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스트리트 1번지
w. 정국학개론
BGM 오늘만큼은 제발 꼭
입술에서 피가 난 건 오랜만이었다. 고요하던 나의 새벽이 깨졌고 정신 없이 옆집을 두드렸다. 잠잠하던 문은 어느새 열렸고 나는 아저씨에게 안겨 울었다. 대학교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늘상 반복되던 일이었지만 요새는 한 달에 한 번씩 있는 일이었다. 아저씨는 익숙하게 내 어깨를 감싼 채 끌었고 아저씨와 걸음을 맞추며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캄캄한 어둠 속이 무서워 아저씨 품을 더욱 파고들었고 서럽게 울었다.
젖은 새벽이 지나가고 아빠가 출근하는 소리까지 듣고 난 후에야 잠에 들었다. 매일 밤을 샌다던 아저씨에게 오랜만에 찾아온 단잠일 텐데 민폐만 끼친다는 생각에 푹 자고 일어나서도 머뭇거리며 아저씨 눈치를 보았다. 방에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는 아저씨는 내가 아직 깨어난 걸 몰랐다. 조용히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 일어났으면 말을 하지. 밥 먹을래, 빵 먹을래? "
" 저 그냥 집에…, "
" 빵은 좀 그렇지? 밥 먹자. "
부끄러웠다. 아저씨를 이런 식으로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다시는 힘든 일이 있어도 오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하며 찬 발을 비볐다. 정신이 없긴 없었나 보다. 신발도 신지 못하고 나온 걸 보면. 아저씨가 밥을 차리는 동안 화장실에 들어가 얼굴을 정리했다. 헝클어진 머리도 정리하고. 퉁퉁 부어버린 눈에 물도 적셔 주고. 한심했다. 가장 예뻐 보여야 할 사람 앞에서 가장 추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게 정말이지 너무 한심했다.
아저씨가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짧게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밥 냄새. 집에선 잘 맡을 수 없는 냄새였다. 아저씨 집에서도 잘 맡을 수 있는 냄새는 아니었는데 웬일로 밥을 다 해서 먹네. 아저씨 맞은편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냉장고엔 비리비리한 반찬통들밖에 없길래 물만 마시고 사는 줄 알았는데 김치에 오징어까지 반찬이 많은 걸 보면 그건 또 아닌가 보다. 아니면 요 앞 반찬집에서 산 건가.
" 오늘 학교 안 갈 거지. "
" 갈 거예요. "
" 열한 신데. "
" 오후 수업도 있어요. "
" 열두 시 수업도 있잖아. 갈 수 있어? "
내 시간표는 귀신 같이 안다. 작년부터 그랬다. 시간표를 짜서 보여 주면 그걸 기억하고 어디에 적어놓는지, 아니면 머릿속에 쭉 담아두는 건지 내 시간표는 무섭게 꿰뚫고 있어서 절대 거짓말 같은 건 못한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열두 시 수업은 못 가겠다. 올해는 수시 평가에서 승부를 보고 싶었는데. 잠시 고민을 하다 씨걸이 떠올랐다. 나랑 같은 단대면 대출도 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휴대폰을 들었다. 번호가 없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이번엔 다른 주제로 같은 고민을 하다 호석 오빠에게 연락했다. 수업이 없는 시간인지 금세 답이 와서는 씨걸의 번호를 덜렁 보내주었다. 손에 쥐고 있던 숟가락을 놓고 두 손으로 폰을 쥐었다.
[나 김OO. 대출 좀 부탁해도 될까?]
혹시 이런 문자가 부담스럽지는 않을까. 겨우 같은 동아리라고, 몇 마디 주고받았다고 친한 사이라고 내가 착각하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기분이 교차되었다. 차라리 답이 빨리 왔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아니라 초조한 마음을 안고 반찬을 집었다. 맞은편에서 밥그릇을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아저씨를 보니 얼굴이 구겨져 있다.
" 누구랑 연락하는데. "
" 대출… 부탁하려고요. "
" 밥 먹고 부탁해. "
아저씨의 단호한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젓가락으로 밥을 집어 먹었다. 이번엔 깨작거리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한숨을 내쉬길래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거렸다. 이런 날은 꼭 그랬다. 아저씨의 눈치를 보게 된다. 능청스럽게 넘어갈 수 있는 일도 하나하나 신경이 쓰이고 가끔은 신경질을 부릴 때가 있다. 아저씨도 물론 그걸 알고 있다.
