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초. 푹푹 찌는 여름날씨라도 밤이 되면 한결 선선해진다. 밀렸던 공부를 끝 마치고 편의점에 들려 이것저것을 사서 돌아가는 길.
짜증나고 찝찝한 습기를 잠시나마 잊게 해 주는 풀벌레 소리라던가 여름 그 특유의 냄새는 더위 따위 아무래도 좋게 만든다.
-지이잉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진동에 한 팔로 커다란 비닐봉지를 잡고 있긴 무리라 아기 안아올리듯 왼팔로 감싸 안고 나머지 오른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하니,
『 야 너네 동네에 치한 있대 조심 ㅅㄱ』 _ 수녕
순영이의 문자가 와 있었다. 그래 이런 허접한 말로 이 뜨거운 더위를 서늘하게 식혀줄 심산이었다면 이미 실패로구나.
비웃음과 함께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는 순간 무엇인가 앞에 툭 하고 부딪혔다.
"아 죄송…"
고개를 들고 그 장본인을 서서히 올려다보자…
"……저, 저기요?"
침인지 뭔지 입에 잔뜩 뭐가 고인채로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쉴 새 없이 웃어대는 아저씨가 서 있었다.
"한 번만 따먹어보자…… 헤헤……"
그는 마치 '치한' 과도 같은 소리를 짓걸이고 있었다.
와, 권순영 타이밍 보소… 그를 비웃은 것을 후회하며 오른쪽으로 내 뺄까 왼쪽으로 내 뺄까, 아니면 짐을 버리고 냅다 뛰면서 경찰에 전화를 할 까 고민을 하던 찰나
내 앞의 치한은 이상한 행동을 취하더니 이내 소리를 질러댔다.
"그, 그만!!! 내가 잘못했어!!!! 아아아악!!!!"
무엇인가 겁에 질린 듯한 그는 나를 거세게 밀치고 지나갔고 기껏 산 맥주와 먹을 것들이 바닥에 널부러지고 말았다.
사실 그를 만났을 때 제일 먼저 살핀 것은 손이었다. 칼이 들려있으면 곤란했으니까.
예전부터 집에 갈 땐 혼자 있는 시간들이 많아서 바바리맨이니 소매치기니 여럿 만나봤던터라 익숙해지면 좀 당황스러운 상황에 익숙해져있었나보다.
그래도 당할 때 마다 등골이 오싹한 건 사실이다.
"아… 귀찮게 다 쏟아졌잖아"
-…킥…-킥킥…--킥
널부러진 맥주와 안주거리들을 주워 담으며 울상을 짓고 있을 때 내 귓가에 기분나쁜 비웃음이 울려퍼졌다.
담던 손을 멈추고 주변을 황급히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방금 귀 근처에서 울려퍼졌기때문에 분명 가까운 곳에 있을거라고 확신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 그거 쓸 남자친구는 있어?
그 목소리가 귓가가 아닌 바로 앞에서 사람이 말하 듯 제대로 울려퍼짐과 동시에 흩트러진 물건들 중 하나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 물건을 보는 순간 난 입을 쩍 벌어트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굴이 시뻘개지고 말았다. 그건 콘돔이었으니까.
아마 생리대 사다가 실수로 사버린 것 같은데 왜 난 눈치 못 채고 있었지??
"어쩐지 편의점 알바가 낮뜨거운 얼굴로 보더라니…!! 아 근데 누구에요!!!"
부끄러움이 괜시리 짜증으로 바뀌고 황급히 내 물건들을 쓸어담고 자리에서 일어나 냅다 소리질렀다.
그리고 그 순간 잘못 본건 가 싶은 흐릿한 3개의 물체가 눈 앞에서 아른거렸다.
난 그것이 사람이 아님에 확신했다. 그 것들은 멀리서 다가온 것이 아니라 내 눈앞에서 '나타난' 것들이었으니까.
