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w.MAYO
4화 「김종인」
까맣게 선탠 된 어두운 차 안, 종인이 손을 뻗어 뒷자리 조명을 켰다. 그러자 앞자리에서 누군가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또렷하게 들리진 않았지만, 대충 '아주 나 여기 있소 해라.' 하고 비아냥거린 것 같았다. 운전석의 남자는 그런 옆자리의 남자를 한 번, 뒷자리의 종인을 한 번 살피곤 난처한 얼굴로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든 말든, 종인이 자켓 안쪽 주머니에서 제 지갑을 꺼내 들었다. 꿉꿉한 장맛비의 습격에 쩍 소릴 내며 뜯어지듯 갈라진 지갑은 많이 낡아 대부분 가죽이 얼기설기 엉겨있거나, 헤져있었다. 그의 재력을 생각하면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학생들이 즐겨 쓰는 중저가의 지갑이었는데, 보통 오래 사용한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손때가 많이 탄 모습이었다. 종인의 주변 사람들이 이런 그의 지갑을 볼 때마다 경악하곤 했지만, 종인은 벌써 4년째 이 지갑을 사용하고 있었다. 뜯어지면 뜯어지는 대로, 갈라지면 갈라지는 대로, 어느 곳 하나 손보거나 수선하는 곳 없이.
종인의 거친 손가락 끝이 지갑 안을 훑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마지막으로 닿은 누렇게 변해버린 필름칸 속엔, 지갑보다 더 세월을 먹은 사진 한 장이 있었다. 종인의 방에 있던 사진 속의 아이들이 그대로 사진 속에 담겨있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액자의 사진 속 아이들이 5살 6살 정도 된 꼬마였다면, 종인의 지갑 사진 속 아이들은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로, 모두 조금씩 성장한 모습이었다. 사진 속의 세 아이는 모두 행복해 보였다. 모두 다 입을 크게 벌리고 꼭 금방이라도 사진을 톡 치면 와하하하하는 투명한 웃음이 누런 필름칸을 씻기며 흘러내릴 것처럼.
종인이 사진 속에서 종인의 손을 잡은 채 하늘을 보고 와하하 웃는 여자아이의 얼굴을 매만졌다. 셋 중 가장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아이는 환한 입매를 따라 드러난 교정기가 인상적이었다. 짧게 친 커트 머리가 얼핏 소년처럼 보이게도 했다. 사진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습기에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금세 머리가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불 꺼"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곤 눈을 질끈 감은 종인이, 천천히 어두워지는 차 안을 감은 눈 안으로 느끼며 피곤함에 찌든 목소리로 말했다.
"망치 아저씨는."
종인의 말에 깜깜한 어둠 속에서 부드러운 미성이 들려왔다.
"두상이 녀석이 알아온 대로, 천주산에 묻어 놨더라. 수습했어."
종인의 바로 앞, 조수석에 앉아있는 남자였다. 지난밤 어두운 복도에서 종인이 짜증스럽게 던진 자켓을 받아든 남자이기도 했고, 방금 종인이 불을 켜자 비아냥거린 사내이기도 했다. 창문틀에 팔을 기대고, 백미러와 사이드미러를 느리게 훑는 그의 눈이 꽤 매서웠다.
"…어디에 모셨어."
"통영에."
그 대답을 하며 조수석의 남자가 창문틀에서 팔을 내리며 운전석에 앉은 남성에게 "오늘따라 끈질기네."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운전하던 남자가 피곤한 얼굴로 백미러를 흘끗거리며 "작정했나 봅니다."하고 말했다. 그들이 긴장한 얼굴로 그런 대화를 나누어도, 종인은 개의치 않는 듯 감았던 눈을 매섭게 치켜뜨며 날카로운 말투로 말했다.
"망치아저씨 고향, 파주 아니야? 왜 더 밑으로 내려갔어?"
"최대한 너랑 멀리 떨어트려 놓아야 할 것 같아서. 파주는 서울서 금방이잖아."
"김준면."
"이젠 형 소리도 안 하네 이 자식이."
준면이 살짝 고개를 돌려 종인을 보곤 씩 웃었다. 그리고선 종인의 반항기 가득한 눈빛에 "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그런 눈빛이야?"하며 다시 몸을 돌아앉았다. 그리곤 방금 뱉은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아닌 낮게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놈들. 우리가 자기들이 따라붙은 걸 알고 빙빙 돌아가는 걸 알면서도, 계속 쫓아오고 있어. 집요한 놈들이야."
"……"
"1시간 반이면 갈 거리를 벌써 세 시간이 넘게 돌고 있다. 종인아. 저렇게 널 쫓는 놈들이 있는데, 우린 아직 저놈들 정체를 몰라."
"뻔하잖아. 누가 보냈는지는."
"그래, 근데, 네가 망치 아저씨 보러 쏘다니는 것까지 들키면. 뭐, 망치 아저씨와 관계가 없는 놈들이든 아니든, 좋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겠지."
"…………"
"'누구' 귀에 들어가든, 들어갈 테고 말이야. 결국, 네가 공들여 온 모든 것. 다 무너지는 거야."
