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패스!”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어 쳐 먹지. 몇 번이나 말했는지 모른다. 경기 시작한지 벌써 20분이 지났는데 난 멀뚱멀뚱 서 있기만 했다. 나한테 공이 올라치면 어디선가 나타난 변백현이 낚아채 가버리고, 이쪽으로 차면 바로 골인데 괜히 멀찍이 떨어진 딴 놈한테 주기 일쑤에…. 아, 나 축구 안할래. 재미없어. 홀수 번호 짝수 번호 나눠서 하는 거라 백현이랑 나는 분명 같은 팀인데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야, 변백 경수한테 공 줘!”
보다 못한 상철이가 백현에게 소리쳤다. 기회다 싶어 백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걸 한번 슥 쳐다보다가 얼른 고개를 돌리며 못들은 척 다른 곳으로 공을 차버린다. 변백현이 찬 공이 그 녀석의 발끝에서 튕겨져 나가 반대편으로 통통 굴러간다. 아 나, 저게 진짜…. 사람 없는 데다 공을 차면 어떡하자는 거야. 나한텐 죽어도 주기 싫다 이거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리로 뛰어갔다. 마침 근처에 있던 상대팀 민수가 눈에 불을 키고 달려온다. 안 돼, 저거 내꺼야. 내 꺼라고. 나도 공 좀 차보자 제발! 지기 싫어서 전속력으로 달렸다. 내 주변으로 모래 바람이 인다. 조금만 더… 좀만… 좀만 더!
“악!!!!”
급하게 왼쪽 발을 뻗어 발끝에 공이 닿을 때쯤 누군가 나를 밀치고 공을 낚아채 가는 바람에 그대로 운동장바닥에 고꾸라졌다. 쿵 소리가 다 났다. 무릎을 부여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피 날 것 같아. 티비에서 볼 땐 별로 안 아파보였는데 진짜 아파. 축구하다 넘어지긴 또 오랜만이라 금방 일어날 수 있는 작은 상처였음에도 혼자서 일어나기가 어렵다. 넘어지든 말든 그대로 재개되던 경기는 내가 일어날 생각을 않고 바닥에 주저앉아있자 그제야 멈췄다. 체육부장이 손을 들며 크게 외친다.
“좀만 쉬자!”
저 멀리서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박찬열이 내게로 뛰어온다.
“야, 너 괜찮냐?”
헉헉 숨을 몰아쉬며 손을 뻗기에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인상을 쓰며 먼지투성이인 체육복을 탁탁 털었다. 박찬열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다가 한번 슥 뒤를 돌아보더니 갑자기 내 팔을 잡으며 오버를 하기 시작한다.
“존나 많이 다쳤는데? 야, 안되겠다. 보건실가자.”
얘가 왜 이러나 싶어 뒤쪽을 한번 쳐다봤더니, 백현이가 다가오진 못하고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뚫어져라 쳐다봤더니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버린다.
“야, 나 아까 누구랑 부딪혔냐?”
나도 좀 화가 나서 변백현을 못 본 척하며 찬열에게 물었다. 내 무릎을 살피던 찬열이 눈을 깜빡이며 말한다.
“변백이 미친 듯이 뛰어가던데? 걔 뭐 코뿔소인줄 알았다. 근데 니들 같은 팀 아니야?”
뭐? 민수도 아니고 변백현이라고? 찬열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자마자 온 몸에 힘이 탁 빠진다. 멍하니 눈을 끔뻑이다가 무릎이 욱신거려서 체육복을 살살 올렸더니 아니나 다를까, 피가 나서 엉망이다. 축구하다 다치는 건 다반사라서 심각하게 아프다 생각은 하지 않았었는데 피를 보니까 갑자기 막 아픈 것 같고 그렇다.
“아, 뭐 이러냐….”
변백현의 뒷모습을 보니까 머리가 다 아파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박찬열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니들 언제까지 이럴래? 묻는다. 아니,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해. 내가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잖아….
