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up de Foudre 04
(부제: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소년)
"내가 11포인트로 하라고 했어, 안 했어?"
"11포인트 맞...."
"내가 돋움체 말고 바탕체로 써 오라고 몇 번을 말해, 어?"
"......죄송합니다. 다시 써 오겠습니다."
"무슨, 남자 꼬시러 회사 왔어?"
선배랍시고 뭐라도 된 듯 양 구는 사람들이 나는 세상에서 제일 싫다. 저 여자는 아마 그런 부류인 것 같다. 입사하고 나서 딱히 밉 보인 것도 없는 데다가, 일 제대로 못해서 욕 먹어본 적이라곤 한 번도 없는 나인데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 오늘도 늘 있었던 일인 듯 서류철을 책상에 내동댕이 치듯 놓으면서 트집을 잡는 선배였다. 지난번에 돋움체로 써 오라고 했었잖아요. 할 말이 많았지만 나는 일개 신입이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못 하고 다시 써 오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말이 저거다.
"야,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애한테."
"아니, 내가 무슨 틀린 말 했어? 맞잖아. 어린 게 어디 줄 서야 되는 지는 딱 아나 보지? 팀장님한테 딱 붙어서...."
"그냥 팀장님이 세봉 씨 유독 챙겨주는 게 배알 꼴린다고 말을 해, 이 여자야."
"뭐가 어쩌고 저째?"
석민 선배가 아니었으면 그 자리에서 바보 같지만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선배들이 옳은 소리를 할 수록 나를 더 갈굴 것이 뻔한 선배였지만, 그래도 후배가 별 시덥잖지도 않은 일 가지고 혼나는 것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해주지 않는 동료들과 일한다는 점이 나에겐 나름 위로가 되었다. 탕비실에 가서 둥글레차 티백을 하나 꺼냈다. 아, 화가 난다. 화가 나. 내 얼굴에, 내 몸매에 무슨 남자를 꼬시러 회사를 다닌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말이 되는 소리를. 그리고 당신이 내 입장이 돼 봐! 전원우가 싸고 도는 게 좋은 줄 알아? 짜증난다니까? 어후.
"세봉 씨 힘들죠."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까 전에 감사했어요, 진짜."
"아녜요. 원래 걔가 좀 그래. 걔가 팀장한테 관심이 좀 많거든. 질투 나서 그래. 냅 둬, 그냥."
"......아아. 그렇구나."
"원래 팀장님이 여직원들한테는 눈길 한 번 안 줬거든. 그런데 세봉 씨는 유독 잘 해주고, 밥도 먹고 퇴근도 같이 하고, 그러니까 그러는 걸 거에요."
"......."
"팀장님이 세봉 씨 좋아하나."
"......풉."
나름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석민 선배에 전원우가 어떤 앤지 말해주고 싶었지만 진심으로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걔가 뭐하러. 그리고 걔는 무엇보다 나한테, 첫눈에, 반감을 느꼈다니까요. 사람 없다고 탕비실에서 자꾸 나를 몰아가는 석민 선배한테 그만 좀 하라고 말하려는 찰나에, 탕비실 문이 열리고 썩 좋지만은 않은 표정의 전원우가 들어 왔다. 아, 나 진짜. 전원우는 어디서나 나를 갈구길 좋아했으므로 일 안 한다고 사람 한심하게 볼 것이 분명했다. 또 자기가 아는 내 약점 하나 둘 씩 집어 가면서 치사하게 굴겠지.
"아, 팀장님. 진짜 다른 건 아니구요. 세봉 씨가."
"둘이 뭐. 만납니까?"
"아니요,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원래 이런 거 신경 안 쓰는 사람인 거 아시지 않습니까. 석민 씨."
"......."
몇 년 전의 그 날처럼, 전원우는 날 선 말들을 내뱉었다. 넌 도대체 또 뭐가 그렇게 불만인데? 억울한 표정의 석민 선배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탕비실을 나갔고, 나도 여기에 딱히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에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그렇지만 발걸음을 제지당하고 말았다. 전원우의 차가운 손이 내 손목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사귀어?"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내가 누구랑 사귀어, 사귀길. 아니야."
"......오해 살 행동을 하지 마. 애초부터. 소문 때문에 시달리기 싫으면."
