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이 처음인 건 아니다. 샤이니를 필두로 하여 SM의 농노처럼 에프엑스와 엑소를 핥기도 했었고, 그 때때마다 정상에 올랐던 비스트와 인피니트에,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입덕했던 비원에이포까지. 이쯤 되니 아이돌 덕질에 통달, 딱히 흥미가 없어져 기존에 좋아했던저 가수들-물론 많다는 건 나도 인정한다-이 컴백할 때나 잠깐 팬심이 반짝하는 정도로 살았고, ‘요새 애들은 얼굴을 모르겠어’를 ‘이게 어른이 된다는 건가…’의 근거로 삼으며 우습지도 않은 감상에 빠져 있었다.
그래도 내 여유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일을 한순간에 지워버리기는 어려워서,포털의 연예면이나 커뮤들의 모스트 뷰Most View와 같은 글들은 꾸준히 읽었더랬다. 예쁘고 잘생긴 건 뭔들 옳다는 주의라, 굳이 ‘덕질’을 하지 않아도 시시때때로 올라오는 글들은 날 흐뭇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내가 ‘요즘 애들은 얼굴을 모르겠’었기 때문에, 이 글 저 글 간보다 가도 내가 아는 연예인들의 기사를 주로 찾아보게 되는 건 당연지사. 이런 상황에서 내가 <민윤기 입덕글>을 클릭하게 된 건 절대로 우연이었다.
‘민윤기? 요새 얘 글이 자주 보이네.’
따위의 생각을 하며 심심풀이로 들어간 글에서, 나는 예감했다. 아, 나는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겠구나. 하지만 아마도 벗어날 수는 없겠구나, 라는 걸
[방탄소년단/민윤기] 팬입니다
‘57번’
‘두 자릿수면 앞쪽인가? 가늠이 안 되네.’
생애 첫 팬싸인회 번호표를 속에 꼭 쥐고 바들바들 떨었다. 팬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와 쿵쿵 크게 울리는 음악 소리에 귀가 터져나갈 듯했고, 너무 많은 사람들의 살 냄새와 무대 위의 강한 조명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꺄아아아아아악-!!’
물속으로 침잠하듯 멀어지는 소리 가운데서 울린 날카로운 함성에 훅-, 하고 고개를 들었다. 아, 너다.민윤기다. 네가, 저 앞에서, 살아 숨 쉰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웅웅대는 그 자리에 앉아 멍하니 너를 바라보다 뇌를 꿰뚫는 함성에 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여전히 음악 소리는 너무 컸고, 사람은 너무 많았으며, 빛은 너무 강했지만, 네가 이 공간에 나와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로 이곳은 살만한, 아니 살고 싶은 공간이 되었다.
“둘셋, 방탄! 안녕하세요. 방탄소년단입니다."
밥은 먹었냐, 오늘 날씨 너무 좋다,보고 싶었다, 등등의 이야기가 스쳐 지나가고, 드디어본격적인 팬싸인회가 시작됐다. 앞번호부터 차례차례 올라가는 팬들의 뒷모습을 보며, 아 나도 곧 저 위에 올라가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어 심장이 쿵쾅쿵쾅뛰기 시작했다. 김석진, 김태형, 김남준, 전정국, 박지민, 민윤기, 정호석 순이네. 애써멤버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고 차근차근 이름을 짚어가며 진정하려고 하지만, 뒤태에서 ‘나 지금 설레요’라는 오오라를 마구마구 풍기는 팬들이 각각의 앞에 설 때마다 눈을 사르르 휘어가며, 입꼬리를 양껏 올려가며 웃는 그 얼굴에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었다.
“팬싸는 처음이신가 봐요.”
“네, 네? 아, 네. 많이 티 나요?”
앉으면서 살짝 인사를 나눈 게 전부인 옆자리의 팬이 말을 걸어 왔다.
“계속 멍하게 계시길래 찍어 봤어요. 사진은, 안 찍으세요?”
“카메라를 안 가져와서요. 홈마 분들이 좋은 사진 올려주실 거라고생각하고 아예 안 들고 왔어요.”
“그래도 한 장 정도는 폰카로라도 찍어두는 게 좋아요. 나중에 후회할수도 있어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끝을 올리는 옆자리 팬의 충고에 아,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라고 말한 후 가방을 뒤적거려 찾은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아, 역시 화질이 별로네. 이것만 찍고 그냥 눈으로 담아야겠다. 다시 휴대폰을 챙겨 넣고 나니 벌써 앞줄 끄트머리가 비어있는 게 보였다. 이제 내 앞으로 한 10명쯤 남았을까, 라고 생각하니 또 심장이 쿵쿵 뛴다. 직캠 보면소리도 지르고 이름도 부르고 심지어는 질문도 하던데, 그분들은 도대체 얼마나 강심장인 거지. 이러다 심장이 남아나지 않겠다는 섬뜩한 생각을 하며 고개를 흔들고, 다시 민윤기에게 눈을 고정했다.
