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XX년 12월 5일
오늘은 딱히 별 일은 없었고, 그냥 잠이 안와서 일기를 써.
내 손에 대해 한 번도 이 일기에 써 본 적이 없었네..
중학교에 사환으로 들어와서 처음 맡은 일은 축제 현장 뒤처리였어.
여기저기 불려다니면서 시키는 대로 일을 하다가...
"어이 거기 사환! 조심해!!!!"
이 소리를 미처 듣지 못하고, 위에서 떨어지는 스패너에 손목을 아주 강하게 맞았어.
원래 어깨를 맞을 뻔 했는데, 다행히도 전정국이 나를 확 잡아 당겨주었지.
아마 그 때가 전정국과 나의 첫 만남이었을 거야.
처음에는 정말 아파서 울고 싶었지만 그럴 틈도 없이 계속해서 일을 시키는 통에
결국 모든 정리가 다 끝나고 나서야 약을 찾았지.
하지만...저번에도 말했듯이 사환은 보건실을 이용할 수 없어.
그리고 한밤중에 그 어느 학교 관계자도 겨우 사환 따위를 고쳐주겠다고 비싼 응급실에 보내지 않아.
그렇게 너무 아파서 밤새 울면서 나 좀 살려달라고 뒹굴었는데, 결국 아무도 오지 않았고, 난 계속되는 고통에 지쳐 기절하듯이 잠들었어.
아침은 왔고, 일어나보니 손목이 하나도 아프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어서 일을 하려는데,
"어...?"
"왜 그래."
"정국아..."
"왜 그래. 아침에 안아프다고 했잖아"
"손에 힘이 안들어가....어떡해?...정국아..."
너무 무서웠어. 손이 내 말을 듣지 않았어...만난지 이틀만에 전정국한테 안겨 울었어.
아마 우리가 이렇게 시작해서 자연히 나는 늘 약하고 전정국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전정국은 나를 지켜주는 그런 존재로 남아있게 되었나봐.
내가 아무리 손에 힘을 주려고 해도, 힘을 풀고 있는 것처럼 손이 축 처져서 아예 젖혀졌어.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서 전정국 외엔 아무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고.
나도 통증이 있거나 하지 않으니까 그냥 살고 있었어.
다행히 청소하느라 마대걸레를 쓸 때 외엔 별로 그렇게 많이 불편한 일은 없었거든.
그리고 내가 그 날 이후 별로 언급을 안해서 전정국이 금세 잊은 줄 알았어.
그런데...기억해줬어.
전정국이 나를 위해서 꿈을 바꿨다는 소리를 듣고 나니 이제 더이상 전정국과 내 사이가 가볍게 느껴지지만은 않았어.
너무 고맙기만 한데 정국이는 나에게 자꾸 미안함을 가지게 되는지...
나는 정말 정국이가 고마울 뿐인데...
그래. 내 의도가 있었든 없었든 민윤기 도련님 옆에 있는 모습을 보여 전정국을 상처준 내가 잘못했어.
더이상 흔들리지 않고, 누가 나를 괴롭힌다고 해서 지지 않고, 전정국만 볼 거야.
20XX년 12월 7일
지금 내 일기장은 한 줄밖에 안썼는데 이렇게나 눈물이 번져있네...
제대로 쓸 수 있을지 모르겠어.
오늘 아침에,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전정국과 만나서 도서관에 있었어.
전정국은 수능 만점자에게 쏟아지던 수많은 인터뷰를 모두 끝내고 대학교 입시 접수까지 마친 상태여서 한결 홀가분해보였어.
"이제 다 끝난거야?"
'어. 이제 좀 편해지겠다."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면서 도서관에 앉아있는데,
"도련님...!"
윤기 도련님이 도서관으로 왔어.
"야. 너는 이 새끼가 니 남친이야?"
"내 여친 맞아. 민윤기. 이제 애 데리고 장난질 그만해."
"누가 장난질이래 씨발"
"이게 장난이 아니면 뭐야."
나는 중간에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어.
그 때 민윤기 도련님이 내 손을 잡고 도서관에서 끌고 나가려고 했어.
난 늘 그렇듯이 끌려나가는데, 이번엔 달랐어.
"하지 말라고 했어."
"좋은 말로 할 때 놔라."
전정국이 내 반대쪽 손을 잡고 윤기 도련님과 대치했어.
"아미가 설사 내 여친이 아니었다고 해도, 너 같은 새끼한테 넘기느니 차라리 내가 보듬어. 그리고, 아미는 내 여자친구니까 더더욱 못 넘겨."
"내놓으라고 했어."
"애가 물건도 아니고, 너 것도 아니야. 좋은 말로 할 때 너가 놔."
윤기 도련님이 손을 탁 놨어. 무진장 세게 잡으셨겠지만, 왼손이라 전혀 느낌이 안났지.
하지만 전정국의 손은 느낌이 났어. 거칠었지만, 따뜻했고, 그냥 내가 늘 느끼는 전정국이 그대로 느껴졌어.
"야. 너가 선택해."
'예...?"
"나 따라 외국 갈건지, 저 쓰레기 같은 전정국 새끼 따라 여기서 평생 이렇게 살건지."
"저는..."
그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랑 전정국은 서로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줬어.
"....죄송합니다 도련님."
"...후회 안해? 번복의 기회를 줄게."
"..후회 안할래요."
"씨발... 들어와"
여러명의 수트 입은 분들이 들어와서 전정국을 포박했어.
전정국의 목을 조르고 있었고, 우리가 잡았던 손은 풀려버렸어.
"아직도 후회 안해?"
도련님이 나의 왼손을 잡았어.
아무 느낌 없는 왼손. 나는 민윤기 도련님이 미워지기 시작했어.
전정국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몸부림치고 있었고, 난 이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풀어주세요...제발 풀어주세요...도련님..."
"나랑 외국으로 떠나겠다고 약속해 당장."
나는 전정국을 쳐다봤어.
가드 두 분이 붙잡고 한분이 전정국의 목을 조르고 있었어.
전정국은 정신을 잃었는지 축 처져있었어.
"너가 끝까지 전정국을 선택한다면, 너도 전정국도 차라리 죽는게 나은 삶을 살게 할 거야."
"..."
"대신, 너가 날 따라 외국으로 떠난다면, 전정국에 대해 일절 터치하지 않을게."
그 상황에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어.
그래서 지금 나는, 전정국이 어떻게 된 지도 모른 채, 한 호텔방에 있어.
어떡하지...? 진짜 도련님이 전정국에게 일절 터치하지 않으실까..?
우리 어떡해...어떡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