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형. 형, 형. 형!
"으응?"
"무슨 생각 한다고 사람 말을 못 들어."
"아니야. 왜?"
"우리 월요일에 놀러가자."
"우리 둘이?"
"오랜만에 데이트 좀 해야지."
김종인은 맞잡은 손을 앞뒤로 크게 흔들었다. 나의 팔이 덩달아 덜렁거렸다. 데이트. 그것은 일반 남자 둘이 가는 짧은 여행에 붙이기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일반의 남자들이면서도 그렇지 않았기에 우리에게 그 세 글자는 오히려 가슴이 설레는 것이었다.
어디 가지? 형 바다 가고 싶댔 잖아. 겨울 바다 좋은데 우리 바다 갈까? 섬은 어때? 확 배 끊겨버리게.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야설스러운 농담을 뱉어낸다. 형 나 믿지? 그 말에 나는 결국 내 머릿속을 지배했던 고민들을 지워버리고 픽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웃었네."
"니가 웃겼잖아."
"요즘 통 안 웃었잖아."
그랬나. 그랬겠지. 내 머릿속 고민들은 웃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김종인이 저 말을 할 정도라니 그렇게 표정이 별로였나, 이런 생각은 미안함이 들게 했다. 늘 헤어지던 집에서 조금 떨어진 가로등 앞에서 김종인의 발걸음이 멈췄다. 한 뼘이 큰 키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눈빛은 언제나 따뜻한 것이어서 나는 가끔 그 눈을 맞추기가 힘들 때가 있었다. 마치 지금처럼 다정한 손길로 내 목에 둘러진 워머를 바로 정리해 주는 그런 간지러운 행동이 따라올 때.
"요 앞인데 집..."
내 말은 우리 집은 바로 코앞이니 굳이 워머를 예쁘게 정리해줄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다. 부끄러움에 나온 마음에도 없는 말이었다. 김종인은 나를 잘 알았다. 베이지색의 두꺼운 워머로 볼을 은근슬쩍 가려버리는 행동에 나는 더욱 부끄러워진다. 얼마나 또 빨개졌을까.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시원하게 벌어진 입매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나도 다시 매 줘."
이런 어린애식의 투정은 김종인을 귀엽게 하는 것 중 하나였다. 예쁘게 감았던 와인색 목도리를 굳이 다시 풀고 내게 다시 매어 달라 투정한다. 나는 목도리를 예쁘게 감지 못했다. 덜렁거리는 질감 좋은 목도리 양 끝을 두 손에 쥐고 어떻게 감지 고민하고 있으니 무릎을 조금 접에 내게 시선을 맞춰온다. 딱 맞은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눈빛은 위에서 내려오는 것보다도 더 참기 힘든 것이었다. 고동색 눈동자엔 아주 가깝게 내가 담겨 있었고 그것은 내게 나와 눈을 맞추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눈 둘 곳을 잃어 버벅거리며 맨 목도리는 제법 맵시가 있게 매어져 있었다.
"예쁘게 했네."
김종인은 멋있는 사람이다. 특히 특유의 쌍꺼풀 짙은 눈을 세모꼴로 접으며 시원한 입매로 깊은 보조개와 함께 웃을 때는 더욱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적당한 구릿빛 피부 톤과 몸 사이사이에 자리 잡은 잔근육들, 선천적으로 비율 좋은 바디는 김종인을 섹시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연락 할게."
"응."
"들어 가."
"먼저 가."
"떽. 빨리. 나 춥다."
이마에 가볍게 붙었다 떼어지는 입술. 손을 흔들어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입구에 들어가기 전 한 번 더 뒤를 돌아보면 그 자리 그 곳엔 나를 바라보고 있는 김종인이 서 있다. 가로등 아래에서 큰 키를 자랑하며 서 있는 김종인. 돌아본 내 시선에 머리 위로 큰 하트를 만들어 몸을 좌우로 흔들거리는 김종인.
김종인은 도경수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왜 이렇게 춥게 입었어.”
“어차피 실낸데.”
“그래도 추울 건데.”
겨울 바다니 뭐니 했던 말이 우습게도 우리가 일요일에 간 곳은 스케이트장이었다. 안타깝게도 한 달 전 거금을 들여 스키장 여행을 다녀온 덕에 우리의 형편은 어딘 가로 떠날 것이 되지 못했다.
“아쉽다.”
“바다 못 가서?”
“형 못 잡아먹은 거.”
눈을 흘기는 내게 농담이라며 실실 웃었다. 나는 스케이트를 잘 타지 못했다. 인라인스케이트 하나 제대로 탈 줄 모르는 내게 얼음판 위에서 타는 스케이트는 더 쥐약이었다. 이 년 전, 김종인에 의해 어거지로 갔던 스케이트장에서 김종인 없이는 옴짝도 못해 질질 끌려다니던 일 이후로 스케이트장은 피하던 곳이었다. 어이없게도 오늘 나를 끌고 온 김종인은 그 모습이 귀엽다며 끌고 왔지만.
나는 스케이트장에 둘러진 난간과 김종인의 한 팔에 의지한 채 힘든 걸음을 떼었다. 그는 그런 나를 보고 자지러지듯 웃었고 내 손을 놓는 척 장난을 치기도 했다. 그 시간은 달콤한 것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머릿속 모든 고민을 뒤로한 채 김종인과의 시간에 집중했고 그건 그만큼 값진 시간이었다. 김종인만이 내게 줄 수 있는 기쁨. 나에게만 줄 수 있는 것. 나는 그것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행운아였다. 그리고 이 행운을 더 오래 유지하기 위해선 지금 내 머릿속 고민을 반드시 풀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실컷 스케이트를 타고 잠시 추위를 식히러 나온 스케이트장 내 매점에서 김종인이 말했다.
“형”
“응?”
“요즘 무슨 고민 있어?”
“어? 아니... 왜?”
“그냥. 너 요즘 계속 멍때리니까.”
“아...”
“고민 있으면 나한테 바로 말해. 맨날 형 혼자 알고 말야...”
김종인은 꽤나 섭섭한 기색을 띄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우리 부모님께 말씀 드리자.’
애석하게도 머릿속에서 뱀뱀 맴도는 말은 입으로 꺼내기가 너무도 어려웠다. 그 말이 아슬아슬하지만 너무도 행복한 이 시간을 한 순간에 깨뜨릴 수 있다는 걸 무엇보다 잘 알기에. 나는 김종인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나를 껴안아주는 김종인의 어깨에 기대 눈을 감았다. 다음에, 다음에. 나는 오늘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 뒤로 두 시간이나 스케이트를 탄 뒤에야 우리는 그곳을 나왔다. 함께 샀던 검은 털모자로 귀를 단단히 가리고 손을 잡고 걸었다. 가까운 설렁탕집에서 따뜻한 국물로 몸을 녹이고 지하철에 탔다. 저녁 시간이라 사람으로 가득 찬 지하철 안에서 김종인은 손잡이를 잡았고 나는 김종인의 앞에 서서 나를 지탱해 주는 그의 힘에 의지해 안전하게 서있었다. 손잡이를 잡고 있는 오른손 대신 왼손을 앞뒤로 잡고 있던 우리에게 앞에 앉은 여자 승객의 시선이 닿았다.
