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리프: 시간을 뜻하는 "time"과 되돌린다 라는 뜻을 가진 ”replay"가 합성된 단어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비한 능력 “김태형.” 나지막이 태형의 이름을 부르는 지민의 입술이 여느 때보다도 차분하고, 침착했다. 이제는 하나의 습관이 되어버린, 부드럽게 앞머리를 쓸어 올리는 지민의 얼굴이 많이 야위어 보였다. 아무렇지 않은 듯 평온한 목소리와는 동 떨어진 그 얼굴이 태형의 마음을 아리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애써 지민을 따라 웃으며 응, 하고 익숙하게 대답을 했다. 아직 반도 채 마시지 않은 테이크 아웃 커피에는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무렵, 그렇게 또 하나의 계절이 지나가는 자리에 둘은 서로의 이름을 한 번씩 불러보았다. 부족한 것은 없었다. 좋아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할 것이고 사랑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할 것이며 미안했느냐고 묻는다면 그 역시 그렇다고 할 것이다. “박지민.”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했었다. 만나왔던 날들 중 가장 신경을 쓰고 준비해서 나온 마지막 데이트. 멋지게 사랑했으니 멋지게 보내줘야 한다, 이것이 바로 태형의 온전한 배려였다. 절대 놓지 않을 것 같았던, 마주 잡은 두 손에서 스르르 힘이 풀리며 둘을 이었던 따스한 고리가 더이상 그 누구도 속박하지 않은 채 그렇게 사라졌다. 서로를 처음 만났던 그곳에 다시 한 번 눈을 마주치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많이 변했네, 우리 둘. 3년전, 밝은 색색의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서 졸업 기념 사진을 찍었던 것이 여전히 마음 한 켠에는 세월에 색이 바래지지 않은 채 선명하게 남아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연락을 끊을 생각조차는 양쪽 그 누구도 해 본적이 없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만나서 술잔을 기울이기로 약속을 해 두었다. 사실 그렇게 거창할 것도 없는, 한 쪽이 사귀는 사람이 생길 때까지 유효한, 그런 약속. 태형이 원래 살던 곳에서만 가능하던 일. ‘야…너! 그거 알아..?..딸꾹.’ ‘뭐, 뭐 인마아..’ ‘헤…김태형.’ ‘엉?’ ‘아니, 아니이…얘기 좀 끝까지 들어봐, 조옴.’ ‘아, 뭔데에..’ 딸꾹. 내가 너, 딸꾹. 좋아했었던 거.. 딸꾹. …몰랐지? 태형에게는 남아있는 타임 리프가 하나밖에 없었다. 딱 하나, 언젠가 한 번 지민이 그것을 발견했을 때 무엇이냐며 물어왔을 때는 대충 얼버무리기 일쑤였다. 그런 건 말해줄 수가 없으니까, 오른쪽 손목의 소매를 걷어 올리며 적혀있는 숫자를 보여주는 것밖엔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새로 한 타투냐며 검지 손가락으로 숫자가 적혀있는 부분을 매만지는 지민의 손길이, 여전히 이게 무엇을 뜻하는 지를 모르겠다는 것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태형아, 김태형.” 때마침 역광으로 지민의 시야가 자꾸만 좁아졌다. 지민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어떤 대상을 향한 사랑인지, 불안인지, 혹은 후회인지도 모르는 복잡한 감정이 그를 온통 둘러싸고 있었다. 가지마. 외마디의 외침이 달구어진 여름의 공기를 타고서 태형에개 닿았을까. 태형이 사라져가는 와중에도, 그렇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듯 이전보다 흐리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민아.” 생각해보면 참, 우여곡절이 많았다. 취중진담이라고 믿고 싶었던 지민의 뜬금없는 과거의 속마음에, 태형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금이 아니면 안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야말로 마음이 촉박했다, 그에게 시간이라는 건 어쩌면 무의미했을테니까. 태형의 타임 리프 능력을 알고 있는 단 한 사람, 아마 또 자신과 다른 차원에서 늘 그랬듯이 그 시절의 태형을 지켜주고 있을, 하나뿐인 어머니. ‘너희 아빠를 마지막으로 봤던 건, 손목에 1이라는 숫자만 적혀있을 때였어.’ 늘상 어머니가 되새김질을 하듯, 하루도 거르지 않고 태형에게 해주신 단 한마디였다. “…처음엔 무서웠어.” 역광이 아니었노라고 지민은 생각했다. 