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수는 쉴 새 없이 카톡이 들어오는 걸 보며 휴대폰 액정을 껐다. 군대를 다녀와 복학을 얼마 앞두고 있는 경수에게 선후배 간의 친목을 도모한다나 어쩌나 하며 과생들이 모두 모인 술자리라며 꼭 참석하라는 백현과 찬열의 연락에 경수는 하는 수 없이 터덜터덜 밖으로 나왔다. 대충 몇 잔 얻어먹다가 집에 가야지. 경수는 여전히 언제오냐고 폭풍 카톡을 날리는 백현과 찬열을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비글새끼들.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경수는 자신과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고깃집 간판을 찾고 걸음을 옮겼다.
"도경수!!!!!"
경수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경수를 소란스럽게 반기는 건 역시나 백현이었다. 어디에서 튀어나와선 자신에게 매달려 얼마만이냐며 찡찡거리는 백현을 보고 경수는 웃으며 백현에게 말했다.
"떨어져"
"여전하다니까 도경수"
백현은 경수를 안고있던 팔을 풀고 경수를 자리로 이끌었다. 북적북적한 테이블에는 아는 얼굴 반, 모르는 얼굴이 반이었다. 아마 모르는 얼굴 반은 후배들이지 않을까 싶었다. 경수는 자신을 보고 손인사를 건네는 준면을 보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요즘도 여기저기 끼시네. 한결같이 사람 많고 북적북적한 곳엔 빠지지 않는 준면이 경수는 신기했다. 백현과 찬열의 옆자리에 앉은 경수에게로 다른 테이블에 앉아있던 준면이 다가왔다.
"도후배! 얼마만이야 이게"
"아, 그러게요.. 잘 지내셨죠?"
잘 지냈지~ 준면은 경수가 군대가기 전 경수를 애틋하게 아끼던 선배로 지금은 학생 회장을 맡고 있었다. 나중에 경수가 이 사실을 듣곤 꽤 놀랬다고 한다. 경수가 학교를 다닐 때 어찌나 경수를 챙기던지 도후배, 도후배 하며 자신을 불러내기 일 쑤이던 준면이 사실 경수로썬 부담스러웠다. 많이. 생긴 것도 좀.
"처음 보는 얼굴 많겠다 넌. 후배들이랑 인사해야지 도경수"
"아니, 괜찮은데.."
"다 주목! 여기 군대를 막 제대하고 돌아온 복학생 선배 왔는데 다들 뭐해 인사 안하고"
준면이 큰 소리로 시선을 끄는 바람에 자신에게로 주목된 시선에 경수는 어색하게 웃었다. 여전히 눈치 없는 인간이야... 여기저기서 안녕하세요, 선배님-하며 들려오는 목소리에 경수는 괜히 쑥스러워졌다. 1학년 여름방학이 되자마자 군대에 간 경수는 사실상 선배대접을 받을 일이 여태껏 없었다. 자신이 벌써 선배님 소리를 듣고 있다니 경수는 시간이 꽤 빠르게 흐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입학한 지 얼마 시간이 지난 것 같지 않은 데 벌써 세번째 봄이 찾아왔다. 준면이 자리로 돌아가고 나서야 경수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벌써부터 피곤한 느낌이었다. 경수는 옆에서 열심히 고기를 구워 자신의 접시에 담는 찬열을 보았다.
"뭐해"
"너 고기 좋아하잖아."
쳐먹고 돼지 되라고. 경수는 찬열의 등짝을 한 번 내리친 후 젓가락을 들고 고기를 입에 넣었다. 어쨌든 고기는 좋았으니까. 찬열은 깻잎을 찾아 휙휙 고개를 돌리다가 빵빵하게 볼 안에 음식을 넣고 우물거리는 경수를 보았다.
"도경수, 군대에서 많이 굶주렸나보다? 변백현, 얘 봐. 볼따구 터질거같아."
"다챠"
"뭐라는거야. 다 삼키고 말해."