근처에 있던 놈들이 뛰어와서 내 무릎을 보더니 그런다.
“야, 뭐 이거가지고 엎어져있냐?”
“피 닦으러 보건실이나 가라.”
“도경수 엄살은.”
에라이, 보건실이나 가야겠다.
너와 나만의 시간
2부
10.
사는 게 뭐 이래. 보건실에서 소독을 하고 약을 발랐다. 체육복이 너무 더러워서 교복으로 갈아입고 싶었지만 무릎에 닿으면 아플 것 같아서 옷도 갈아입지 않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러다 힘이 빠져서 책상위로 고꾸라졌지만.
변백현. 아, 변백현….
축구하다 몸싸움이 일어나서 태클 걸다가 넘어지는 경우는 종종 있는 일이지만, 우린 같은 팀이었고 나한테서 공을 뺏을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 또 뛰어왔어. 와, 대박. 독을 품은 게 분명하다. 일부러 나한테 독을 품고 달려 든거지. 와씨, 이렇게 생각하니까 좀 서운한 거다. 말로 풀면 되잖아. 말로. 말은 안하려고 요리조리 피하면서 이게 뭐하는 짓이지, 대체. 머리가 아파. 변백현이랑은 어떻게 해야 화해할 수 있는 걸까. 생각은 많이 해봤는데 답이 나오질 않는다. 답답해서 또 한숨을 내쉬었다.
“야, 경수야. 니들 좀 빨리 풀어라.”
박찬열이 의자를 끌고 다가와 앉으며 내 어깨를 마구 흔든다. 귀찮아서 그 손을 내쳤다. 그런데 자꾸 다가와서 작은 목소리로 말을 던진다. 아, 진짜 귀찮아 죽겠네.
“나도 그러고 싶지.”
“오죽하면 다른 애들이 나한테 와서 묻는다. 니들 싸웠냐고.”
그 말에 힘이 쭉 빠진다. 하, 깊은 한숨을 내쉬며 찬열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넌 어땠냐?”
“뭐가.”
“내가 종인이 얘기 했을 때 넌 어땠냐고.”
내 물음에 더욱 의자를 가까이 당긴 찬열이 내 책상에 턱을 괴면서 나를 본다. 옛 기억을 떠올리는 듯 어딘가를 쳐다보며 눈을 깜빡인다.
“뭐, 어땠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
“생각 해내봐.”
“난 그냥 처음엔 장난이겠거니 했었지.”
“엉.”
“뭐, 그러다가…. 그러려니 하고 넘겼는데?”
고개를 끄덕였다. 보니까, 얘도 잘 기억 안나는 것 같아. 지가 어떻게 해서 받아들이게 됐는지. 그냥 남 일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겼겠지. 어차피, 니들이 그래도 난 아니니까 괜찮다고 생각하고. 아,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될지를 모르겠다. 백현이가 왜 저러는지도 다 알고, 나도 충분히 이해는 하는데 뭘 어떻게 해야 쟤가 풀릴지를 모르겠다고. 아오, 답답해!
“나 좀 도와줘라.”
불쌍한 표정으로 박찬열을 쳐다봤다. 그랬더니,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다 어깨를 으쓱한다. 으쓱은 뭔 으쓱이야. 어깨 다 뽑아버릴라.
“얘기 하다가 니 이름이나 김종인 이름만 나오면 경기를 일으키는데 나라고 별 수 있겠냐.”
“…쟨 화가 난 거야, 아님 삐친 거야?”
“둘 다?”
그래, 둘 다인 것 같다. 둘 중에 하나만 해도 벅찬데, 둘 다라니…. 머리를 부여잡으며 백현이 앉아있는 자리를 쳐다봤다.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신나서 주위 애들이랑 웃고 떠들고 있다. 난 골머리가 썩는데 넌 웃음이 나냐…. 그냥 이대로 가만히 당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가다간 화해고 뭐고, 아예 없을 것 같아서 결심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정면 돌파를 하는 거야! 혼자 주먹을 꽉 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뭐하냐?”
