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충동적이었다. 충동적인 시작은 나를 끝까지 몰아세웠다. 더 이상 나도 나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유치한 김팀장 14
사실, ##김여주가 우리 회사에, 그것도같은 부서에 들어온 순간부터 나는 흔들렸을지 모른다. 처음에는 김여주의 모든 행동이 거슬린다고 생각했다. ##김여주가 복사를 할 때도, 팩스를 보낼때도, 커피를 탈 때도 김여주가 신경쓰여 미칠 지경이었다.
그리고 난 거슬린다는 핑계를 두며 김여주를 내 주위에 두려고 했다. 가장거슬렸던 순간을 꼽으라면 김여주가 백현씨와 한창 점심시간마다 운동을 했을 때라고 할 수 있다. 미칠지경이었다. 나는 김여주가 미워 죽겠는데, 그 와중에도 내가사랑했던 고등학교 그 시절의 잔상이 항상 김여주를 쫓아다녔다.
혼자서 몇 번이고 나를 자책했다. 병신 같은 김종대. 그렇게 당하고도 관심이 가냐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있어서불가항력이었다. 나는 그녀의 향기에, 너와의 추억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었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을 때였다. 이미 내 모든 정신은너에게 함락당한 후였다. 회사에서는 지금까지 일만 열심히 했는데, 이제는모니터를 봐도 네 생각밖에 안 나고, 회의를 해도 네 생각밖에 안 나고, 다른 사원들과 얘기를 나눌 때도 네 생각밖에…시발
“…미치겠다.”
혼자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거슬려서 그렇다고 부정해왔는데, 이제는 아프면 걱정되고, 혹시 뭐 하다 다칠까 항상 전전긍긍해 하는게단순히 너가 싫어서 그런 것 같지 않아 무서울 지경이었다.
***
그런 너와의 나 사이에 변환점이 된 계기는 출장을 가면서였다. 출장을 가면서 너에 대한 나의 감정도 완전히 깨달았고. 하루하루 더 쌓여만 가는 너를 향한 마음에 나는 하루하루가 떨렸다.
너를 보면 저절로 예쁘다는 말만 나왔다. 한번 인정하고 나니 그 다음은 쉬웠다. 너가 나에게 무슨 거짓말을 했든, 그런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너가 그랬든 안 그랬든, 나는 너가 좋은걸. 너는 내게 있어서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존재다.
출장을 가서의 마지막 날은 아마 내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씻고 나왔는데 방에는 너가 없었다. 시간이 몇시인데,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급하게 핸드폰을 찾았다. 핸드폰에는 너가 남긴 두 통의 문자만이 존재했다.
[야]
[나 잠깐 산책 갔다 올게]오후11시37분
저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산책? 지금 시간이 몇시인데 여자 혼자서? 급하게 너에게 전화를 걸며 겉옷을 챙겨있었다.
고작, 고작 산책하나 나간건데, 너를 내가 정말 좋아하기는 하는지 머릿속에는 최악의 상황들만 재생되었다. 미칠 지경이었다. 그리고 마침 시끄러운 해변에 그 쪽으로 달려가니 그럼 그렇지, 너가 있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너를 괴롭힌 그 남자들을 때리고도 남았다. 하지만 침착하게 들끓는 분노를 가라앉혔다. 여기서 흥분해봐야 좋을게 없다.
경찰을 부른다며 겁을 줘 그 남자들을 쫓았다. 눈물을 떨어뜨리며 나를 바라보는 너가 보였다. 화가 났다. 너에게 화가 난게 아니라 너를 이렇게 만든 남자들에게 화가 났다. 남자들의 손찌검에 상처가 난 너의 볼이 보였다. 손이 떨렸다.
"ㅈ,종대야-"
"다 울었냐?"
"..."
"뭘 잘했다고 울어."
나도 모르게 말이 차갑게 나갔다. 다 너가 걱정돼서 그런건데, 너한테 화난거 하나도 없는데. 나는 너에게 화같은거, 낼 수 없다. 감히 나 따위가 말이다. 서툴렀다. 내가 이래, 미안해.
너를 치료해주고는 어서 자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런데, 너의 말은 내 사고를 멈추게 하기에 충분했다.