닥치라고. 경수는 찬열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래, 쌈이 좀 크긴 했어. 경수는 아무리 씹어도 씹어도 삼켜지지 않는 입안의 고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경수가 입을 닫고 가만히 입 안의 음식을 씹기만 할 때 였다. 이상하게도 앞에서 낯선 시선이 계속해서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에 경수는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맞은 편에서 처음 보는 얼굴이 턱을 괴고 자신을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있었다. 경수는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은 남자의 시선에 기분이 언짢아졌다.
'뭐야 쟤.'
경수는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계속 입을 오물거렸다. 어느 정도 음식물이 넘어간 것 같다고 생각한 경수는 물과 함께 입안에 남아있는 음식물도 위로 내려보냈다. 다시금 깔끔해진 입안에 입을 쩝쩝 다시던 경수를 보던 맞은편의 남자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선배님"
경수는 자신을 보며 말하는 낯선 남자의 낯선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선배님? 신입생인가? 아니면 후배?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거지. 경수는 처음 맞닥뜨린 상황에 당황해 입을 열 수 없었다.
"09학번 김종인입니다."
뜬금스레 자기소개를 하는 김종인이란 후배를 경수는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나저나 09학번이면 일 년 후배구나. 본디 낯을 가리고 친화력이 많진 않은 경수는 처음 보는 종인이 부담스러웠다. 나보고 어쩌자는거야... 경수는 계속되는 종인의 시선에 어쩔줄 모르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자신이 시선을 피한다고 해서 종인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이상하게 더 노골적이게 느껴지는 시선에 경수는 앞을 보지 못하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만약 저 후배가 자신을 곤란케할 작정이라면 충분히 당황스럽고 곤란하니 이쯤에서 그만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왜 자꾸 쳐다봐"
경수는 눈을 치켜 뜨고 종인을 보았다. 계속 시선을 피할 수도 없는 일. 이유만 묻고 하지 말라고 말하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경수의 퉁명스러운 질문에 종인은 그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일관할 뿐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웃음이었다. 경수를 보며 웃기만 하던 종인이 갑자기 자신 쪽으로 몸을 조금 수그렸다. 마치 경수만 그 대답을 들으라는 듯이. 경수는 부쩍 가까워진 종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쌍커풀이 짙네. 종인이 작은 목소리로 경수에게 속삭였다.
"이상하게,
선배가 귀엽네요"
소란스러운 주위는 아무도 경수와 종인에게 신경쓰지 않았다. 경수는 자신을 웃으며 쳐다보는 이 당돌한 후배와 자신을 빼곤 주위가 멈춘 듯 한 기분이 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과 이 후배만 멈춰버린것 같다고도 느꼈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시간이 이상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경수는 생각했다. 이상한 녀석에게 걸려버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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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경수는 아까부터 자신을 불러오는 목소리를 피해 캠퍼스를 몇 바퀴 째 도는 중이었다. 끈질기게 어디선가 들려오는 종인의 목소리를 경수는 이리저리 피해 다니느라 진이 다 빠진 것 같았다. 아까부터 종인과 자신이 술래잡기를 하듯 쫓고 쫓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고깃집에서 종인을 처음 본 이후 종인은 새로 수강하는 교양강의에서 다시 볼 수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종인과 같은 강의를 듣는다는 것. 경수와 강의실에서 맞닥뜨린 종인은 경수를 보자마자 갑자기 다가와선
"어? 도경수 선배네?"
"선배도 이 강의 듣나 보네 나도 이 강의 듣는데"
"우리 앞으로 자주 보겠네요-"
"나 마침 친구 없는데 잘 됐다. 옆에 앉아도 되죠?"
"아, 배고프다. 선배는 배 안고파요?"
"선배도 야구 좋아해요? 어제 두산이랑 삼성이 붙었는데..."