석진이한텐 잘생겼다고 말해야지. 태태한텐 머리 집게 전해줘야 하고, 랩몬한텐 웃는 게 예쁘다고 말하고 싶어. 가끔은 입술에 뭘 발라보는건 어떠냐고 물어봐야지. 정국이한텐 이제 어른 다 됐다고 말해주고, 수제향수 전해줘야지. 지민이한텐 <쩔어> 너무 좋다고, 노래도 무대도 옷도 너무 좋다고 꼭 말해주고싶다. 코디한테 꼭, 우리가 너무 고마워하고 있다고 전해달라고해야지. 지민이가 스탭들이랑 제일 친할 것 같으니까. 홉이한테도웃는 게 예쁘다고 말해줘야겠다. 아 일본어 공부는 잘하고 있냐고 물어볼까.
그리고 민윤기, 민윤기한테는… 금발너무 잘 어울려요. 밥은 잘 챙겨 먹고 있어요? 작업실에만 오래 있으면 폐암의 위험이 있대요. 활동할 땐 괜찮지만 공백기 땐 일부러라도 밖에 나가야 해요. 진짜 잘생긴 거 알죠? 알면서 괜히 못생겼다고 그러는 거죠? 아 그리고 뭐 또 있었는데. 뭐지.
그에게 해줘야지라고 생각한 말들을 곱씹고 또 곱씹다 보니 벌써 일어서야 할 시간이 되었다. 계속해서 심호흡해가며 서 있자 예의 옆자리 팬이 어깨를 툭툭 쳐주며, 긴장하지말아요. 하고 웃었다. 아니 그러니까, 긴장이 안 되는 게 정상인가요! 도대체 몇 번을 와야 긴장하지 않는거지!
어느덧 내 순서가 되어 석진이, 태태, 랩몬, 정국이, 지민이를모두 지나쳤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던 것 같긴 한데, 멤버들앞에 서서 눈을 마주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손이 덜덜 떨리고 머리가 새하얘져서 가까스로 이름을 뱉어낸-말한게 아니다. 뱉어냈다-것 외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준비해 간 선물은 줘야겠다 싶어서 손을 덜덜 떨며 머리 집게와 향수를 전해주고, 겨우 약간, 아주 약간 진정된 마음에 지민이에게 <쩔어> 너무 좋다는 말을 덜덜 떨며 전해준 게 다였다.
그리고, 발을 옮겼다.
앞 팬분의 싸인이 빨리 끝났는지 좌석의 팬들과 말을 주고받던 민윤기는, 내가 자리를 옮기자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강한 조명을 받아 반짝반짝 부서지는 듯한 금색 머리칼과 하얀 피부, 부드럽게 휘어진 눈과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다 화들짝, 놀라며 흠칫, 하고 반 발짝 뒤로 물러섰다.
“어어, 어디 가요. 가까이와요."
고개도 푹 숙이고서 대답도 못 하는 나를 앞에 두고 흐흐, 하고 웃던민윤기는 다시 차근히 말을 걸어왔다.
“이름이 뭐예요?"
“…김탄소요.”
“가까이 와요. 고개 들고. 나한테 해줄 말 없어요?”
“……그, 그게.”
“응. 그게? 지금 나 안 보고 나한테 말 못 해줬다고 집에 가서 우울해 할 거잖아. 그러지 말고 예쁜 얼굴 보여 줘요."
그래,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이 사람을 보겠어. 필사의 노력으로 고개를 들어 민윤기와 눈을 맞춘 나는, 또 입만 벙긋벙긋, 숨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하, 바보 같아 김탄소. 그 많은 준비해 온 말은 다 꿀꺽 삼켜버린 채, 시간이 멈춘 듯 눈만 바라보고 있기를 몇 초, 이동하라는 소리가 나오기 직전 건넨 그의 ‘밥 먹었어요? 라는 질문에,
“조, 좋아해요."
뱉어버렸다. 흡-, 말해버리고 난 직후 나조차도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숨을 멈췄다. 이게 무슨 짓이야! 얌전히 대답이나 했어야지! 민윤기가 얼마나 당황했겠어! 때마침 들린 이동하라는 목소리에 속으로 오만 가지 생각이 교차하면서도 빨개졌을 게 분명한 얼굴을 한 손으로덮듯 감추고 다른 손으로 앨범을 끌어다 들고서 옆으로 움직였다.
“나도 좋아해."
아니, 움직이려고 했다. 내가 끌어가려던 앨범을 탁, 잡고선 달콤하게 말한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또다시 한 시간 같은 일 초를 보내고, 눈만 빼꼼 들었다. 그 짧은 새를 놓치지 않고 눈을 마주쳐 오는 그를 보며, 난 웃으며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난 벗어날 수 없겠구나. 꿀독에빠진 개미 마냥, 민윤기, 너에게 빠져서,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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