“에이”
“......”
“또 그런다.”
순간적으로 빼려던 손을 단단히 붙잡은 건 김종인이었다. 나만이 들리게 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결국 얼굴이 붉어졌고 나는 그것을 지하철 유리에 비친 모습을 통해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같은 길을 걸었다. 몇 정류장을 더 가야하는 김종인은 늘 나와 함께 내려 집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이 일이 이 년을 넘어갈 때부터 나는 그를 포기했다. 이제는 자연스러웠다. 오히려 없으면 섭섭하기 까지. 같이 보고 싶은 영화를 얘기하고, 다시 만날 약속을 정하는 사이 우리는 또 그 가로등 앞에 섰다. 고개를 돌려 아파트를 올려다보면 나의 집이 보인다. 나는 종종 저곳에서 누군가 우리를 보고 있진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집을 올려다보곤 했다.
김종인은 나의 손을 매만졌다. 손가락을 간지럽게 만지작거렸고 나는 이것으로 김종인이 나를 그냥 보내기 싫다는 뜻을 어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만지작, 만지작. 조금 튀어나온 입술은 내 추측에 힘을 실었다. 이것역시 김종인을 귀엽게 하는 것이었다. 검은 뜻을 품고 하는 행동이 어린아이의 보챔 수준인 것은 나 역시 그를 그냥 보내기 싫게 만들었다. 나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언제나 고요한 골목. 먼저 발뒤꿈치를 들고 입을 맞췄다. 목에 팔을 두르고 발뒤꿈치를 든 채 끙끙거리며 입 맞추는 내 모습은 김종인이 열광하는 것 중 하나였다. 자연스럽게 입술이 열렸고 우리는 혀를 섞었다. 허리를 죄여오는 단단한 팔에 나는 그의 목을 더 끌어안았다. 부드럽게 서로의 입 안을 배회하는 핑크빛의 두 살덩이. 끈적하고 뜨거운 키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일은 언제나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애석하게도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너무나도 나쁜 일이었다. 뜨거운 입맞춤을 순식간에 차게 식어 버리게 만들만큼 그 목소리는 내게 너무 절망적인 것이었다.
“경수야...”
분명하게 그 목소리는 내 귀에 들려왔다. 나도, 김종인도 행동을 멈추었다. 삽시간에 그 열기는 사라졌고 우리에게 남은 건 서늘한 불안감뿐이었다. 부비던 입술을 떼고 빳빳하게 굳어진 고개를 돌렸다. 아주 멀지 않은 곳에 그녀가 있었다. 못 볼 것이라도 본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몸을 바들바들 떠는 그녀,
"...엄마..."
엄마. 나와 나의 남자친구와의 뜨거운 키스를 목격한 사람은 불행히도 나의 어머니였다. 나는 아주 날카로운 소음을 들었다. 작은 금이 가는 소리. 그 금은 점점 커졌고 결국 위태롭던 우리의 세상은 깨졌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들이 무너졌고 그 안에 있던 우리는 헐거벗은 채였다. 끔직했다. 이것은 내가 생각했던 모든 전개 중 가장 최악이며 끔찍한 것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이 상황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 행동이었다. 이것이 제발 꿈이길 바랬던 나의 도피. 다시 눈을 떴을 땐 불안한 눈빛을 띤 김종인과 여전히 몸을 바들바들 떠는 나의 어머니가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는데... 이런 식으로 들키는 건 원하지 않았는데. 김종인의 손을 잡고, 정식으로 옷을 차려입고 형식적인 과일 바구니 하나를 손에 들고 엄마, 내 남자친구야. 그렇게 밝히고 싶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나는 그녀를 향해 나아갔다. 김종인의 손을 끌고, 엄마와 세 발 걸음 떨어진 곳에서 말했다.
“엄마.”
“.......”
“인사해. 종인이야. 김종인.”
“......”
“내 남자친구.”
스파크. 나는 강렬한 스파크를 맛보았다. 두꺼운 대나무로 된 매를 휘두르던 그녀의 힘은 여전했다. 처참하게 돌아간 내 얼굴엔 붉은 손자국이 남았다. 왼쪽 볼이 따끔거렸다. 불어오는 겨울바람은 고통을 더욱 부추겼다. 그 상황에서 김종인은 나를 감쌌다. 돌아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내 몸을 돌려 부어오른 뺨을 살폈다. 차갑게 식은 손으로 맞은 뺨을 감싸려는 팔을 쳐낸 건 엄마였다. 둔탁한 소리가 났고 나는 엄마의 뒤로 끌려 났다. 김종인의 앞에 서 있는 건 내가 아닌 엄마였다.
“어, 어머님...”
“누가 어머님이에요. 당신 어머님 아닙니다.”
“경수...”
“제 아들 다신 만나지 마세요.”
지나치게 딱딱한 말투였다. 당신은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고 남이기에 예의를 갖춘, 엄마의 평소 신념이 그대로 들어난 말투. 나와 김종인의 사이를 엄마는 순식간에 남으로 갈라버렸다. 이 년 동안의 사랑을 순식간에 없던 것으로 만들었다. 억센 손길로 나를 끌고 들어가려는 그녀의 앞을 김종인이 가로 막았다.
“어머님, 저희 사랑합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하는 그 말에 나는 그런 드라마틱한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왔다. 두 사람의 시선은 내게로 집중됐다. 그저 도망치지 않고 당당하게 말할 줄 아는 김종인이 기특해서 나는 웃었을 뿐이다.
“미쳤니 드디어?”
“아니.”
“나는 내 아들이 멀쩡하다고 생각했다.”
“멀쩡해 나.”
“상식은 갖춘 아들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상식이 아니라 그냥 오래 전해진 관습이야 엄마.”
엄마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내게서 등을 돌려 단호한 목소리로 김종인에게 말할 뿐이었다.
“제 아들 다신 만나지 마십시오.”
“어머님, 저희 정말 사랑...”
“아무 데나 갖다 붙이면 다 사랑인 줄 알아요?”
“어머님...”
“어디 남자랑 남자가...”
“.......”
“다신 경수 찾아오지도, 만나지도 마세요.”