따위의 말을 경수를 본 후 부터 강의가 시작하든 말든 계속해서 걸어오는 탓에 경수는 강의 내내 종인 때문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교수가 앞에서 뭐라고 말을 하든 말든 옆에서 어찌나 조잘조잘 말도 많은지. 그닥 중요한 말도 아니고 어제 이긴 야구 얘기나 자신의 어제 있었던 일 등의 시시껄렁한 얘기들 뿐이었다. 가뜩이나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자신의 옆에서 끊임없이 얘기를 하는데, 슬슬 열이 받기 시작하는 경수였다. 경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좀 조용히 하자, 종인아."
"선배 제 이름 기억하네요? 이름 안 불러주길래 기억 못하는 줄 알았지"
네가 못 잊게 했잖아. 경수는 고개를 한 번 저은 후 종인을 무시하고 최대한 교수의 말에 집중하려 애썼다. 종인은 안 그래도 큰 눈을 더욱 크게 뜨고 열심히 교수를 보는 경수를 보고 반쯤 열리던 입을 다물었다. 경수는 갑자기 잠잠해진 종인에 마음 한켠에서 이상하게 어딘가에서 불안함이 일었지만 그래도 지금이라도 그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필기를 써 내려갔다.
"뭐 묻었네"
갑자기 자신의 머리를 만지는 종인의 행동에 경수는 열심히 노트에 끄적이던 손짓을 멈추었다. 경수는 고개를 돌려 종인을 보았다. 자신의 시선에 어깨를 으쓱하더니 앞을 보라며 고개짓을 한다. 정말로 이상한 녀석한테 걸려버렸어.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힘들게 교양 강의가 끝나고 서둘러 가방을 챙겨 나가는 경수를 잡은 건 역시나 종인이었다. 강의실 문을 나서려는 자신을 선배!하며 부르더니
"같이 가요"
하며 종인이 말을 하자마자 경수는 그대로 강의실을 나와 문을 향해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상대였다. 직감이 였다. 여태까지 자신이 만난 상대와 모든 것이 다른 느낌이었으니까. 말로 형용할 수 없지만, 종인은 확실히 달랐다.
"선배!"
언제 쫓아 나온건지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종인의 목소리에 경수는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그 때 부터 시작된 종인과 경수의 추격전은 꼬박 삼십분 동안이나 이어졌다. 지치지도 않는지 자신을 계속해서 부르는 종인의 목소리에 경수는 진저리를 쳤다. 종인을 피해 요리조리 다니던 경수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종인의 모습에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앞 벤치에 앉았다. 어휴... 이게 무슨 일이야.. 오랜만에 오래한 달리기에 다리가 쑤시는 듯 아팠다.
"선배!!"
아, 깜짝이야. 경수는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어느새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종인을 쳐다보았다. 눈이 땡그래진 모습이 아무래도 적잖이 놀란듯 싶었다. 경수가 본능적으로 종인을 피하려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종인에게 다시 팔이 잡인 덕에 경수는 꼼짝없이 다시 벤치에 앉았다. 경수는 종인의 반대로 고개를 돌렸다.
"선배 이제 안 쫓아 갈테니까-
대신에 선배 번호 좀 주세요"
경수는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폰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마음같아선 주기 싫었다. 내가 왜 너한테 번호를 줘. 하지만 이미 경수의 마음 속에선 줄까말까 하는 갈등이 시작되었다.
'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또 안 주면 어떻게 되는 걸까.'
경수는 자신을 재촉하는 듯 종인이 흔드는 휴대폰을 결국 받아 들었다. 종인의 입에서 아싸-하고 작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경수는 종인의 휴대폰에 자신의 번호를 후다닥 입력하고 벤치를 벗어났다. 번호를 왜 입력해 줬는지는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자고 도경수... 엮이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생각과 다르게 행동하는 몸을 원망스러워하며 경수는 빠르게 캠퍼스를 빠져나갔다.
