| 세준/ 어쩌다 너를 ver.J |
上 아침 일찍 부터 찬열과 백현의 괴성이 울렸다. 그 소리에 잠에서 깬 준면이 인상을 찌푸리곤 거실로 나오니 찬열이 세훈을 붙잡고 있고 백현이 준면의 앞으로 쪼르르, 달려와서는 세훈의 휴대폰을 준면에게 보여주며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세훈이 여자 친구 생겼대! 형은 알고 있었어? 백현의 물음에 준면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정수기 쪽으로 몸을 돌려 백현에게 등을 보였다. 컵에 물을 받으며 준면은 조금은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알고 있었어.” “진짜? 와 대박. 형, 형! 말이 돼? 막내가 먼저 애인 생기는게?” “그러니까! 찬물도 위 아래가 있지, 와 대박.” 세훈의 휴대폰을 몰래 들여다 본 찬열과 백현이 유난을 떨며 난리였다. 세훈은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채로 찬열과 백현 사이를 오가는 자신의 핸드폰을 되찾아오려고 손을 내젓지만 번번이 실패할 뿐이다. 아침부터 무슨 소란이냐며 종인이 짜증을 내었으나, 곧 원인을 알고 종인까지 합류했다. 뒤이어 나온 경수는 이미 알고 있었던 일인 냥,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마시며 그걸 이제야 알았냐는 듯이 얘기했다. 준면은, 모든 광경을 식탁에 앉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당황한 기색이지만 입가에 수줍으면서도 행복해하는 미소를 띠운 세훈을 오래도록 보고 있었다. 물 컵에 담긴 물을 마시며 경수는 준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제서야 준면은 경수를 올려다보았고, 경수는 준면을 흘끗 내려 보았다가 소란인 거실로 눈길을 돌렸다. “괜찮아?” “…….” 경수의 물음에 준면은 그저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준면은 제게 꽂히는 경수의 시선을 느꼈지만 꿋꿋이 거실에만 시선을 두었다. 정말 괜찮아, 이제 아무렇지 않아.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식탁 밑으로 감추며 준면은 입 꼬리만을 올려 웃어보였다. 줄곧 바라보고 있던 세훈과 눈이 마주쳤다. 세훈은 어떡 하냐는 듯 난감한 표정을 지어보였다가 다시 찬열과 백현, 그리고 종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경수는, 준면을 위로하듯 어깨를 두어 번 탁탁 두드려 주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식탁에 홀로 남아 앉아있던 준면은, 여전히 웃으며 거실에 있는 네 사람을 보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는, 네 사람 중 가장 행복해 보이는 세훈을 보고 있었다. 너의 그 사람과 행복하길, 세훈아. *** 대기실에서 대기를 하는 내내 세훈의 손에서 휴대폰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것을 두고 찬열과 백현이 또 부러운 듯, 괜히 장난을 치며 툭툭 건들었다. 세훈은 답해주기도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젓기만 했다. 이에 찬열과 백현은 어쩌면 이럴 수가 있냐며 우는 시늉을 했고, 그 모습을 보며 종인과 경수가 시원스럽게 웃었다. 그곳에서 오로지 준면만이 마음 편히 웃지 못했다. 경수는 그런 준면을 매우 잘 알았지만 차마 위로의 손길 하나 제대로 내밀지 못했다. 그 이유는, 세훈에게 여자 친구가 생긴 것을 제일 먼저 알아챈 준면이 울면서 경수에게 한 부탁이었다. 제발, 다른 사람 다 알더라도 세훈이 만큼은 죽을 때까지 모르게 해달라고. 그날 밤 준면도, 경수도 참 많이 울었었다. 함부로 거론조차 못하는 그 마음이 안쓰럽고 아파서, 누구 하나 알아주지도, 알아 줄 수도 없는 그 마음이 애처로워서 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계속 울었었다. 경수의 연민어린 시선이 와 닿은 것을 느낀 준면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괜찮아, 정말 괜찮아. 속으로 스스로 달래며 준면은 세훈을 보았다. 세훈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환하게 웃을 뿐이었다. 형들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해요. 농담조의 세훈의 말에 찬열과 백현이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굉장히 어색하면서 과장된 몸짓을 해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세훈은 뒤로 넘어갈 듯이 크게 웃었고, 찬열과 백현 또한 본인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머쓱한 듯 웃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 일 수도 있었다. 이제 세훈은 더 이상 열아홉 살 고등학생이 아니었고, 갓 데뷔한 신인 가수도 아니었다. 영영 없을 것 같았던 후배 가수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제는 가요계의 꽤 높은 위치에 있는 선배쯤 되어 있었다. 열아홉 살은 스물다섯 살, 청춘이라면 청춘이 되어있었고 준면은 어느덧 서른을 가까이에 두고 있었다. 한 번 씩 스치는 인연으로 연애란 것도 했었다. 정말 당연한 일임이 분명했다. 참 이상한 것은 모두들 나이가 들고 생각이 조금 깊어졌을 뿐, 뭐 하나 변한 것이 없는데, 세훈을 향한 제 마음 만은 엄청난 소용돌이에 갇힌 것 마냥 이리 변했다가 저리 변했다. 그것은 모두 하나같이 ‘사랑’ 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때로는 ‘욕망’ 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행복’ 이 되기도 했으며, 대부분 그것은 ‘슬픔’ 이 동반했다. 헛된 희망에 사로잡히기도 여러 번, 그러나 그 헛된 희망도 이제는 품을 수가 없었다. 세훈에게는, 아름다운 연인이 생겼다. 문득 눈가가 시큰해지는 것 같아 준면은 조용히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등 뒤로, 경수의 시선이 따갑게 꽂혔지만 애써 모른 척 하며 대기실 문에 기대어 복도에 가만히 서 있으니 복도를 지나가는 많은 연예인들과 관계자들이 인사를 건넸다. 준면 또한 그들에게 인사를 해주며 복도에 서있었다. 딱히 어딘가에 갈 생각이 없었기에 다시 대기실로 들어갈까 싶었지만, 또 다시 울컥 치미는 감정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언제쯤 이 아픔에서 벗어나,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온전히 너를 마주할 수 있을까. 아마 인연이 오래 이어진다면 지금 연인과 결혼을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지금 연인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결혼을 하겠지. 그때쯤이면 너를, 너를… 친한 동생을 아끼는 형의 마음으로 볼 수 있을까? “여기서 뭐해요, 형?” 등 뒤에서 대기실 문이 열리고 세훈이 밖으로 나왔다. 흠칫 놀란 준면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세훈을 올려보았다. 귓가에 대고 있는 휴대폰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연인과의 통화를 방해받을까 싶어서 나온 것 같았다. 준면은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려 보이곤 급하게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길고 긴 레이스를 달리고 온 사람마냥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찬열과 백현, 종인 그리고 경수의 시선이 준면에게로 향했다가 다시 돌려졌다. 오직, 경수만이 계속해서 준면을 보고 있었다. 준면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며 그들 무리에 뒤섞였다. 무슨 얘기 해?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만, 신경은 여전히 문 밖에 있는, 통화 중인 세훈에게로 향해 있었다. 다시 대기실 문이 열리고 세훈이 안으로 들어와 준면의 뒤에 섰다. 그 순간부터 준면은 숨을 잠시 멈췄다가, 길게 내쉬며 모든 신경을 제 뒤에 서있는 세훈에게로 향하게끔 했다. 세훈은 자연스럽게 준면의 어깨에 양 손을 올렸고, 준면은 신경 쓰지 않는 척 하며 떨리는 제 마음을 애써 감췄다. 불안하게 떨리는 손을 감추려 꾹 마주 잡았다. “애인 있는 사람은 지금 당장 저 구석으로 갑니다. 우우.” “헐, 찬열이 형 너무해요. 완전 유치해.” “너무하긴, 세훈아 어떻게 네가 날 버리고 다른 여자를…! 흐윽.” “백현이 형 우린 인연이 아니에요….” “쓸데없이 아련한 건 또 뭔데!” 머리 위에서 웅웅 울리는 세훈의 목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하지만 점점 세차게 뛰는 심장으로 인해 호흡이 불규칙 적으로 변했다. 찬열과 백현이 농담을 던지는 말에 답하는 세훈과, 그 대답에 종인이 웃으며 받아치는 것을 들으며 준면도 같이 웃었지만, 그 웃음이 어딘지 어색했다. 그 미묘한 차이는 옆에 있는 경수만이 알 수 있는 미약한 차이였다. 경수는, 웃겨 죽겠다는 듯 웃으며 몸을 기울여 부들부들 떨리는 준면의 손을 꾹 잡았다가 놓았다. 처음부터 아끼는 동생을 바라보는 형의 마음이 아니었기에 어쩌면, 어쩌면 내가 너를 아무렇지 않은 시선으로 볼 수 있는 날이 안 올 것 같아. 세훈아, 내가 미안해. 대책 없이 너를, 오랜 시간 마음에 담아서 미안해. ***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이었다. 그렇게 외박은 안 된다고 몇 번이고 말했는데, 비어있는 옆 자리를 보며 준면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세훈이 아직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늦는다는 연락도 없었기에 어디에서 누굴 만나 뭘 하는지 알 수도 없었다. 숙소가 조용한 것을 보면 세훈이 안 들어 왔다는 사실을 준면 혼자만 알아차린 것 같았다. 길게 한숨을 내뱉은 준면은 이리 저리 뒤척이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세훈에게 연락하려던 찰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고 현관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질질 끄는 발걸음이 적막을 깨고 방 문 앞까지 이어졌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술 냄새와 함께 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세훈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들어와 침대에 드러누웠다. 어둠 속에서 준면은 숨을 죽인채로 색색거리며 숨을 내뱉는 세훈을 지켜보았다. “형, 준면이 형…….” “…….” “연예인은, 진짜 사랑하기 힘들어요… 그렇죠?” “…….” “나는 잘해준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세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우는 것 같았다. 준면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세훈의 얼굴 근처로 가져갔다가, 허공 위를 맴돌다가 다시 손을 거두었다. 울음소리가 새어나올까 싶어서 두 손으로 입을 막고 흐트러진 모습의 세훈을 보았다. 싸운 걸까? 또 다시 헛된 희망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왔다. 혹시, 헤어진 걸까? 그러다가 곧, 행복을 빌어주지는 못할망정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고 마는 자신의 마음이 원망스러워 끅끅, 소리를 내며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헤어졌기를 바라는 마음이 점점 더 크게, 서서히 지배하고 있었다. 못난 놈, 나쁜 놈. 스스로를 질책하고 욕하지만 계속해서 헛된 희망을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웠다. 그리고 세훈은 여전히 술에 취해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한테 많이, 서운 했나 봐요…” “…….”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 그 말을 끝으로 세훈은 잠이 든 듯, 색색거리던 숨소리도 가라앉은 채로 다시 고요 속에 잠겼다. 그제서야 준면은 참고 있던 숨을 내뱉으며 울음을 토해냈다. 깨어있을 땐 차마 손대지 못했던 그 얼굴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약간의 물기가 남아있는 눈가를 어루만지고, 차가운 볼을 쓰다듬어 주며, 준면은 그렇게 울고 또 울었다. 자신은 몇 년을 바라보기만 했던 사람인데, 이렇게 힘들게 만드는 그녀가 너무나도 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훈이 사랑하는 그녀라서, 차마 욕하질 못 했다. 힘들어 하지 마, 제발. 네가 힘들면 나는 어떻게 해. 너의 행복을 바라면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준 나는 어떻게 하냐고. 내 마음 죽여 가며 너의 행복을 빌어준 내게 이런 모습 보여주면, 보고 싶을 때마다, 욕심 날 때마다, 쥐어뜯고 무참히 짓밟아서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무시했던 내 마음이 불쌍해서 어떡해. 그러니까 제발, 제발 이런 모습 두 번 다시 보여 주지 마. 세훈아, 보란 듯이 행복해. 내가 두 번 다시 욕심내지 못하게. 너만 행복할 수 있다면 이 마음, 죽이고 또 죽일게.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숨조차 제대로 못 쉬어도 널 품은 내 마음, 끝까지 철저하게 짓밟고 또 짓밟을게. 中 그날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운 준면은 피곤한 얼굴을 손으로 쓱, 문지르며 아침이 되자 기계적으로 일어났다. 옆자리에 약간은 괴로운 듯한 얼굴로 누워있는 세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꿀물이라도 타줘야 일어나서 숙취 해소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다행이도 오늘은 별도의 스케줄이 없었기에 큰 지장은 없을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오니 경수가 목에 수건을 두른 채로 거실 바닥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준면은 경수에게로 다가가 툭툭, 치니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 경수가 준면을 보고선 하품을 크게 하며 기지개를 켰다. “씻었는데도 정신이 안 들었어?” “응, 그런 것 같아. 그나저나 형…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아… 잠을 제대로 못 잤나봐. 