"…협박도 꼭 지같이 하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종인은 준면의 말에 반박할 수 없어서 후 한숨을 쉬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준면은, 종인의 수행비서였다. 정확히 따지자면 얼마 전까진 종인의 아버지 김재표 회장의 비서였지만, 김재표 회장이 병상에 눕게 되자 자연스레 차기 회장 종인의 곁에 있게 되었다. 김종인을 회장직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정신을 잃기 전 김재표가 붙여놓은 김종인의 경영선생님 겸 김재표의 버킷리스트를 위해 움직이는 남자. 물론 그런 갑과 을의 불편한 말들을 떼어놓으면 아주 오랫동안 종인을 '진짜 형'처럼 돌봐준 좋은 남자이기도 했다. 뒤끝이 조금 길긴 하지만. 종인의 말에 큭큭거리며 웃던 준면이 기사의 "어, 어, 저 새끼들 속도 늦춥니다. 포기하려나본데요." 하는 목소리에 얼른 표정을 굳히곤 사이드미러를 확인했다. 기사의 말대로 점점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던 준면이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곤 더욱더 피곤함에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 가자. 쉬고 싶다. 진짜로."
▼
며칠째 여전히 장맛비가 계속되었다. 그 날 이후, 집안사람들은 내가 오랫동안 바라던 대로 내가 하는 말에 대답을 해주거나, 가끔 먼저 말을 걸어주고 했지만, 나는 생각보다 그들과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그들이 내게 말을 많이 걸어오지 않아서는 아니고… 어쩐지, 그들이 대화를 아예 하지 않았던 예전보다 나를 더 어려워하는 것만 같아서였다. 물론 그들이 내게 반말을 하진 않았지만, 굳이 상황을 예시로 든다면 고조할머니의 명령으로 명절에나 보는 어려운 큰아버지와 야자타임을 가져야 하는 20살배기 조카처럼 군다고 해야 할까. 어떻게든 그 날 하루 큰아버지를 만나기 싫은 조카처럼, 그들은 그렇게 나를 계속 피해 다녔다. 그걸 깨달은 후엔 나 스스로 피하다 보니 타의인듯한 자의로 내가 그들과 말을 많이 섞지 않게 되었다.
이상하게, 나는 그들이 내게 잘 해준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에게 더 큰 불편한 존재가 되는 것이 싫었고, 그들이 싫어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 두려웠다. 두려워? 그래, 두렵다. 미움을 받는 것이. 내가 가진 것이 없어서, 내 이름도, 내 가족도, 친구도 아무것도 없어서 그게 더 두려울지도 모르지. 원래 내 것이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저, 무언가를 잃는다는 게 무서워서.
나한텐 지금 이 상태가 최선이라고 해놓고, 사람들이 내게 말을 걸건, 걸지 않건 간에 왜 사람들이 내게 말을 걸 수 있게 해주었는지, 나는 따져 물어보려 했으나, 벌써 그 날 이후부터 쭉 나흘이 지난 지금까지 녀석이 꼭 내가 자고 있을 때 집에 와서 이른 새벽 나가거나 아예 집에 들어오지 않는 바람에 그마저도 하지 못했다. 주인님, 놈, 그 새끼, 싸가지 등등 매번 부르는 호칭이 바뀌지만, 아무튼 내 쪽 가위를 가져가 놓고 아직까지 돌려주지 않은 그 망할 주인놈은 대체 정체가 뭘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있다, 휙 민석씨를 바라보았다. 나를 보고있는 듯 했던 민석씨가 나의 시선에 다시 휙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주인놈 직업이 뭐라고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황당하겠지만, 난 그 날 이후 민석씨와 대화를 나누다가도 툭, 과일을 먹다가도 툭, 주인놈의 신상을 털기 위해 민석씨를 여러번 찔러보았다. 하지만 민석씨는 정말 그게 무슨 국가기밀이라도 된 것 처럼 짜증이 날 법한 내 집착에도 끝까지 대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당연히 짜증은 내지 않았다. 오늘은 비가와서 하루 종일 방 안에서 나와 시간을 보내 내게 이 질문을 약 열 번쯤 들은 민석씨는 저녁부턴 아예 나와 눈이 마주칠 것 같으면 시선을 돌려 피해버리곤 했다.
"치, 좀 말해주면 덧나나. 여기에 전화가 있나요, 뭐가 있나요. 직업 안다고 내가 뭐 어디 신고하는 것도 아니고 어디 도망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죄송합니다."
"에이, 좀 알려주지. 나만 알고 있을게요!"
"안됩니다."
안된다고 말하는 민석씨의 표정에서 어쩐지 '너 빼고 다 아는데, 무슨 너만 알고 있어?'하는 생각이 보이는 것 같았다. 표정은 둘째치고, 평소보다 더 단호한 말투에 내가 들으라 듯 '치사하다. 치사해.'하고 구시렁거리며 휙 돌아누워 버렸다.