'선배 저 종인이에요. 번호 저장해 두세요'
경수는 막 자신에게 도착한 문자를 감흥없이 쳐다 보았다. 잊고 있었네. 막 샤워를 하고 나온 경수는 12시를 가리키는 시곗바늘을 한 번 보고 아랫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왜 이렇게 늦게 연락한거지. 아니,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경수는 고개를 빠르게 흔들었다. 휴대폰을 침대위에 내려 놓은 경수는 머리도 수건으로 탈탈 털어 말리고 불을 끄고 잘 준비를 마쳤다. 경수는 침대 위에 드러누워 한참동안 문자와 종인의 번호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저장해도 되려나... 경수는 갈등하던 마음을 굳혔다. 뭐, 번호 정도로 무슨 일이 있을까. 경수는 메뉴를 눌러 번호 등록 창을 켰다. 그나저나 뭐라고 저장하지... 김종인? 김종인 후배? 아니면 후배 김종인? 그게 무슨 큰 상관이 있나 싶지만 경수는 나름 진지했다. 백현과 찬열은 그냥 '변백현'과 '박찬열', 심지어 준면이 '김준면'으로 저장된 것 따위는 경수에게 생각나지 않았다. 경수는 20분동안 끙끙 고민하다가 결국 힘들게 타자를 입력해 넣고 휴대폰을 내려 놓았다. 아.. 피곤해.. 경수는 급작스레 몰려오는 피로감에 이불을 머리 끝 까지 뒤집어 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수의 색색거리는 소리에 맞춰 이불이 오르락 내리락 했다. 경수가 막 잠에 빠져 들었을 때, 경수의 휴대폰은 '이상한 김종인 후배'로 부터 도착한 '선배 자요?'라는 메세지를 화면에 띄운 채 어둠속에서 번쩍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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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김종인 후배 '선배 저 술사줘요'
그러니까 내가 왜. 경수는 종인의 카톡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경수는 입력창에 힘을 주어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내가 ㅇ'
ㅙ를 치려던 손짓은 종인의 '제가 밥 사줬잖아요 저번에'라는 카톡에 멈추고 말았다. 얼마전 경수는 종인에게 밥을 얻어먹었다. 종인과 같이 듣던 교양 강의가 끝나고 경수가 가방을 챙길 때 였다. 종인은 갑자기 선배 배고프죠? 배 안고파요? 저 완전 배고픈데. 따위의 말을 짓걸이며 경수에게 말을 걸어왔다. 종인의 말을 무시한 채 가방을 챙기던 경수가 뒷정리를 마친 후 자리에서 일어나자 종인은 그대로 경수의 팔을 이끌고 학생 식당으로 향했다. 경수는 종인의 손에 이끌려가면서 놓고있던 정신을 한창 끌려가고 있던 도중 차렸다.
"야, 너 뭐해"
"저 배고프다니까요"
"근데 어쩌자고"
종인은 대답이 없었고 경수는 종인의 손에 질질 끌려 학생 식당까지 도착했다. 그제서야 종인은 잡았던 자신의 팔을 놓았고 팔이 풀리자 마자 경수는 한 발짝 종인에게서 물러났다. 경수는 종인을 향해 눈을 치켜떴다. 종인은 싱긋 웃은 후 경수의 뒤로 가 경수의 어깨를 잡고 식당 안으로 이끌었다.
"그래서 밥 먹자고. 같이"
그렇게 경수와 종인은 같이 밥을 먹었다. 겨우 학생 식당에서 밥 한 번 사줬다고 지금 술을 사내라는 당돌한 김종인 후배는
이상한 김종인 후배 '그럼 오늘 9시에 카페베네 옆 호프집에서 뵈요'
라며 자신에게 만날 시간과 장소까지 통보했다. 경수는 액정 한 쪽에 작게 쓰인 오후 07:26 이라는 글을 보았다. 경수는 휴대폰을 방 구석에 던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자신이 던진 휴대폰을 눈을 깜빡거리며 쳐다보던 경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갔다. 경수가 들어간 화장실에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샤아-하는 시원한 샤워기 소리가 들려왔다.
"도경수, 여기!"
경수는 먼저 도착한 종인이 자신을 향해 손을 방방 흔드는 걸 보고 종인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아니 근데 쟤 아까 도경수라고 안했나?
"너 방금 뭐랬어?"