“내가 오늘 안에 해결 본다.”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
“그냥, 부딪혀보는 거지 뭐.”
그랬더니 박찬열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어깨를 토닥토닥.
“힘내 도게이.”
…이런 시발놈. 짜증나서 어깨에 올려진 손을 내쳤다.
一
“하이.”
일본어 아니고, 영어 인사거든. 에이치 아이. hi 안녕?
비어있는 옆 자리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태연하게 인사하는 나를 백현이 얼빠진 얼굴로 쳐다본다. 어이가 없는 모양인지 멍하니 쳐다보다 곧 정신을 차리고 팩,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버린다. 그런다고 굴할 내가 아니지. 오늘은 너 때문에 피까지 봤는데 이렇게 물러 설 순 없어.
“야, 변백. 너 오늘 좀 심했던 건 아냐?”
“…….”
“우리 같은 팀이었다고. 굳이 내 공을 빼앗으려 달려올 필요는 없었잖아요. 네? 내 말이 틀렸냐고요.”
쥐고 있던 펜으로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을 걸었다. 꽤 간지러울 텐데 꾹 참고 내 쪽으론 쳐다보지도 않는다. 몇 마디라도 더 붙여볼까 하다가 앞문을 열고 들어오는 선생님 때문에 입을 닫았다. 책상위에 올려놨던 교과서만 만지작거렸다. 솔직히, 짝이랑 자리 바꾸면 화낼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아니다. 아냐, 차라리 화를 내는 게 나을 수도 있다고. 어떻게 보면, 내 행동에 반응하는 거니까. 이건 뭐, 말을 시켜도 못들은 척, 옆구리를 찔러도 태연한 척하면서 무시로 일관한다. 세상에 무관심보다 무서운 건 없다고 했다. 차라리 반응이라도 해주지. 화를 내려면 화를 내고, 욕을 하려면 욕을 하란 말이야. 새하얀 등을 바라다가 조금 기가 죽었다. 어떻게 보면, 난 지금까지 그만큼 백현이의 감정을 가볍게 본 거라고 말 할 수도 있으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저러다 말겠지, 하고 치부했었다. 그러다, 종인이가 심각하게 이 녀석 집 앞까지 찾아갔다는 걸 듣고서 그제야 아차, 하면서 깊게 생각하기 시작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백현이에게 미안해졌다. 박찬열이 전에 나한테 그랬다. 역지사지로 생각을 한번 해보라고. 역지사지. 역지사지라….
내 입장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는 건 꽤 어려운 일이다. 감정이입이 잘 되지 않으니까. 아무래도 사람이다 보니 내 자신을 우선으로 생각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경우에 따라선 나보다 타인을 우선시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난 그런 타입이 아니라서.
난 내 감정에 충실했을 뿐이고, 거기에 대해 한 점 부끄럼이 없다. 물론, 변백현에게 말하지 않은 건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건 충분히 잘못한 일이니까. 나라도 섭섭하고 서운했을 것 같아. 하지만, 변명을 하자면 그건 내 나름대로 백현에 대한 배려였다. 내가 종인이를 좋아한다고 말을 하면 백현이가 받을 충격이 염려되어서 다음으로 미룬 것뿐이라고. 언젠가는 말하려고 했다.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인데다 그걸 굳이 숨기고 싶진 않았으니까. 결국엔 타이밍이 좋지 않아서 이렇게 꼬여버리고 말았지만…. 그래, 준비를 하고 말을 했다 하더라도 백현이가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내가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일을 겪게 되니 혼란스러운 건 어쩔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머리만 아픈 걸 어떻게 해? 이번엔 백현이까지 옆에 두고 생각하려니 머리가 더 아픈 것 같다.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아…, 이게 다 박찬열, 오세훈 때문이야. 망할 인간들.