제법 형태를 갖춘 그들은 건장한 남자 세명으로 보였다. 아니, 누가봐도 그러하였다.
기껏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일어나 소리를 지른건데 다시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물론 이번에는 내 소중한 먹을 것들이 널부러지지않게 꽉 움켜잡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말만은 자동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살려줬는데도 지랄이야"
"네?"
"콘돔이나 버리지? 쓸 데도 없어보이는데"
그게 그들과의 첫 만남이었다.
-
"안녕 가람아? 우린 아까 널 처음 봤지만 대충 나이를 가늠했다. 앳되보이는데 술을 사서 가더라고. 그리고…"
"…콘돔도"
소파에 드러누워 거만하게 짓걸이는 내 또래 남자아이를 보며 (아까 소개할 때 김민규라고 했던 것 같다) 치밀어 오르는 울컥함에 난 잠시 쟤가 귀신인것을 까먹을 뻔 했다.
자신을 '최승철' 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어, 그래 그것도. 너 스무살 맞지?"
"네……"
잘생긴 척 하지만, 아니 잘생기긴 했지만 병신같음에 난 점점 이들이 사람이 아님을 잊어가고 있는 듯 했다.
자신도 소파에 눕고 싶다며 민규를 밀어내는 최승철 덕에 말을 잇게 된 것은 전원우였다.
"죽고 나면 약 2-3주동안 천계에서 조사를 받아. 다 받고나면 지상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지. 그 과정에서 너무 원한으로 둘러쌓인 존재는 지상에 내려놓고 천계로 올라오지 못하게 해. 그리고 연쇄살인마라던가 엄청난 죄를 저지른 자는 지옥으로가지. 살인마들 아니고서야 지옥은 웬만해서 안 가. 우린 우연히도 같이 나와서 나이 또래도 비슷하고 해서 같이 다니고 있어"
"…그런데 우리 집엔 왜 왔는데요?"
"나랑 민규는 억울하게 죽은 케이스고 그래서 환생 여부에 대해서 심판을 받아야 해. 승철이 형은 천계에서 염라대왕을 능욕하다가 처벌 심판을 받아야하고. 근데 그게 8월 말이나 9월 초에 이루어져. 우린 환생을 하게 되면 기억이 지워져 지금의 나로 살 수 없고 승철이 형은 잘못 되면 지상에 내려오는게 금지되지. 우리로서의 마지막 3개월이야. 지낼 곳이 필요해"
"아까 치한에게서 구해줬으니 그걸 빌미로 여기 좀 있겠다…?"
"너 머리가 좋구나?"
철 없는 남자 3명을 앞에 두고 있는데 그게 귀신임에, 대체 이 때까지 뭘 하고 살았나 회의감이 들었다. 뭣같은 학교 동기들 상대하기도 벅찬데 개초딩같은 남자 셋을 데리고 살라고? 하지만 구해준 건 사실이고 저들이 귀신이라면 무슨 해코지를 할 지 몰랐다. 만약 날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귀신과 동거를 한다는 사실에 대신 억장이 무너졌을 것이다.
"먹여 줄 밥도, 재워 줄 이불도 없어요"
"우리 귀신이야"
"가위 눌리게 하지마요……거실에서 자던가"
"봐라 내가 집 구한댔지? 빨리 찬양해"
"쿱스! 쿱스!"
이상한 구호를 외쳐대며 최승철에게 맞춰주는 전원우를 보며 저것도 정상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방 문을 열고 들어가니 떡 하니 내 침대에 누워있는 김민규가 보였다. 할 말을 잃은 듯 그를 쳐다보자 그는 피식 하고 웃으며 말했다.
"세달이야. 참아"
내 인생 최악의 여름이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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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사실 빙의글이라는 걸 몰랐답니다. 그래서 팬픽 쓰고 있었는데 빙의글 발견해서 미친 듯이 써버림.
핳 잘 부탁드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