나는 그녀의 손에 힘없이 끌려갔다. 김종인의 표정은 참혹했고 슬퍼 보였다. 죄책감도 살짝 엿보이는 듯 했다. 우리는 끝까지 시선을 맞췄다. 김종인 곁을 지나가면서 스쳤던 마지막 손가락의 감촉. 그 온기를 기억하며 우리 모두 잠시 동안의 이별을 예상할 수 있었다.
나는 방에 패대기쳐졌다. 엄마는 억센 손으로 나를 방 안으로 밀어 넣었고 바닥을 구르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착잡했다.
“그만 해라.”
“싫어...”
“얼마나 됐어.”
“사 년.”
눈이 휘둥그레진 엄마는 혀를 찼다.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여전히 맞은 왼쪽 뺨은 쓰라렸다.
“엄마를 사 년이나 속이니 좋든?”
“속인 거 아냐.”
“뭘 아냐!! 엄마랑 아빠, 둘 다 바보 꼴로 만들고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찢어질 듯 높은 목소리는 공기를 가르고, 방안을 울렸다. 엄마를 보지 못했다. 나는 엄마의 목소리에서 물기를 읽었다. 처절한 외침이었고 모든 걸 부정하는 태도에 나는 힘없이 작아지고 말았다. 이 년 동안 견뎌낸 모든 시선과 나를 품어 낳은 사람의 경멸은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나를 밴 사람에게서 부정당했고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작아졌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짓눌렀던 죄책감과 미안함이 결국은 터져버렸다. 매일 같이 마주하는 엄마를 볼 때 마다 먼저 돌렸던 시선. 죄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놓지 못했다.
“그냥, 말 안 한 거뿐이야.”
“못 한 거겠지.”
“......”
“네가 생각해도 이건 말이 안 되니까. 아무한테도 말 못했겠지. 이건 잘 못 된 거니까.”
“....아니야...”
“당분간 집에서 나가지 말아라.”
쾅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닫혔다. 힘이 없었다.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졌고 꼭 지옥과도 같았던 아까의 일들을 떠올렸다. 집 앞에서 아쉬움에 나눴던 입맞춤부터 엄마의 경멸 어린 눈빛. 우리는 옳지 못하다고 단호하게 말하던 목소리, 잡아끄는 거친 손길. 나는 오늘의 데이트에서까지 우리가 당당하게 인정받을 것을 꿈꿨다. 그것은 내가 최근 가장 고민하던 문제이고 또 김종인과 함께 풀고 싶은 문제였으니까. 어이없게도 나는 그에게 말을 꺼내기도 전에 우리의 관계를 들켜버렸다. 그것도 아주 좋지 않은 상황에서 말이다.
나의 꿈이 헛되다는 걸 증명하듯 엄마는 나를 김종인에게서 아주 멀리 떼어 놓았다. 나는 힘없이 끌려 왔고 김종인도 나를 붙잡지 못했다. 위태위태하던 관계에는 단단한 벽이 생겼다. 우리가 서로를 잡지 못한 것은 단한가지 이유였다. 당당하지 못해서. 우리는 4년 동안 사랑을 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연애했고 남부럽지 않은 사랑을 나눴다. 우리에게 따라붙는 시선을 모르지 않았다. 너무나도 잘 느껴지는 것이었고 그것의 끝은 너무도 날카로웠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는 그 누구보다도 우리가 잘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를 놓지 못했다. 지독하게 그 모든 것들을 보지 않은 척 담담하게 연기했다. 그 모든 것을 애써 무시할 만큼 안타깝게도 우리는 너무도 깊은 사랑을 나누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언젠가는 맞부딪혀야 했던 장애물. 우리는 그 앞에서 순식간에 힘을 잃었다.
일주일. 나는 오로지 방에 갇혀 지냈다. 일찌감치 엄마가 가져간 휴대폰과 노트북 덕에 바깥, 아니 김종인과의 모든 연락은 차단되었다. 우리가 군대를 갔었을 때 이후로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는 적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이 시간은 낯설고 외로웠다. 나는 주로 방에 오도카니 앉아 창 밖 하늘을 보았다. 눈도 오고, 구름도 끼고, 맑았다가 흐려지던 하늘을. 엄마는 내게 정해진 시간에 밥을 가져다 주었다. 늦잠을 자 11시 쯤 일어나면 12시에 밥이 들어왔다. 그리고 6시에 또 한 번의 밥이 들어왔다. 우리는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엄마가 나를 이 방에 가둔 것은 어릴 때 엄마의 교육방식이 그대로 적용된 것이었다. 내가 어릴 적, 잘못을 하면 집 안 가장 어두운 구석에서 벽을 본채로 서있어야 했다. 엄마는 그 공간을 반성의 상자라고 불렀고 나는 엄마가 만든 가상의 상자 안에서 잘못을 뉘우쳐야 했다. 지금 나의 처지는 단지 그 반성의 상자가 크기가 커지고 실제적이게 되었다는 것만 빼면 그때와 같았다. 상자에 갇혀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고 그 다음에 내가 스스로 내 잘 못을 말하고 그것에 대해 뉘우친 내용을 직접 듣는 것이 나를 상자 안에 집어넣은 엄마의 마지막 일이었다. 어릴 적 나는 그 상자 안에서 내 잘못 보다는 엄마가 무엇에 화났는지를 찾았다. 나는 그것을 잘 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엄마와의 바람과는 맞지 않게도 말이다.
이 십년에 가까운 시간이 더 흐른 지금, 상자 안에 갇힌 나는 떠올린다. 엄마가 내게 쥐어준 속죄의 시간 동안 내가 떠올린 것은 김종인이었다.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모두에게 죄스럽게도 나는 여전히 너무도 김종인을 사랑했다. 이것은 잘 못이 아니었으니까, 틀린 게 아니니까. 나는 이 십 년 전처럼 엄마가 싫어하는 일을 찾아낼 필요가 없었다. 이미 너무 명백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나는 이번엔 엄마에게 그것의 일말이라도 말 할 수가 없다. 내가 죄스러운 것은 내가 남자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이 바라는 아들이 되지 못하는 그것에 대한 마음이었다.
입맛이 돌지 않았다. 밥을 먹지 않았고 엄마는 화를 냈다. 나는 이불안으로 몸을 숨겼다.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김종인을 생각했다. 그와 함께 했던 마지막 저녁 식사를 떠올렸다. 서랍 안에 넣어 두었던 김종인이 준 몇 장의 폴라로이드 사진들에 의지한 채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 나는 언제 이렇게 나는 김종인에 죽고 못 사는 애가 된 거지, 그런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곧 그것이 어리석은 질문인 것을 깨닫고 픽 웃고 말았다. 대학교 2학년, 신입생 환영회에서 쑥스러운 낯빛으로 앉아 있는 녀석을 발견한 순간부터 김종인은 내게 갖고 싶은 사람이었고 그가 내 품에 안긴 지금은 죽어도 놓치기 싫은 사람이었으니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 그 말이 거짓이란 걸 증명하듯 내 마음은 너무도 애틋해져버린 것이었다.