진동이 울렸다. 아저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던 건 기억도 나지 않는지 재빠르게 폰을 잡았다. 아저씨의 얼굴이 다시금 찡그려진 것 같기도 하다.
[왜요? 어디 아파요?]
폰이 내 손에서 사라진 건 순식간이었다. 아아! 탄성이 나올 새도 없이 아저씨가 폰을 가져가버렸다. 문자 내용을 슬쩍 확인한 아저씨가 홀드 버튼을 눌러 닫아버렸다. 답장 보내야 하는데. 아저씨를 힐끗 보자 꽤 엄한 표정으로 밥과 나를 번갈아서 본다. 빨리 먹으라는 듯한 무언의 압박에 젓가락을 놓고 숟가락을 들었다. 빨리 먹고 답장 보내야지.
*
" 야, 너 능력 좋더라~ "
" 내가 봤다고 말했지? 얘 또 꼬리 친다니까. "
잠잠하다 싶었더니 다시 기가 산 김규태가 제 무리와 함께 내쪽으로 다가왔다. 혹시나 얼굴에 아주 살짝 서려 있는 멍을 보게 될까 두려워 모자를 더욱더 푹 눌러 썼다. 아는지 모르는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내 책상을 똑똑 두드린다. 지금 내 기분과는 다른 청아한 소리에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숙였다. 괴롭히지 말고 제발 좀 가라. 적어도 오늘만큼은. 애써 무시하며 가방에서 책과 필통을 꺼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내 앞에서 녀석들은 웃으며 떠들었다.
" 걔 경행이라며? 어떻게 꼬셨냐? "
" 어떻게 꼬시긴 뭘 어떻게 꼬셔~ 그때처럼 꼬셨겠지~ 규태한테 했던 것처럼~ "
그날 일은 절대 꺼내고 싶지 않았다. 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도 그날만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쿵쾅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눈 앞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토기가 올라왔다. 내 손목을 억세게 잡던 그 더러운 손 하며, 내 온몸에 닿던 더러운 시선. 숨이 거칠어졌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들을 떠올리는 녀석들에게 뭐라 해 줄 수 있는 힘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얼굴이 뜨거웠다.
"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진 선배님들이 알 필요는 없고. "
주변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귀가 멍멍했는데 그 목소리만큼은 뚜렷했다. 내가 아는 목소리. 내가 들으면 꼭 반가워할 목소리. 씨걸. 내 빈 옆자리가 채워졌고 씨걸이라는 걸 알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모자로 내 얼굴과 함께 그의 얼굴을 가려 몸밖에 보지 못했지만 알 수 있었다. 너구나.
단호한 그 목소리에 김규태 쪽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갑작스런 등장에 당황한 것 같았다. 오늘도 역시 늘 보여 주던 그 웃음을 가지고 있을까. 모자가 답답해졌다. 유일한 내 안식처였던 모자가, 참 많이도 답답했다.
교수님께서는 우리 과 학생도 아닌 놈이 앞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으니 당연히 누구냐는 듯한 시선을 보내셨고 씨걸은 능청스럽게 일어나 교수님을 존경한다며 아부를 떨었다. 기분 좋으신 듯 웃으시던 교수님은 마음껏 들으라며 웃으셨다. 친화력 하나는 알아줘야 해, 진짜. 수업 시간 내내 집중이 되지 않았다. 전 수업을 듣지 못했으니 이 수업이라도 들어야 하는데,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씨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멍한 표정으로 화이트 보드를 보고 있었다. 책을 밀자 씨걸이 웃으며 나와 눈을 맞췄다. 보지 마. 고개를 살짝 숙이자 책상 밑으로 씨걸의 손이 들어왔다. 곧 그의 손이 내 손에 닿았다. 내 손을 움켜쥔 그 손이 너무 따뜻해서 웃음이 나왔다.
