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주 자그맣던 그 시절부터 우리는 또래 아이들보다 곧잘 붙어다녔었다.
서로의 가옥을 드나들며, 남녀 아이가 너무 붙어다닌다며 이따금, 장난식으로 꾸중을 늘어놓으시던 어르신들의 말에도
약간은 주눅이 든 나의 작은 손을 꼭 붙잡으며 나와 혼인을 할터이니 괜찮다고 말하던 너였다.
네가 서당에 가 있는 동안, 난 우리집 마당을 거닐며 산책을 하기도 하였고,
너에게 줄 생각에 들 떠 바늘에 손가락이 찔려 붉은 피가 찔끔 새어나와도 개의치 않고 자수를 놓기도 하였다.
하지만, 커 갈 수록 너는 여느 양반댁 도련님들과 같이 학문을 가까이 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너와 다른 세상에 사는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하였다.
언제나 함께였던 너이지만, 이제 더 이상은 너에게 내가 소중한 존재아 아닌것만 같았다.
어릴적부터 내게 교양을 쌓아야 한다며 글을 가르치신 아버님덕택인지 여느 양반집 규수들보다 조금 더 글을 잘 쓰던 나는,
때로는 너를 생각하며 한 자, 한 자 써내려가기도 하였다.
그렇게, 사랑채 안은 점점 너에 대한 나의 그리움으로 채워져 갔다.
오랜만에 너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안하던 분칠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너를 기다리며 마을 연못가를 맴돌며 산책을 하고 있을때였다.
하늘은 너와 나의 재회를 축하해주기라도 하는 양 푸르르게 물들어 있었고, 내리쬐는 햇빛은 따듯하게 나를 감싸왔다.
그때 연못가를 지나던 여인네들의 입에서 너무도 익숙한 너의 이름이 흘러 나왔다.
'정대감댁 첫째아들이 이번에 최대감네 둘째 여식과 혼사가 오고간다는게 사실이오?어쩜...한쌍의 잉꼬가 따로 없구만'
내가 들은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연못가에 풀썩 주저앉아 넋이 나가있었다.
멀리서부터 가까워지는 익숙한 너의 향과, 너의 얼굴과, 너의 미소에 , 나는 왜인지 너를 마주하자마자 뒤돌아 곧장 집으로 뛰쳐 왔었다.
며칠이 지났는지 나는 식사를 하는 일 외에는 사랑채의 문을 잠구어 두곤
넋이 나간듯 멍하니 어릴적 네가 나에게 준 댕기만을 바라보고 있는 일이 빈번했다.
같은 곳을 보고 있는지,
같은 꿈을 꾸고 있는지,
너에게 내가 무언지,
네게 내가 무거운 짐이 아닌지,
이젠 그렇다고 믿어왔던것들이 모두 내 허상이었을 뿐인 것같았다.
여지껏 나는 내 아이의 아비가 될 사람도,
내가 늙어 병들었을 때 내 옆에 있어줄 사람도,
매일 밤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내 옆에 누워 있을 사람도,
모두 너일거라고, 그렇게 생각해왔다.
너무 당연하게도.
그 날 들은 말이 정녕 사실인지, 그저 뜬 소문인지 확인도 안한채로, 그렇게 나는 허탈감에 하루하루를 보냈다.
마음으론 뜬 소문일 뿐일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머리론 자꾸만 그 것이 정녕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날 괴롭혔다.
어릴적부터 듬직한 사내아이가 될 때까지도,
너는 곧잘 내게, 그리고 집안 어른들께도 나와 혼인을 할거라 말했었다.
그게 그저 농일거라는 생각은 한번이라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6살 때 즈음이였나, 줄곧 친구라고 생각했던 이웃집 연이는, 어느날인가 갑자기 나에게 말도 하지 아니하고 떠나갔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밤낮으로 울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의 나는 새삼 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연이가 떠오르며,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너도 연이처럼 어느순간 갑자기 내 곁에서 멀어질 것 같았다.