참, 경수야 오늘 아침에는 콩나물국 끓여줄 수 있어? 고추 가루 풀어서 살짝 매콤하게.” “만들 수는 있는데, 누가 술 마셨어?” “응. 세훈이가.” “그 놈, 그거 안 되겠네…… 알았어. 형, 가서 잠을 더 자든 씻든 좀, 몰골이 말이 아니야.” 경수의 걱정 어린 말에, 준면은 그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너 요리하는 동안 난 꿀물 타려고. 준면의 말에 경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열부 났어, 진짜. 퉁명스럽게 답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준면은 경수의 뒤를 따라 부엌으로 가, 전기 주전자에 물을 채워서 끓이고는 컵과 꿀을 찾아 식탁 위에 올렸다. 그 사이 경수도 냉장고에서 콩나물을 꺼냈고, 고요한 가운데 두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는 소리만이 울렸다. 전기 주전자에서 물이 다 끓었는지 자잘하게 들리던 소리가 멈추고, 준면은 컵에 뜨거운 물을 붓고 숟가락으로 살살 저었다. 쟁반 위에 컵을 올리고 방으로 들어가니, 세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가 아픈지 손을 이마에 올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준면은 협탁 위에 쟁반을 올려놓고 세훈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인기척에 고개를 든 세훈은, 준면 임을 확인하고 꾸벅 인사를 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인사는 잘 하네. 꿀물이나 마셔, 조금이라도 속 달래는데 좋을 테니까.” “고마워요, 형.” “외박 안 했으니까 타주는 거야. 다음부터는 어제처럼 연락도 없이 제 몸 하나 못 가눌 정도로 취해서 들어오면 국물도 없어. 경수한테 미리 말해서 콩나물국 끓이고 있으니까, 일단 좀 씻어. 옷 갈아입고.” “넵,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어제 밤에 본인의 행동은 모두 잊은 것 마냥, 세훈은 꽤 밝은 모습이었다. 괜찮아 보이는 세훈의 모습에 준면이 안도의 숨을 뱉었다. 세훈은, 준면이 타준 꿀물을 모두 마시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던 준면은 저도 모르게 안도함과 동시에 또 다시 사라진 희망으로 인해 한숨을 내쉬며, 쟁반을 들고 부엌으로 향하니 경수가 식탁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준면은 싱크대에 컵을 놔두고 쟁반을 원래의 자리에 놔둔 뒤, 경수의 맞은편에 앉았다. 부엌에는 콩나물국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만이 들렸다. 이따금씩 경수가 식탁 위에 손가락으로 박자를 맞추듯 탁탁, 두드리는 소리만 국이 끓는 소리에 섞여 들렸다. 아침에 세훈은 괜찮아 보였지만, 눈물을 흘리던 그 모습이 쉽사리 잊혀 지질 않아 준면은 때때로 한숨을 내뱉었다. 그럴 때마다 식탁을 두드리던 경수의 손가락이 잠시 멈춰지고, 준면에게로 시선이 향했다. 준면은 그 시선을 모른 채 하며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국이 다 끓었는지 경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스레인지의 불을 껐다. 부엌에 완전한 적막이 흘렀다. 간간이 욕실에서 물줄기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것은 아주 미약했다. “어제 무슨 일 있었지?” 먼저 입을 연 것은 경수였다. 준면이 줄곧 피하고 있던 눈길을 돌려 경수를 보았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던 준면은, 욕실의 문이 열리고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식탁으로 온 세훈으로 인해 다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경수는 한숨을 내뱉으며 탐탁하지 않은 시선으로 세훈을 보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세훈은 멀뚱한 시선으로 경수를 보았다가, 경수가 앉았던 자리에 앉으며 물기를 마저 닦아냈다. 준면은 제 앞에 앉은 세훈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숟가락과 젓가락을 세훈의 앞에 놔두고, 반찬 몇 가지를 꺼내 식탁에 올려놨다. 그 사이 경수가 국그릇에 콩나물국을 담아 조금은 퉁명스럽게 탁, 올렸다. 그것을 보고 준면이 뒤에서 경수에게 눈치를 주었지만 잔뜩 굳은 경수의 표정은 조금도 풀어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세훈은, 챙겨줄 것을 다 챙겨주면서도 이상하게 딱딱한 분위기에 어색해 하는 것 같았다. 겨울의 시린 공기가 부엌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 마냥, 공기는 차갑게 적막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모두들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리고 며칠 간, 세훈은 겉으로는 밝아 보였지만 그 이면에 슬픈 표정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오직 준면만이 눈치 챈 듯, 다른 사람들은 평소처럼 세훈을 대했다. 오로지 준면만이 세훈을 하나하나 신경쓰며 조심스럽게 행동했으나, 오히려 그것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이상하게 여겨졌다. 그로부터 또 며칠이 지나자 세훈은 다시 평소의 밝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런 일이 있고나서 바로 화해를 했다나, 뭐라나. 여하튼 연인들 간에 있을 법한 아주 사소한 말다툼 이었다고 한다. 비록, 그 말다툼으로 인해 준면은 헛된 희망에 사로잡혀 저 끝까지 올라갔던 마음이 한순간에 추락하고 마는 고통을 겪어야 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준면은 세훈이 있을 때면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심장을 그대로 느껴야 했고, 가끔씩 스치는 스킨쉽에 설레기도 했다. 세훈으로 인해 준면의 기분은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저 끝까지 추락하기를 반복했고, 이에 따른 대가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처참한 고통의 맛이었다. 말다툼 이후의 어느 날, 세훈은 오전에 몰려있었던 모든 스케줄이 끝난 숙소에서 준면을 따로 불러내었다. 아주 조금의 가능성도 없었지만 혹시, 하는 생각을 하며 준면은 세훈과 단 둘이 방에 있었다. 그리고 세훈의 입에서 나온 말은, 준면을 다시 저 밑바닥으로 떨어트리고 말았다. “저녁때 시간 비죠?” “응. 별다른 약속 없는데, 왜?” “형한테만 소개시켜 주려구요.” “…누구를?” “제 여자 친구, 혜인이요.” 준면은,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눈물이 나올 것처럼 콧잔등이 시큼하고 눈가가 따끔거렸지만 계속해서 웃으려 자신을 조금 더 세게 채찍질 했다. 그래, 어차피 기대조차 하지 않았잖아. 왜 이래, 당연한 일이잖아. 나한테만 소개시켜준다는데, 그게 어디야. 괜찮아, 괜찮아. 스스로를 다독이며, 준면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라도 준면이 거절할까봐 걱정하며 준면의 눈치를 살피던 세훈은, 준면의 긍정의 대답에 비로소 안도한 듯 환하게 웃으며 이따가 다른 사람들 몰래 연락을 주겠다고 하고선 방을 나섰다. 탁. 방문이 닫히고, 준면은 그제서야 웃고 있던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 볼을 타고 손등으로 떨어졌다. 이를 악물고 준면은 가만히 제 가슴께로 손을 올려 옷깃을 세게 부여잡았다. 큰 돌덩이가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것 마냥, 답답해서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고통이었다. 눈앞에서는 세훈의 웃는 얼굴이, 귓가에는 세훈의 목소리가 준면을 더욱 더 괴롭게 했다. 제 여자 친구, 혜인이요.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엄청난 고통이 뒤따를 것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준면은 세훈의 그녀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 더 컸다. 가서, 본인의 두 눈으로 두 사람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두 사람이 얼마나 예쁘게 사랑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나면 길게도 담아두었던 이 마음을 단념하는 것이 조금은 더 수월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녀를 만나기도 전에, 세훈이 따로 불러내었다는 것만으로도 헛된 기대를 품었던 준면은 그에 따른 대가를 톡톡히 치루고 있었다. 넌, 어차피 안 돼. 네가 감히 꿈꿀 수도, 넘볼 수도 없는 자리야. 귓가에 울리는 세훈의 목소리가, 준면이 힘겹게 잡고 있던 동아줄을 단칼에 잘라내었다. 끝없는 곳으로 추락하는 준면은, 그럼에도 행복하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그래도 좋아, 세훈이 네가 행복하다면 난 그걸로 충분해. 너만 행복할 수 있다면, 나 하나쯤 고통에 내던져져도 괜찮아. 다 괜찮아 세훈아. *** "안녕하세요. 조혜인입니다." 그녀가 수줍게 인사를 건넸다. 세훈의 그녀는, 누구나 봐도 아 예쁘다,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상당한 미인이었다. 세훈의 어깨 정도에 닿는 키, 어깨를 살짝 넘은 자연 갈색 빛의 머리카락, 보는 사람도 같이 웃게 만드는 예쁜 미소. 아름답다는 말 외에는 별다른 말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준면은, 차마 그녀에게 모난 점 하나 발견하지 못하고 같이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흠잡을 곳이라고는 하나 없는 그녀로 인해, 준면은 또 다시 비참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녀라면, 세훈이 사랑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질투라는 감정이 무색해질 만큼 예쁘게, 잘 어울렸다. 선남선녀 커플은 이 두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무 잘 어울렸다. 그녀를 만난 준면의 마음은 찢어지다 못해 넝마처럼 너덜너덜 해졌다. 이제는 단념할 수 있겠지, 싶으면서도 한 구석에서부터 조금씩 범위를 넓혀가는 질투가, 그녀를 보는 준면의 시야에 막을 씌워놓고선 악마의 유혹인 마냥 귓가에는 그녀를 있는 힘껏 모질게 대하라는 속삭임이 들렸다. 네가 괴로웠던 만큼 그녀를 괴롭히란 말이야. 너의 사람을 뺏어간 여자야, 어서 그녀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게 만들어. 그리고 그 사이, 세훈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 공간 안에 준면과 그녀가 단 둘이 남자, 귓가에 속삭이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준면은 제 귀를 틀어막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누르며 어색하게 웃어 보이곤 고개를 푹 숙였다가 심호흡을 하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혜인씨.” “네?” “세훈이랑, 정말 잘 어울려요.” “아, 감사합니다.” “많이 사랑하고, 또 행복하게 해줘요.” “네… 그럴게요.” 내가 못주는 사랑, 많이 주고, 내가 못 주는 행복, 많이 주세요. 내가 못 받는 사랑, 많이 받고, 내가 못 받는 행복, 많이 받아요. 커플링도 맞추고, 데이트도 될 수 있는 데로 많이 하고, 이벤트도 받아보고, 또 해주기도 해보고, 평범한 연인들처럼 지내진 못해도 꼭, 행복한 추억 많이 만들어요. 전부 다, 내가 못하는 것들을 당신은 꼭 다 해봐요. 준면은 그녀를 보며, 그녀에게 전하지 못할 말을 속으로 말하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자, 그녀는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같이 웃어줄 뿐이었다.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일어날게요. 세훈이한테 말 좀 잘 전해주세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네, 다음에 또 봐요.” 준면은 그 자리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나오자마자 제 앞을 지나가는 택시를 붙잡고 숙소의 주소를 대고는 등받이에 푹 기댔다. 목 언저리에 가시라도 걸린 것처럼 답답했다. 그녀를 만나고 나면, 단념하기가 수월할 것 같았는데 오히려 그것은 역효과를 낳았다. 그녀가 미치도록 부러워서, 세훈의 사랑을 모조리 받는 그녀가 너무나도 부러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억지로 웃는 것이 힘겨워지던 참에, 잘 빠져나왔다는 생각을 하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세훈의 얼굴이 아닌,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와 같이 웃는 세훈이 떠올랐다. 그 사이 택시는 숙소 앞에서 멈춰 섰다. 택시비를 내고 조금은 불안정한 걸음으로 숙소로 들어서자, 숙소가 웬일인지 조용했다. 모두들 잠들었다고 하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의아한 마음이 들면서도 방으로 들어가 겉옷을 벗으니, 경수가 준면의 방으로 들어왔다. 나갔다 온 사이 아직까지도 눈가가 빨간 준면을 보고, 경수는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준면은 경수를 발견하고 숙소가 왜 이렇게 조용하냐며 묻자, 경수는 대답 대신 준면을 침대에 앉히고, 자신은 그 옆자리에 앉았다. “세훈이는 어쩌고 왜 혼자 와?” “…….” “무슨 일 있었어?” “…만났어.” “누구를? ……설마.” “세훈이 여자 친구.” 경수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준면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해보려 입 꼬리 끝을 당겨 웃어보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슬퍼 보였다. 준면은 넋두리처럼 세훈의 여자 친구를 만난 소감을 쉼 없이 풀어놓았다. 경수는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할 말을 잃은 사람처럼, 준면의 이야기를 듣고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너무 예뻐서, 부럽기만 하더라. 세훈이가 좋아할 만한 여자였어. 착해 보이기도 하고, 그냥 누가 봐도 예쁜 여자야. 웃는 것도 예쁘고, 목소리도 예쁘고… 다 예쁘더라. 