이제 와서 탓하면 무엇하겠나 싶어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칠판을 한번 바라보고서 옆에 앉은 백현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자리가 앞자리긴 한데 사각지대라서 선생님들이 시선을 주질 않는다. 덕분에 변백현이 만날 엎어져 자도 걸리지 않았다. 변백현은 오늘도 엎드려있다. 그래도 잠을 자는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옆에 앉아 있어서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을 거다. 그냥, 이 상황을 피하고 싶으니까 엎드려있는 거지. 그걸 빤히 쳐다보다가 또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내가 왜 자리까지 바꿨는데. 응? 좀, 일어나서 나랑 얘기 좀 하자.
“안자는 거 다 알거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변백현이 움찔한다.
“야.”
“…….”
“얘기 좀 하자.”
불러도 대답은 없지만, 그에 굴하지 않았다. 난 불굴의 사나이니까.
“야, 백현아.”
이름도 불러보고,
“저기요, 아저씨.”
장난도 쳐 봤다가,
“거기 잘생긴 형.”
내 생에 다신 없을 칭찬까지 해줬건만 반응이 없다. 아,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워낙 어릴 때부터 교우관계가 원만했다. 그러니까, 친구들이랑 이런 식으로 싸워 본 적이 없다고. 그래서 이런 반응을 하는 백현이가 더 어려웠다. 괜히 손을 들어 머리를 긁었다.
“야.”
“…….”
“미안하다.”
그래도 미안하단 말은 꼭 해야 될 것 같았다. 나랑 종인이랑 사귀는 게 미안한 건 아니지만, 미리 말하지 않은 점은 미안했으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 하는 것도 좀 우습긴 한데. 얘기 한 답 시고 따로 자리를 마련해서 하는 건 더 못할 것 같으니까 지금 했다. 변백현이 이런 내 마음을 알아먹을 리는 없지만 어찌됐든 미안하단 말은 들었을 테니까. 그렇다고, 뭐. 내가 이 수많은 애들이 있는데 상황을 구구절절 읊으며 종인이랑 사귀는 건 안 미안하다고 설명할 순 없잖아. 대놓고 ‘나 게이요.’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고 보니 …게이? 난 이 단어가 왜 이렇게 생소하지. 으, 뭔가 좀 그래. 그나저나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반응이 없다. 그래서 또 펜으로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아, 쫌….”
그랬더니, 변백현이 손으로 제 옆구리를 찌르던 내 펜을 툭하고 내치며 짜증을 낸다. 오, 반응했어! 드디어 반응했다!!! 다른 건 다 모르겠고, 짜증이든 뭐든 일단 나한테 반응해준 게 너무 고마운 거다. 거기에 감격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래, 입질이 왔다. 드디어!
“나랑 얘기 좀 하자. 어?”
펜은 다시 필통으로 넣었다. 대신, 일어나라는 뜻으로 어깨에 손을 올려 조금 흔들었다. 내가 흔드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며 끝까지 안 일어나는 거다. 얼굴보고 나랑 진지하게 얘기 좀 하자니까. 그래서 좀 일어나라고 말까지 덧붙이면서 더 세게 흔들었다.
“도경수, 변백현.”
변백현한테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서 몰랐다. 바로 앞에 선생님이 다가온 걸 몰랐다고. 둘의 이름을 차례로 부르는 날이 선 목소리에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잔뜩 인상을 쓴 선생님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내가 일으킬 땐 죽어도 안 일어나던 변백현이 벌떡 일어난다. 나를 보곤 한번 인상을 쓰고, 선생님을 향해 어색하게 웃는다.
“…….”
“…….”
“…….”
그래서 나도 따라서 웃었다.
우리를 번갈아 보던 선생님이 뒷 문을 향해 손을 쭉 뻗는다.
“나가.”
변백현이 나를 째려본다. …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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