굳이 손으로 눈 앞을 가리지 않아도 충분히 볼 수 있는 빛이었다. 그는 들어올린 손을 천천히 내리며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처음엔 무서웠어. 나는 네가 정말 친한 친구라고만 생각을 했었고, 네가 날 좋아한다던가 내가 널 좋아한다는 그런 식의 사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 사실 남자끼리 그런 게 있기가 힘든 일기도 하고. 장난인 줄 알았어, 그 때가 마침 4월 1일이었잖아, 만우절이다보니까 날짜도 다 외웠네.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 내가 어떤 심정이었는지…알아? “…지민아, 박지민.” 지민의 목소리가 점점 더 떨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태형이 지민의 말을 가로막고서 서두르는 기색을 보였다. 달달달 떨고 있는 한 쪽 다리가 그의 속마음을 대신했다. “…너 그거 알아?” 태형은 슬프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미련이 남아 후회가 됐지만 원망은 하지 않았다. 다리에서부터 흐릿해지기 시작하는 태형을 바라보는 지민이 그에게 묻는다. “네가 가면 내 기억은 어떻게 되는거라고..?” ‘야, 이거 아무도 모르는 건데…너 한테만 비밀로 얘기해줄까?’ ‘어어…뭔데, 뭔데?’ ‘나, 시간을...’ 터무니없는 소리, 그랬었다, 적어도 그 때는. “그건…지워져, 나랑 같이 있었던 모든 일들도..” 익숙한 듯 담담하게 말하는 태형의 말투가 오히려 지민의 눈가를 적셨다. 시큰거리는 코를 부비적거리며 애써 마지막이라도 웃으려는 지민을 보는 태형도 역시 그러했다. 지민아, 너 그거 알아? 내가 너보다 훨씬… “먼저 너 좋아했었던 거.” 미래를 알고 왔다고 해서 과거에서 바꿀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성인이 되서야 지민은 어렸던 날의 그 마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런 지민을 태형은 줄곧 좋아하고 있었다. 서로 바라보는 시선이 달랐기 때문에. 지민은 자신의 마음에 대한 확신을 얻지 못했고, 태형은 그런 지민에게 친구 이상의 관계를 요구할 수는 없었다,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래서 태형은 달렸다. 그렇게 시간을 달려 지민을 만난 것이 어느덧 다섯 번째. 손목에 있는 숫자가 1이 될 때까지 그는 계속해서 과거에 갇혀 살았다.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와 지민에게 고백을 할 때마다 그에게 두렵다는 눈빛을 받아야 했고, 1년여동안 지민을 따라 다니며 그의 마음을 보여주어야 했다. 다섯 번이나 타임 리프를 했지만 패턴은 늘 일정했다. 너무 어렸기 때문에, 갈팡질팡하던 지민은 낯설음을 느낄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만나고, 고백하고, 사귀고, 다시 헤어지고. 지민에게 건네는 말이 담담하게 들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내가 널 기억할 수 있을까?” 아니. “우리는 진짜 시간에 있는 거 맞아?” 아니. “김태형, 이 거짓말쟁이야.” 이제 정말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그동안의 두려움과 고마움, 그리고 힘들었던 것이 마치 어린 아이의 울음처럼 터질 것만 같았다. 지민의 입에서 거짓말쟁이라는 말이 나옴과 동시에 왜, 하고 태형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묻는다. “….이거 처음 아니잖아.” 지민아. “…너 이렇게 가는 모습, 처음 보는 거 아니라고.” 박지민. “이제 가면 언제 올건데,” 박지민.. “나 여기에 내버려두고 언제 올거냐고!” 침착했던 호흡의 균형에 서서히 금이 가고 있었다. 그리고, 태형은 마지막 한마디를 남긴 채 그 시간에서 지워졌다. “…미래에서 기다릴게.” 또 올게, 라고 하기에는 손목에 적혀있는 숫자가 턱없이 부족했다. 어디선가 본 듯한 태형의 모습을, 지민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데자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익숙했으며 생생했다. 지민은 다섯 번째 이별 속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터뜨렸다. ‘또 올게.’ 금방 눈을 감았다 뜨면 내일이라도 다시 제 앞에 나타나 그 특유의 네모웃음을 지을 것 같았는데. 그 말은 더이상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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