"...침대에서 잘래?"
"너나 자라니까."
"같이 자면 되잖아."
머리 속이 새하얘졌다. 너는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면서도, 내 음란한 머릿속은-아, 말도 안됐다.
결국 네 옆자리에 누웠다. 괜시리 민망해 등을 보이고는 누웠다. 마음만 같아서는 연인들처럼 너를 내 품에 꼭 안고-, 그렇게 자고 싶었는데...
너는 내가 자는 줄 알았는지 중얼중얼 말을 꺼냈다.
"종대야."
"종대야, 자?"
"흠, 있잖아, 종대야. 아까 진짜 고마웠어."
"너가 막, 나한테 차갑게 굴긴 해도, 어-, 사실 너한테 고마울 때 되게 많았어."
"음, 저번에 나 운동했는데 음료수 줄 때도 그랬고, 다친거 신경써줄 때도 그랬고..."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잘자, 종대야."
한참 생각에 빠졌다. 너는 내게 무엇이 미안한 걸까.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저 십년전 그 일에 대해 사과를 한 것이라 생각하고는 뒤를 돌아 누워 너를 바라보았다. 작게 너의 이름을 불렀다. 자는 듯 규칙적인 숨을 내뱉는 너였다.
넌 잘 때도 예쁘구나. 너를 조심스럽게 내 품에 넣었다. 맞춘듯 딱 내 품에 쏙 들어오는 너였다. 너의 숨결이 내 목을 간지럽혔다. 내 심장은 그 감촉보다 더 간지러웠다.
***
다음 날 우리는 어색했다. 그리고 너는 내 눈치를 봤다. 나는 너에게 어떻게 하면 점수를 딸까, 어떻게 하면 너와 잘 될 수 있을까 고민하느라 말이 없었다. 아니, 사실 내 눈치를 보는 너가 귀여워서 일부러 아무 말도 안한 것도 있었다.
너를 집 앞에 내려주었다. 그리고는 얼른 너를 따라내렸다.
나는, 너를 놓치고 싶지 않다.
너에게 입을 맞췄다. 달았다.
"...우리, 너 엊그제 술 취했을 때,"
"우리 키스했어."
집으로 가는 내내, 너의 그 놀란듯한 표정이 너무 귀여워 잊혀지지 않아 웃음이 나왔다.
***
엄마가 오신다는 너의 말에 같이 공항에 간다며 졸랐다. 어머니는 나를 참 예뻐라 하셨다. 너의 집에 가서 다같이 저녁을 먹는 일도 많았다.
그리고, 어머니와 같이 저녁을 먹을 때에는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았다.
"종대야, 재촉하는건 아니지만. 여주랑 결혼 할거지? 10년을 넘게 만났는데."
너의 당황한 표정이 보였다. 그 표정에 웃음이 나왔다.
너가 어떨진 모르겠지만, 난 너하고 결혼하고 싶은데?
"네, 해야죠."
"할거에요, 여주랑 결혼."
너를 향한 나의 마음이, 사랑을 다시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
너와의 스킨십은 할 때마다 아찔했다. 너가 너무 여자로 보여 미칠지경이었다. 옛 말에 여자는 남자를 3초만에 바보로 만든다는 말이 있었다. 그게 딱 내 꼴이었다. 너 앞에만 서면 바보가 됐다.
너만 보면 입맞추고 싶고, 다들 알다시피 나는 충동적인 사람이라, 내 본능이 시키는 대로 바로 너에게 입을 맞췄다. 입을 맞출때면 싫은 척 하면서도 슬쩍 눈을 감는 너가, 달콤한 입술이, 무엇 하나 좋지 않은게 없었다.
나는 너가 이렇게 좋아 죽겠는데, 너는 나에게 관심이 별로 없어보였다. 그 김종인 대리인가 뭔가 하는 사람 때문에.
너는 그 날도 김종인 대리와 밥을 같이 먹는다 했다. 싫었다. 당장이라도 너에게 가서 그 남자 말고 나랑 먹자고, 나한테도 관심 좀 주라고 보채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이것보다 너가 나에게 질려하는게 더 겁이 났다.
[그래]
[맛있게 먹고]
[나 걱정시키지 마]오후11시46분
찌질하기 짝이 없었다.