"제가 뭘요?"
아닌가.. 경수는 종인에게 고개를 저으며 종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계속해서 경수의 행동을 쫓아 눈동자를 굴리던 종인은 경수가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멀뚱멀뚱 자신을 쳐다보는 걸 보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 선배 오늘 나 만난다고 신경 좀 썼어요? 왜 이렇게 예뻐?"
"시끄러워"
경수의 대답에 종인은 크크-하며 낮게 웃었다. 경수는 종인의 말에 얼굴이 빨개져선 니트 안에 받쳐 입고 온 셔츠의 제일 윗 단추를 풀었다. 자신과 잘 어울리는 아이보리색 니트를 입고 안에 청색 셔츠를 받쳐 입은 경수는 평소와 다르긴 했다. 학교갈 땐 매일 청바지에 후드티 차림이긴 했지.
"내가 주문 다 해놨어요. 여기 나 아는 형이 하는데 거든"
돈은 내가 내는데.. 종인은 경수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아-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열었다.
"걱정마요 이미 계산 내가 했으니까"
"뭐?"
니가 술 사달라며. 경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경수의 눈치를 살피던 종인이 경수를 향해 말했다.
"이렇게 안하면 선배 안나올거 아니야"
경수는 웃으며 이해해줘요-하고 말하는 종인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찝찝하다. 경수는 자신의 앞에 차려지는 안주들과 하얗게 거품이 나는 생맥주를 보았다. 종인이 경수에게 생맥주 한 잔을 내밀었다. 안 받을 거에요? 경수는 꾸물거리던 손을 올려 종인이 건네주는 잔을 받아 들었다. 그제서야 종인도 웃으며 자신의 잔을 들었다. 우리 쨘 한번 하죠 선배. 경수는 보글보글 올라오는 생맥주의 거품을 보았다. 꼭 집어 삼킬 것만 같네. 종인이 건배를 하자는 듯 잔을 위로 들었다. 경수도 어설프게 자신의 잔을 들었다.
"쨘-"
종인이 경수의 잔에 자신의 잔을 쨘-하는 소리를 내며 맞부딪히고 종인의 목울대를 따라 맥주가 시원하게 들어갔다. 울렁거리는 종인의 목젖을 보고만 있던 경수는 서서히 비워져가는 종인의 잔을 보다 자신도 잔에 입을 대었다. 모르겠다, 이제. 경수가 시원하게 맥주 한 잔을 원샷한 모습을 보던 종인은 웃으며 빈 경수의 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
"선배, 취했죠?"
"아니.."
경수는 나른해 지는 몸과 흐트러지는 정신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반쯤 풀린 경수의 눈을 보던 종인은 취했네, 취했어-하며 경수를 보며 깔깔 거렸다. 종인이 채워주는 대로 잔을 비우던 경수는 자신의 주량을 넘어선 것도 모른채 계속해서 잔을 비워 나갔다. 정신 차려야 되는데... 경수는 점점 멀어지는 정신에 아찔해짐을 느꼈다. 정신을 잡질 못하는 경수를 보며 종인이 경수의 팔을 잡고 경수를 일으켰다. 경수의 몸이 힘 없이 축 쳐졌다.
"나가자. 데려다줄게"
경수는 자신을 지탱하는 종인의 몸에 의지해서 한 발, 두 발 걸음을 옮겼다. 호프집 문을 열고 나오자 경수는 자신의 얼굴에 닿는 찬 바람에 정신이 조금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종인과 경수는 경수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했다. 긴 말은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얼마를 걸었을까, 멀지 않은 호프집과 집의 거리 덕에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둘은 곧 경수가 사는 빌라 앞에 다다랐다. 마지막 호프집에서 보다 정신이 조금 또렷해져 경수는 이제 두 발로 자신의 몸을 지탱 할 수 있었다. 종인은 경수가 사는 빌라를 올려다 보며 입을 열었다.
"와, 선배 여기 살아요?"
"응"
"혼자?"