근데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은 더 예쁘더라. 감히 나 같은 건, 넘보지도 못한다고 얘기하는 것 같았어. 사실, 그것이 내가 바라던 바이긴 했어. 두 사람을 보고나면, 포기하는 게 좀 더 쉬울 것 같았어. 이 마음, 비워낼 수 있을 것 같았어……. 준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준면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경수는, 입을 틀어막고 어깨를 들썩이며, 마음껏 울지 못한 준면을 대신해서 울었다. 담담하게 이야기 하는 준면과는 달리, 경수는 부들부들 떨며 울음을 토해냈다. 끝내 새어나가지 않게 꾹 막고 있던 울음소리가, 앙 다문 잇새로 억눌려서 새어나갔다. 물기 어린 시선으로 경수는, 담담한 모습이라 더 슬픈 준면을 보았다. 넝마처럼 너덜너덜해진 그의 마음을, 경수는 한 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래서 경수는 준면을 대신하여 울었다. 준면이, 세훈에 대한 제 마음을 토로했던 그날 밤처럼 말이다. “형은, 형은 진짜… 바보같이, 그 자릴 왜 가…… 왜 보러갔어…….” “…….” “형한테 도움 될 것이 뭐가 있다고, 결국엔 형만 혼자 아플 거면서 왜…” “…….” “그런데도 세훈이가 그렇게 좋아? 아직도… 오세훈을 사랑해? 형도 진짜… 독종이다.” “…….” 경수는 자조적인 웃음과 함께 손으로 눈을 부비며 눈물을 닦아 내었다. 준면은 허공을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었다. 협탁 위에는, 세훈과 자신이 어깨동무를 하고서 찍은 사진이 액자에 걸려 있었다. 그것을 망연히 바라보는 준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저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지독하게 사랑하고 있진 않았는데. 새삼 오랫동안 세훈을 마음에 담은 것 같아 준면 또한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 끝은, 결국 주체 못한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오른 눈물이었다. 소리 없이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두 사람 보면 비울 수 있을 것 같다고? 웃기지마. 형 가슴만 찢어 놓는 그딴 개소리! 도대체 사랑이, 사랑이 뭐 길래 이렇게… 한 사람은 죽을 듯이 아프고, 한 사람은 행복하고…… 왜 이렇게 모순적인 건데, 원래 이런 거 아니잖아…….” “…그러게. 이런 거 아닌데, 나도 그렇게 알았는데.” “…….” “어쩌다가 세훈이를 사랑하게 된 걸까.” 한숨과 함께 내뱉어지는 준면의 말에, 경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위로의 말도, 질책하는 말도 해주지 못한 채 경수는 가만히 준면의 옆에 앉아 있었다. 힘내라는 말도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미친 짓이니 그만 두라는 말도 먹히지 않았다. 마른세수를 한 경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또 다시 준면의 어깨를 두어 번 쳐주는 것으로 모든 위로와 질책의 뜻을 다 담았다. 한바탕 속에 담아두었던 감정을 모두 털어놓고서야 준면은 다시 처음 했었던,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갔느냐는 질문을 했다. 경수는 작게, 각자 친구 만나러 갔다는 말을 짧게 하고는 방문을 열었다. 문턱에 있는 한 사람의 발에 깜짝 놀라 위를 올려 보고서 경수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끼며 온 몸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는 것 같았다. 방문 뒤에는 세훈이 유령처럼 가만히 서있었다. 下 경수는 곧바로 곁눈질로 준면을 보았다. 준면은 아직 세훈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아 급하게 문을 닫고는 세훈의 팔을 붙잡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세훈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어떠한 변화가 없는 표정에 경수는 더 두려웠다. 세훈이만은 모르게 해줘. 울던 준면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경수는 어떻게 말을 시작 해야할지 몰라 머뭇거릴 뿐이었다. 조금은 불편한 침묵이 이어지던 찰나, 세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경수는 두 눈을 질끈 감고서 어떠한 말이 나오더라도 울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았다. 준면이형, 이거 놔두고 갔는데. 하지만 세훈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에 경수는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세훈을 보았다. 세훈의 손에는 준면이 일전에 팬에게서 받은 손수건이 들려있었다. 경수는 세훈의 손에 들린 손수건과 세훈을 번갈아 보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들은 것이 없어서 그러는 것인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세훈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태도였다. 그것이 연기이건 진짜이건 간에 말이다. 경수는 부디 세훈이 아무것도 듣지 않았길 바라며, 세훈의 손에 들린 손수건을 가져갔다. "이건 내가 가져가. 알아서 돌려줄게." "꼭 돌려줘요. 준면이 형이 많이 아끼는 거라" "…응. 너 혼자 온 거야?" "아뇨, 차 안에 혜인이 있어요." "어… 그럼 다시 가봐야겠구나. 잘 갔다와, 외박은 절대 안되고." "알았어요." 세훈은 먼저 경수의 방을 나섰다. 방을 나가는 세훈의 뒷 모습을 보며, 경수는 잠시 주먹을 꽉 쥐고 손수건을 내려다 보았다. 데뷔할 때 준면의 문양과 함께 필기체의 'SU-HO' 가 세겨져 있는 손수건 이었다. 엑소를 수호하는 리더 수호 입니다. 귓가에 울리는 준면의 목소리에 경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룹을 수호한다던 그는 지금, 제 자신은 지키질 못했다. 경수는 침대에 앉아 한숨을 내쉬며 손수건에 세겨진 글씨를 메만졌다. 아프기만 할 준면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없었기에, 그것을 대신하듯 아주 조심스럽게 손수건을 만졌다. 경수의 방을 나선 세훈은, 잠시 준면이 있는 방문 앞에 멈춰섰다. 그 앞에 주저 앉는 세훈의 표정에는 여전히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방문에 기대어 앉아 무릎 사이로 고개를 숙였다.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방안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경수가 나간 뒤에 곧바로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겠지 싶었다. 세훈은 고개를 들고 문에 머리를 기댔다. 비로소 세훈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괴롭다는 듯 일그러진 얼굴에서 눈물이 볼을 타고 턱 밑으로 흘러 내렸다. 억눌린 잇새로 고통에 찬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준면이 형……."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가 준면을 불렀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준면에게 들릴 턱이 없었다. 세훈은 한참을 그 앞에 앉아 있다가 조용히 숙소를 나왔다. 그리고 뒤이어 밖에 나갔던 다른 멤버들이 하나 둘 씩 비어있는 공간을 채웠다. 경수는 그 틈에서 웃는 얼굴로 이들을 맞이 했다. 준면은 경수가 나간 뒤에 곧바로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닫힌 방문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스륵, 눈을 감았다. 세훈아. 작은 목소리로 세훈의 이름을 불렀다. 준면은 모르겠지만, 그와 동시에 문 밖에서 세훈도 준면의 이름을 불렀다. 얼마 뒤에 거실이 소란해지는 소리를 들으며 준면은 참 오랜만에 깊은 잠에 들었다. 한순간의 달콤함에 젖어들게 하고서 일어나면 모든 것이 사라지던, 세훈과 자신이 함께 웃는 꿈도 꾸지 않았다. 정말 깊게, 푹 잠에 들었다. ***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그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른 척을 하며 표면상으로는 매우 잘 지냈다. 스케줄이 없는 날에는 연습을 하고, 숨가쁘게 이어지는 스케줄을 소화하고, 틈틈히 짧은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누군가 툭 건들면 터질 것처럼 위태로웠지만 그럼에도 어떠한 안정감이 계속 유지되었다. 세훈은 여전히 부러움의 대상이었으나 이제 더 이상 놀림받는 일도 없었고, 그것을 보는 준면도 남몰래 쓰게 웃음짓지 않았다. 경수는 여전히 조금씩은 준면을 의식하긴 했지만 생각 외로 괜찮아 보이는 모습에 안도하던 시점이었다. 바쁜 스케줄에 쉴 틈도 없었고, 숙소로 돌아오면 쓰러지듯 잠에 취했다. 그런 생활이 점차 반복되니 차츰 잊어가나 싶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와중에도 세훈은 이따금씩 전화를 받으며 한 구석으로 사라지기도 했고, 그 뒤엔 세훈의 뒤를 끈질기게 뒤쫓는 준면의 시선도 있었다. 한동안의 해외 스케줄 이후에 오랜만의 휴식이 주어졌다. 고요한 아침, 아무도 눈을 뜨지 않고 잠에 취해 있었다. 그 중 준면이 제일 먼저 잠에서 일어났다.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가 참 오랜만에 느긋하게 씻으며 욕실 밖으로 나오니 여전히 숙소에는 적막이 흘렀다. 팔을 위로 쭉 뻗어 기지개를 켜며 간단하게 먹을 것이라도 있나 싶어 부엌으로 가 냉장고의 문을 열었을 때,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보나마나 경수이겠거니 싶어서 아침은 어떻게 할까? 하고 말을 했으나 답이 없었다. 의아함에 냉장고 문을 닫고 고개를 돌리니 세훈이 멀뚱히 서있었다. 흠칫 놀란 준면은 멍하니 세훈을 바라보았다. 역광으로 인해 세훈이 빛을 내고 있는 것 마냥 눈이 부셨다. "…잘 잤어? 일찍 일어났네. 좀 더 자지." "그러는 형은,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요." "나야 뭐… 원래 항상 일찍 일어나잖아. 씻고 나와, 우리끼리라도 뭐 먹자." "알았어요." 욕실로 들어가는 세훈의 뒷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준면은 인스턴트 밥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리며, 냉장고에 들어 있는 몇 안되는 반찬을 꺼냈다. 계란도 있길래 꺼내서 스크램블 에그를 만들었다. 그 사이 다 데워진 밥을 밥그릇에 옮겨 담아 식탁 위에 올리니, 세훈이 다 씻고 나왔다. 그 순간까지도 다들 일어나지 않았다. 준면은 문득, 꿈에서 맞이하던 아침이 떠올라 새삼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고요한 아침, 세훈과 단 둘이 있는 식탁은 꿈만 같았지만 그것이 준면 혼자만의 설렘이라 슬플 따름이었다. 준면이 먼저 식탁에 앉자, 맞은편에 세훈이 앉았다. 먼저 먹어. 준면의 말에 세훈이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준면은 가만히 그 모습을 보다가 숟가락을 들었다. 이 모든 것이 꿈에서 보던 것과 같은 풍경이라 준면은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래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아, 꾸역꾸역 밥을 입 안으로 밀어 넣으며 눈물도 같이 삼켰다. 세훈은 제 앞에서 꽤 힘겹게 밥을 먹는 준면을 의식했지만, 모른 척하며 계속해서 밥을 먹었다. 결국 준면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물컵에 담긴 물을 마셨다. 그리고 세훈이 밥 먹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세훈아, 모른 척 하기 힘들지. 그 날, 문 앞에 서있던 너를 봤어. 급하게 문이 닫혔지만 그건 분명히 너였어, 그렇지? 너도 다 들었겠지. 너만큼은 죽을 때까지 모르길 바라고 있었는데, 결국 알아버렸네. 그래도 모르는 척 해줘서, 스케줄이 너무 바빠서 이야기할 틈이 없어서 너무 고마워. "…안 먹고, 뭐 해요." "……." 탁. 세훈이 식탁 위에 내려 놓는 젓가락의 소리가 심판의 순간에 울리는 망치 소리 마냥 크게 울렸다. 그와 동시에 준면을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도저히 세훈과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마냥 그렇게 눈을 감고 시선을 피하는 것으로 상황을 모면하고 싶었다. 세훈은 고개를 들고 일그러진 얼굴의 준면을 보았다. 식탁 아래에 둔 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꽉 쥐었다. 바보 같은 사람. 준면을 보며 세훈은 한숨을 내뱉었다. 적막만이 가득했던 공기가 답답했다. "그렇게 티를 내면서, 내가 모르길 바랬어요?" "…무슨, 소리야?" 세훈의 말에 준면이 줄곧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세훈을 보았다. 복잡함이 가득한 세훈의 표정에, 준면의 시선이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티가 났다니, 무슨 뜻이지? 호흡이 가빠지며 준면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식탁 밑으로 감추며 두 손을 꼭 마주 잡았다.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고서 세훈을 보았다. 고개를 숙인 세훈이 다시 한숨을 내뱉으며, 제 앞에서 불안한 모습으로 떨고 있는 준면을 보았다. "굳이 그 날이 아니었어도, 알고 있었어요." "……." "형이 나를 보는 것과, 다른 형들 보는 것이 다르다는 거 말예요. 너무 많이 티가 나잖아요." "……." "왜 감추지 않았어요, 왜… 왜 숨기지 못했냐구요." "아, 아니야… 나는, 나는……." "다른 사람 다 알아도, 죽을 때까지 내가 모르길 바랬으면 적어도 티는 내지 말았어야죠." "세훈아… 오, 오해 한거야…… 나는, 노력 했는데……." "형 진짜 바보에요? 왜 그 마음 못 숨기고, 눌러 담지도 못했어요. 나는 다른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잘 지내는데, 왜 그러질 못했냐구요!" "세훈아… 아니야…… 아니야, 세훈아. 미안해, 내가 미안해……." "나는 다 숨기고 다 눌러 담았는데, 왜 형은… 하지 못하고, …그럴거면 처음부터 좋아하지도 말지!" "세훈아……." 세훈은, 제 앞에서 덜덜 떠는 준면을 내려 보았다. 부엌에서의 소란에 깜짝 놀란 다른 멤버들이 잠에서 깨어나 밖으로 나왔다. 놀란 준면은 소리 없이 눈물을 떨어트렸고, 그 앞에서 세훈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으로 준면을 보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무슨 일인지 알아챈 경수가 급하게 준면의 곁으로 다가갔다. 