나 아닌 다른 여인과 혼인을 하고,나 아닌 다른 여인과 밤을 지새워 밤하늘에 박힌 별을 보며 산책하고,
그렇게 날 잊을 것같았다.
너와 내가 자주 들르곤 했던 연못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한 걸음에 너의 대한 내 마음을 실어서 그렇게, 서둘러 발을 옮겼다.
이미 해는 지고 어둑어둑해진 세상은 낮과 다르게 적막함만이 내 주위를 감싸고 돌았다.
유난히 밝은 달빛은 호수에 비치어 잔잔하게 일렁였고,
난 여느때와 같이 풀꽃들 사이에 앉아 일렁이는 연못을 바라봤다.
풀벌레 소리와 잔잔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복잡하게 얽혀있던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어주었다.
풀밭에 몸을 뉘이고 달과 별을 바라보는것을 즐기던, 조그마한 아이였던 너와 나는 벌써 이렇게나 커버렸다.
키도 훌쩍 커버린 우리지만, 키보다 더 커진것은 어릴적 심었던 감나무도, 무엇도 아닌 너와 나 사이의 공백이었다.
그렇게 나는 여지껏 그 공백을 오직 내 마음으로만, 내 허상으로만...내 그리움으로만 채워나갔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 공백을 매꾸기에 바쁘던 것은 '네'가 아닌,'우리'도 아닌, '나'였다.
천천히만 흘러가던 구름에 발걸음을 맞추어 살아가기엔, 세상은 너무도 빠르게 지나갔다.
벌써 이렇게나 커 버린 우리였고, 눈가에 주름이 하나 둘 늘어가시는 어른들이셨고,
벌써 그렇게나 낡아버린 내 오랜 일기장과, 또 벌써 이렇게나 약해져버린 내 마음은 이 시간들을 버티기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항상, 그리고 아직도 너와 함께 하고 있었고, 함께 하고 있는데
너는 그렇지 않은 것같았다.
섭섭함이 주체할 수 없이 밀려오다가도
학문과 혼사가 오가는 너의 집안에 치여 너도 많이 힘들었을것 같아 이내 네가 또 보고싶어졌다.
그렇게 너에 대한 내 애증은 세월의 주름처럼 깊어져만 갔다.
그렇게 정적만이 날 스치던 그때였다.
풀잎이 사그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향이 났다.
나는 코끝을 맴도는 나의 어린시절을 줄곧 함께해왔던 향의 주인이 너라는걸 알고 있었지만, 차마 고개를 들어 널 볼 용기가 나지 아니하였다.
그렇게 너와 나는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달이 비친 연못만을 바라 볼뿐이었다.
바람에 연못이 일렁이며, 비쳐있던 달은 제 모양을 잃은 채 흐트러졌다.
잠잠하기만 하던 너의 입술이 달싹였다.
별빛아..
빛아...
나즈막히 나의 이름을 불러오는 너의 목소리에 꽤나 오랜 시간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치마자락만 붙들고 있던 나였다.
응...
응 운아....
세상의 전부라곤 부모님과 연못과 너밖에 모르던, 아주 어린시절 서로의 이름을 부르던 그때가 생각났다.
언제부터였을까,
네가 날 친구로 생각하기 시작하고, 또 나 이외의 여인들이 너의 곁에 하나 둘, 인연이 되어간지.
그리고 내가 더 이상 너의 가장 특별한 존재가 아니였던것은.
절대 나오지 않았으면 하던 말이 너의 입에서 기어코 나오고야 말았다.
별빛아...
나 장가간다.
빛아...
나
너도 알잖아 우리 아버지 너 많이 아끼시는거...
니가 말해주면 나..
나 너랑 평생 같이 할 수 있지않을까...?
응...?빛아..
빛아....
내 별빛아...
좀 잡아주라...
너는 그렇게 괴로운듯 눈물을 흘렸고, 그것이 네가 내게 보인 첫번째 눈물이었다.
나만큼, 너도 괴로웠고
또 나도 너만큼 괴로웠다.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돌아가는 운명이 야속했다.