엄마와 나의 대립이 이주에 가까운 시간 동안 계속 되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엄마는 아빠에게도 그리고 누나에게도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의도는 뻔했다. 묻으려고 하는 거겠지. 혼자 덮어버릴 생각이겠지. 우리의 사랑을 없던 일로 만들려고 하는 거겠지. 나는 엄마를 이해했다. 하나 뿐인 아들이, 집 안에 대를 이어야 할 아들이 생물학적으로 같은 남자를 사랑한다니. 이 세상 어느 엄마라도 그 사실에 충격을 먹지 않을 순 없을 거다. 그래서 나는 커밍아웃 하는 것을 망설였고 하지만, 그렇다고 엄마는 나를 부정해선 안 되는 거다. 낳아준 부모의 은혜는 하늘 같이 높은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그 사랑을 부정해서는 안 되는 거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녀의 행동은 너무나 잘 이해되면서 동시에 나를 처연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는 내게 든 생각은 가여움이었다. 가여웠다. 나도, 김종인도, 우리 모두 가여웠다. 그래서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방 밖을 나왔다. 함께 식사를 나누는 나의 누나와 엄마, 아빠. 식탁 옆에 서서 나는 아빠를 불렀다.
“아빠.”
“응?”
“.....도경수”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아들에 아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엄마는 낮게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지나치게 무표정한 얼굴로 엄마를 보았다. 엄마의 옆 벽에는 큰 액자에 성경 구절이 쓰여 있었다. 아, 우리 집안 기독교 집안이었지. 예수님, 죄송해요. 하지만 저는 당신을 믿은 적도 없는 걸요. 당신이 존재한다면 우리가 좀 행복하게 사랑할 수 있게 해주지 그랬어요. 그리고 엄마, 미안한데 엄마가 짐작하는 게 맞아. 미안해.
“저 남자 좋아해요.”
싸늘한 정적이 찾아왔다. 누군가 물을 끼얹은 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서늘했다. 누나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고 아버지의 젓가락질을 멈추었다. 엄마는 그저 눈을 감고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 공간에서 담담한 건 오직 나뿐이었다. 정지해 두었던 비디오가 재생되듯 멈췄던 아빠의 젓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내 말을 무시해버린 그의 손은 애처롭게도 바들거렸다. 아빠는 집으려던 콩나물 집기에 결국 실패하고 젓가락을 식탁에 내려 놓으셨다. 그리고 물을 마셨다. 투명한 유리컵 안에 남은 약간의 물이 그의 손바닥 안에서 바다처럼 출렁거렸다.
“못 들은 걸로 하겠다.”
식탁에서 일어나면서 아빠가 한 말은 그것이었다. 내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그는 느릿하게 걸어 안방으로 향했다. 나는 끝까지 그를 보았다. 떨리는 다리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아버지, 나의 아버지. 죄송합니다. 저는 당신이 기대하는 아들이 되지 못해요.
“아빠.”
“......”
“저 남자 좋아해요. 애인도 있어요. 사 년 동안 만났고요, 한 달 전엔 같이 여행도 갔어요.”
“도경수, 그만해.”
내 말을 가로막은 건 엄마였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멈추게 하지 못 했다. 나는 이미 하나의 시한폭탄이었다. 이미 불이 붙었고 더 이상 나는 그것을 터뜨리는 것 밖에 남지 않았다. 시간이 다 되어버린 시간폭탄. 더는 멈출 수 없었다.
“김종인이라고 한 살 어린 애에요. 키도 커요, 182. 몸도 좋고 잘생겼어요.”
“......”
“같은 학교 후배에요, 학과도 같아요. 내가 반해서 걔한테 고백했어요. 내가 먼저, 니가 너무 좋다고 울면서 매달렸어요. 내가 꼬셨어요. 바로 아빠 아들이요.”
“...그만 해라.”
“아니요, 저는 다 말할 겁니다. 전부 다 말할 거 에요. 우리 같이 영화도 보고 데이트도 했어요. 커플로 산 운동화도 있고 휴대폰도 사실 커플 요금제에요. 어버이날에 아빠한테 선물한 홍삼, 그것도 종인이가 준 거에요. 몰랐죠? 저 옛날에 엠티 간다고 거짓말 치고 둘이 부산 여행도 갔어요. 우린 같이 키스도 하고 잠도 잤어요. 잤다 구요 우리. 어디서 어떻게 했는지도 다 말씀해 드릴까요?? 아니, 말 하려면 끝도 없...”
“그만 해!!”
“아빠 아들이에요, 그것도 아빠 아들이라구요!! 우리는 남들 하는 거 다 했어요. 남들이랑 똑같이 연애했구요. 다른 거 하나 없어요. 남들 보다 더 사랑했으면 했지 그거 말 곤 없어요.”
“.......”
“왜, 근데 대체 왜 우리를 부정 하세요...”
문은 닫혔다. 큰 소리를 내며 굳게, 다시는 열 수 없을 것처럼 작은 틈 하나 없이 닫혀 버렸다. 그 문에 대고 나는 소리 질렀다. 우리를 부정하지 말라고, 남자를 좋아하는 도경수도 당신 아들이라고,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라고.
“인정해 달라고 안 했잖아요, 허락해 달라고 안 했잖아요!!”
“경수야, 그만 해!”
“그냥 우리 둘이 부정만 하지 말라 구요, 제발, 제발!”
“......”
“우리 그냥 사랑만 하게 해주세요, 아버지, 아버지...”
결국엔 눈물이 터졌고 나는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팔이 붙잡혀 엄마에 의해 방으로 끌려갔다. 여전히 눈물을 멈추지 못한 채로 내 눈물 자국들을 바닥에 남기며 그녀의 손에 의해 다시 그 외로운 공간에 갇히고 말았다. 나는 이곳이 숨이 막혔다. 빠져 나갈 수 없는 상자에 갇혀 호흡곤란을 느끼는 것 같았다. 바닥을 기며 울었다. 창피한 것도 모른 채 눈물이 범벅이 된 채로 오열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엄마, 어떡해... 나 종인이가 너무 보고 싶어, 엄마, 엄마...”
방을 빠져나가려는 그녀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엄마, 엄마. 종인이 한 번 만 만나게 해줘. 종인이가 너무 보고 싶어. 죽을 거 같아 엄마. 엄마, 엄마. 종인이, 김종인.... 떨리는 몸을 일으켜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엄마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것은 나와 같은 짠맛의 눈물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신경 쓰기엔 나는 너무도 처절했다. 제대로 된 이성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오로지 본성으로 나는 두 다리로 일어섰다. 고개를 돌린 채 흐느끼는 그녀의 등을 보면서 말했다.