안쓰럽게 떨고 있는 준면을 감싸 안고 세훈을 노려보는 시선이 매서웠다. 영문을 모르는 나머지 셋은 놀란 눈으로 부엌의 세 사람을 멍하니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이게 뭐하는 짓이야, 오세훈!" "나는 애써 숨겼는데, 왜 형은 더 커지는데요! 형한테 기회를 줬는데, 왜! 그 기회를 못 잡고, 바보같이……." 경수의 외침을 무시하고 세훈은 빠르게 할 말을 하고 현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것을 보던 준면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세훈의 팔을 붙잡았다. "가, 가지마. 내가 미안해, 미안해, 세훈아. 가지마 제발……." 세훈의 손이 매정하게 준면을 내쳤다. 그리고 현관문이 열렸다가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 앞에서 준면은 눈물만 뚝뚝, 떨어트리며 닫힌 현관문을 하염없이 바라 보았다. 도무지 세훈이 했던 말이 하나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몇개의 단어들만이 정리가 되지 않고 머릿 속을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경수는 그 뒤에서 복잡한 표정으로 가늘게 떨리는 준면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경수도 마찬가지로, 세훈이 했던 말들이 하나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분명한 것은, 세훈은 오래 전부터 준면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 뿐이었다. *** 그들에게 주어진 휴식의 시간동안 세훈은 계속해서 숙소로 돌아오지 않았다. 갈수록 준면은 수척해졌고, 이제는 다른 멤버들 조차 준면이 세훈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다 알아차렸다. 경수는 계속해서 밥을 차려서 준면의 방으로 들어갔지만 번번히 식사를 거르기 일쑤였다. 숨막히는 고통의 순간이 계속되고 있던 찰나에, 루한에게서 연락이 왔다. 혹시 세훈은 아닐까 싶어서 다급하게 받았지만, 들린 건 루한의 목소리 였기에 준면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전화를 받았다. "-준면, 잘 지냈어?" "아, 루한이구나. 뭐, 나름……." "-에이 거짓말. 목소리가 안 좋은데?" "……." "-우리 만날까? 버블티 마시자, 내가 사줄게." "…그래, 자주 모이던 카페에서 보자." 루한과의 전화를 끊은 준면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거울 속으로 보이는 모습이 굉장히 수척하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심각한 것을 스스로 깨닫고선 일단 좀 씻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욕실로 들어갔다. 그 안에서도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려고 찬 물로 세수를 하고서 간단하게 씻고 나왔다. 나갈 준비를 하는 준면을 보는 멤버들의 불안한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 다녔지만 그것들을 애써 무시하며 준면은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준면이 밖으로 나오자, 거실에 모여있던 멤버들의 시선이 일제히 준면을 향했다. 형 어디가? 찬열이 조심스럽게 묻자, 준면은 숙소 근처 카페에 루한 만나러, 라고 짧게 답했다. 이에 어색하게 웃으며 잘 갔다 오라는 인사를 건네지만 표정들이 썩 밝지만은 않았다. 준면은 동정이 담긴 시선들을 죄다 무시하며 신발을 신고 현관을 나섰다. 카페에 도착하니 루한이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는 조금만 변장을 허술하게 해도 누가 누군지 다 알아보았기에 일부러 구석진 곳으로 자리 잡은 것 같았다. 사람들의 발길이 가장 닿지 않는 자리에 앉자, 루한이 조금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준면을 살펴보았다. 목소리 뿐만 아니라 얼굴도 말이 아니네. 루한의 말에 준면은 그저 약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 사이 루한이 먼저 주문한 음료가 나오고, 쟁반을 들고 자리로 돌아온 루한이 조심스럽게 준면의 눈치를 살피며 세훈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세훈이 지금 우리 숙소에 있어." "어……."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 놀라지 말고 천천히 들어." "응." "준면아 너는, 지금까지 너의 마음만 본 것 같다는 생각 해본 적 없어?" "그게 무슨……."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세훈일 좋아한다는 것만 보지 않았냐고. 세훈이가 어떤 마음일지는, 생각해 봤어?" "……." 준면은 말없이 루한을 보았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루한에겐, 조금의 거짓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준면은 조금씩 세훈이 내뱉었던 단어들이 정리가 되며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귓가에, 고통에 차서 내뱉은 세훈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서야 조금씩 세훈의 표정이 하나 둘 씩 눈앞에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고, 세훈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기도 했다. 또한 자신이 세훈을 남몰래 보았던 것처럼, 세훈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자신이 있었다는 것도 떠오르기 시작했다. 준면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소리 없이 눈물이 한, 두 방울씩 뚝뚝, 떨어졌다. 나는 다 숨기고 다 눌러 담았는데, 왜 형은 그러질 못했어요. 나는 애써 숨겼는데 왜 형은 더 커지는데요. 형한테 기회를 줬는데, 왜 그 기회를 못 잡고……. 기회를, 줬어요. "세훈이는 기회를 준거야." "……." "험난한 현실에 부딪히지 않고, 영원히, 오래도록 함께 할 수 있는 기회." "……." 형과 내가 영원히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친형제 처럼. 그 언젠가, 세훈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친형제 처럼 오래 오래 함께 지내고 싶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때 당시에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세훈과 자신의 사이를 아무리 가깝게 만들어 봤자 '친 형제' 라는 틀 안에 머무를 것이라는 말로 들려서 슬프기만 했는데, 이제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그 말에, 세훈의 진심이 담겨 있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세훈은, 준면과 행복하게 오래도록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에게, 그리고 준면에게 준 것이 아닌가 싶다. 세훈과 준면, 이 두 사람이 현실이란 벽에 부딪히지 않고, 상처받지 않고, 세상이 정한 일반적인 사랑을 하다가 결혼을 하고, 이따금씩 만나서 친 형제 마냥 술 한 잔씩 주거니 받거니 하며 그렇게 영원토록 함께 지내는 것. 그것이 세훈이 생각한 최선의 방법이 아니었나 싶었다. 그래서 준면이 먼저 그 마음을 접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을지 모른다. 준면이 남몰래 우는 것을 다 알면서도 모른 척 하고, 쓰게 웃음 짓는다는 것을 봤음에도 못 본 척 하며, 그렇게 준면이 마음을 접기를,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세훈이는 아직도 기다리고 있어. 네 마음이 단념되기를." "…말도 안돼. 어떻게, 그게, 그렇게 쉽게 접힐 마음이었으면…… 그랬으면……." "……." "쉽게 단념할 수 있었다면, 진작에 접었겠지! …오세훈 바보같은 놈, 걔는 생각하는게 어쩜 그래!" "준면아." "그래서 세훈이는 다 포기 했대? 그래서 그런 말같지도 않은 방법 생각해서 기회니 뭐니 운운하는 거래?" "……." "결국은, 결국은 오세훈도 아직 접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내가 먼저 포기하기를, 기다리고… 아, 아으윽……." 앓는 소리를 내며 준면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갑자기,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세훈의 마음들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준면이 세훈을 향한 제 마음을 꽁꽁 감추려 무던히도 애써서 만들었던 성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아으으, 세훈아. 하염없이 세훈을 부르며 준면은 그간의 속앓이를 풀어내듯 울고 또 울었다. 루한은 그런 준면을 바라보며, 조금 붉어진 눈가를 손으로 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세훈이 있었다. 루한은 입을 꾹 다물고서 세훈을 노려보았다. 결국은 이렇게 되지 않았느냐고, 서로 울고 아프기만 하게 된 것 아니느냐고, 꾸짖는 듯한 시선에 세훈은 씁쓸히 웃으며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푹, 숙였다. 준면은 아직, 세훈이 있음을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루한은 맞은편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우는 준면을 보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세훈의 팔을 잡아 끌어 준면의 앞에 앉혔다. 준면아, 고개 들어봐. 루한이 준면을 부르자, 준면이 눈물을 닦아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제 앞에 보이는 세훈의 모습에, 멍하니 그 모습을 보다가 옆으로 고개를 돌려 루한을 보고는, 다시 세훈을 보았다. 꿈 일까? 눈앞에 보이는 세훈을 보고도 그대로 믿지 못해, 준면은 천천히 손을 뻗어 세훈의 볼에 대었다. 따뜻하게 느껴지는 온기에 준면은 입을 꾹 다물고서 애써 그쳤던 눈물을 또 다시 흘리고 말았다. 행여 울음소리가 세어 나갈까 싶은 마음에 두 손으로 입을 꽉 막고 어깨만 들썩이며 울음을 토해냈다. "미안해요. 내가 잘 못 생각 했나봐요." "……." "형도 나도, 참 지독하게 오랫동안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미처 그건 생각 못했어요." "……." "단지, 형이랑 영원하고 싶었을 뿐이었어요. 비록 그것이 사랑이 아닐지라도, 영원할 수 있다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바보같은 놈……." "맞아요. 진짜 멍청했어요. 우리 참, 끈질기게도 서로를 원하고 바라보고 있었는데,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요." "……." "이만하면 우리, 사랑해도 평생 갈 것 같은데 말예요. 설마, 벌써 늦은 건 아니죠?" 세훈의 물음에 준면은 고개를 저으며, 하나도 안 늦었다고 웅얼거렸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세훈은 작게 미소지었다. 루한은, 비로소 두 사람이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같아, 괜히 뿌듯한 마음에 함박 미소를 지었다. 축하해! 루한의 축하 인사에 준면은 눈가에 남은 물기를 닦아내며 수줍게 미소 지었다. *** "어쩌다가 너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세훈아." 하나의 침대에 나란히 누워 손장난을 치다가, 준면이 세훈을 올려다 보며 말했다. 세훈은 손으로 제 머리를 받치고 모로 누워 준면을 보다가, 가만히 고개를 숙여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가 떼며 작게 답했다. "이렇게 행복하려고." 세훈의 답에 준면이 베시시, 미소를 지어보이자, 세훈도 같이 웃어보였다. |
| 세준/ Merry? Marry Christmas! |
딸랑, 종이 울리고 아기자기한 인테리어의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주인이 밝게 웃으며 맞이했다. 준면은 이에 살짝 미소 지으며 가게를 둘러보다가, 카운터 앞으로 갔다. 가게의 벽에는 예쁜 손 글씨로 ‘크리스마스 기념 케이크 예약 주문 받습니다.’ 라고 적혀있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카운터에서 주인이 케이크 예약 하시려구요? 라고 물으니, 준면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여러 가지 모양의 케이크 사진을 보여주며 이것저것 추천 하는 것을 보던 준면은, 디저트에는 문외한이라 하트 모양의 케이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 애인 선물로 드리시려구요?” “네? 아, 네. 애인, 애인이요.” 주인의 물음에 준면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로 인해 조금은 수줍게 미소 지었다. 애인이라면 애인이지, 남자애인. 속사정을 알 리 없는 주인은, 그저 준면을 여자 친구에게 수제 케이크를 선물하려는 다정한 남자친구 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 부러움이 섞인 눈으로 준면을 보았다. “다정하시네요, 애인분이 엄청 좋아하실 거예요. 혹시, 문구는 생각하신 거 있으신가요?” “문구요? 어… 아, 제가 적어 드린 대로 꼭, 이대로 해주세요.” 준면이 문구를 종이에 적어 주인에게 내밀자, 주인은 처음에는 무엇인가 싶어 준면을 보았다가, 다시 보고 나니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 더욱 더 환하게 웃으며 알았다고 답했다. 준면은, 내심 뿌듯한 마음에 계산을 하고 나오면서도 연신 입가에 미소를 띠우고 있었고, 주인은 가게를 나서는 준면의 뒷모습을 보며 그의 애인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참 행복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 연말, 크리스마스이브에도 회사에서는 여섯 시 전에 퇴근하는 것은 그 다음 다음 날부터 회사를 안 나오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다는 회사의 방침으로 인해 꽤 여러 사람들이 불평이 가득한 표정으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연인이 없는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이브와 크리스마스가 그저, 월요일과 회사 안 나오는 화요일에 불과했기에 반기는 기색이었지만 말이다. 