그리곤 다시 적막 속에서 내가 여기에서 도망친다면 제일 먼저 경찰서로 가야겠지? 부모님은 날 찾고 있겠지? 여기에 텔레비전이 없어서 그렇지 텔레비전만 딱 켜면 내 얼굴이 뉴스에 대문짝만하게 나오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헛된 망상을 늘어놓다, 아주 문득, 그의 서재에서 보았던 그의 어린 시절 사진을 떠올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와 그의 친구 두 명이 같이 찍힌. 모두 다 귀여운 얼굴로 턱에 꽃받침을 한 채 잔디밭에 엎드려있는 사진이었다. 남자애들이 어쩜 그렇게 예뻐. 그 싸가지도 어렸을 때는 진짜 귀엽던데. 대체 뭘 먹고 뭘 배우고 자라면 그 귀여운 아이가 그렇게 자라는 거야? 그런 생각을 하다, 나는 어렸을 때 어떤 아이였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황당함에 허허하고 웃어버렸지만. 지금 바로 두 달 전 나의 모습도 기억하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어린 시절 타령이람.
허허 웃는 나를 슬쩍 바라보는 민석씨가 마주 보고 있는 유리창으로 비춰 보였다. 삐져놓고 또 금세 웃어서, 비도 오고 아주 미친년 같았겠다. 그런 생각도 잠시 내가 휙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아까와 같이 민석씨가 휙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민석씨를 문 시선을 놓지 않고 물었다. 아니, 물으려고 했다.
"있…"
"안 됩니다."
그렇지만 입을 떼자마자 민석씨가 단호박 백 개를 먹은 목소리로 내 말을 가로막았다. 또 '주인 놈 직업이 뭐냐'나, '주인 놈 이름이 뭐냐' 이런 것들을 물어볼 것으로 생각한 듯했다. 민석씨가 이렇게 내 말을 끊고 대답을 한 것은 처음이어서, 그래. 오늘은 그만 물어봐야겠다. 내일 또 물어보면 되지! 하는 생각을 하며 그를 어르고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거 물어보는 거 아니고요~"
이런 내 말에도 들은 척도 안 하는 민석씨를 보며, 주인 놈 나이를 물어본 뒤 방금처럼 운을 떼놓고 주인 놈 이름을 물어봤던 아까 오후의 나를 떠올리며 "진짜 그거 물어보는 게 아니고요."하며 아예 다시 뒤돌아 민석씨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민석씨는 여전히 딱딱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민석씨의 얼굴을 침대 위에 늘어져서 가만히 쳐다보던 내가, 부끄러움에 작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이름 지어본 적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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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지어달라고 했다. 민석씨에게. 나는 '천천히 기억이 돌아오겠지.'하고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사실 아주 간절하게 이름이 필요했다. 알게 된 지 몇 달밖에 되지 않은 사람에게 이름을 지어달라고하는 것은 사실 조금 쑥스럽고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그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내겐 불릴 무언가가 필요했다. 아니, 아무리 민석씨가 내 이름을지어준다 해도, 나를 그 이름으로 불러줄 사람이 없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나는 누구예요.'라고 소개할 무언가도 필요했고. 나 스스로 '너는 누구누구다.'라고 말해줄, 나의 존재를 스스로 인정하며 살 수 있는 이름이 필요했다. 물론 299. 이딴 거 말고. 굳이 민석씨에게 부탁한 아주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이제 막 태어난 아기가 스스로 이름을 짓지 않듯이, 그냥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내 이름을 지어주길 바랐고, 이 집에선 민석씨가 가장 마음이 편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리고 그냥 민석씨가 지어주길 바라서. 그냥 민석씨에게 부탁했을 뿐.
'제가 지어도 되는 겁니까…?'
민석씨는 엄청나게 부담스러워했다. 그 부담을 느낀 내가 손바닥을 휘휘 흔들며 "아니 막 뜻, 한자, 사주팔자 이런 거 따져서 지어달라는 게 아니고요… 그…강아지 안 키워봤어요? 강아지나 고양이 아니면 뭐 물고기라도! 이름 지어줘 본 적 없어요?"하고 설득하니, "아…어렸을 때 잠깐 키웠습니다."했다. 엄마가 유치원생 아들의 말에 아이고 그랬어, 우리 아들? 하듯 박수를 짝짝 치며 "그렇죠. 그렇죠. 이름이 뭐였는데요?" 하고 묻자 민석씨가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 멍하니 "슈슈…"하고 말했다. 이 집 바깥에 키우는 개 두 마리 이름이 영식이 영희여서, 아주 단순하게 애완동물 이름을 그렇게 사람처럼 지었을 거라 생각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귀여운 이름의 공격에 내가 "어…"하고 말 끝을 흐리다 "그런 이름 말고, 그래도 좀 사람 같은 걸로… 부르기 쉽고… 잘 어울리는 걸로 부탁해요."하고 말했다. 여전히 민석씨는 부담이 되는 듯 내가 고개를 돌렸을 때 몰래 자켓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땀을 찍어냈다.
그 후 이틀이 지났다, 민석씨는 이름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어서 나는, 나 스스로 나에게 지어주진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나한테 어울리는 이름이 뭐가 있을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사실 그 생각을 함으로써 어쩌다 진짜 내 이름을 기억해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으나, 이것저것 입에 담아보아도 착하고 붙는 것이 없어 반쯤 포기상태에 있었다.