"그냥 위로 차원으로 얘기하고 있었던 것 뿐이야. 그리고 신경 쓰지 말아 줘. 내가 뭘 어떻게 하던."
신경 쓰지 말아달라는 말에 전원우가 내 손목을 놓았다. 얼마나 세게 잡은 건지 손목이 얼얼했다. 사람 손이 뭐 저렇게 차가워. 전원우의 손이 잠시 머물렀던 곳이 싸하게 식은 것 같았다. 도대체 너랑 나랑 뭐 때문에 여기까지 왔을까. 원인을 찾으려 기억을 되짚어 봤지만 나는 기억이라고는 다 기분 나쁜 일들 뿐이었다. 전원우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그 때의 그 사람. 그 사람을 떠올리기란 나에게 고문과도 같은 일인 것 같다. 뜨거운 종이컵을 매만지며 탕비실을 나왔다.
탕비실을 나오자마자 기분이 상해 있을 줄 알았던 석민 선배가 도리어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나보고 빨리 오라고 하기까지 한다. 왜요, 왜. 이건 진짜 확실해. 운까지 띄우며 사람 궁금하게 만드는 선배였다.
"세봉 씨. 나 진짜 확실히 느낀 건데. 아까 전에 말이야."
"팀장님 얘기죠?"
"응. 팀장님, 이건 확실해."
"......뭔데요."
"팀장님 세봉 씨 좋아한다. 진짜다, 저거."
*
"너는 네 개인 스케줄 같은 거 없어?"
"있지."
"근데 왜 자꾸 사람 뒷꽁무니만 쫓아 다니냐고. 말했잖아. 사과할 거면 제대로 사과를 하라니까? 어물쩡 넘어가지 말고?"
"이석민이랑 만나나 보려고."
"와.... 내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 해? 내가 너한테 해명할 이유는 없는데, 진짜 아니라니까? 그리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회사 주변 커피숍에 들어가서 아메리카노를 시키는 내 뒤를 쫄래쫄래 쫓아오는 전원우가 너무 거슬려서 정말 한 마디 했다. 얘하고 대화가 안 된다는 것 쯤은 옛날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전원우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 능글맞아지는 것 같다. 돌아오는 답변이 너무 어이 없어서 실소가 절로 나왔다. 내가 도대체 그 사람이랑 왜 만나는데, 왜, 왜! 그리고 그게 왜 네 신경을 긁는지 모르겠다고!
"상관 있는데."
"왜. 내가 웃는 게 보기 싫었나보지? 너 나 기분 좋은 거 싫어하잖아. 그리고 나 안에서 다 먹고 갈 거니까 좀 가."
"왜. 걔 만나게?"
"......아니, 아니라고 말을 했으면 좀 알아 들어 주라, 제...."
아니, 내가 지금 초등학생이랑 대화를 하는 건지 어른이랑 대화를 하는 건지 도대체 분간을 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 기어이 내가 잡은 자리까지 따라와서는 내 앞에 앉는 전원우를 죽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사람을 싫어해야 이러지? 눈에 힘을 빡 줘 봤지만 전원우는 턱을 괴고 민망하리만큼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내가 졌다, 졌어. 이러다 너랑 미운 정 들겠다. 머그잔을 들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려고 할 때, 커피숍 문이 열리고 딱 봐도 깨를 볶는 것 같은 두 남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냥 보지 말 걸. 들어오는 저 사람들이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차린 나는 표정을 굳히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표정관리가 전혀 안 된다는 걸 느낀 건지, 전원우도 내 시선을 따라 그 둘을 바라봤다. 적어도 저 둘이랑은 눈 안 마주치게 해 주세요, 제발.
그러나 사람이 많은 커피숍 안에 남은 자리라고는 내 바로 옆 자리밖에 없었고, 그 둘은 거기에 앉았다. 아직까지는 나를 보지 못한 건지, 꿀 떨어질 것 같은 눈빛으로 뭐라뭐라 대화를 하더니 여자가 주문을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결국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너 세봉이야?"
"......."
"오랜만이네. 하나도 안 변했다."
"......오빠도요."
"...그래. 원우도. 아직 만나나 보네."
"......."
"좋은 인연은 아닌데.... 좋아보이니까. 다행이다."