불평이 가득한 사람들 중에는 단연 준면도 뒤섞여 있었다. 그때 갑자기 울린 휴대폰으로 인해 준면은 곧바로 부장의 눈치를 살피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케이크 완성 되었어요. 찾아가시면 됩니다^^] 케이크 가게의 주인에게서 온 친절한 문자였다. 준면은 완성된 케이크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나름의 위안을 삼고자 했다. 이왕 휴대폰을 켠 김에 제 연인 세훈은 뭘 하고 있을지 궁금했으나, 오늘 조금 바쁘다고 말하던 목소리가 떠올라 생각을 접고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시간은, 퇴근을 한 시간 가량 남겨두고 있었다. 오늘따라 회사에서의 일과가 지루하게 흘러가는 것 같아, 지루해지던 참이었다. 애꿎은 시계만을 원망스레 노려보다가, 부장의 기침 소리에 스스로 놀라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여섯시가 되기 십 분 전부터 퇴근 준비를 미리 해둔 준면은, 여섯 시가 되자마자 쏜살같이 회사를 빠져나왔다. 계획해둔 대로 장을 보고 준비를 하려면 바삐 움직여야 했다. 날이 날이니 만큼 차가 밀릴 것을 계산해서 준면은 차를 타고 회사에서 가장 가까운 마트로 향했다. 벌써, 둘이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지도 8년째였다. 준면이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사귀기 시작했으니, 꽤 오래된 연인이었다. 남들은 6년만 넘겨도 사랑보단 정으로 사귄다고들 하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가 사랑스럽고 예쁘게만 보였고, 볼 때마다 설레기까지 했다. 물론 그것에는 갈수록 남자다워지는 세훈의 모습도 한 몫 했겠지만 말이다. 열일곱 살의 소년이었던 세훈은 어느덧 스물다섯 살의 어엿한 남자가 되어있었다. 그래서 준면은, 세훈과의 모든 것이 마냥 새롭게만 느껴졌다. 숨 가쁘게 장을 보고, 막 영업을 마치려고 하는 케이크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주인이 준면을 알아보고는 활짝 웃으며 케이크 상자를 건넸다. 준면은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에 다시 차에 올라타 집으로 향했다. 오늘 세훈이 늦게 온다고 한 것이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준면은 와이셔츠를 걷어붙이고 앞치마를 둘렀다. 옷 갈아입을 시간조차 부족한 것 같아 대략 손을 씻고 케이크를 냉장고에 집어넣은 뒤, 장 봐온 재료들을 꺼냈다. 음식을 준비하고 있을 동안에 세훈이 올까봐서 초조해졌다. 그때, 갑자기 울린 휴대폰에 깜짝 놀라 내용을 확인하니, 세훈에게서 열 시 조금 넘어서 도착할 것 같다는 내용이라 다행이라고 여기며 천천히 오라고 답장을 보냈다. 준면은, 조금 여유로운 마음으로 음식을 준비했다. 식탁에 세팅을 마치고 나니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남아, 준면은 옷장 문을 열었다. 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서 집안을 정리한 뒤에 트리 장식을 마저 했다. 전원을 켜니 곧, 화려한 불빛이 트리를 휘감고서 빛을 내고 있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준면은, 때마침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와 함께 열리는 현관문에, 쪼르르 현관으로 가 활짝 웃으며 세훈을 맞이했다. “생각보다 많이 안 늦었네?” “응. 더 일찍 못 와서 미안해요.”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 세훈에게 폭, 안기며 올려다보니, 세훈이 부드럽게 웃으며 준면의 머리를 매만졌다. 아냐, 안 늦었어. 준면의 말에 세훈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아침에 출근하기 전 준면이 사오라고 시켰던 와인을 건넸다. 준면은, 세훈이 건네는 와인을 받아들고, 옷 갈아입고 나오라고 한 뒤에 식탁 위에 와인 잔 두 개와 함께 바구니에 와인을 넣었다. 이제야 제대로 된 모양새에 뿌듯해 하고 있으려니, 겉옷만 걸어두고 나온 세훈이 준면의 어깨를 감싸며 볼에 짧게 입 맞추었다. “항상 형 혼자서 준비하게 해서 미안하네요.” “괜찮아. 혼자 하는 게 더 편해.” “말에 뼈가 담겨있는 것 같은 건, 기분 탓?” “응, 기분 탓. 얼른 앉아, 배고프지.” 세훈의 말에 준면이 킥킥, 웃으며 세훈을 자리에 앉히고 냉장고에서 케이크를 꺼내왔다. 식탁의 한 가운데에 케이크를 올려놓는 순간까지, 세훈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했다. 조금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케이크와 세훈을 번갈아 보니, 멍한 표정의 세훈이 보였다. 하트 모양의 케이크에는, ‘Marry Christmas’ 라고 적혀있었다. “형, 이거 오타 아니에요?” “오타 아니야, 세훈아. 잘 봐봐.” “메리 크리스마스 할 때, a가 아니라 e…… 어?” “이제 알 것 같아?” “형, 이거, 메리…….” “응, marry. 결혼하자, 우리.” “형…… 당연한 소리 아니에요? 와.” 준면이, 수줍게 웃어보였다. 너무나도 사랑스럽기 만 한 제 연인의 모습에, 세훈은 감격에 찬 얼굴로 준면을 보았다. 크리스마스이브, 창 밖에는 눈송이가 하나, 둘 씩 떨어지기 시작했고, 거실 한 구석에서는 크리스마스트리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세훈은 준면의 앞으로 가, 한 쪽 무릎을 꿇고서 준면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추고 준면을 올려 보았다. 부끄러운 듯, 볼이 발갛게 물든 모습이 예쁘게 보였다. 세훈은, 굽혔던 상체를 쭉 펴서 준면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가만 가만 입술을 물었다가 놓으며 오가는 숨결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Merry Christmas, Marry Christmas” |
| 세준/ 어쩌다 너를 ver.S |
추천 BGM.샤이니 - 방백 지금부터 아름다운 한 연인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연극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관객 여러분은 정숙해주시고, 휴대폰은 무음으로 해놓거나 꺼주시길 바랍니다. 아, 그리고 앞좌석을 발로 차거나 옆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등의 행위는 하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공연 에티켓 잘 지켜 주실 거죠? 막이 걷히고, 무대의 조명이 밝아진다. 무대의 한 구석에 여전히 연극의 시작을 알린 사람이 서있고, 무대의 한 가운데에는 유난히 하얀 피부가 두드러지는 남자와 남자 못지않게 고운 피부를 자랑하는 아담한 체구의 여자가 나란히 마주보고 서있다. 무대의 배경은 공원, 두 남녀 주변으로 조깅을 하는 사람, 술래잡기를 하는 꼬마들이 있다. 저기 공원 한 가운데에 있는 피부가 하얀 남자와 여자가 보이시나요? 오늘 이 연극의 주인공들입니다. 정말 선남선녀 커플이죠? 남자의 이름은 J이고, 여자의 이름은 Y입니다. 아, 깜빡할 뻔 했군요. 혹시 솔로이신 분들 있나요? 부러워도 뛰쳐나가시면 안 됩니다. 알겠죠? 아 제 이름은 뭐냐고요? 이 연극에서 전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중요한 건, 저기 있는 저 커플이죠. 그래도 궁금하다고요? 아, 잘 생겨서 궁금하다고요. 하하, 감사해요. 음, 그럼 편의를 위해 제 이름은 S라고 해두죠. 연극의 시작을 알린 S가 무대의 가운데로 움직인다. 줄곧 멈춰있던 J와 Y가 S의 등장에 환하게 웃으며 반긴다. S역시 웃는 낯으로 J의 옆에 선다. J는 Y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S의 시선이 J의 팔이 움직이는 동선을 따라간다. S는 관객석을 향해 서있었는데, 그래서인지 S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던 것은 관객만이 볼 수 있다. J는 Y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환하게 웃고 있다. S는 그 모습을 보며 환하게 웃지만, 어쩐지 슬프게만 보인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Y가 S에게 자신의 왼손을 보여주고, J역시 S에게 왼손을 보여준다. 두 사람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같은 모양의 반지가 끼워져 있다. 두 사람의 손을 본 S의 표정이 다시 한 번 더 굳어졌다. 이것 역시 관객들만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 결혼하기로 했어.’ Y의 목소리가 무대에 울려 퍼진다. 이후로도 세 사람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다가, J와 Y가 먼저 S에게 인사를 하며 무대의 뒤편으로 사라진다. S는 그 뒷모습을 바라본다. 여러분, 들으셨어요? J가 Y에게 청혼을 했다 네요. 곧, 결혼을 한 대요. 웨딩드레스를 입은 Y의 모습은 얼마나 예쁠까요? 마침 오늘 웨딩드레스를 보러 간다는데, 그 곳으로 가볼까요? S가 무대의 뒤로 사라진다. 조명이 꺼졌다가 다시 켜진다. 배경은 세련된 분위기의 웨딩드레스 숍으로 바뀐다. 무대의 한 쪽에 눈부시게 하얀 미니 웨딩드레스를 입은 Y가 서있고, 그 뒤편에서 말끔한 양복을 입은 J가 나타나자 Y가 환하게 웃으며 J를 반긴다. 두 사람의 반대편에서 S가 무대로 나온다. 조명이 S의 쪽으로 집중된다. 와, 역시… 예쁘죠? 정말 잘 어울리네요. 감히 제가 끼어들 틈이 없을 정도로……. S는 씁쓸한 표정으로 잠시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가, 곧 다시 웃는 낯으로 바꾸곤 J와 Y를 바라본다. 그때 J와 Y가 S를 발견하고는 어서 들어오라며 손짓한다. S는 어색한 웃음으로 J와 Y의 앞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이때 무대에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J와 Y앞에서 S가 그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지만, 두 사람에게는 S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다. 날 보며 웃을 때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심각해지는 병이 있어요 이러면 안 되는데 널 안고 싶어, 느끼고 싶어 함께 꿈꾸고 싶어 항상 너를 사랑해주는 그가 참 밉다가도 한없이 부러워지곤 해요 하지만 언젠가는 오롯이 내 마음 담아서 오래된 이야기 하고파, 너의 손을 잡고서 환하게 웃는 J와 Y의 표정과는 상반된 S의 표정이 비춰진다. 환하게 웃는 J와 Y에게로 조명이 집중된 후에, 무대의 조명이 꺼진다. 다시 조명이 밝아지고, 깔끔한 양복차림의 S가 등장한다. 무대의 한 가운데로 걸어 나온 S는 웃는 낯으로 좌중을 둘러본다. 오늘 J와 Y의 결혼식이 있는 날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결혼식의 하객으로 참석하신 거예요. 많이들 축하해주실 거죠? 저 역시… 기쁜 마음으로, 두 사람을 축복해주려고 해요. 울음을 참으려는 듯, 힘겹게 말을 끝마친 S가 무대의 뒤편으로 사라지며 다시 조명이 꺼진다. 조명이 밝아졌을 땐, 무대의 한 가운데에 웨딩드레스를 입은 Y와 양복 차림의 J가 팔짱을 끼고서 나란히 서있다. 흡사 연극이 시작될 때, 공원에서의 모습과 비슷하다.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지고, 두 사람의 머리 위로 꽃가루가 흩날린다. 결혼식의 사회자가 이제 막 영원한 사랑의 약속을 한 두 사람을 위해 박수를 쳐달라고 하며, 관객들의 박수를 유도한다. 행복한 두 사람의 표정이 눈에 띈다. 무대의 한 구석에 조명이 들어오고, 그 곳에 웃고 있지만 어쩐지 처연한 모습의 S가 서있다. 결혼 행진곡이 잠시 멈추고, 무대에 다시 아까 전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지금 내 앞엔 너무 눈부신 두 사람, 그리고 서툰 연기를 하는 내가 있어 이런 바보 같은 날, 스스로 꾸짖어 봐도 가슴은, 가슴은 여전히 널 향하고 있나 봐 무대로 사진 기사가 등장하고, J는 무대 한 구석에 서 있는 S를 향해 어서 오라며 손짓한다. S는 괜찮다는 듯 손사래를 치지만, J가 직접 S의 손을 잡아끈다. J의 손에 잡힌 제 손을 보던 S는 하는 수 없이 J에게 이끌려 사진 기사 앞에 선다. Y를 가운데에 두고 양 옆으로 J와 S가 나란히 섰다. S는 환하게 웃는 모습의 J를 바라보고,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사진이 찍힌다. 시간이 멈춘 것 마냥 가만히 있는 J와 Y, 그리고 사진 기사를 두고 S만이 조용히 입을 연다. S의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는다, 오로지 연극을 보는 관객들에게만 들린다. 여러분한테만 고백할게요. 사실 J는 제가 정말 많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한때 그에게 고백을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 이후에 영원히 J를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그게 너무도 두려워 말을 못했어요. Y는 착하고 예쁜 사람이에요. J와 정말 잘 어울리죠. 여러분도 보셨으니 알 거예요, 두 사람이 얼마나 예쁜 커플인지. 그런 두 사람인데 제가 어떻게 제 욕심을 채울 수 있겠어요. 힘들진 않았냐고요? 힘들었죠, 두 사람 다 제게 많이 소중한 사람들이라. 사실은… J의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게 제일 힘들었어요. 그의 행복을 바라면서도, 막상 그가 행복하면 슬펐다고 해야 할까요. 어쨌든… 그는 들리지 않겠지만 오늘을 마지막으로 그동안 수없이 했던 고백을 멈추려고요. S는 J의 앞에 선다. J의 웃는 얼굴이 S를 보고 있다. S는 조심스럽게 제 앞에 있는 그를 끌어안는다. “J, 내가… 당신을 많이 좋아해요.” J가 손을 들어 S의 등을 토닥인다. 그것을 끝으로 조명이 꺼지며, 연극이 막을 내린다. 무대에 흐르는 노래는 끊이질 않고 계속 된다. |
| 세준/ 오전 1시 10분에 저장한 글입니다. |