모든 일과를 마치고, 각자 방에서 쉴 수 있는 시간, 나는 나를 따라 나오려는 민석씨를 말리곤 여전히 입으로는 노래를 흥얼거리듯 여러 가지 여자 이름들을 중얼거리며 부엌으로 향했다. 에잇, 왜 이렇게 길어 복도가. 방 좀 가까운 데로 해주지. 차라리 집을 2층으로 만들던가. 이렇게 길게 쭈욱 1층으로 만들어놓으니까 너무 불편하잖아. 돈도 많은데 한 층 더 쌓아두지. 그렇게 구시렁구시렁 투덜투덜하기도 하면서.
부엌으로 향하기 직전, 거실엔 웬일로 홍 여사가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일이 끝나는 시간이면 그녀조차 나처럼 방순이가 돼버려서 방 밖에 나오는 모습은 쉽게 보기 힘들었었는데. 그녀의 책장 넘기는 소리가 사근거려서 나도 모르게 발소리가 줄어들었다.
물이나 마실까 해서 나왔지만, 나는 홍 여사의 책 읽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슬금슬금 거실 책장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 집엔 라디오도, 전화도, 티비도, 컴퓨터도 없어서 일이 끝난 시간이면 너무 무료해서 몸이 베베 꼬였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민석씨를 괴롭히는 걸지도 몰랐다. 책장 앞으로 다가선 내가 책장의 유리문을 조용히 열곤 둘러보았다. 당연한 것처럼 그림이 많아 보일 것 같은 얇은 책을 위주로 시선을 휘휘 둘렀으나 책장엔 그림책은커녕 책 제목조차 한자나, 영어로 되어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냥 다시 주방으로 돌아가기엔 부끄러워서 계속해서 읽을만한 책이 없나 아래위로 책장을 훑는데, 뒤에서 홍 여사 특유의 맹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책 읽으시게요?"
"아…"
그녀가 나에게 말을 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나는 갑자기 눈에 확 띈 책을 휙 꺼내 품에 안으며 "네."하고 대답했다. 홍 여사가 여전히 책에 시선을 둔 채 "좋은 생각이십니다. 좋은 책이 많이 있으니, 많이 읽으세요."하고 일렀다. 읽을 수 있는 책이 몇 권이나 있을까요… 그 말은 그냥 속으로만 했다.
나는 그녀의 곁에 앉아 책을 읽어야 하나? 하고 순간 고민했지만, 그랬다간, 살짝 펴보았던 이 책의 빼곡한 글씨에, 또 홍 여사의 기에 눌려 속이 울렁울렁거릴까 봐, 방으로 올라가기로 하곤 천천히 발을 떼는데, 그때 홍 여사가 흘끗, 나를 보곤 그녀의 허리춤에 늘 메어있는 작은 가방 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가방에서 나온 핸드폰은 진동소리가 아주 약하게 들릴 정도로 작게 몸을 떨고 있었다. 핸드폰. 사실 여기에 살면서 연락망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에 홍 여사든 누구든 휴대전화 하나쯤은 있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눈으로 이렇듯 전자기기를 보는 것은 처음이어서 나는 움찔 발걸음을 멈추곤 다시 걸음을 돌려 천천히 홍 여사의 곁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홍 여사는 나를 흘끗 보았지만 별로 개의치 않는 듯 그녀다운 고고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네, 김 비서님."
나는 소파 위에 두 발을 올려 무릎을 세우곤 그 위에 책을 얹어 보는 듯 마는 듯 책 첫 장을 흘끗거리며 홍 여사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웠다. 사실 그녀가 누구랑 통화하느냐, 무슨 내용의 통화를 하느냐는 별로 흥미롭진 않았지만, 홍 여사의 입에서 나온 '김 비서'라는 사람이 얼굴은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아침마다 주인놈이 차를 타러 나갈때 늘 문을 열어주는 뒷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쪼금 아주 쪼금 흥미가 생겼다.
"일이 바쁘시면 그럴 수 있지요. 이곳은 별일 없습니다. 네. 네. 그럼 오늘 늦으시겠군요. 네. 아니요. 그럼 아침 메뉴는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아니 어쩜 이렇게 대화 내용이 안 들려. 네.네. 하고 대답하는 홍 여사의 목소리만 또렷이 들리지 김 비서의 목소리는 그냥 웅얼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정확히 대화 내용을 들을 수 없었다. 그냥 홍 여사의 말로 알 수 있는 것은, 주인 놈이 오늘도 새벽 늦게 들어온다는 것과 아침 메뉴를 특별히 지시했다는 것. 홍 여사가 핸드폰을 다시 가방 안에 넣는 것을 보며 내가 펼친 책 위로 눈을 살짝 내민 채 조용히 물었다.
"아침…뭐… 특별히 먹고 싶… 아니, 드시고 싶은 게 있으시대요? 주인…님이? 아, 엿들은 건 아니고, 들린 거예요. 들린 거."