나한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저 가야 돼서요. 반가웠어요. 그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로 기계적으로 말들을 내뱉은 채 가방을 챙겨 밖을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시선이 하나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는 내 감정에 충실했다. 눈물이 났고, 그냥 울었다. 왜, 왜 하필 오늘일까. 옷 소매로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눈물 때문에 뿌옇게 변한 시야였지만 내 옆에 전원우가 있다는 것 쯤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 어깨를 토닥이는 전원우의 손을 쳐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가 왜 위로를 해? 너가?
"너가 왜 위로를 해. 손 치워, 치우라고!"
"......."
"너랑 나랑 만나? 사귀어? 뭐가 어째?"
"......."
"너 왜 그랬어. 너 왜 그 때 그랬어. 나, 나."
"......."
"나 최승철 진짜 좋아했고.... 나 처음으로 그렇게 누구를 깊게 좋아해 본 적 없었어."
"......알아."
"너가 다 망쳤어. 내가 몇 년을, 몇 년을, 그 사람한테."
"......미안해."
"안 미안하다며, 안 미안하다며! 내가 그 사람 옆에 있는 거 보기 싫었다며. 너가."
"...울지 마."
"......나쁜 새끼."
"미안해."
*
오늘이 불타는 금요일이었다는 걸 친구의 문자를 받고 나서야 알았다.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우울한 금요일일 것 같다. 나는 오랫동안 전원우의 옷소매를 늘어지도록 잡으면서 펑펑 울었고, 전원우는 그런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하지 않았다. 전원우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울었고, 전원우는 나한테 처음으로 사과를 했다. 사과를 한다고 해서 풀릴 일도 아니었지만 언젠가는 짚고 넘어가야 했던 문제였다고, 스스로 기억에서 오늘 일을 삭제하려고 노력했다.
씻고 나와 거실 소파에 누웠다. 너무 행복해 보이던 둘의 모습이 자꾸 내 눈에 아른거렸다. 그거 네 자리였을지도 몰라, 라고 말하던 전원우의 목소리도 귀에서 웅웅거렸다. 정말 그게 내 자리였을까. 2년, 절대 짧다고 말할 수 없는 그 시간 동안의 내 자리는 한 순간에 없어졌었다.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잘 들어갔어?
"너가 내 번호를 어떻게 알아."
-내가 네 상사니까.
"......아. 그렇지."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전화를 받았고, 평소와는 다르게 느릿느릿 말을 내뱉는 전원우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제 너랑 그런 일 가지고 왈가왈부하기도 지친다. 지금 내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든 정신 상태였다.
-다음주에 너랑 나랑, 외근 나가야 돼서.
"......그거 좀 다른 사람이랑 가면 안 될까?"
-내가 맘대로 바꿀 수 있는 거 아니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거짓말 아냐.
"......그래서?"
-월요일 날, 너네 집 앞으로 갈테니까 8시까지 나와 있어.
"......그래."
-아직도 거기 살아?
아직도 주소를 기억하나 싶었다. 전원우와 내가 공유하고 있는 기억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아직 거기 살아. 무미건조하게 답변하며 냉장고 안에 처박혀 있던 맥주캔을 꺼냈다. 시원한 소리를 내며 캔을 땄다. 오늘은 술을 좀 마셔야, 내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같아서.
-너 술 못 마시잖아.
"......너 자꾸 참견한다."
-네 앞가림, 네가 네 스스로 못하니까.
"최승철도 그랬는데."
-.......
"...너 진짜 못됐다."
-너도 못됐어.
"내가 뭘."
-네 자리 언제 올 건데.
ㅠㅠ네.. 제가 왔습니다!
오늘도 똥글...... 오늘은 그냥 브금을 넣어봤어요... 분위기랑 안 맞나요.. 그런데 전 맞다고 생각합니다!!ㅋㅋ
원우 이 정도면 티 내는 수준이ㅋㅋㅋㅋ장난 아니지 않나요... 여주 넌씨눈... 넌씨눈이야. 그런데 여주는 정말 몰라요.
왜냐면 원우의 행적들을 보면...음..
오늘은 승철이와의 재회가 있었네요8ㅅ8 승철이가 원우와 여주의 사이를 완전히 틀어놓는 데에 한 몫을 한 인물이에요ㅠㅠ
여주한테는 큰 상처가 된 사람이기도 하구요! 차차 잘 풀어가겠습니다
그럼 늘 읽어주시는 분들 너무 감사드려요ㅠㅠㅠ하트! 굿밤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