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XX년 12월 9일
윤기도련님을 따르던 두 명의 아저씨들한테 모든 짐을 다 뺏기고 몰래 숨겨둔 다이어리와 펜만 남았어.
윤기도련님은 밤에 와서 나한테 열 장 남짓의 사진을 주셨어.
"너가 불안해하는 건 싫어. 앞으로 이렇게나마 약속을 지킬게.전정국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걸 니 두 눈으로 확인하면 마음이 놓일테니까"
매일 사진을 주시겠다며 웃고 가셨는데, 왠지 무서웠어.
대우는 최고였고, 난 방 안에서 아무거나 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지만,
밖엔 나갈 수 없었어. 가드 아저씨들을 대동하지 않는 이상.
더군다나 가드아저씨들은 방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방 안에 있었기 때문에, 거의 그냥 감시당하고 있다고 보면 돼.
"ㅈ...저기요..."
"예. 말씀하십시오."
"윤기 도련님한테 전화 한 통만 할 수 있을까요...?"
가드 아저씨가 전화를 걸어서 날 바꿔줬어.
[왜]
[도련님.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말해봐]
[편지 한 통만 써서 보내도 될까요...?]
[전정국한테?]
[....]
[내가 내용을 봐도 된다면.]
[...네]
[그래. 써서 가드한테 줘.]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나서 나는 윤기 도련님이 본다고 했던 말은 잊은 채 신이 나서 정국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어.
< 정국이에게.
꼭 너가 원하는 의사 되서 너가 나한테 해줬던 그 약속, 꼭 지켜야 해. 기다릴게.
나 보고싶다고 울지 말고. 내 걱정하지 말고. 늘 말했던 것처럼 난 널 믿어. 알겠지? >
길게 쓰고 싶었지만, 어떤 이야기를 써야할지도 모르겠어서 이쯤에서 마무리하기로 했어.
"잘 전해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나 때문에 전정국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20XX년 12월 10일
"도련님께서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가드 아저씨가 주시는 봉투 속엔 전정국이 찍혀있는 사진이 있었어.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 모습.
이젠 다른 곳이 아닌 교실 책상에 앉아서 무언가에 열중하는 모습.
여러 아가씨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
그리고...내 편지를 보는 모습.'
그리고...편지를 구기는 모습.
그리고...눈물 흘리는 모습.
"사진은 또 왜이리 잘 찍혀서..흡..흑...울지 말라니까..."
오늘은...아무리 좋은 생각을 해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다.
진짜 보고싶다...
20XX년 12월 20일
오늘은 내가 이 곳에 있게 된지 딱 2주째 되는 날이야.
살이 엄청 빠졌고, 실신을 하루걸러 하루 하는데도 입맛은 없고, 이젠 전정국이 보고 싶은건지, 그냥 여길 나가고 싶은 건지도 잘 모르겠어.
영원히 여기에 갇혀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울면서 도련님한테 이제 한국에 보내달라고 말했지만 어김없이 도련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셨어.
"곧 적응할거야. 힘들겠지만 참아. 나가고 싶으면 나한테 말해. 같이 나가자"
"그냥..여기 있을게요..."
"내가 이렇게 미음까지 가지고 왔는데, 한 숟갈이라도 먹어야 예의 아닌가?"
윤기 도련님의 눈빛이 무서워서 도련님이 떠주시는 미음을 한 숟갈 먹자마자..
"우욱...!"
"....야"
도련님도 나도 서로 당황해서 내가 얼떨결에 뱉어버린 미음을 보고 있었고, 가드 아저씨가 황급히 와서 시트를 빼냈어.
"야. 너 애 관리를 어떻게 한거야."
"죄송합니다."
"뒤지고 싶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당장 최박사님 불러."
"하지만 여기가 ㅂ.."
"닥쳐. 빨리 불러."
"예.알겠습니다."
가드 아저씨 두 분이 다 나갔다.
"저 분들 때문이 아닌데..."
"그러니까..아프지마. 쟤네를 생각하든, 전정국을 생각하든, 나를 생각하든. 너를 걱정하는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
"난, 널 괴롭히려고 여기 이렇게 가둔게 아니야."
"..."
"너가 조금만 더 적응하면 학교도 보내줄거고, 같이 여행도 다닐거야."
"도련님..."
"왜."
"전..그런거 다 필요없어요."
"전정국얘기하려면 집어치워. 너희가 하는 건 진짜 사랑이 아냐."
"그냥...학교로 돌아가고 싶어요 도련님..."
"전정국 때문이 아니라면 그 학교로 왜 돌아가고 싶은건데? 하루종일 일에 또 일하고, 학교에선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고. 대우가 거지같은 사환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이유가 뭐야"
"마음이 편하잖아요...흑..흑..마음이.."
"너가 지금 왜 마음이 불편한데. 이렇게 편한 곳에서 전정국 일상도 알려주고. 내가 뭘 더 해줘야 되는데."
"..."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나는 힘들었어.
그만 나를 놔줬으면 좋겠어.
하지만....놔달라는 얘기를 못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