추천 BGM.에픽하이 - FAN 1. 가질 수가 없어도 12.04.10 오늘은 내가 당신을 처음 본 순간이었어요. 그저 스치듯 마주친 당신이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당신 한 명만 눈부시게 빛나고 있더군요. 이름도 모르는 당신을 본 순간,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고 오직 당신만 눈에 들어 왔어요. 당신은 나를 몰라요, 나 역시 당신에 대해 잘 모르죠. 하지만 당신을 알고 싶어요. 첫 눈에 반한다는 말을 당신 덕분에 알게 되었어요. 고마워요. 12.04.19 당신의 이름도 알게 되었고, 생일도 알게 되었어요. 당신의 이름이 참, 당신과 잘 어울려요. 단정한 이름, 단정한 당신. 당신의 이름을 이루는 자음과 모음들이 꼭,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겐 쓰이게 된다면 어색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당신과 정말 잘 어울려요. 참, 그러고 보니 당신의 생일이 대략 한 달 가량 남은 것 같네요. 벌써부터 당신에게 무엇을 선물할지 고민 중이에요. 당신은 뭘 좋아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요. 밤이 깊었네요,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지. 자기 전이라면 어서 자요. 12.05.12 멀리서 나마 당신을 본 날이에요. 심장이 세차게 뛰어서 절로 흥분이 되더라고요. 열정적인 당신의 모습을 열정적인 시선으로 담았어요. 역시나 당신은 항상 빛이 나더군요. 당신은 전혀 듣지 못했겠지만, 사실 난 당신을 보며 계속해서 내 마음을 고백했어요. 내가 당신을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다고. 당신은 듣지 못하는 말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찌나 떨리던지. 아, 아직도 미친 듯이 두근거리고 있어요. 이 기분 간직한 채 잠이 들어야할 것 같네요. 잘 자요. 12.05.22 Happy Birth Day to you. 12.06.02 다들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고 하면 제정신이냐고 물어요. 뭐가 문제인 걸까요? 나는 단지, 눈이 부시도록 빛나고 아름다운 당신을 좋아하고 있을 뿐인데. 아직 그들이 당신의 아름다움을 몰라서 그러는 걸까요? 아, 사실 나는 그들이 당신에 대해 몰랐으면 좋겠어요. 그들 역시 당신을 알게 된다면 나처럼 사랑에 빠질지도 모르니까요. 당신을 사랑하는 건 오직 나뿐이었으면 좋겠어요. 우스운가요? 하지만 난 진심이에요. 사랑해요, 사랑해. 미쳤다고 해도 좋을 만큼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12.06.24 당신을 끌어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당신은 작은 사람이니까, 내가 당신을 안으면 내 품에 쏙 들어올 것만 같은데. 하지만 그러기엔 당신은 너무나도 멀리 있어요. 우리나라와 멀리 떨어진 타국에 있는 당신이 너무나도 보고 싶은 밤이에요. 당신이 보고 싶어요. 내 모든 것이 당신을 갈망하고 있어요. 당신이 보고 싶어요. 12.07.02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나는, 하루 24시간 전부 당신만 생각해도 부족할 정도에요. 당신을 생각하기에는 이 하루가 너무 짧아요. 당신은 그렇지 않겠죠? 벌써부터 홀로 당신을 사랑하는 일이 지친다고 하기엔 내가 너무 끈기가 없는 것이겠죠? …그냥, 갑자기 생각이 많아져서 그랬어요. 절대 지치는 게 아냐.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단지 나는 당신과 같은 땅을 밟고, 같은 하늘을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는데 지금은 그러질 못해서,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미안해요, 잠시라도 이런 생각을 해서. 당신이 있는 곳은 지금 낮이겠죠? 여긴 밤이에요. 더 깨어 있다간 무슨 소리를 할지 모르겠어서 무섭네요. 잘게요, 좋은 하루 보내요. 2. 만질 수가 없어도 12.08.11 와, 거의 한 달 만이네요. 그 사이에 당신은 잠깐 동안 나와 같은 땅, 같은 하늘을 보고 있었고요. 사실 나도 너무 바빴어요. 그래도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이 식었다거나 한 것은 아니니 걱정은 마요. 더 깊어졌다면 깊어졌겠죠. 왜냐하면 단 한 순간도 당신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으니까. 사랑해요. 12.08.12 당신을 끌어안고 싶고, 당신에게 입 맞춰주고 싶어.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 당신이 내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어. 당신과 사랑하고 싶어. 언제쯤 당신이 날 봐줄까? 내가 여기 있다고 계속 신호를 보내는데, 당신은 그것을 몰라. 그럴 때마다 죽고 싶어. 당신의 사진 위에 사랑을 말하고, 안고 싶을 때면 사진을 가슴에 품고, 입을 맞추고 싶을 땐 사진 위에 가만히 입술을 대어보고. 그러고 나면 난 항상 비참해져. 언제까지 이렇게 비참한 기분을 느껴야 하지? 당신은 언제쯤 날 알아주지? 12.08.14 미안해요. 이틀 전엔… 그래, 술을 좀 마셨는데 감정이 격해져서 그랬어요. 요새 더위를 먹었나, 내가 이상해진 것 같네요. 나는 당신에게 이러면 안 되는 건데. 12.08.20 음… 오늘 당신의 기분이 안 좋아 보였어요. 웃고 있는데 웃는 것 같지 않아보였어. 당신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요? 당신의 표정이 좋지 않아서 하루 종일 신경이 쓰였어. 도대체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힘들게 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난 모르겠어요. 당신이 힘들 때면 내 어깨라도 빌려주고 싶은데, 내가 당신에게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줄 수 있는데. 그럴 수가 없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안타까워. 꿈에서라도 만난다면 당신을 위한 작은 쉼터가 되어줄게, 당신을 만나러 꿈속으로 가요. 12.09.03 내 안의 당신이, 영원히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12.09.10 당신을 처음 사랑하게 된 순간은 만물이 생동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봄이었는데 어느덧 꽃이 지고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이 되었네요. 도시에서는 쉽사리 들을 수 없는 귀뚜라미의 울음소리가 찌르르, 내 가슴에 울리고 있어요. 당신에게 이 소리를 들려주고 싶다. 올려다본 까만 밤하늘에는 별들이 촘촘히 박혀서 빛을 내고 있어요. 이것 역시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네요. 당신은 계속 도시에서만 살았다고 들었는데, 이런 풍경들을 전혀 모르겠죠? 12.09.24 내 안에 자리 잡은 당신이 그 크기를 점점 키워갈수록 나는 더 괴로워져요. 너무 너무 괴로운데, 한 번 손을 대면 벗어나지 못하는 마약인 것 마냥 당신이 더 좋아져. 주변 사람들은 날 더러 미쳤대요. 그래요, 나는 당신이란 사람에게 미쳤어요. 사랑해요, 사랑해. 정말 많이 사랑해. 사랑해요. 당신을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당신마저 날더러 미쳤다고 하지 말아줘요. 만약 당신마저 날 미친놈 보듯 본다면 정말 죽고 싶을 거야. 12.10.04 10월 4일. 풀어쓰면 1004. 당신은 천사에요, 내 천사. 당신의 미소를 보고 있으면 온 세상이 밝아지는 기분이에요. 12.10.10 요새 나는 당신을 생각하면 감정이 두 가지로 나뉘어요. 어떤 날에는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미친 듯이 설레고, 또 어떤 날에는 끝없는 우울 속으로 빠져 들어가요. 오늘은… 아까 언급한 것과는 전혀 다른 기분이에요. 그러니까, 좀 이상해.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당신의 온기를 가까이서 느껴보고 싶어요. 당신에게선 좋은 향이 나겠죠? 당신의 붉은 머릿결은 분명 부드러울 거예요. 희고 고운 피부는 또 어떤 느낌일까요. 내가 좀 변태 같나요? 그렇지만… 내 상상 속 당신의 피부는 말랑하고, 부드러워요. 머릿결은 비단 마냥 곱고, 좋은 향이 나요. 상쾌한 향기가 절로 맡아지는 기분이야. 당신은 항상 따뜻하고, 붉은 그 입술마저…… 윽, 미안해요. 여기까지 쓰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그러니까 오늘 기분이 이런… 기분이에요. 당신도 알겠죠, 내 심정. 당신을… 조금 다른 의미로 안고 싶어요. 미안해요, 미안해. 당신을 두고 이런 생각을 해버려서. 12.10.22 드디어 내일, 다시 한 번 당신을 조금 더 가까이서 만날 기회가 생겼어요. 이번에는 당신이 들을 수 있게 조금 더 큰 소리로 내 마음을 고백해보려고 해요. 잘 자요, 내 사랑. 3. 말할 수가 없어도 수많은 사람들의 함성이 귓전을 때렸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저 멀리서 보이는 당신의 모습에 표정을 풀고 미소를 지으며 당신을 보았다. 당신 역시 시끄러운 소리에 아주 잠깐 인상을 찌푸렸다가 곧 환한 미소로 마중 나온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서 숨을 죽이며 당신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마음만큼은 당신의 근처에 도착하고도 남았는데 도무지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조금만 더 가까이 가고 싶다. 아주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데. 당신을 갈망하는 이내 마음이 주체할 수가 없어졌다. 나도 모르게 당신이 지나가는 행로를 따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당신이 이동하는 속도에 맞춰서 당신의 옆에서 걷는 것 마냥 빠르게 당신을 뒤쫓았다. “김준면!” 겨우 당신의 손목을 잡을 수 있었다. 갑자기 불린 제 이름과 맞닿은 낯선 피부의 감촉에 놀랐는지 놀란 토끼눈이 되어 나를 보았다. 간신히 당신과 가까워졌는데, 당신의 손목을 그러쥔 내 손은 당신을 둘러싼 경호원들에 의해 내쳐지고 말았고, 나는 발악을 하며 어떻게든 당신에게 가까워지려고 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당신에게 나를 알릴 수 있는데. “준면아, 괜찮냐?” “어? 어, 형 나는 괜찮아…….” “아 진짜 오늘따라 사람도 많아서는, 큰 일 날 뻔 했네.” 당신과 내 사이에 사람들이 들어차며 다시 거리가 생겨버렸다. 당신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를 붙잡는 이 사람들을 어서 떨쳐내고 당신에게 가야하는데, 자꾸만 나를 붙잡는 이들이 너무나도 싫었다. 그리고 그저 말없이 겁에 질려서 당신마저 그 순간에는 미웠다. 왜, 왜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건데? 나는 그저, 당신을 사랑하고 있을 뿐이었다. 멀게만 느껴지는 당신을 혼자서 사랑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당신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당신에게 가까워지고 싶었을 뿐인데. 당신은 내가 무섭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고, 당신과 나를 가로막는 사람들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당신과 나는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것일까? 내가 이만큼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데, 당신은… 당신은……. 주변의 시선들이 못 견디게 싫었다. 죄다 나를 미친놈 보듯 보고 있었고,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사진을 찍는 사람도 여럿 있었고, 나는 비참한 기분으로 내팽겨졌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 것이 죄였을까? 나는 단지 사랑을 하고 있었을 뿐인데. [23일 저녁, 해외 스케줄을 마치고 귀국을 한 아이돌 가수 김준면이 공항에서 한 극성팬에 의해 기습 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일로 정신적 충격이 큰 김준면은 한동안 휴식과 안정을 취하기로 했다고 전해집니다…] 당신에게는 내 사랑이 충격이었을까? 나를 보던 당신의 그 눈빛이 기억 속에 깊숙이 박혀서 지워지지가 않는다. 내 사랑이 당신에게 조차 인정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 살고 싶지가 않았다. 그저 당신이 날 알아주길 바라고 있었을 뿐인데, 그게 너무 큰 바람이었나 보다. 당신은 내가 가진 이 마음을 듣고 있지도 않았었다. 난 곧 죽어도 안 되겠지? 다음 생에서도 당신은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살아가겠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당신에게 내 이름을 말해줄 것을 그랬나 보다. 내 이름을 떠올릴 때, 비록 당신에게 좋은 기억이 아닐지라도 당신이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았을 지도 모를 일인데. 당신에게 ‘오세훈’ 이 세 글자를 알려줄 것을 그랬나 보다. 사랑하고 싶다. 정확히는, 당신과 사랑하고 싶다. 내 머릿속에서라도, 그저 헛된 꿈이라도, 멀리서 숨어서라도, 널 사랑한다고. 내가 누군지는 몰라도. |
| 열준/ 담벼락 |
그와 나의 나이 차이는 꼬박 3살 차이였다. 그가 나보다 3살 형이었고, 나는 그보다 딱 3살 동생이었다. 그의 집과 내 집은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이웃이었는데, 형제가 많은 그의 집에 비해 외동이었던 나는 그 집에 자주 놀러가곤 했었다. 내가 그를 비롯한 그의 형제들과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부모님과 내 부모님이 예전부터 친했던 것도 있긴 했었다. 어쨌건 간에 나는 그와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었다. 그의 가족 이야기를 잠깐 해보자면, 그에게는 위로 형이 하나 있었고 아래로 남동생이 둘 있었다. 그러니까 4형제가 사는 아들 부자 집이었다. 동네 어르신들은 그 집을 두고 전생에 업을 많이 쌓았다고들 말했다. 어쨌건 간에 그 집 아들들은 참 신기한 것이, 저마다 성격이 다 제각각이었다. 그리고 그 집 둘째인 그가 제일 맏이 같았다. 그렇다고 그의 형인 첫째가 맏이답지 않게 철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뭐라고 해야 하나, 여하튼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그 집의 셋째 아들은 나보다 한 살 많았는데, 내가 생일이 빨라 그와는 같은 학년이었다. 실상 나와 동갑인 것은 그 집 넷째 아들 이었는데, 내가 생일이 빨라 어쩌다 보니 형 소리를 듣고 있다. 이렇게 나열 하고나니, 따지고 보면 제일 친하게 지내야 하는 것은 그 집 셋째와 넷째였는데, 이상하게도 나보다 3살 많은 그와 제일 친했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그에게 유난히 친근하게 굴었다. 내가 그에게 유독 친근하게 굴기 시작한 계기가 있었는데, 아마 내가 막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였을 것이다. 그 집 4형제와 같이 연날리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당시에 그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을 싫어했었다. 나는 연을 날리며 한참을 뛰어 놀다가 연이 바닥에 떨어져서 줍고 난 뒤에 뒤를 돌아보니, 나무 그늘에 앉아 하늘 위를 자유롭게 떠다니는 연을 올려다보던 그의 모습을 보았다. 