***
며칠만에 나의 생각은 많이 바뀌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너에 대해서 자신이 있었다. 나는 십년 전의 너도 알고, 지금의 너도 알고...하여튼 너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는데.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은 통 자신이 없었다.
어쩌면, 내가 너의 감정을 가로막고 있는 거일지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너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다.
"...내일, 어머니 공항에서 배웅해드리고..."
"응."
"...데이트할래?"
"...미안해."
심장이 멈추는 듯 했다.
"...응? 안돼...?"
"나 그 날, 친구들 만나기로 했어."
사실, 내 눈을 피하는 너를 보고는 거짓말이라는걸 직감했다. 믿기 싫었는데, 잠시라도 네 생각을 안하기 위해 찾아간 영화관에서 나는 뼈저리게 후회했다. 그냥 집에서 티비나 볼걸 하고 말이다. 내 눈앞에 보이는 행복해보이는 너와 김종인 대리의 모습에 눈물이 날것만 같았다.
너가 행복하다면, 내가 떠나주는게 맞는걸까.
***
그 이후로는 매일매일이 술이었다. 회사에서도 너를 피하기 바빴고, 너에게 거리를 두느라 바빴다. 너가 불안해 하는 눈빛을 보일 때마다 속으로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너를 거절해야 하는 내가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너가 우리 집으로 찾아온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내 집으로 들어오는 너에 더 마음이 아팠다. 너는 내가 그렇게 쉬운가, 하고 말이다. 너는 내게 단 한순간도 쉬웠던 적이 없다. 너는 항상 내게 어려운 존재였다.
"...너 나 이제 싫-"
너가 하려던 말을 가로챘다. 말도 안됐다. 내가 어떻게 널 싫어해. 오히려 너를 향한 너무나 강한 마음에 내 자신이 싫을 지경이었다.
"말도 안돼, 내가 어떻게 널 싫어해."
"그, 그러면 왜 요즘에 나한테..."
"..."
"나 막 피하구, 내가 말 걸려고 해도 다른 일 얘기만 하고..."
너는 속상한 듯 했다. 속상해? 내가 더 속상했다. 나와는 다르게 내 감정도 컨트롤이 안되고, 너도 내 마음대로 안되고, 그냥 내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내가 더 속상했다.
"너무 좋아해서 그래, 너무 좋아해서..."
술김에 말한 진심이었다. 괜히 감정이 격해졌다. 울것만 같았다. 네 앞에서는 눈물 보이기 싫었는데, 너만 보면 마음아파도 약하게 보이기 싫었는데...
너라는 사람 앞에서 나는 한없이 유치해지고, 약해질 뿐이었다.
"나는, 나는 진짜 모르겠어."
"너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고..."
"너는 김종인 대리하고 잘 돼가고 있는것 같고..."
"나는 너가 정말로 좋아서, 너가 행복하면 그걸로 됐다고 포기하려고도 해봤는데,"
"안돼, 정말로 안돼."
"너 볼 때마다 미칠것 같아. 너가 다른사람이랑 있는것만 보면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아."
내 눈을 바라보는 너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 너한테 목 메는거 맞아, 여주야."
맞아, 나 너한테 목 멨어, 너가 아니면 정말 안될것 같아.
"너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고, 싫을 수도 있는거 이해하는데..."
그런데, 그래도 못 멈출것 같아.
"나도 내 감정이 주체가 안돼, 나도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아."
힘들어도, 그래도 차라리 너를 안좋아하는것 보다는 덜 힘들것 같은데.
"갖고 놀아도 좋으니깐...그냥 네 옆에 있으면 안돼...?"
나도 모르게 내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정말로...나는 너가 나 갖고 놀아도 돼, 막, 나 싫으면 다른 남자 만나고, 그래도 되니깐..."
"내가 다 노력할게. 너가 싫어하는 내 모습 고치고, 다른 남자 만나도 맨날 기다려줄게."
"나 싫어하지만 마, 제발...응...?"
간절했다. 나도 내 감정이 이렇게까지 절실한지는 몰랐는데. 그저 네 옆에 있는것 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한참 우리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무서웠다. 너가 나를 싫어할까봐. 내가 방금 한 말이 오히려 역효과가 날까봐. 뱉어 놓은 말을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어있었다.