다시 책을 펴다 말고 나를 빤히 바라보던 홍 여사가 간단하게 "네. 북어 넣은 콩나물국."하고 말하며 다시 안경을 고쳐 쓰곤 책을 펼쳐 들었다. 나는 아침 메뉴로 인해, 주인 놈이 오늘 술을 진탕 먹었구나. 싶어 끌끌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이런 내 속마음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난 듯 언젠가부터 또 나를 보고 있던 홍 여사가 나를 더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민망함에 벌떡 일어나서 괜히 팔을 비비며 말했다.
"아, 음~ 여기서 읽으려니까 추워서 집중이 안 되네~! 올, 올라가서 읽어야지~ 내일 봬요, 홍 여사님~"
무뚝뚝을 뛰어넘어 뚱해 보이기까지 하는 홍 여사의 표정에 대고 있는 힘 껏 밝게 인사한 내가 책을 품에 끌어안고 통통통 뛰듯 어두운 복도 코너로 몸을 숨겼다. 그리곤 아, 물 마셔야 하는데. 하고 다시 흘끗 뒤를 바라보았으나, 조용한 거실에 울리는 홍 여사의 책장 넘기는 소리에 쓸쓸하게 다시 걸음을 돌렸다.
내가 오는 걸 어찌 알고 방에 다가서니 민석씨가 달칵 문을 열었다. 문틈으로 날 바라보는 민석씨를 보곤 씩 웃으며 "어떻게 알았대~"하자 , 민석씨가 큼. 하고 헛기침을 하며 내 시선을 피하고 문을 조금 더 활짝 열었다. 얼굴이 조금 빨갛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며 열린 문 방문을 닫으며 방 안으로 들어온 내가 바로 고개를 휙 돌려 민석씨를 바라보았지만, 빨갛기는, 뙤약볕에 종일 바깥에 서 있는데도 나보다 더 뽀얀 피부를 자랑하며 나의 시선에 '왜?'하는 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흥미가 사라진 내가 슬리퍼를 탁,탁 벗어던지곤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품 안의 책을 의식하곤 다시 엉거주춤 일어나 아빠 다리를 하고 앉았다. 나는 그제야 내가 가져온 책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죽음의 수용소에서」뭐지 본능적으로 내 현실을 반영한 듯한 책을 골라온 건가…? 속으로 웃으며 책을 펼쳤다. 어렴풋이 민석씨의 시선이 느껴졌다. 들어오면 바로 쫑알쫑알 거렸을 여자가 자기 얼굴을 살피더니 바로 침대에 올라가 책을 펴고 앉아있으니 좀 이상하긴 하겠지. 근데, 왠지 나 굉장히 똑똑한 여자 같고 현대여성이 된 것 같은 느낌인데. 괜히 어깨가 으쓱해져서 더 집중해서 읽어보려 눈을 모았지만, 한 열 장을 넘긴 이후, 생각보다 무거운 이야기에 쉽게 집중이 되질 않았다. 게다가, 책에 가려져서 정면에 서 있는 민석씨가 보이진 않았지만, 자꾸만 느껴지는 시선에 어쩐지 몸이 간질거려서 몸을 자꾸 베베 꼬게 되었다. 문 옆에 꼿꼿이 서 있는 민석씨를 바라보았다.
"책 읽는 거 처음 봐요?"
"네."
"어…아…맞다. 처음이지."
민망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도도하게 말은 해놓고 열 장만에 덮은 책이 민망해서 나는 무릎을 끌어안고 펼쳤다, 덮기를 반복하며 민석씨를 흘끗거렸다. 민석씨는 정확히 내 눈은 아니었지만, 내 쪽 어딘가에 시선을 계속 두고 있었다. 조금 생각에 잠긴듯한 얼굴을 바라보다 천천히 시선을 내려 공손하게 앞으로 쥐고 있는 두 손을 바라보았다. 늘, 저 자세였다. 가끔 뒷짐을 지고 서 있거나 차려자세를 하고 서 있긴 하지만, 늘 저 자세. 비 오던 그 날 밤, 다친 내 손을 보며 나를 위했던 그런 다정한 모습은 정말 딱 그 날뿐이었고, 조금 가까워졌나 싶었지만 정말 그것 모두 다 내 착각에 불과했다. 내가 가만히 생각을 잇다가, 책을 톡,톡 이불에 두드리며 민석씨를 불렀다.
"민석씨."
"네."
"나… 어려워요?"
내 말에 민석씨가 '음'하며 목을 살짝 돌리며 천장에 시선을 흘리다 "아니요."하고 대답했다. 느리더라도 아니요. 소리가 나온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내가 무릎을 매만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방 안에 있을 때는 그냥 편하게 있으면 안 될까요?"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니요. 그게 아니고…"
내가 너무 무리한 걸 부탁하는 건 아니겠지? 싶어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곧 조용히 말을 이었다.
"어차피 우리 둘뿐인데, 말도 좀 편하게 하고… 더우면 자켓도 좀 벗고… 쇼파에 앉아도 있고 좀…"
"……"
"그런 거요."