나는 그제야 뒤늦게 그가 무리에 끼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형, 여기서 뭐 해?’ ‘연 날리는 거 보고 있었지. 찬열이는 연 안 날려?’ ‘연이 떨어져서. 근데 힘들다, 여기서 쉴래.’ ‘그래, 그럼 여기서 형이랑 같이 하늘 보자.’ ‘응. 그런데 형은 연 안 날려?’ ‘나? 나는 그냥 보는 게 더 좋아. 봐봐, 하늘도 예쁘고 그 위에 있는 연도 예쁘고.’ 그의 말에 나는 하늘과 그를 번갈아 보았다. 저녁놀이 지기 시작하던 때였는데, 붉은 하늘과 잘 어울리는 그 모습에 넋을 놓았던 것 같았다. 입을 벌리고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옆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하얀 피부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때 들었던 생각이, 나중에 그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것이 그를 향한 ‘동경’ 쯤이라고 여겼었다. 그렇게 시간을 흘러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그는 군 입대를 했고, 그가 제대를 했을 때 나는 수험생이었다. 죽자 살자 공부해서 겨우 그와 같은 대학에 합격했을 때, 나는 한 학기 다니고 바로 입대를 했다.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나는 거의 5년 동안 그와 제대로 얼굴을 마주하질 못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내가 그를 의식적으로 피한 것도 있었다. 그러니까 그 ‘동경’ 쯤이라고 여겼던 것이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변형되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대 이후, 짧은 머리가 민망해서 모자를 푹 눌러쓰고 들어온 도서관에서 만난 그가 괜스레 반가웠다. 그는 나를 보지 못한 것 같아서 대충 그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가 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서가 주변을 돌아다니며 정리하는 모양새가 너무도 잘 어울렸다. 꽤 바빠 보이는 것 같기도 해서 도와줄 겸 인사도 건네려 그에게로 다가갔다. 책을 떨어트릴 것 같기에 발걸음을 빨리해 잡아주니, 부딪힌 것이 미안했는지 대뜸 고개 숙여 사과하는 모양새가 그저 우스웠다. “아! 죄송합니다…… 어?” “오랜만이에요.” 변함없이 하얗기만 한 피부의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나를 올려본다. 나이를 헛먹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순한 모습에 그저 웃음만 지어졌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어린 시절에 그가 그의 형보다 맏이 같다고 느낀 건 비단 나만의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그는 사실 지극히 둘째다운 사람이었는데, 어쩌면 그 뭣도 아닌 동경 때문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우와, 찬열이 맞지? 엄청 멋있어졌네?” “참나, 난 원래부터 멋있었어요. 어어, 또 책 떨어트릴라.” 또 다시 떨어트리려는 책을 붙잡아주니 멋쩍게 웃는다. 부쩍 부주의해진 것 같은 모습의 그가, 전혀 어색하지 않고 어울린 것 같아 웃음이 세어 나왔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몇 번이고 나를 보다가 웃음 짓고서 고개를 돌리길 반복했다. 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계속 그것이 반복되니 여간 민망한 것이 아니라서 그가 나를 보는 타이밍에 고개를 돌려 같이 보니, 깜짝 놀라서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모양새가 퍽 귀여워 우스웠다. “왜 그렇게 보는 거예요.” “그냥… 어렸을 때는 그냥 귀엽기만 했는데, 부쩍 잘생겨진 것 같네.” “푸핫, 그래서 뿌듯해요? 형이 내 엄마도 아니고. 그러는 형은 어째 나이가 들수록 귀여워지는 것 같아요.”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이게 못 하는 말이 없어.” 내 말에 민망한 듯 귓가가 빨갛게 변해, 손을 들어 내 팔을 찰싹 때리는 손이 꽤 매웠다. 아픈데 그냥 웃음이 나와 웃으면서 팔을 문지르니, 그가 저만치 앞서 걸어갔다. “같이 가요!” 그의 뒤를 쫓아 걸음을 빨리하면서도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허파에 바람이라도 들었나, 이상하게도 자꾸 웃음이 나왔다. 그의 집과 내 집에 다다랐을 때, 꼭 그에게 처음 시선을 떼지 못 했던 날과 같이 저녁놀이 지고 있었다. 더욱 신기한 것은 그의 피부가 그때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집과 내 집을 가르는 담벼락 앞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섰다. “노을 지네요.” “와… 그러게. 예쁘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를 멍하니 보다가, 한차례 텀을 두고 입을 열었다. “제대하면 형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무슨 말?” “그러니까, 내가…” 하늘을 올려다보던 말간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 눈을 보고 있자니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텅 비어버리는 것 같았다. 갑자기 말이 끊기니, 그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 그냥, 형 많이 보고 싶었다고요.” “…그게 뭐야, 나도 찬열이 많이 보고 싶었어. 이제 얼른 들어가.” “하, 하하, 형 먼저 들어가요.” “응, 알았어.” 말갛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뒷모습이 얄미우면서도 얄밉지가 않았다. 그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나는 담벼락에 머리를 박았다. 으으, 박찬열 이 병신아. 괜스레 한숨이 나오고 답답했다. 마음 같아선 집에 들어가 버린 그를 다시 나오라고 부르고 싶었으나, 또 막상 그 얼굴을 마주하면 할 말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사실은 내가, 내가……” ……김준면을 많이 좋아해요. 아, 내 자신이 엄청나게 한심해지는 순간이었다. |
| 루준/ I'm fine thank you, and you? |
시애틀에 도착했을 땐, 하늘이 우중충하더니 결국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우산을 챙기질 못해서 공항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망연히 서리 낀 유리창을 바라보았다. 금세 그칠 줄 알았던 빗줄기가 점점 더 거세지는 것이, 어쩐지 불안했다. 더불어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에 문득 울고 싶어졌다. 한국인이라곤 나밖에 없는 건지 공항을 가득 메운 알아듣지 못 할 소음에 머리도 아파오기 시작했다. 시애틀로 떠나온 이유도 최악이고, 도착한 이후에도 최악이기만해서 서러웠다. 한숨을 푹 내쉬고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정말, 모든 것이 다 최악이었다. 아는 사람도 없는 이 낯선 땅에 온 것은 단지, 내 첫사랑이었던 ‘그’ 가 참 좋아하는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그래, 사실 나는 동성애자였다. 그런 반면에 내가 좋아한 그는 지극히 일반적인 이성애자였기에, 내 마음을 알면서도 그는 끝내 모른 척 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한다는 말이, 곧 있으면 결혼을 하는데 사회를 봐줄 수 있냐는 부탁이었다. 아, 지금 와서 후회가 든다, 그 말을 꺼낼 당시에 그의 면전에 물을 뿌리지 못 한 것이. 그때 나는 멍청하게도 너무나도 사랑하는 그가 결혼을 한다니 씁쓸한 마음이 들면서도 사회를 봐주겠다고 흔쾌히 승낙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너무 병신 같았다. 그의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나는 피로연이고 뭐고 무작정 짐을 싸서 미리 예매해둔 시애틀 행 비행기를 타고 훌쩍 떠나왔다. 그냥, 그와 같은 땅을 밟고 있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는 지금 따뜻한 나라 태국으로 신혼여행을 가있겠지만 말이다. 아, 생각해보니 너무 억울했다. 나는 아는 이라곤 하나도 없는 춥기만 한 낯선 땅에서 홀로 오들오들 떨고 있는데, 그는 따뜻한 나라에서 사랑하는 부인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 자신이 너무도 비참했다. 한숨을 길게 내쉬고선, 무릎을 끌어안으며 몸을 웅크렸다. “한국인이에요?” 낯선 이국땅에서 들린 반가운 한국말에 고개를 들고 내게 말을 건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밝은 오렌지 브라운 빛의 머리색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소유한 그 사람은 지극히 이곳 시애틀의 현지인 같아 보였다. 그럼에도 그 사람의 입에선 유창한 한국말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조금 멍해져서 그를 올려다보다가 뒤늦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나와 그 남자의 첫 만남이었다.
내게 말을 건 그 남자의 이름은 루한. 내 생각대로 그 남자는 중국계 미국인 이라고 했었다. 그럼에도 한국말을 잘 하는 이유는 그 남자의 아버지가 한국계 미국인인 것과 동시에 그 남자가 예전에 대학 다닐 때 교양수업으로 한국어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루한은 참으로 고맙게도 우산이 없는 나를 위해 흔쾌히 자신의 차에 태워주었다. 그리하여 덕분에 나는 비에 젖지 않고, 택시비조차 아낀 채 예약해두었던 호텔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루한의 차를 타고 호텔에 도착했을 때,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개의 도시 시애틀답게, 여전히 안개로 인해 하늘이 흐렸다. 호텔에 도착하자 나는 루한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차 문을 막 열려는 찰나, 루한은 나를 불러 세웠다. “미스터 김, 영어 잘 못하죠?” “어… 네, 사실… 잘 못해요.” “그럴 줄 알았어, 그럼 미스터 김만 괜찮다면 우리 집에서 묵을래요? 혼자 살거든요.” 루한의 말에 나는 어떠한 힘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한은 싱긋, 웃으며 차를 출발 시켰고 어쩐지 나는 도착했을 때의 우울함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 시애틀에 머무른 지 한 달, 즉, 루한의 집에 있게 된 지도 꼬박 한 달이 지나있었다. 그 사이 나는 루한에게서 배운 덕택에 영어 회화 실력이 많이 늘어 있었다. 이제는 혼자서도 잘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 동시에 루한과도 많이 친해져서 이제는 루한의 친구들이 루한을 부를 때와 같이 ‘루’ 라고 불렀다. 루한 역시 나에게 미스터 김이 아닌 온전한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루한과 지내는 한 달 동안, 신기하게도 나는 한국에 있는 내 첫사랑 그를 떠올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그가 가보고 싶었다던 거리를 걸으면서도 그의 생각이 나질 않았다. 시애틀에 있는 동안 루한은 내게 한 없이 다정했고, 늘 ‘예쁘다’라는 말을 해주었다. ‘예쁘다’라는 말은 내가 참 많이 좋아했던 그에게서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한국에 있는 내 첫사랑 그에게서 듣고 싶었던 그 말을 루한에게서 처음 들었을 땐, 왈칵 눈물이 쏟아지기도 했었다. 그때 루한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그저 나를 품에 안아 다독여 주었을 뿐이었다. 루한은 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리고 나는, 루한이 참 좋았다. 루한과 나는 처음부터 같은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혼자 사는 집이었기에 여분의 방은 따로 없었고, 같은 남자니까 같은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물론 나는 상황이 조금 달라 많이 부끄럽긴 했었다. 처음에는 같은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어색하고 민망해서 잠을 설치기도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혼자 자는 것이 더 허전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쨌든 그 날도 저녁을 먹고 루한이 다운 받은 한국 영화를 보고나서 잠이 들었다. 한참 단잠에 빠졌을 때, 침대 맡 서랍에 올려 두었던 휴대폰이 진동을 울리기 시작했다. 잠귀가 유난히도 밝았던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뻗어 전화번호를 확인하지도 않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니 건너편에선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제야 졸린 눈을 비비며 액정을 확인하니, 순식간에 잠이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한국에 있는, 내 첫사랑 그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고쳐 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어 다시 “여보세요” 라고 말했다. “-나야…….” “… 술 마셨어요?” “-조금? 넌 자고 있었나 보네.” “여기, 한국 아니에요.” “-그래? 그렇구나….” “왜… 전화 했어요.” “-준면아, 지금 이런 말…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 “-이혼 했어. 뭐, 처음부터 혼인신고 하지도 않았으니, 그냥 헤어진 게 맞네.” “… 왜요?” “-이상하게 네 생각나더라, …절대 술김에 하는 말은 아니야, 준면아.”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심장이 세차게 뛰며,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참, 끝까지 잔인하기만 한 사람. 나도, 전화기 너머의 그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고, 전화기 너머의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심장을 후벼 파는 그 말을, 한 달 전에 들었더라면 당장에라도 한국으로 갔을 텐데. 지금은 그냥, 화가 치밀었다. 그에게 휘둘리는 내가 한 없이 한심했고, 나를 가지고 노는 그가 참으로 미웠다. “내가, 내가 당신 장난감이에요? 버려두자니 아깝고, 가지고 있기엔 싫고.” “-준면아 그게 아니고…” “듣기 싫어, 다시는 술김에 전화하지 마요. 아니, 정신 멀쩡해도 전화 하지 마.” 속사포 마냥 말을 쏟아내고는 휴대폰에서 배터리를 분리해 서랍 위에 던져두었다. 끝내 참고 있던 눈물이 터져 나와 양 손에 얼굴을 묻었다. 행여나 세어 나온 울음소리에 루한이 잠에서 깰까봐, 입술을 꾹 깨물며 울음소리를 집어 삼켰다. 그때 내 허리에 감싸는 하나의 팔이 있었다. 나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준면, How are you?” 나는 곧장 몸을 돌려 루한의 목에 팔을 두르며, 그에게 안겼다. 루한은 내가 그 앞에서 처음 울었을 때처럼, 그저 말없이 등을 토닥여 주었다. “… I'm fine thank you, and you?” “준면, 거짓말은 나빠. 그리고… 그런 나쁜 사람 때문에 우는 건 더 나빠.” “…….” “질투 나잖아, 내가. 차라리 울려면 나 때문에 울어.” 루한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나, 준면이 좋아. 준면도 나 좋아하지 않나?” “…응, 좋아. 내가 루 많이 좋아해! I love you!” “I love you, too.” 방금까지도 울던 나는 언제 울었냐는 듯, 베시시 웃고 말았다. |