"무슨 말이야."
마침내 너가 입을 열었다.
"내가 너를 왜 싫어해."
너의 한 마디에 나는 살았다, 죽었다 한다.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만만치 않게 너한테 휘둘렸고, 하루 종일 네 생각밖에 못했어."
"내가 너를 어떻게 가지고 놀아, 좋아하는 사람을 가지고 노는게 말이 돼-"
급하게 너를 끌어당겨 깊게 입을 맞췄다. 아, 예쁘다. 너무 예뻐. 나를 좋아한다고, 그런 말을 내뱉는 너의 입술은, 지금까지보다 몇배는 더 달콤했고. 힘이 풀려서는 나에게 매달리는 너가 너무 예뻤다.
"사랑해, 사랑해. 진짜."
말해도 말해도 내 진심을 담기에는 모자라, 여주야.
***
며칠 후 너를 집 밖에 기다린게 원인인지 나는 감기에 걸렸다. 항상 그랬듯 잠깐 스쳐지나가는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너가 나를 걱정하는게 눈에 보여 그저 좋았다.
월차를 내라는 너의 말을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내 몸상태는 따라주지 않았다. 내가 삐졌다며 화를 풀어주려는 너의 모습도 귀여웠고, 그러면서 먼저 스킨십하는 모습이 조금은 섹시...아...됐다.
집에 도착해 한참을 자다 간신히 깨 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전화를 받는 너의 목소리는 술에 취한듯 잔뜩 꼬여있었다.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솔직히 너에게 화가났다기 보다는 걱정되었다. 나는 맹세코 단 한번도 너에게 화가 나 본적이 없었다. 너는 나에게 화조차 낼 수 없는,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너의 말은 내를 화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누구랑."
-김종인 대리님이랑!!
"..."
-나 지금 대리님 집이다아-
"...뭐?"
너의 말을 뒤로, 여주씨, 다 갈아입었어요? 하는 김종인 대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오해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너는 전화도 받지 않았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다 다시 지끈거리는 머리에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다.
너는, 이정도 밖에 안되는 애였어? 나한테 단 한순간이라도 진심이었던 적이 있긴 했던거니.
답이 없는 물음을 계속해서 던져댔다.
나는, 진심으로 그냥 일방통행이어도 괜찮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씨발..."
아니었나보다.
나는 처음으로 너에게 화가 났고, 너에게 실망했다.
***
다음 날 회사에서 만난 너에게, 나는 모진 말을 하고 말았다.
"...평생 그딴 식으로 살아."
"남자들 속이고 다니면서."
"이런게 좋아, 너는? 재밌어?"
너가 눈물을 흘렸다. 나 때문에 우는 모습은 보기 싫었는데, 누군가 내 마음을 후벼파는듯 아팠다.
"도대체 뭐 하나 나한테 진실인게 있었어?"
내 말에 너는 그러지 말라는 듯 울며 손목을 잡았다. 그 손목을 차갑게 쳐냈다.
"제발, 제발 내 인생에서 좀 사라져."
그 말에, 너의 눈에서 무언가가 깨진 것을 나는 보았다.
"꺼지라고, 좀."
이 말 만은 안했어야 됐는데,
내 말에 충격받은 듯 꼼짝도 못하는 너를 홀로 두고 나는 비상구를 나왔다.
***
그 이후로 나는 너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너는 많이 상처받은 듯 했다. 그치않아도 말랐었는데, 점점 더 살이 빠지는 듯 했다. 백현씨랑 함께 있을 때도 웃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이기적이다. 그 모습을 보고 못된 마음이 들었다. 힘들어? 내가 더 힘들었어. 너도 그렇게 사람 마음을 짓밟아 놨으면 똑같이 감당해야지. 내가 아팠던 만큼 너도 아팠으면 좋겠어. 내가 힘들었던 만큼 너도 나 때문에 힘들어 봤으면 좋겠어.
유치한 복수심을 나는 너에 대한 미움이라는 변명 안에 억지로 가두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러던 어느날 너는 나를 붙잡았다.
"...종대야."
"뭐."