“엄마 생각해보니까...”
“......”
“우리가 왜 이러고 있지.”
“.....”
“따지고 보면 엄마랑 상관없는 일 아니야?”
“......”
“부모가 뭔데 우리 사랑을 인정하네 마네...”
“......”
“우리는 왜 못 만나고 있는 거지?”
“......”
“나, 종인이 만나러 갈래.”
그것은 내가 이십 오년 인생을 살면서 통틀어 저지른 가장 큰 불효였다. 그 말을 하고 나는 옷걸이에 걸린 외투를 찾았다. 초점 없는 눈으로 팔을 더듬으면서 집히는 대로 옷을 꺼냈고 외투에 한 쪽 팔을 꿴 상태에서 다른 한 팔을 넣으려고 할 때 내 몸이 뒤로 돌려졌다.
짝,
짝,
짝,
짝,
짝.
그녀는 사정없이 내 뺨을 내리쳤다. 나는 맞고, 맞고 또 맞았다. 더 이상 아픔도 느껴지지 않는 상태에서 고개가 돌아갈 때 마다 나의 이성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성을 차린 내게 가장 처음 보이는 것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나를 보는 엄마였다. 붉어진 눈시울로 아픈 내 볼 만큼 아플 손바닥으로 날 내려치는 엄마. 절망의 끝을 본 눈동자로 나를 보는 엄마. 비로소 나는 모든 것이 무너졌음을 깨닫는다. 나의 가족도, 나의 가정도, 나의 사랑도, 그리고 나도.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음을 실감한다.
“미안해, 엄마...”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녀는 내리치던 손을 멈추었다. 대신 나를 끌어안고 서럽게 울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어머니의 울음이었다. 나는 그녀를 다독여주지도 못한 채 그저 티셔츠가 젖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나 역시 눈물을 흘렸다.
“대체, 왜... 왜 너는 대체....”
“......”
“엄마가 뭘 그렇게 잘 못 했다고...”
엄마는 잘 못한 거 없어. 그리고 나도.
나는 끝끝내 그녀에게 김종인과 헤어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원망하는 말에 미안, 그 두 글자로 그녀를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나는 죽어도 효자는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밤이 오래도록 눈물을 쏟아냈다.
그 날 이후로 집 안엔 웃음소리가 나지 않았다. 나는 오래도록 아버지를 보지 못했고 전과 다름없이 방에 갇혀 시간을 보냈다. 아주 가끔 늦은 밤에 누나는 나를 찾아와 말했다.
‘너 때문에 집이 엉망이 됐어.’
그녀는 피곤해보였다. 인상을 썼고 나로 인해 망쳐진 자신의 평화롭던 가족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망쳐버린 것들이 모두 실제가 되어 다가왔다. 나로 인해 흐트러지고 쓰러진 모든 것들. 나는 점점 나약해지기 시작했다. 잘 때 마다 머리맡에 놓고 자던 사진들은 보기 싫게 구겨졌고 위로 받으려 곱씹던 추억들은 더 이상 위로가 아닌 슬픔으로 다가왔다. 결국, 내게 필요한 것은 김종인이었다. 행복과 사랑을 줄 나의 김종인.
나는 김종인이 필요했다. 만약 신이 세상에 나 혼자만이 살아남았을 때 함께할 한 사람을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김종인을 말했을 것이다. 김종인이 주는 행복은 유일하다. 나는 그 누구에게서도 그런 행복을 누릴 수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나는 오직 둘이 남게 될 세상에 김종인이 있다면 그것은 그다지 무섭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설사, 김종인은 그렇지 않을 지라도.
날짜 개념이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오늘이 월요일인지, 화요일인지 아니면 주말인지 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잠을 잤고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오늘도 다름없이 눈을 떴을 때, 나는 내 몸이 좋지 않다는 걸 한 순간에 느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몸은 누구에게 매타작을 맞은 듯 전신이 아팠다. 엄마는 내 이마를 짚어보곤 황급히 물수건을 찾아 들고 왔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휴대폰을 꺼내들고 누나에게 전화했다.
“너 할머니 댁 안 갈 거지. 들어와서 경수 간호나 해.”
나는 오늘이 설날인 것을 그 때 처음 알았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가만히 누워 있었다. 내 이마에 차갑게 적신 물수건을 올려둔 그녀는 내게 당부했다.
“연락할 생각 하지 마.”
“.......”
“희수 곧 온다니까 죽 끓여 달라고 해.”
그 말만을 남기고 그녀는 내 방을 나갔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도어락 닫힘음이 곧 들려왔다. 정적에 휩싸인 집안. 그들이 집을 떠나자마자 나는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찔한 시야를 바로잡고 안방으로 달려가 닥치는 대로 서랍을 뒤졌다.
“휴대폰, 휴대폰, 폰....”
있을 리가 없지. 안방을 엉망으로 만든 채로 거실로 나갔다. 티비 옆에 놓여 있던 인터넷 전화 역시 사라졌다. 손이 달달 떨렸다. 급하게 집을 나갔다. 나는 옆집의 초인종을 미친 듯이 눌렀다.
“..누구세요?”
“아줌마, 저에요. 저, 경수. 경수.”
내 목소리를 확인한 옆집 아줌마는 토끼 눈으로 문을 열었다. 머리카락이 땀에 축축한 채로 식은땀을 흘리는 내 상태를 확인한 그녀는 기겁을 하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아줌마, 전화 한 통만 빌려주세요. 제발요. 제발.”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았다. 겁을 먹은 듯 그녀는 급하게 집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휴대폰을 가져다 주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다이얼을 눌렀다. 공... 일... 공.....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대로 다이얼을 입력하지도 못하는 나를 보며 그녀는 천천히 하라며 나를 안도시켰다. 힘겹게 숫자 열한 개를 입력하고 통화 버튼을 누르자 늘 그렇듯 익숙한 수화음이 들렸다.
“..여보...”
“종인아!!”
“...형? 경수형?”
“종인아, 보고 싶어. 집에 와. 응? 지금 빨리... 빨리....”
형, 집이에요? 알았어요. 나 지금 갈게. 그렇게 대답하는 목소리를 확인하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수상쩍게 쳐다보는 그녀의 손에 휴대폰을 쥐어주고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녀는 됐다며 그만 나가라고 했고 나는 집 도어락 앞에서 비밀번호를 바꿨다. 30분이 흘렀다.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뛰쳐나가 문을 열었고 그리고 문 앞에 서있는 건.
