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시간 정확히 열시 사십분.
분명 열시 반까지 오기로한 그는 전화도 없고 받지도 않는다.
그래 십분쯤이야 내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지.
창틀에 앉아 그가 오기를 기다리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열시 오십분.
여전히 전화는 소리샘으로 넘어가고 연락도 오지 않는다
멍하니 그가 오는 길을 바라보며 또 담배 한개를 꺼내 들었다.
정각 열한시. 인내심 폭발하기 직전.
재털이에는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긴건 아닌지 하는 불안감에
타들어간 내 마음처럼 담배꽁초가 소복히 쌓여있다.
담배 한개를 더 꺼내 입에 물자 저 멀리 내 빨간색 지프가 보인다.
점점 가까워 지더니 날 봤는지 손을 흔들며 빙구처럼 웃는다.
이새끼.. 누군 걱정되서 속이 다 타들어 가는데 누군 빙구처럼 웃어?
어느덧 텅텅 빈 담뱃갑을 구겨 집어던졌다. 걱정한 내가 병신이지.
기식빵 니가 어떤 창의적인 변명을 하느냐에 따라 오늘 너의 생사가 갈릴테니
살고 싶으면 제발 엄청나게 창의적인 변명하길 바란다.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끄자 그가 이름을 부르며 문을 쾅쾅 두드린다.
- 익인아 얼른 나와~
뭐야. 기식빵. 약속시간이 몇신줄도 모르는건지 삼십분이나 늦어 놓고 어쩜 저리 해맑을 수가 있는건지.
창의적인 변명이고 나발이고 오늘 지옥의 맛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하며 문을 열자
짜잔 하며 작은 상자를 들이민다.
짜잔은 개풀. 팔장을 끼고 시큰둥하게 뭐야라고 하니까
진심으로 해맑게 콘돔이란다.
- 하.... 너 지금 몇시야?
지금이 몇시냐는 내 질문은 상큼히 씹어 주시고 초박형 무독성 무자극 콘돔 이라며
여기 저기 뒤져서 제일 좋은거 사오느라 늦었단다.
그게 또 제일 좋은건지는 어떻게 알고 그것만 찾아 댔는지 뭐.. 뻔하지.
삼십분이나 늦은 변명치고는 엄청나게 창의적이긴 하네..
- 몇개짜리야?
- 스무개♡ 헤헤..
스무개 들었다며 하트까지 달아 웃는 기식빵.
도대체 1박 2일 동안 몇 개나 쓸 수 있다고 생각 하는건지.
첫 약속을 연락도 없이 무려 삼십분이나 늦어 짜증이 폭발하는데 사과 한마디 없이
헤헤 거리면 웃는 기식빵을 보자 짜증이 폭발했지만 어금니를 꽉 깨물고 활짝 웃으며 물었다.
- 자기♡ 우리 약속시간이 몇시였을까요?
- 열시 반이지.♡
약속시간은 안까먹고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정말 폭팔하기 직전이였지만
다시 한번 어금니를 꽉 깨물고 싱긋 웃어보였다.
- 그럼 여기서 문제! what time is it now?
진심으로 시간을 몰랐는지 예의상 한번 보는건지 시계를 한번 보고는 헤헤 거리며 웃는다.
기가막혀서 말도 안나온다.
나는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 있는 여자라는걸 얘가 아직 모르네...
이참에 오늘 알려줘 말어.
무표정하게 팔짱을 낀채 아무말도 안하고 서있으니까
처음 여행가는데 웃으라며 양쪽 볼을 잡아 늘린다.
- 전화는 왜 안받고, 왜 안했는데?
십분정도야 쫌 늦는구나 하는데 삼십분이나 늦고
연락도 없지, 전화도 안 받지 내가 걱정해 안해?
- 헤헤.. 핸드폰을 놓고왔지 모야.. 가는길에 집에 들렸다 가자.
늦은건 오늘 밤에 다 갚을께 화내지마 응? 응? 응?
끝까지 미안하단 말은 안하네. 나쁜놈.
약속시간 늦은 벌은 정해도 내가 정해. 내일 아침 정각 열시
콘돔이 몇개 남아있는지 세어보고 벌을 줄지 말지 결정한다고 하니까
그럼 벌 하나도 안서겠네 라고 능청스럽게 웃으면서 히죽거린다.
- 닥치고 빨리 차키나 내놔.
- 우리 자기 어제 아쉬었구나? 내가 그렇게 좋아?
오늘 밤 생각하니까 막 설레지?