네 얼굴조차 쳐다보지 않았다. 내 옷 소매를 잡아쥐는 손이 미약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 손을 차갑게 쳐냈다. 너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나 할 말 있어."
"뭔데, 또 거짓말이나 하게?"
조소를 띠우며 말했다. 그 말에 너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게 보였다. 입술을 깨물던 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종대야, 그게 아니라 지금까지 있었던 일 다 너한테 솔직하게-"
"솔직하게 할게 뭐가 있어."
"..."
"굳이 너가 안 솔직해져도 네 본모습을 내가 다 아는데."
"...종대야, 진짜로..."
"제발 그만해."
나의 말에 너가 말을 멈췄다.
"...꺼지라고 했지."
"..."
"내 눈 앞에 보이지 말라고 했잖아, 보기 싫어.니 얼굴 보기 싫다고."
"..."
"너가 회사를 그만 두던가, 부서를 바꾸거나 하면 되겠네."
"..."
"...내가 너한테 좀 잘해줬다고, 너가 나한테 뭐라도 되는 줄 아냐?"
"..."
"너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양 착각하지마. 나도 그냥 재밌어서 한번 해본거니까."
그 말에 너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진심일리가 없었는데, 그런데.
"기분 더럽지. 나 보면 기분 더럽잖아. 지금 내가 널 보면 그렇다고."
한번 시작하자 끝도 없었다. 이제 내 입은 내 의지와 상관없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
다음날 나는 불안함에 손톱만 물어뜯었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너는 회사에 올 생각조차 없어보였다. 백현씨에게 물어봐도 모른다는 답 뿐이었다.
그러다 어제 나의 말에 무서움이 앞섰다.
'내 눈앞에 보이지 말라고 했잖아, 보기 싫어. 니 얼굴 보기 싫다고.'
'기분 더럽지. 나 보면 기분 더럽잖아. 지금 내가 널 보면 그렇다고.'
...상처받았겠지. 아마 상처받았을 것이다.
그렇게 너는 며칠 째 연락조차 안되고 있었다. 물론 회사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말이다. 이제는 내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온갖 최악의 상상을 다했다. 혹시, 이상한 생각 한건 아니지?
마침 복도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김종인 대리가 보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를 붙잡았다.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저기, 여주씨는."
"...팀장님도 연락 안돼요?"
"네?"
"통 연락이 안돼서."
김종인 대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 김종인 대리는 살풋 웃으며 말했다.
"여주씨가 팀장님 많이 좋아하더라구요."
"..."
"여주씨한테 잘해줘요. 여주씨 많이 힘들었을 거에요."
"..."
"아, 잠시만요. 전화가 와서."
그 말을 끝으로 김종인 대리는 멀어졌다. 그의 의아한 말에 나는 답을 얻지 못한채 사무실로 돌아와야했다.
***
김민석에게 연락이 왔다. 저녁을 같이 먹기로 했다. 그런데 그를 만나자 마자 들은 소리는 욕이었다.
"야, 이 병신아."
"왜 만나자 마자 욕이야."
"너 병신이니까."
"그치않아도 머리아프니까 너까지 머리아프게 하지 마."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잡았다. 그런데 김민석의 다음 말은 내 모든 행동을 멈추게 했다.
"너 여주한테 무슨 말을 했길래 그래."
"...뭐?"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여주한테 무슨 말 한거냐고, 무슨 말을 했으면 애가 갑자기 연락도 안되고, 자기가 사라지겠느니 그런 이상한 말을 하냐고!"
김민석은 화가 난 듯 했다. 그런 그를 나는 바라만 보았다.
"...시발, 니가 알긴 알아? 니가 걔한테 당해봤어? 믿었던 사람한테 짓밟히는 기분을 니가 아냐고!"
"병신아, 모르는건 너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그딴식으로 김여주한테 상처주는 말만 하는데!"
그와 한창 언성을 높혔다. 둘 다 격양된 감정을 가라앉히느라 한참 정적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쪽은 나였다.
"김여주한테 무슨 일 있었는데."
"..."
"들어나 보자, 한번. 또 어떤 거짓말을 쳤을지."