“형, 형...”
아, 김종인.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김종인의 뒤로 철컥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왜 이렇게 야위었니. 전엔 그렇지 않았는데 닿는 곳 마다 딱딱한 뼈마디다. 결국 울컥하고 말았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눈시울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우리는 더 세게 껴안았다. 체력이 현저하게 저하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흥분을 한 탓에 다리가 풀려 그대로 신발장에 주저앉았다.
“형, 열이 대체....”
그 감격적인 재회의 순간 어이없게도 나는 김종인의 얼굴을 채 5분도 보지 못한 채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이마에 물수건을 올리는 손길은 내가 좋아하는 김종인의 예쁜 손이었다.
“거의 한 달 만에 다시 본 건데.”
“......”
“보여주는 게 아픈 모습이야?”
말투는 꽤나 비꼬는 것처럼 들렸지만 말하는 목소리는 걱정이 담뿍 배여 있었다. 배를 쓰다듬는 따뜻한 손길에 나는 편안함을 느꼈다. 아, 이게 얼마만인가. 우리 정말 얼마만이지. 니 온기가 대체 얼마만이지.
“...왜 또 우려고 해.”
“안 울어....”
내 코끝을 아프지 않게 집는다. 그렇게 보고 싶던 얼굴인데 막상 옆에 있으니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나는 내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누우라고?”
고개를 끄덕이자 멋쩍게 웃는다.
“나 누우면 형 좁아서 불편해.”
하나도. 전혀. 이번엔 고개를 저었다. 내 고집을 잘 아는 김종인은 별 수 없다는 듯 내 옆자리로 들어왔다. 내 머리 뒤로 팔베개를 받쳐 주는 것에 나는 몸을 옆으로 돌려 오랜만에 넓은 품에 안겼다. 여전히 은은하게 나는 김종인 특유의 스킨 냄새는 언제나 좋았다. 그것을 더욱 느끼려 품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불편하지?”
“아니이.”
머리카락을 만지는 손도, 뜨거운 몸도, 예쁜 입술도, 짙은 쌍커풀도 모두 김종인이었다. 다행이다. 너는 여전해서.
“왜 이렇게 말랐어.”
“니가 더.”
볼을 꼬집혔다. 봐봐. 잡히는 게 없잖아. 볼멘소리를 내는 것에 손가락을 깨물어버리니 몸을 떨며 웃는다. 나는 행복감을 느낀다. 닿아있는 김종인의 체온은 나를 덥히고 마음까지 풍요롭게 만든다. 우리는 그렇게 끌어안은 채로 오랫동안 가만히, 잠에 들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 때였다.
삐삐삐삐삐삐, 삐이-
“...경수형.”
나는 김종인의 허리를 더욱 끌어안았다. 지금은 아무 생각 하지 말자.
삐삐삐삐삐삐, 삐이-
한 번 더. 그 다음은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애써 그 소리들을 무시했다.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상태가 그대로 내게 전해졌다.
“야, 도경수!!! 문 열어 미친놈아!!!!!”
종인아, 우리 오랜만이잖아. 그러니까 지금은 우리 둘 만 있자. 신경 쓰지 말자 아무도.
“형...”
김종인도 나를 더욱 힘주어 안았다. 내 뜻을 이해한 듯 했다. 비로소 나는 몸에 주고 있던 힘을 풀었다. 집 안엔 여전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초인종 소리, 도희수의 고함소리가 섞여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너 엄마한테 연락했어. 이제 끝일 줄 알아, 이 더러운 호모 게이 새끼야.”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의 잡음은 들리지 않았다. 우리의 공간도 쥐 죽은 듯 고요했으며 아무도 그 불안한 정적을 깨뜨리지 않았다. 김종인은 나의 등을 다독였다. 마치 유치원 어린 아이를 달래는 부모처럼 한 없이 다정한 손길로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괜찮아?”
“응.”
난 괜찮아. 나는 가슴팍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나를 내려 보는 까만 눈동자. 그 것은 나를 빨아 당겼고 할 수만 있다면 그 속에 잠기고 싶었다. 나는 아주 오래 보지 못했던 그를 다시 머릿속에 새겼다.
“...넌 왜 마르고 그래.”
아무리 봐도 속상했다. 살이 홀쭉하게 빠져 날카로워진 턱이 안쓰럽기만 했다. 나는 손 끝으로 그의 얼굴을 만졌다. 오늘이 지나면 언제 다시 볼지 몰라. 모든 것을 새겨야 했다. 손끝은 잘생긴 이마를 훑고 높은 콧대를 스치고 짙은 쌍꺼풀을 따라가고 예쁜 보조개에 담겼다가 도톰하고 예쁜 입술 호선을 그렸다. 아니야. 아직도 부족해. 너를 가슴에 새길 무언가가 더 필요했다.
“형...”
“널 어떻게 각인하지 내 머릿속에.”
나는 울상이 되었다. 정말로 곧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나의 감정은 너무도 심하게 요동쳤다. 김종인은 꽤 서글픈 표정으로 미소를 띤 채 나를 보았다. 큰 감정 변화 없던 내가 이렇게도 바뀐 것이 신기할 것이다. 무엇이 형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렇게 생각하겠지. 나는 시간이 아깝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냥 입을 다물고 오직 김종인만을 바라보았다. 눈 안에 그를 가득 담았다. 몸뚱아리는 여전히 뜨거웠지만 그것을 견딜 수 있었다. 종인아, 그렇게 다정하게 나를 바라보는 너도 나를 사랑하겠지. 그렇겠지. 우리는 지금 똑같이 슬프고 아플까. 그렇다면 너도 혹시 지금 이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일 것 같다고 느끼고 있니. 나는 입을 맞췄다. 그 때 그 지옥 같던 하루, 가로등 아래에서처럼 먼저 입을 맞추었다. 입술을 비집고 들어온 말캉한 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혀로 입천장을 간지럽힌다. 온몸이 짜릿할 만큼 색정스러운 키스. 내 입안을 침범하는 네 혀를 느끼며 나는 목을 끌어안았다. 어느덧 어둠이 내려앉은 바깥. 불을 켜지 않은 방 안은 지나치게 어두웠다. 푸르스름한 빛이 창문으로 들어왔고 나는 자세를 바꾸어 김종인의 위에 올라탔다. 띠리릭. 그것은 확실하게 도어락 잠금이 풀리는 소리였다. 김종인은 키스를 멈추었다. 그에게 계속 입을 맞춘 건 나였다.
“..계속 해.”
쿵, 쿵, 쿵, 쿵. 요란한 발소리. 방문이 열린다. 활짝.
“아윽....”