"그럼 누구랑 살아"
종인은 자신의 앞에 볼이 빨개져선 부루퉁한 얼굴로 틱틱거리는 경수를 내려다 보았다. 종인의 자신을 보고 있는 시선을 느낀 경수는 고개를 들어 종인을 보았다. 이제 보니 얼굴도 불그스름한 것이 저 만큼이나 취한 것 같은 종인이었다. 순간이었다, 종인이 경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 당긴 것은.
"이건 내 술주정이에요.
후배 술주정 정도는 들어줄 수 있지?"
종인이 낮은 목소리로 경수의 귀에 속삭였다.
"아, 도경수 쪼끄만게 진짜 딱 알맞네"
종인의 입바람이 닿은 귓 속 부터 손 끝, 발 끝 까지 세포 하나하나가 짜릿하게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종인의 몸에서 진한 알코올 향이 훅 끼쳐온다.
"오늘 왜이렇게 이쁘게 입고 나왔는지 몰라 도경수는"
그 말을 끝으로 종인은 말이 없었다. 그저 가만히 경수를 품에 안고 있을 뿐. 얼마 시간이 지나 종인이 꽤 긴 시간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정말로-"
경수가 깊이 숨을 들이 쉬었다.
"- 도경수는 왜 이렇게 이쁜지 몰라"
종인은 경수를 끌어 당겼던 팔을 풀었다. 종인과 경수의 눈이 마주치고 종인은 '잘자요' 한 마디를 남기고 경수에게서 멀어져갔다. 골목 모퉁이를 돌아 종인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경수는 들이 쉬었던 숨을 내쉬었다. 경수는 종인이 사라진 골몽 모퉁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비밀번호를 치고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경수는 집에 도착하자 마자 옷도 제대로 벗지 못하고 침대위로 쓰러졌다. 아무 힘이 없었다. 경수는 아무 힘 없는 몸에 비해 유난히 또롯한 정신에 눈을 떳다 감았다를 반복했다. 술이 진탕 들어갔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알코올 때문인지 아니면 종인 때문인지 원인 모를 심장의 쿵쿵거림이 새벽 늦은 시간까지 경수를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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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유독 조용한 종인은 다른 의미로 경수의 신경을 긁었다. 평소였으면 자신이 필기하는 노트를 보며 노트 한 구석에 졸라맨 등을 그리며 낙서를 하고 있을 종인이 었는데 오늘의 종인은 이상했다. 아까부터 조용하게 입을 닫곤 오른팔로 턱을 괴고 필기를 해가는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종인에 경수는 신경이 쓰여 제대로 필기를 할 수가 없었다.
"아..."
결국 글자 하나를 잘 못 쓰고만 경수였다. 수업도 안듣고 저게 뭐하는 짓이야. 완전히 수업은 무시한 채 자신의 얼굴만 보고 있는 꼴이라니. 경수는 종인의 모습에 어이없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슬쩍 옆을 보니 입에 미소를 달고 진지하게 자신을 보는 종인이다. 무슨 엄마가 자기를 볼 때 처럼 웃는다. 그렇게 종인을 신경쓰느라 강의시간은 평소보다 빠르게 지나갔고, 경수는 강의가 마치자 마자 재빨리 가방을 챙겨 강의실을 나갔다. 진짜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러는 거래... 바닥을 보며 걷던 경수는 자신의 발에 채이는 벚꽃 잎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경수는 자신의 앞에 활짝 벚꽃을 피운 채 길게 뻗어 있는 벚꽃 길을 보았다. 일렬로 나란히 길 양 옆에 피어있는 벚꽃은 경수네 학교의 명관으로 유명했다. 예쁘게 핀 벚꽃을 구경하며 벚꽃길을 걷던 경수는 아까부터 자신을 따라오는 발소리가 매우 신경쓰였다. 티라도 내질 말고 따라오던가 저렇게 나 너 따라가요 하고 팍팍 티내면서 따라오는 건 뭐람. 아니면 그냥 옆에서 걷던가 앞에서 걷던가 스토커 처럼 왜 뒤를 졸졸 쫓아오는 지 모르겠다. 오늘 정말 왜저래? 경수는 계속해서 뒤에서 느껴지는 종인의 인기척에 걸음을 멈추고 종인을 향해 돌아보았다. 종인 역시 경수를 따라 걸음을 멈춘 상태였다.