그리고 이어진 김민석의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과거의 나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
핸들을 쾅 내리쳤다. 급하게 차를 몰아 도착한 너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도대체 어디있는거야, 도대체...
깊은 한숨을 내쉬다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몇 번째 하는 전화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핸드폰이 꺼져있다는 안내음 만이 나를 반겼다. 고민하다 미국에 계실 너의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
-어, 종대니?
밝은 어머니의 목소리에 한없이 죄송하면서도 안심이 됐다.
"...혹시, 여주랑 요즘에 전화한 적 있으세요?"
-아니, 얘는 전화도 잘 안하고...
그 말에 머리가 아파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알겠습니다. 감사해요."
-왜, 무슨 일 있니?
"아니에요, 다음에 다시 연락 드릴게요."
겁이 나기 시작했다. 무슨 일 있는건 아니겠지,
다 내 잘못이었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치않아도 힘들었을 너에게 상처를 줬고, 네 진심을 무시했다. 피해자인척 굴었는데, 오히려 진심을 무시하고 마음을 짓밟은건 내 쪽이었다.
***
한숨을 내쉬었다. 입김이 불어나가는 것이 보였다. 아직 야자가 끝나지 않았는지 불이 환히 켜져있는 학교 건물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옛날 생각이 나 웃음이 나왔다.
"...옛날에는 여기 앉아서 김종대랑 수다도 떨고 그랬는데."
지금 앉아있는 벤치를 쓰다듬었다. 고등학교를 찾아온건 충동적이었다. 그냥, 이번을 마지막으로 김종대를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서...
며칠 전 김종대에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모든걸 다 말하겠다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역시 김종대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상처를 받는건 어쩔 수 없었다. 그게, 김종대의 눈 앞에서 완전히 사라지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김종대가 처음 내게 꺼지라고 말했을 때, 상처는 받았어도 포기는 안하겠다고 생각하고 계속해서 회사를 나갔다. 그런데, 김종대가 나를 싫어하는 것 보다 나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는게 몇 배는 더 힘들었다.
김종대가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김종대가 나를 못 믿는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단지, 김종대가 정말 좋은데, 진심인데...그런데 이런 그를 다시는 못 본다는 것이 가장 가슴아픈 일이었다.
한참 김종대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옆에서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고개를 돌리니
...김종대가 무릎을 집고는 빠르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 둘 다 한참을 굳어있었다. 숨을 고른 김종대는 내 쪽으로 다가와 나를 품 안에 넣었다. 그런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뭐 하는거야, 놔."
"미안해, 미안해. 여주야."
"뭐가 미안해, 거짓말하지 말라며. 너가 꺼지라했잖아, 그래서 너가 원하는데로 했는데 왜-"
"내가 진짜 미안해, 응...?"
김종대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정말로 몰랐어. 너한테 그런 힘든 일이 있는지도 모르고, 나만 이기적이게-"
"...들었어?"
"...응."
그 말에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누구한테 들은거야.
"미안해..."
"..."
"정말 미안해. 너 진심 몰라준 것도 미안하고, 네 말 무시한 것도 미안하고..."
김종대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
"나도 잘한거 없잖아, 됐다고."
"여주야."
김종대는 초조한 표정이었다. 그런 김종대를 내버려 두고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학교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런 나를 김종대는 붙잡았다.
"여주야."
"...왜."
"지금 이런 말 정말 뻔뻔하고, 우스운거 아는데..."
"..."
"우리 다시 진지하게 만나보자."
그 말에 뒤를 돌아 김종대를 바라보았다.
"진심이야."
"..."
"이제는, 서로한테 숨기는것도 없고, 진심이니깐."
김종대는 긴장되는듯 손을 가만두지 못했다.
"...싫어."
"응...?"
"너가 나한테 얼마나 심하게 말했는데."
"..."
"너 애 좀 타보라고."
"..."
"아직은 아니야."
"아, 왜애..."
아직은 아니라는 내 말에 소심하게 왜애...하고 말끝을 흐리는 김종대였다. 모르냐는 듯 고개를 돌려 확 째려보자 내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고개를 내리깔았다.
"...너 하는거 보고, 생각해 볼게."
그 말에 김종대는 굳은 결심을 한 듯 의지에 가득차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왕님처럼 모셔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