*
" 무슨 일 있었어요? "
" 아아니. 아무 일도 없었는데. "
" 그런 얼굴이 아닌데. "
" 보이지도 않으면서. "
그러게. 헤실거리는 말투로 대응한 씨걸이 장난스럽게 내 모자 챙 위를 두드렸다. 그러길 몇 번. 처음에는 장난인 걸 알면서도 혹시나 내 모자를 벗기진 않을까 걱정스런 마음에 씨걸의 손길을 피했는데, 딱히 그럴 생각이 없어 보여 굳이 그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고 동방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호석 오빠의 잔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마음도 살짝 있었고, 또다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야 할까, 방황하다 잡은 곳이 동아리 건물 바로 앞 벤치였는데 햇빛도 잘 들고 따뜻해서 자주 애용하는 곳이었다. 씨걸은 다음 수업이 없는지 내 옆에서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 이거 무슨 노랜지 알아요? "
" 그게 노래였어? "
장난이었는데 아는지 모르는지 금세 퉁명스런 표정을 하고는 손장난을 치는데, 그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터져나왔다. 씨걸이 나를 힐끗 보는 듯했지만 꼬물거리는 그 손을 뚫어져라 보았다. 저 기다란 손이 뭐가 그렇게 귀엽다고 계속 보게 되는지. 금세 기분이 풀린 씨걸이 다시 입을 열었다.
" 누나한테 전해 주고 싶은 말이 많은데 "
" ……. "
" 이 노래가 내 마음의 전부인 것 같아요. "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더니 내 무릎에 올려져 있는 가방을 두드리며 노트 한 장을 찢어달란다. 가방을 뒤적거려 수첩 한 장을 찢어 건네주었더니 내 필통에서 파란색 볼펜을 꺼낸다. 내가 보이지 않게 제 쪽으로 종이를 숨기며 뭘 적더니 꼬깃꼬깃 접어 내 후드 주머니에 쏙 넣어 준다.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으려 하자 손과 얼굴을 세차게 저으며 내 손목을 덥석 잡는다.
" 아이, 집에서 봐야죠. "
" ……. "
" 연애편지일 수도 있는데. "
*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밤에 돌아다니는 건 딱 질색이라 일부러 야간 수업을 잡지 않았다. 아저씨 집도 들리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 그렇게 추한 모습을 보이고 다시 얼굴을 마주하기가 부끄러웠다. 사실 아저씨 집 앞에서 잠시 머물렀다. 고작 두 걸음 차인데 아저씨 집 앞은 그렇게 따뜻하더라. 그렇게 오 분 정도 아저씨 집 앞에서 신발코를 괴롭히다 돌아선 것 같다. 현관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느껴지는 냉기에 얼굴이 찡그려졌다. 아빠는 밤늦게 들어오신다. 어젯밤의 전쟁을 알리는 듯 잔뜩 어지럽혀져 있는 집을 정리하고는 침대에 누웠다. 씻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는 하얀 천장에 어렸을 때 붙여두었던 형광 별 하나가 외로이 자리하고 있다. 나머지는 오빠 방에 붙였던 것 같은데. 옛 생각에 마음이 울적해졌다. 그러다 문득 주머니 속에 잠들어 있을 씨걸의 쪽지가 떠올랐다. 후드 주머니를 뒤져 꼬깃꼬깃 접혀 있는 종이를 꺼냈다. 뭐 이렇게 열심히 접어놨어.
스탠딩 에그 - little star
고개를 갸웃거렸다. 들어보라는 건가. 쪽지의 의미가 뭘까 잠시 고민하다 씨걸이 흥얼거리던 노래가 떠올랐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던 그의 모습을 회상하고는 휴대폰을 들었다. 스탠딩 에그의 little star. 한 자, 한 자 조심스럽게 적어 검색했다.
눈을 감고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들어봐
나의 얘기가 끝나기 전에 너는 꿈을 꿀 거야
Little star tonight 밤새 내가 지켜줄 거야
처음 너를 만났을 때 정말 눈이 부셨어
너의 미소를 처음 봤을 땐 세상을 다 가졌어
Little star tonight 밤새 내가 지켜줄 거야
…
내 사랑 tonight
밤새 내가 지켜줄 거야
평생 내가 지켜줄 거야
' 누나한테 전해주고 싶은 말이 많은데 '
' ……. '
' 이 노래가 내 마음의 전부인 것 같아요. '
정국학개론 |
여러분 제가 왔어요! 과제도 안 하고 왔어요! 오늘도 사랑해요! 정국아 너도 사랑해으악ㅇㅇ그이각 BGM ~ 스탠딩 에그 - 넌 이별 난 아직, little star |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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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노래 순서가 잘 맞았으면 좋겠는데 다들 잘 맞았나요 (BGM 안 들으셨으면 실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