나는 억센 힘에 의해 바닥으로 떨어졌다. 떨어지면서 부딪힌 허리가 고통스러웠다. 바닥에서 고통을 호소하다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엄마에게 뺨을 맞은 김종인이 방 문 앞에 서 있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엄마는 뺨을 잘 때리는 사람일지도 모르겠구나.
“미쳤어??”
“.......”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한 번 더.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는 경쾌했다. 짝.
“다시는 우리 애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어.”
“....약속 한 적 없습니다.”
“당신 부모님은 사실 아시나?”
“......”
“아시면 퍽이나 좋아하시겠네. 이게 일반 부모들의 태도야. 왜 내가 못되고 나쁘다고 생각하지?”
“......”
“너희들에게 있어서 나는 세상에 둘 도 없을 악역이겠지만 나한테는 네가 내 인생 최악의 악역이란다.”
“..어머...”
“그건 네 부모님들도 마찬가지겠지. 한 순간에 나타나 당신 아들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천하의 악마라고 생각할 걸 우리 경수를.”
“.......”
“아직 택 도 없이 모자라. 다 자랐다고 생각하지 말거라. 너희들은 아직 어려.”
“......”
“그만 나가거라. 이미 경수가 망가뜨린 걸로 충분해.”
엄마는 그렇게 김종인을 거실까지 몰아 붙였다. 고개를 수그린 그는 작았다. 그가 견뎌내기엔 너무 많이 아픈 말이었다.
“너희 둘 다 불행해지는 길이란다.”
그 말을 끝으로 엄마는 김종인을 집 밖으로 몰아내고 문을 닫았다.
힘이 빠졌다. 나는 소파에 힘없이 앉았다. 가죽의 소파는 내가 앉은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그저 멍하게 바닥을 보았다. 내겐 더 이상 소리를 지를 기운도, 애원을 할 눈물도, 바짓가랑이를 붙잡을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너무 지쳐버렸고 더 이상 엄마를 가로막을 기력도 상실했다. 그저 김종인을 보았고 잘 지내는 것을 확인했다는 그 사실 하나로 이 아수라장이 된 파티장에서 나는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김종인을 보았음에 만족했고 그래도 종인이 너는 밥 잘 챙겨 먹었어야지, 그런 생각에 조금 속이 상했을 뿐이다.
엄마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안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김종인에게 쏟아 부은 말을 되새긴다. 너무도 생생하게 나는 그녀의 모든 말을 기억했다. 불행. 그녀는 우리의 끝을 그렇게 보았다. 그녀를 불렀다.
“엄마...”
이것은 내가 그녀에게 전하는 마지막 부탁이고 애원이 될 것이다.
“엄마는 이해해 주면 안 돼...?”
“.......”
“엄마는..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미안하게도 나는 엄마에게 모성애에 기반 한 포용을 구걸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모성애를 배신한 자식이면서. 하지만, 그만큼 내게 지금 이 순간은 간절한 것이었다. 그녀의 포용과 이해는 지친 나를 끌어올리기 위해 꼭 필요했다. 모두가 적이었던 이 세상에서, 엄마의 모성만큼은 나도 포기하기 힘든 것이었으니까. 나를 기대 쉬게 해 줄 무언가가 절박하게도 내겐 필요했다.
“엄마.. 나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
“내가 잘 못한 게 아니잖아.... 이게 잘 못은 아니잖아....”
“.......”
“나는 사랑 밖에 안했어.”
“.......”
"그냥 남들처럼. 남들 하는 만큼. 그 만큼 사랑 했어 나도.“
“.......”
“그냥.. 그냥 나는 김종인이 좋았던 거뿐이야.”
그랬던 것뿐이다. 그냥, 그냥 김종인이 좋아서 그랬어. 좋아서, 너무 좋아서.
“왜 그랬냐고 하지 마.”
“.......”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도 아니고 그러려고 한 것도 아니야.”
“.......”
"좋아한 게 뭐가 죄라고 내가 숨어...."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 감정을 모두 억누르고 진심을 이야기했다. 오로지 진심만을. 그녀에게 마지막 부탁을 빌어본다. 절박한 심정으로. 나를 이해해 주길 바라면서 말했다.
"...옳지 않은 데 숨어야지 그럼. "
하지만, 그녀 역시 진심이었다. 진심에 맞선 진심. 낳아 기른 부모와 그 부모의 젖을 먹고 자란 아이의 진심이 위태로운 벼랑 끝에 서있다.
“세상 사람들이 왜 죄다 남자랑 여자랑 사는 지 물어봐라.”
“.......”
“그건 하늘이 정한 이치야. 그래서 여자의 몸속에 아기의 집을 만들고 남자에겐 아기의 씨를 주었지.”
“.......”
“남자랑 남자는 안 된다 경수야. 하늘이 정하기를 안 되는 거야.”
“.......”
“경수 넌 예쁜 여자 만나서 예쁜 자식들이랑 오순도순 살아야지... 왜 그렇게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해.”
“.......”
“너희의 끝이 너무나도 잘 보이지 않니.”
그녀도 진심을 다해 이야기 해주었다. 하늘이 정한 이치. 나는 하늘이 정한 이치에 어긋나는 사람이란 말인가. 우리는, 정녕 이루어 질 수 없단 말인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품을 만한 자궁이 내겐 없었고 우리의 사랑은 법으로도 인정이 되지 않는 것이며 사회인들에게 우리는 더러운 해충이었다. 그랬기에 우리의 사랑을 가르는 건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발목을 붙잡을 아기도 생길 일 없었고 법으로는 인정조차 되지 않았고 사회에선 없었으면 하는 존재인 우리가 헤어진다고 해서 누군가 아쉬워한다거나 심심한 위로의 말조차 건넬 일이 없다는 것. 과연 그것이 끝이었다.
나는 스스로 방 안으로 걸음 했다. 침대에 앉아 김종인을 떠올렸다. 전과는 다른 종류의 명상을 했다. 내가 없는 김종인은 어떨까. 김종인도 죽을 만큼 힘들 거야. 나는 그런 확신을 할 수 없었다. 내가 없는 김종인은 하늘에 어긋나는 사람이 아니고, 법에 준수적인 사람이며 사회에서는 20대 중반의 평범한 미래가 촉망한 대학생. 그러면 너는 망가뜨리지 않아도 되겠지. 너의 가족도, 너도, 너의 미래도, 너의 집안도. 아이러니하게도 김종인을 만나고 엄마와의 큰 소동이 있었지만 내 마음은 지나치게 가벼워졌다. 김종인의 존재, 그 자체가 준 평온은 생각 그 이상이었다. 그 평온 안에서 나는 김종인만은 안녕할 수 있는 방법들을 궁리했다. 그리고 나는 끝에 도달한다.