"절 신경 써주시는 거면 다 습관이 되어서 괜찮습니다."
"맨날 나 몰래 땀 닦으면서."
내 말에 민석씨가 살짝 당황한 듯 보였지만 곧 침착한 얼굴로 "몰래 닦은 게 아니고, 그냥 땀 닦는 모습이 불결하고 찝찝해 보일까 봐 배려한 겁니다."하고 말했다. 어쩐지 울컥한 목소린데. 내가 일부러 장난을 거는 짓궂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솔직히 말해봐요. 자켓 못 벗는 이유가 와이셔츠에 홍수나서 그런거죠?"
"아닙니다."
이를 꽉 물고 대답하는 듯 발음이 뭉개진 민석씨의 대답에 내가 큭큭거리며 웃자, 민석씨가 "하,참."하며 자켓 안쪽의 와이셔츠 소매 단추를 풀렀다. 그럼 뭘 해. 자켓을 입고 있는데.
"자켓 벗어요. 나 별로 그런 거 신경 안 쓰니까. 민석씨를 고용한 사람이 나도 아닌데, 날 어려워할 이유 없잖아요."
"안 됩니다."
"왜요?"
"편해지면…"
"편해지면?"
입을 떼려다 다시 다물고 "음…"하고 바로 말을 잇지 않은 민석씨가 나의 시선에 시선을 맞추며 잔잔한 웃음이 깔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가씨가 고생하실 겁니다."
워. 무서운데. 의미심장한 그 말에 내가 조금 움찔했고, 그런 나를 보았는지 민석씨가 씩 웃었다. 아주 약간의 미소는 보았었는데, 저렇게 짓궂게 웃는 것을 처음 봐서 내가 대답하는 것을 잊고 "어…아…"하고 바보처럼 말을 흐렸다. 그렇게 말을 흐리고 나서야 내 멍청한 표정이 상상이 되어서 나는 황급히 무릎 위의 책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에이, 뭐 원래도 만만치 않게 고생하고 있는데요, 뭐. 맨날 나 외롭게 혼자 말하고…"
"규칙상 어쩔 수 없습니다. 저도."
"그러니까 둘만 있을 때…"
"…편하게 하라고?"
책 모서리 끝을 구겼다 폈다 하며 말을 잇던 내가 순간 잘못 들었나?하며 민석씨를 올려다보았다.
"네?"
나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던 건지, 민석씨가 나를 보며 살짝 웃었다. 분명. 분명 요도 없었고, '편하게 하란 말씀이십니까?'하고 길게 말하지도 않았다. 분명… 나의 살짝 얼빠진 표정에 무표정으로 날 보고 있던 민석씨가 또 씨익 웃는다. 미쳤다.
"대박. 지금 반말… 대박!"
내 격한 리액션에 민석씨가 금세 민망해진 듯 헛기침을 큼 하며 표정을 관리하더니 다시 뒷짐을 지고 어깨너비로 다리를 벌려 서며 말했다.
"아가씨가 불편하다 하시니 노력해보겠습니다. 천천히."
왠지, "편하게 하라고?"하고 말한 민석씨의 말투와 목소리가 귓가에 계속 맹맹거렸다. 왜인지, 내가 고생할 거라는 말이, 벌써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잠이 들었다가 번쩍 눈이 뜨여졌다. 그리곤 황급히 손을 뻗어 이불을 확인했다. 끈적한 느낌과 함께 훅하고 코를 찌르는 비릿한 피 냄새에 한숨을 쉬며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원래 주기가 불규칙했었나, 끝난 지 한 달도 안 되었는데 또 생리라니. 그러다 문득 이 방 안에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멈칫 민석씨를 바라보았다. 쇼파에 브이 자로 꺾여 누워있는 민석씨에게 아주 작게 새근새근 하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아, 자는구나. 마침 오늘따라 계속 서 있는 모습이 마음이 불편해서 "아, 어차피 나가면 또 1분 만에 잡힐 텐데, 그리고 기억 돌아오기 전까진 아무데도 못 가요 저."하는 말로 민석씨를 구슬려서 방 안 쇼파에서 잠을 자도록 부탁했었는데, 천만다행이었다. 깨어있었으면 얼마나 부끄러웠을 일이야.
나는 아주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으로 내려섰다. 방 안 화장실에서 빨기엔 방음이 안 돼서 그 바로 앞 쇼파에서 자는 민석씨가 깰 것이 분명했다. 나는 아주 조심스러운손길로 겉에 이불을 살짝 걷어내곤 서랍에서 저번 생리 때 쓰고 남은 생리대와 새 속옷, 그리고 새 잠옷 바지를 챙겨 들고 문으로 다가섰다. 다행히 민석씨는 내가 문을 닫고 복도로 나올 때까지, 깨지 않았다.