"너 왜 자꾸 나 따라와?"
"선배가 좋아서요"
경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몸을 좌우로 흔들거리는 종인을 보았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 경수는 종인을 한 번 흘겨본 후 다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종인의 발걸음 소리도 다시 들려왔다. 뚜벅뚜벅 마치 한 명이서 걷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딱 맞는 발자국 소리였다. 경수와 종인사이의 다섯 발자욱 남짓한 거리는 가까워지지도,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않은 채 딱 일정한 거리만을 유지했다. 종인은 자신의 앞에서 총총 소리를 내며 걷는 것 같은 경수의 뒷모습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아, 벚꽃 한 번 멋들어지게 피었다. 연애하기 좋은 날씨네. 하늘을 한 번 올려다 보고 경수의 뒷모습을 한 번 더 본 종인은 벚꽃엔딩을 부르던 휘파람을 멈추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리로 경수를 불렀다.
"경수야-"
도경수-
우리,
연애하자"
종인의 마지막 말에 총총 거리며 걷던 경수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종인의 발걸음도 덩달아 멈추었다. 종인의 입에선 더이상 휘파람 소리가 나지 않았다. 경수는 종인 쪽으로 몸을 약간 틀었다. 종인은 경수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까전 처럼 자신을 흘겨보는 눈빛. 정말 사나운 고양이가 따로 없네.
"피-"
경수의 김새는 웃음소리와 올라간 한 쪽 입꼬리를 보며 종인은 아랫입술을 내밀고 어깨를 으쓱했다. 경수는 다시 몸을 돌려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갔다. 종인은 혼자 뚜벅뚜벅 걸어가는 경수의 뒷모습을 보며 씨익 웃었다. 종인의 입술이 둥글게 모아지고 다시 종인의 입술 사이로 벚꽃엔딩이 흘러나왔다. 일정한 속도로, 박자로 맞춰 걷던 종인의 발걸음에 조금 속도가 붙었다.
'아, 도경수랑 연애하기 좋은 날씨다.'
벚꽃이 휘날리는 어느 봄날 캠퍼스 안, 종인이 입술을 모아 부르는 벚꽃엔딩이 거리에 낮게 깔리고, 경수와 종인의 거리는 그렇게 조금씩 좁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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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여 이번에도 달달한 연애물로 찾아 뵙네여 원래 쓰던 건 이게 아니라 프로포즈하는 얘긴데... 그 얘기 쓰다보니까 둘이 처음 만나는 부분이 되게 길어지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그 부분을 떼서 조각으로 만들었다는.... 이번에도 다 쓰고 다시 안 읽어 봤어요 하ㅏ하하하핳 이번데도 하루만에 막 쓴... 저 되게 막 쓰네요 팬픽 프로포즈 단편도 반은 써놨으니 아마 이번주 안에 다 쓰지 않을까 싶어요. 이 캠퍼스연애담은 vol.2 까지 나올 계획이에요. vol.2도 쓰는 중에 있고 그건 닼닼해 질.. 수 도 있는데 그러면 캠퍼스연애담이 아니네여... 그래서 그냥.. 전 또 달달하려구요.. 정말 달달한 것만 쓰려니 제 오장육부가 되게 뒤틀리는 느낌이랄까.. 결론은 앞으로 나올 달다랃라다라다랃라ㅏ랃라달 한 단편이 2개나 더 있다는... 전 언제쯤 닼닼한 걸 쓰죠? 나도 수위좀 하ㅜ히ㅏ주힏주리우ㅐㅇ 사실 닼닼한 것도 도입은 써놨는데 말이져. 쓸 시간이 안나네여. 말이 길어진다 그럼 저는 이만..!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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