| 종현준면/ 꽃송이가 |
그를 다시 만난 것은 꼬박 10년 만이었다. 그러니까, 갓 스물이었을 때 대학에서 만난 그가 너무나도 눈부시게 아름답기에 반하고 나서 친구를 가장한 연인으로 지내다가 내가 먼저 군대에 가게 되면서 우리는 이별 아닌 이별을 했었다. 제대했을 때 제일 처음 들었던 소식이 그가 어학연수를 갔다는 소리였다. 그러고 나서 대학을 졸업할 때 쯤, 그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을 땐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라는 지나치게 친절한 여성의 목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때 당시에 나는 데뷔를 앞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씁쓸한 마음에 친구 놈을 불러다 앉혀놓고 포장마차에서 병나발을 불었고, 취한 상태에서 몇 번이고 그 이름을 부르짖었다, 라고 친구가 말해주었다. - 요즘도 그 친구 놈은 틈만 나면 그 때 당시 과거를 인터넷에 올리겠다고 장난 식으로 협박한다. - 어쨌건 간에 10년 이라는 시간이 지나, 나도 그도 서른이 되었을 때 우리는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나는 전부터 꿈꿔왔던 가수의 꿈을 이뤄, 소위 ‘잘 나가는’ 한류 스타였다. 그리고 다시 만난 그는 바쁜 나와는 달리 굉장히 여유로움이 묻어 나왔다. 아니, 사실 전부터 그는 매사에 한 없이 여유로운 사람이었다. 나는 늘 그 점을 부러워하곤 했었다. 그는 말끔한 양복차림이었고, 나는 스케줄을 끝내고 차에 올라타려 할 때 그를 보았다. “…….” “…….” 어쩐 일인지 그는 나를 보고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차에 올라타려던 나 또한 발걸음을 멈춘 것은 마찬가지였다. 때는 벚꽃이 만발하던 봄이었고, 어디선가 따스한 봄바람이 한차례 불어오더니 마치 영화처럼 벚꽃 잎이 우리 둘 사이로 우수수 떨어졌다. 나는 열었던 차 문을 다시 닫고서 그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는 굉장히 당황한 듯 주변을 둘러보더니 급하게 뒤로 돌아섰다. 나는 걸음을 조금 더 빨리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가 이렇게 떨고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나는 가쁜 숨을 고르게 쉬며 천천히, 십 년 간 가슴 속에 묻어둔 그 이름을 불러 보았다. “김준면.” “…….” “우리 오랜만이잖아, 얼굴 좀 보자.” 내 말에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십 년이 지났음에도 그는 여전히 하얗고, 눈부셨다. 문득 벅찬 감동과도 같은 기분이 들어 무작정 그를 끌어안았다. 고맙게도 그는 나를 밀쳐내지 않았다. 다만 제 손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몰라, 어정쩡하게 있을 뿐이었다. 괜스레 웃음이 나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더니, 그제야 나를 밀어낸다. “잘 지냈어?” “그냥…… 너는?” “텔레비전 틀면 나 나오는데, 말 안 해도 알지 않겠어?” “노래 잘 하더라.” “내가… 보고 싶지는 않았어?” “네 말대로, 텔레비전 틀면 너 나오는데, 뭘.” “아 이런, 나만 손해였네.” “…….” “왜… 말없이 사라졌어?” 내 물음에 그가 고개를 숙였다. 나는 가만히 그의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짧게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굳이 확인 하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매니저가 이쪽으로 오는 건 아닐까 싶어 슬쩍 뒤를 돌아보니, 고맙게도 매니저는 차 안에 있을 뿐이었다. “바쁘면 먼저 가도……” “아니, 대답 듣고 갈 거야.” “… 사실은, 그때 난 내 마음을 잘 몰랐어. 여자, 남자 관계없이 누군가와 연애란 걸 해본 것이 네가 처음이었거든. 그래서 조금 혼란스러웠어.” “지금은, 어때?” “지난 십 년 동안, 네가 많이 그리웠어. 그런데 텔레비전 틀면 나오고, 라디오 틀면 나오는 네가 나와는 너무 다른 곳에 사는 사람 같아 보여서… 그래서 연락 못 했어.” “내 번호 그대로인데, 누구와는 다르게.” 내 말에 그는 작게 웃을 뿐이었다. 다시 한 번 바람이 불어오더니 꽃잎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가 입은 양복 어깨에 떨어진 꽃잎을 털어 내주니, 그 역시 손을 뻗어 내가 쓴 모자에 얹어져 있는 꽃잎을 떼어 냈다. 그와 제일 처음 만났던 때와 같은 봄 날, 나는 그와 다시 만났다. |
| 카준/ 어떻게 그 예쁜 얼굴을 하고 곰보다도 더 둔한가요… |
추천 BGM.비스트 - 미운사람 엄마는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학교 갈 준비를 하는 나를 보며 뒷목을 붙잡으셨고, 누나는 오늘 해가 서쪽에서 뜬 건 아니냐며 놀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꿋꿋이 교복을 챙겨 입고서 학교 갈 준비를 마쳤다. 가방을 메고 신발을 신기 전, 마지막으로 현관에 있는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서 현관문을 열었다. 일전에는 그렇게 가기 싫던 학교가 처음으로 가고 싶은 곳이 되었다. 등 뒤에서 닫히는 현관문 소리가 경쾌했고, 절로 콧노래가 흥얼거려졌다. 이게 다, 버스에서 만난 예쁜 선배 덕분이었다. 나는 사실 그렇게 모범적인 학생이 아니었다. 늘 늦잠을 자서 학교에 등교하는 시간은 기본 여덟시, 일주일 중 정시에 도착하는 날이 많아야 3일이었다. 고등학생이 된지 얼마 안 되어서 그렇다고 하기엔, 우리 반에서 지각하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런 내가 일찍 학교에 가게 된 이유는, 바로 등교할 때마다 타던 버스에서 같은 교복을 입은 한 학생을 보고 난 뒤였다. 그날따라 유난히 눈이 일찍 뜨이기에 일찍 집에서 나왔다. 하품이 나오는 입을 애써 막지 않으며 창밖을 보다가 내릴 때가 되자 기지개를 켜며 차에서 내리니, 나와 같이 내리는 또 다른 학생이 보였다. 처음 그 학생을 보았을 땐, 무슨 남자가 저렇게 피부가 하얗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피부가 하얗기만 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피부 톤이 조금 어두운 편이었는데, 그를 보고 나니 흑과 백 같았다. 여하튼 그가 지나간 자리에 뭐가 떨어져 있기에 주워드니, 그것은 그의 학생증이었다. 그의 이름은 김준면, 학년은 나보다 한 학년 선배였다. 버스에서 내렸을 땐 옆모습 밖에 보질 못 했으나, 어지간한 사람 아니고서는 죄다 굴욕적이라는 증명사진 속 그는 정말, 예뻤다. 뭐 이런 이기적인 유전자가 다 있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었을 때, 한참을 앞선 그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와 급하게 뛰어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가쁜 숨을 고르게 쉬고 있으려니, 그가 조금은 놀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그는 나보다 작았다. 내려다보는 그 얼굴은 사진 보다 훨씬 더 잘 생겼는데 예뻤다. 2차적으로 온 심장 어택에 나도 모르게 기침이 나와 고개를 돌리며 쿨럭이니 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았다. ‘괜찮으세요?’ ‘어후, 네. 아 저, 큼, 이거 떨어트리셨어요.’ ‘아, 감사합니다.’ ‘저… 제가 한 학년 아래에요. 말 편하게 하시라고.’ ‘아아.’ 사실 난 그 순간 내 입을 봉하고 싶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생초면에 무작정 말 편하게 하라니, 절망적이었다. 그리고 그는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지, 라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근데 그 웃음 역시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뒤늦게 순서가 잘 못 되었음을 깨달은 나는 다시 내 소개를 하며 인사를 건넸다. ‘저, 저는 일학년 김종인이라고 합니다.’ ‘음… 나는 김준면이라고 해.’ ‘…….’ ‘…….’ 아 시발. 예쁜 선배의 표정이 더 이상해졌다. 정말이지 나는, 쥐구멍이 있다면 어디로든 숨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날의 미친놈 이미지를 탈피해보고자, 며칠 동안은 그에 대해 수소문 하고 다녔다. 그리고 학교에서 그를 마주칠 때마다 부러 친근하게 다가서서 말을 걸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처음에는 뭐라 설명하기 힘든 애매모호한 표정이었는데, 점차 익숙해진 듯 편하게 웃으며 나를 반겼다. 또 어떤 때는 먼저 인사해주기도 했다. - 그 때 나는 정말 미친 놈 마냥 실실 웃으며 하루를 보냈다. - 그가 도서부라는 소리에 점심 먹자마자 도서관으로 달려가곤 했었다. 그런 나를 두고 친구들은 어디 아픈 건 아니냐며 걱정하기도 했으나, 사실 난 멀쩡했다. “종인이는 책 읽는 거 좋아하나 보다.” “어… 이제부터 좋아해보려고 노력중이에요.” “그래? 계기라도 있어?” “그냥…….” 차마 선배 때문에요, 라는 말을 못했다. 이제 막 서서히 친해지고 있는데, 초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꼬박 한 달이 지났을 때, 나는 그의 취향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단정한 모범생 스타일의 그는 의외로 애 같은 면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입맛이었다. 의외로 그는 단 음식들을 좋아했었다. 그래서 부러 그가 도서부 일로 바빠서 점심을 챙기지 못할 때엔 매점에서 그가 좋아하는 빵과 초코우유를 사다가 몰래 자리에 놔두기도 했고, 야간 자율 학습이 시작하기 전에는 그에게 초콜릿을 사다주기도 했었다. 내가 그런 것들을 건넬 때마다 그는 미안한 표정으로 자신도 무언가 해주겠다고 말했다. 아, 그렇게 말하는 입술이 어찌나 예쁘던지. 눈을 감으면 그 입술이 둥둥 떠다니기에, 그날 밤 잠을 설치기도 했었다. 그리고 유난히 무더운 여름. 방학을 하면서 내 마음은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고 있었고, 그 역시 걷잡을 수 없이 예뻐졌다. - 물론 이건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다. - 나는 그를 보고만 있는 것이 자꾸만 안달이 나, 몇 번이고 그에게 터질 듯 부푸는 이 마음을 고백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걱정이 조금 더 앞섰다. 혹시라도 그가 안 좋게 생각하며 나를 멀리할까봐, 그게 가장 두려웠다. 그렇지만 사나이 김종인, 이대로 그를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혼자 끙끙 앓기에도 이미 지치고 있었기에, 나는 미친 척 그의 집 앞에 가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 나 선배 집 앞이에요. 지금 나올 수 있어요?” “-어,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아, 고운 목소리가 귓가에 잔잔하게 울린다. 터질 듯 세차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심호흡을 해보지만 역부족 이었다.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손에서는 자꾸 땀이 나왔다. 열기를 가득 머금은 여름 바람이 한차례 지나가니 몸에 열이 올랐다. 그 때, 대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고 기다리던 선배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그게, 그러니까…” 편안한 옷차림의 그 역시 예뻐도 너무 예뻤다. 순간 할 말을 잃고서 넋 놓고 그를 보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입술을 혀로 축이며 마른침을 삼켰다. “서, 선배… 내가, 내가 많이 조, 좋아해요.” “알아.” “… 네?” “종인이가 나 좋아해서 잘 해주는 거 아니야? 나도 종인이 좋은데.” “아…….” 말을 마치고서 싱긋, 눈웃음을 짓는데, 그게 정말… 정말 미치도록 예뻤다. 순간 어이가 없어져서 헛웃음을 흘리니, 그는 정말 티 하나 없이 맑은 미소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래, 그래요. 내가 좋아해서 선배한테 잘 해주죠. 네. 선배 말이 다 맞아요. 하하하.” 내가 뭐라고 말하는지도 모른 채 그냥 떠오르는 대로 막 내뱉으니, 그는 그저 웃기만할 뿐이었다. 아아, 신이시여, 어찌 그에게 잘생김과 예쁨을 주고서 눈치는 당최 새끼발가락의 때만큼도 주지 않으셨나요. |
끝! 끝입니다!
이미 보신 분들에겐 정말 정말 죄송하지만 ... 그래도 꽤 알차게 담겨있죠..?
아 그리고 세준 어쩌다 너를 ver.J와 ver.S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 입니다. 연관성 전혀 없는 그런 단편이에요.
또한 어쩌다 너를 ver.J 쓸 당시에는 한참 안엑컴일 때, 그러니까 엑소 열두명이 다 같이 숙소 쓰기 전에 쓴 글이라 케이멤버 숙소 엠멤버 숙소가 나뉘었습니다.
그리고 글 밑에 비지엠 쓰여있는 건 추천 비지엠입니다. 같이 들으시면서 보면 정말 좋겠어요... 개인적인 바램...!
어쨌든.. 곧 조만간 새 글 들고 올게요... 헌글 재탕 안하고... 정말 죄송합니다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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