내 뒤에 바짝 붙어오면서 막 설레냐고 묻는 기식빵. 대답할때까지 귀찮게
계속 물어볼 것 같아 수줍은척 하면서 뒤를 돌아 귀를 대보라고 손짓했다.
또 좋아서 실실 거리며 허리를 숙에 내 입가에 귀를 갖다 댄다.
- 있잖아 ... 나 완젼 설레서 한숨도 못잤어.
자기.. 나 실망시키지 않을꺼지.......?
기식빵 머리에 섹스밖에 없는것 같아 부담감이나 팍팍 느끼라는 심산으로
실망시키지 말라고 했더니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살짝 당황하다
이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씨익 웃는다.
- 오늘 밤에도 한숨도 못잘텐데 어떡하지??
헐. 근거 없는 자신감에 어이없어서 받아치지 못하고 멍하니 서있으니
늦었으니까 빨리 가자며 내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간다.
진짜 저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거야. 기식빵 입을 다물게 하려던 내 계획은 완젼
fail.
*****
런던 외곽에 들어서서 답답한 탑을 걷어내고 내달렸다.
햇빛은 살짝 뜨거웠지만 은은한 가을 냄새가 나는 바람은 선선했고
내 옆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리듬을 타는 그는 너무 귀여웠다.
스쳐지나가는 풍경들이 너무 예쁘고 멋있어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니
그는 여행와서 사진만 찍어댄다고 입이 댓발 나왔다.
기억은 시간속에 희미해 지니까 사진이라도 남겨야지.
난 이년 후면 영국하고 안녕이니 바로 바로찍어야 한다니까
이년 후엔 한국가는거냐고 물으며 눈이 동그래진다.
내가 말 안했었나..? 나도 엄마의 감시망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긴 싫지만
월급쟁이가 힘이 있나 회사서 까라면 까야지...하고 말끝을 흐렸다.
렌즈를 바꿔가며 연신 셔터를 누르다 사진찍어 줄테니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하는데
뭐야 이 남자 엄청 시무룩해져 있다. 이년 후면 한국가야 한다니까 저런건가??
난 영국온지 일주일도 안됐는데... 누가 보면 당장 내일 떠나는줄 알겠네.
시무룩해져 있는 그를 달래줄겸 오전에 실패로 들어간 기식빵 디스를
만회하기 그의 앞에서서 노래를 불렀다.
- 하루에 네번 사랑을 말하고~ 여덟번 웃고 여섯번의 키스를 해줘어~
날 열어주는 단 하나뿐인 비밀 번호야~ ㅋㅋㅋㅋ
노래를 시작하니 본인도 민망한지 그만하라며 살짝 짜증을 내길래
그럼 이 노랜 완젼 신날꺼니까 잘들어보라며 흠흠 목청을 가다듬고 노래를 시작했다.
- 그댄 나의 해피 바이러스~ 그댄 나의 해피 바이러스~ ㅋㅋㅋㅋㅋㅋ
악 동영상 생각나 웃겨서 못부르겠어 ㅋㅋㅋㅋㅋ
댓글에 제발 축구만 하라고 써있는거 봤어?? ㅋㅋㅋㅋㅋㅋ
노래가 시작되자 얼굴이 점점 빨개지다 내가 자지러지게 웃기 시작하니까
그만 하라며 커다란 손으로 내입을 틀어 막는다.
지지않고 손바닥을 혀로 할짝이니까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뗀다.
- 에헷 이럴줄 몰랐지? ㅋㅋ 상대의 허를 찌르는 어택 ㅋㅋ
- 하... 밖에서 이러면 난 어쩌라구
얘 또 분위기 끈적하게 만드네.
- 어쩌긴 뭘 어째 . 그냥 웃고 넘어가면 되지.
넌 머리속에 뭐가 들은거냐?? 변태.
빨리 차에나 타셔. 지금부터 니가 운전해.
***
30분을 더 달려 드디어 도착.
꿈속에서만 그려오던 윈저성이 내 눈앞에. 감동 감동 감동 그 자체.
가슴 한켠이 뭔가 찡~~ 하는게 중학생 때 영화 '러브오브시베리아'를 보고 반해
스무살 겨울 무작정 시베리아횡당열차를 타던 그 설레임과 두려움이 겹쳐졌다.
너무 좋아 방방 뛰며 그의 손을 이끌어 구석구석을 돌아다니자
자기보다 윈저성이 더 좋냐며 툴툴댄다.
얜 진짜 바본가..?
넌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 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왠지 바로 엄마가 좋다고
대답할 것 같아 묻지 않고 지나가는 코쟁이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카메라를 건내주고 그를 잡아 끌었다.