이제는 훌쩍 커져버린 너의 손을 잡고, 도망치고싶었다.
그렇게, 짙은 어둠속에서 달빛은 아득하게 빛을 내었다.
따듯한 너의 품이 이내 내 뺨에 닿았다.
제법 차가워진 새벽공기는 내 뺨에 닿아있는 따듯한 품에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이젠 너도 나와 같은 꿈을 꾸고 있다는걸 알게되었지만, 왠지 모르게 내 심장 깊숙이 어느 부근인지 아릿해져 왔다.
이번엔 우리가 손을 맞잡는데도 해결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두려웠다.
그렇게 너와 영영 작별 할까봐.
그 일이 있은 며칠이 지났는지, 운이는 날 찾아왔다.
미안하다 했다.
너는 뭐가 그리 죄스러운지 고개를 푹 숙이고 내게 처음으로 풀죽은 모습을 보였다.
그런 너를 보자, 난 확신이 섰다.
이런 비단옷을 안입어도, 고운 댕기를 안하여도 좋으니, 너와 함께이고 싶다고.
그렇게 너와 나는, 이미 함께였다.
몸은 떨어져 있더라도 마음만은 이미 하나였다.
한번은 작정하고 파르르 떨려오는 두 손을 맞잡고 우린,
그렇게 도망쳤었다.
너의 집도, 나의 집도 아닌 우리의 집을 원했다.
양반집 규수도, 양반집 도련님도,
이젠 그 무엇도 싫었다.
그저 네가 함께 있다는것, 그리고 우리가 함께 있다는것.
그것만이 우리의 숨 쉴 곳이였다.
하지만 그 도피도 오래가지 못하였다.
너도 나도, 처음엔 그저 행복하기만 했지만, 시간이 갈 수록 안정되지 못한 생활에,
인정 받지 못한 우리의 관계에 두려움이 커져만 갔고,
결국 우린 그렇게 돌아왔다.
정대감님은 우릴 보자마자 크게 화가 나신듯 하였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으시곤, 왜그리하였냐고, 말을 하지 그랬냐며 나무라셨다.
정대감님도 사실 너를 다른 여인에게 보낸다는것이 마음에 걸렸다며,
되려 미안하다고 하셨다.
너무도 죄송스럽고, 감사해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그렇게 너와 나는,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행복한 혼인을 치뤘다.
어릴적부터 정대감님은 내게 관대하셨고, 너와 나를 무척이나 아끼셨다.
함께한 세월 덕분인지, 너와 나의 사이의 끈끈한 인연덕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연민때문인지,
어찌되었건 우린 혼인을 치뤘고,
너와 나는 비로소 완전한 부부가 되었다.
꿈만 같았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깨어보면 지독한 현실만 있는, 그런 지독한 꿈.
그렇게 몽롱하고 고요하게 다가온 한여름밤의 꿈만..같았다.
![[VIXX] 달이 비친 연못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5/4/f/54fa2eb696bf8de0bc99a7458b67f84a.gif)
어째 갈 수록 산으로 가는 것 같지만...
사극느낌을 잘 못낸게 아쉽다....오또카지이ㅣ...
결말은 해석하기 나름!
해피엔딩으로 보면 글 그대로 결국 행쇼하는거
새드엔딩으로 보면 글 마지막에 비쨍이 독백 처럼 모든게 꿈이였던거지
그니까 운이가 다른 여인과 혼인을 하는거고, 그걸 듣고 충격을 받아서 비쨍이는 연못가에서 잠이들어.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인가.
그래서 자꾸 일이 너무 술술 풀리는게 이상하다 느끼지만 꿈이 아니라고 믿는거지.
근데 사실 자기도 꿈인걸 어느정도는 알고있고, 그래서 더 깨어나기 싫어하고,
몸져 누워서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하는거지.
오늘날에 식물인간 비슷한 개념인데 간혹 몸에는 아무 이상 없는데 못깨어나는 경우 있잖아.
그런거라고 봐주면 돼!
똥글이지만 읽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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