복도를 저벅저벅 걸으며, 군데군데 켜진 벽 등이 아니었더라면 진짜 무서워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품 안에 이불을 폭 끌어안고 조심조심 거실쪽 제일 큰 화장실로 향했다. 불을 켜고 나서 이불을 펼쳐보니 으, 아침에 알았더라면 진짜 난리 났었겠다. 하는 생각을 하며 주섬주섬 물을 받아 열심히 비비고 밟아서 이불과 속옷, 바지를 빨았다. 완벽하게 피가 지워지지 않아서 세탁기로 한 번 더 돌려야겠다. 하는 생각을 하고 화장실과 연결된 세탁실로 가서 드럼 세탁기에 넣고 빤 이불과 옷가지들을 한번 더 세탁을 했다. 세탁기를 얼마나 비싼 걸 샀으면 빨고 탈수하고 건조까지 30분밖에 안 돼? 나야 좋지 뭐… 욕조에 걸터앉아 드르륵 드르륵 돌아가는 드럼세탁기를 바라보며 2분정도 남은 카운터를 바라보다 지루해진 내가 벌떡 일어나 화장실 거울로 다가가 얼굴을 바라보았다. 스킨로션을 바른 적이 한 번도 없어 조금 푸석한 피부를 매만지며 내가 중얼거렸다.
"몇 살이니 너…"
나 스스로 그런 질문을 하는 게 웃겨서 씩 웃다가, 드러난 치아를 보며 내가 더 활짝 웃어 보였다. 교정이라도 했던 것처럼 아주 가지런한 이에 내가 손가락으로 이를 쓱 훑으며 "우리집 부자였나…"하고 중얼거리는데, 밖에서 덜컹하고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혼자 있으니 괜히 무서워서, 내가 다시 세탁실로 뛰어들어가 막 다 돌아간 세탁기 속의 이불과 옷가지들을 우루루 꺼내 품에 끌어안고는 다시 화장실로 나와 아주 살짝 문을 열어 바깥을 살폈다. 바로 현관이 보이는 구조가 아니여서 누가 문을 열었는지는 보이지 않고, 현관쪽에서 들리는 웅성웅성한 소리만 들려왔다.
"형규야, 김종인이 방에 데려다줘라."
"네 형님."
"아냐… 가, 나 혼자 갈 수 있으니까…"
처음 듣는 목소리 두 개와 분명 아주 엄청나게 혀가 꼬부라지고 있었지만 주인 놈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김종인. 이름이 김종인이구나. 몇 날 며칠을 민석씨에게 구걸하듯이 물어보았던 그 질문의 답을 이런 곳에서 이렇게 쉽게 얻다니. 허탈감에 "허"하고 작게 숨을 토했다. 김종인. 이름과 얼굴이 매치가 잘 되는 것 같다는 생각에 딱히 입안에서 한 번 더 녀석의 이름을 굴려보지 않아도 입에 착 감기는 기분이 들었다.
"너 혼자 못 가, 김종인. 너 지금 만취야."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도련님."
"됐어… 가. 가라. 빨리."
"어, 야. 야. 김종…!"
그리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꽤 크게 들렸다. 나는 현관문이 닫히는 그 큰 소리에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 바람에 후두둑 바닥에 속옷이 떨어져 버려서 나는 구시렁거리며 얼른 다시 속옷을 주워 탁,탁 털어 이불 중앙에 밀어 넣었다. 문밖으로 밀려난 그들이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와 시끌벅적해질 줄 알았는데, 현관문 바깥으로 쫓겨나간 그들은 다시 문을 열진 않았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는 듯, 아니 정말 신발을 어디 내 던지기라도 하는 듯 쾅,쾅 소리를 내며 신발을 벗은 김종인이 한숨을 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나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를 고민하던 내가, 순간 '내가 뭐 잘못했어?'하는 생각이 들어 휙 문을 열어젖혔다. 어두운 집 안에 빛이 보이자 김종인이 그 꽐라된 상태에서도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알았는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누구야."했다. 얘길 들어보니 술도 만취했겠다. 몸도 못 가누는 것 같던데. 콱 얼굴 가리고 때려주고 도망가버려?
그 생각을 잠시 했다가, 그랬다간 이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 모두가 달달 볶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고개를 휘휘 젓곤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현관에 살짝 기대어 서서 김종인이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장실 불을 끄자, 녀석의 눈코입은커녕 서 있는 실루엣만 간신히 보일 정도로 어둠이 가득했다. 조금이라도 달빛이 비추는 곳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몇 발자국 더 바깥쪽으로 걸어 나온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는 김종인을 바라보며 이불을 더 품 안에 꽉 끌어안곤 말했다.
"음…늦었네…요."
그런 내 말에도 반응 없이 현관문에 기대서서 나를 바라보는 김종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녀석의 시선이 오로지 내게 꽂혀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아, 그냥 화장실에 있을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먼저 들어가도 되나? 안 되나?를 고민하고 있는데, 녀석이 말없이 발을 뗐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아슬아슬 걸어왔다. 미운 것은 미운 거고, 재수 없는 것은 재수 없는 거지만. 저 상태라면 정말로 금방이라도 쿠당탕 넘어질 것 같아서 내가 한쪽 팔로 이불을 끌어안고 녀석을 향해 다가가며 "괜찮아요?"하고 물었다.
막 녀석의 앞으로 다가갔을 때였다. 김종인이 이불을 꼭 끌어안은 내 손목을 콱 움켜잡아 날 끌어당겼다.