둘이 같이 찍는건 처음이라 왠지 어색해 살짝 떨어져 있으니
연인사이에 왜이리 어색하냐며 좀더 붙으라고 하자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잡아 끈다.
- 남이 봐도 우리 애인사이로 보이나봐 ㅋㅋㅋㅋ
- 그러게 하하..
어제 일이 생각나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어제 왜 그랬을까. 미쳤지 미쳤어.
어차피 한국 들어가면 끝날 사이. 뭐 그전에 끝날 가능성이 높고. 내 인생에 이런 잘난 남자 언제 만나보겠어 그냥 본능에 충실해? 말어?
머리속에서 이성과 본능을 두고 갈등하는 사이에 코쟁이는 모델이 좋아
사진이 잘나왔다며 카메라를 건냈다.
- 외국인도 나 잘생긴건 아네?? ㅋㅋ
- 아우. 기식빵 저 자뻑. 넌 도대체 자신감의 근원이 어디냐!
- 자뻑이라니. 잘난걸 잘났다고 하는데 틀린말은 아니잖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쳇. 잘난거 충분히 알지만 지 입으로 잘난척 하니까 어쩐지 재수없어
도시락이나 먹자며 말을 잘라버렸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도시락을 꺼내 펼치니 우와 우와 환성을 지른다.
어제도 먹었으면서 호들갑 떨지 말고 김밥이나 먹으라고 입에 넣어 주니까
먹여주니까 더 맛있다고 또 달라고 새끼 새 마냥 아~ 하며 입을 벌린다.
이럴때 마다 너무 귀여워서 괴롭혀 주고 싶어진다는걸 그도 알려나 모르겠다.
- 자기 눈감아봐.
- 눈은 왜? 빨리 김밥이나 줘. 아~
- 빨리 감아 봐. 김밥이 더 맛있어 질꺼야 ㅋㅋㅋ
- 너 또 장난칠려고 그러지? 안 속아. 빨리 김밥 줘. 아~
- 아이. 빨랑 눈 감아보라니까!!!
이미 눈치챈 듯한 그에게 빨리 눈감으라고 애교반 짜증반을 섞어 말하니
못이기는척 하고 눈을 감는다. ㅋㅋㅋ
젓가락으로 김밥 다섯개를 집어 자기 아~ 하며 입에 넣어줄려는 찰나
갑자기 눈을 확 뜨고 내 손목을 잡는다. 으아.
- 이것봐. 이럴 줄 알았지.
넌 꼭 나 괴롭힐때 마다 자기 자기, 이러더라.
- 하하.. 들켰네.
- 평소에도 자기 자기 해봐. 얼마나 좋아!. 응? 응? 응?
아.. 기식빵 또 보채기 시작한다. 우린 왜 원하는 대답을 들을 때 까지
징징대고 보채는건 똑 닮은거야...
몸집은 커다래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징징대고 보채는걸 보면
더욱더 괴롭혀서 울리고 싶을 만큼 귀엽다.
너무 쉽게 해주면 재미 없으니까 더 안달나게 해야지.. ㅋㅋ
- 에헤. 빨리 먹어. 이튼 칼리지까지 걸어 갈꺼란 말이야.
- 빨리 해봐. 응? 자기 자기 자기 자기 자기. 해보라고!!!
역시. 귀여워.. 예전엔 연하라면 딱 질색이였는데 예외란 항상 존재하는 법.
쫌더 버티면 울 것 같기도 한데.. 진짜 울어버리면 나도 내가 뭔 짓을 할지 모르니..
괴롭히는건 이쯤에서 접어야 겠다 싶어 자기 맛있게 드세요 라며 궁디 팡팡까지
해주니 아주 좋아 죽는다. 다음번엔 안달나게 해서 울려봐야지.
| 더보기 |
안녕하세요~~ 오늘 완전한 불꽃마크를 달 예정이였는데.. 쓰다보니 너무 길어졌네요.. ㅋㅋ 갈수록 여주 성격이 이상해 지는건.. 제 기분탓인가요....... 기분탓이겠죠... 하하하... ㅠㅠㅠㅠㅠ 11편에 불꽃마크를 달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 불꽃마크를 달기엔 완전한 떡신도 아니고 너무 짧아서 독자님들 낚는거 같아서 안달았어요... ㅎㅎ 12편에서는 완젼체 떡신을 기대하셨을 텐데.. 죄송해여.......... 13편에서는 꼭꼭 불마크를 달고 나타나겠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기대는 하지 말아주시구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니까요 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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