영화 타이타닉을 떠올렸다. 나는 잭 도슨이었다. 로즈만이라도 이 지옥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새로운 사랑을 하며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잭 도슨. 타이타닉 티켓을 구한 것이 자기 생의 최고의 행운이었다고 말하는 잭 도슨처럼 나는 김종인이라도 날 잊고 자신의 아이들과 부디 제발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랐으며 내겐 타이타닉 티켓이 김종인과 같은 하늘 아래 산다는 그 사실 자체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내 생의 최고의 행운이라고 여기고 로즈, 아니 김종인의 행복을 빌 거라고.
내가 모든 한계에 도달하고 끝없는 미로 속을 해쳐도 결국 나는 벽을 넘을 수 없음을 인정한 결과였다. 나는 모든 것이 망가졌지만, 제발 너라도 그것들을 지키길 바래 종인아. 김종인의 평화가 곧 나의 평화였으며 그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고 그가 안녕하다면, 나는 비록 그가 내 곁에 없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아주 조금, 아니 사실 아주 많이 슬프겠지만 말이다.
우리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개 속에 가려져 뿌예서 보이지 않던 그 끝이.
3월.
나는 약 한 달 반 만에 집에서 나올 수 있었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했다. 신발장 앞에서, 엄마는 불신의 눈빛으로 나를 보았지만 나가는 것을 막진 않았다. 그녀는 나의 의지가 수그러들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맞는 말이었다. 이제야 건네는 휴대폰을 받지 않았다. 굳이 연락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한 캠퍼스 안에서 마주볼 운명이었으니까.
그리고 정확히 오후 4시. 우리는 길 위에 서있다. 캠퍼스 안 마른 가지가 사부작거리는 척박한 나무 밑에. 한 걸음 떨어진 채로 서로를 응시한다. 여전히 쌀쌀한 바람은 살을 갈랐고 날라가는 바람과는 달리 우리 사이의 공기는 무겁게 침체되었다.
“형.”
“...응.”
“더 야위면 어떡해....”
첫마디가 그것이었다. 여전히 다정했고 여전히 애 같고 여전히 너무도 좋은.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마르긴 니가 더 마른 것 같다고 타박하고 싶었으나 그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오랜 시간 고민한 마지막 인사는 너무도 꺼내기 힘든 것이었다. 머릿속으로 그렇게 이해하고 이해한 마지막을 아직 마음이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일까. 애석하게도 오랜만에 생기를 되찾은 심장의 박동에 도리어 나의 몸은 더 차갑게 식어갔다. 어떻게 말을 꺼내지. 종인아, 우리 헤어지자. 그렇게 말을 하기로 했나 내가. 어떻게 우리의 마지막을 마무리하면 좋을까. 종인아, 너는 알고 있니. 너는 내가 지금 우리의 마지막을 말할 거라는 걸 예상이나 하고 있니. 형. 김종인이 불렀다.
“우리 그만 하자.”
김종인이 한 말이다. 김종인이 내게 이별을 고했다. 한 달에 가까운 시간동안 고민했던 시간들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나는 입을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 네 행복을 빌며 너를 보내겠다고 한 다짐들을 한 순간에 무용지물로 만들다니. 힘이 풀렸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김종인을 보았다. 아, 역시 나는 너에게 있어 하나의 짐이었던 거니. 내가 너무 늦게 길을 비켜 주는 걸까. 정말로 너는 나를...
“나 생각 많이 했어. 그냥 단순하게 형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뭘까. 그거 딱 하나만 고민했어.”
“......”
“엄청난 경우가 나왔어. 셀 수도 없을 만큼 너무도 많은 수가.”
울먹이는 목소리는 담담하게 말했다.
“근데 그 답은 딱 하난 거 같더라.”
“....종인아.”
“미안해....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에선 결국 눈물이 떨어졌고 나는 멍하게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을 귀에 새기며 터질 것 같은 가슴을 느낀다.
“이미 넌 너무 많이 힘들었잖아.”
“.......”
“내 모든 걸 버릴 순 있어도 네 모든 걸 버리게 할 순 없어.”
나는 이미 모든 게 망가졌는데. 너 마저도 놓아버리려 했는데.
“형, 우리는 사랑 했잖아. 아니, 사랑하잖아.”
그래. 지금도 아주 많이 너를 사랑해.
“그걸로 된 거야.”
“.......”
“우리가 사랑한 사실, 그거 하나면 된 거야.”
아아-
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너를 너무도 얕잡아 보았구나. 네가 이렇게 깊은 사람인 걸. 길바닥에 쭈그려 앉아 서럽게 울었다. 목이 터져라 소리 내어 울었다. 마음에 얹어졌던 무거운 체증이 가라앉았다.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던 너.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는 채인데 나는 대체 그 시간동안 무엇에 힘겨워 한 것인가. 김종인은 나보다 훨씬 성숙하고 어른스러운 아이라는 걸 간과했다. 나는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물에 범벅이 된 얼굴로 김종인을 보았다. 나는 웃었다. 눈물에, 콧물에 범벅이 되어서 미소 지었다. 나를 보는 김종인의 표정도 편안했다.
“종인아.”
“응, 형.”
“행복해.”
“행복해 제발 형.”
우리는 서로를 위해 등을 돌렸다. 서로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면서 마지막 아닌 마지막을 고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위대한 일이다.
그 위대한 발견을 이룩한 채 나의 사랑은 끝이 났다. 타이타닉이 잭의 죽음에도 비극이 아닌 것처럼 서로를 위해 길을 비켜준 우리의 이야기는 결코 비극이 아니었다. 아직 끝이 나지 않은 우리 이야기는 시간이 60년, 아니 어쩌면 70년은 넘게 흐른 뒤에야 비로소 완전한 결말이 날 것이다. 어린 손녀들 곁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는 늙은 두 노인의 모습. 우리의 사랑은 죽은 것이 아니라 가슴에 새겨지는 것이었다. 아주 가끔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당신을 추억하고 우리의 사랑을 회상한다면 우리의 끝은 해피엔딩일 것이다.
fin.
+)
원래 이 글 쓰려고 생각 할 때 ‘동성애’ 이거 하나만 생각하고 쓴 글인데요, 그냥 가끔 현실적인 얘기를 쓰고 싶을 때 있잖아요. 근데 비현실적이게 쓰임.
너무... 너무 끝이 인소st 같지 않나요? 현실로 마주친다면 니들 드라마 찍냐? 이럴 듯.
그리고 너무 뭐라고 쓴 지 모르겠다. 보면서 멘붕오는 느낌..? 그냥 저 브금을 듣는 데 뭐든 써야 되겠다 싶어서 급하게 이틀만에 갈겼더니 참혹한 결과가 나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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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거 = 걍 신혼임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