"술 엄청…!"
나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김종인의 커다란 두 손이 그대로 내 얼굴을 감싸며 녀석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아버렸기 때문에. 안고 있던 이불은 힘이 빠져버린 팔 때문에 내 발등 위로 소복이 떨어졌다. 건조가 덜 된 바지 끝이 축축하게 내 발등을 적셨다. 당황함에 딱딱하게 굳어있다 상황을 깨닫곤 김종인의 팔뚝을 힘주어 잡았지만, 녀석은 그런 내 손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내 얼굴을 감싸고 계속해서 내 입술과 혀를 삼켜왔다.
아랫입술을 빨고, 깨물다 곧 다시 삼키듯 내 아래 윗입술을 삼켜왔다. 녀석은 아주 오랫동안 내 입술을 애무했다. 근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숨 쉴 타이밍도 주지 않고, 아주 일방적으로 하는 배려심 없는 키스인데도. 어쩐지, 사랑받고 있나. 하는 착각이 들어버려서, 온몸이 베베 꼬이는 것 같았다. 내가 올라탄 대형 트램펄린에 누군가가 무거운 볼링공 하나를 툭 던진 것처럼, 이미 심장이 아니라 온몸 자체가 들썩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녀석이 입술을 뗐음에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녀석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큰 손으로 여전히 내 얼굴을 감싸 쥔 채, 숨이 간지럽게 닿는 거리에서 김종인이 나를 바라보았다. 녀석의 뜨거운 숨이 내 입가에 닿아 녀석이 한참이나 괴롭혀 예민해진 입술 표면을 간지럽혔다. 몽롱하게 풀린 눈, 그 눈이 나를, 오로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손가락 끝이 저릿해지고 옴짝달싹을 못하겠는 이 이상한 기분에 몸서리치고 있을 때, 김종인이 다시 다가와 내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입술이 짓눌리는 순간에도 김종인은 내 떨리는 입술을 보고 있었다.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야 김종인의 시선이 다시 내 눈에 닿았다. 나는 그 키스에, 나는… 김종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아주 많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키스였다. 아주 아주아주 많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할 수 있는. 그 애틋한 키스에, 어쩐지 나는 …나는 전보다 더 이상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좌절감? 아닌데. 근원을 알 수 없는 기분에 내가 다시 한 번 김종인의 팔뚝에 손을 얹고 끌어내렸으나, 김종인의 손은 집요하게 쫓아 올라와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숨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 자신이 만지는 내 뺨을, 귓불을, 뒷목을 바라보는 김종인의 그 눈빛에 자꾸만 쿵하고 떨어지는 심장에 놀라며 다시 내 얼굴에서 녀석의 손을 뜯어내려 하는데, 진한 술 냄새를 풍기며 옅은 숨을 내뱉던 그 입술이 다시 천천히 벌어지며 피곤에 쇤 김종인의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만 믿어."
"…어?"
"나만…나만 믿어…현아."
그리고 김종인의 몸이 내게 푹 늘어졌다. '현아? 현?' 김종인이 뱉은 누군가의 이름에 의문을 갖기도 전에 나는 윽 소릴 내며 두어 걸음 뒷걸음질 치다 결국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얼마나 세게 넘어졌는지, 카펫과 엉덩이 밑에 깔린 이불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집 바닥이 무너지는 소리에 모두 다 지진이 난 줄 알고 뛰어나왔을지도 몰랐다. 눈물이 찔끔 나와서 내가 김종인의 키스로 인해 부풀어 오른 입술을 깨물며 김종인을 노려보았지만, 기절한 건지, 잠이 든 것인지 아니면 기절한 듯 잠이 든 것인지 숨만 색-색-쉬며 내 품에 안겨있는 김종인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나는 엎어진 그 상태로 가만히 김종인을 내려다보았다. 내 가슴팍에 뺨을 기댄 채 색,색 숨을 내쉬는 모습에 기분이 이상해 조금 뒤로 몸을 빼냈다. 녀석의 머리가 내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움찔하고 떨리던 속눈썹이 다시 파르르르 깊은 잠에 빠진 듯 보였다. 나는 그 떨리는 속눈썹을 바라보았다. 내 뺨을 붙잡고 나를 오롯이 쳐다보던 그 눈빛이 아직까지 생생했다. 그리고 부러워지고 말았다.
김종인이 나를 통해 보고 있던 그 여자가.
김종인의 입술을 받았어야 할 그 주인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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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열심히 썼어요.......이번 뿐이야.....이런 분량.......
저번 편에는 말씀 못 드렸는데,
추천 눌러주시는 분들, 댓글 남겨주시는 분들!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추리 댓글 남겨주시는 귀여운 내 님들
ㅎ...헿..........귀여워 우쮸쮸
3편에서 올렸던 퀴즈 질답
Q.다음에 출연할 멤버는 누구?
A:김준면
저번 편 퀴즈 정답을 맞춘 사람은
한 명 도 없 었 다
한
명
도
없
어
선물로 날 받고 싶지 않았던 거지.
뿡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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