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이 끝났다.
내 12년이 끝났다.
허무하더라, 내가 배웠던 것들이 시험 한 번으로 평가를 받고 끝났다는 게. 실감이 안 났어. 기대했던 점수와 등급은 아니었지만 그냥 내 실력 그대로 나온 것 같아서 후회는 없었어. 수능이 전부 끝나고, 긴장이 다 풀리고서야 드는 생각이 이거였어. 부승관이 만나자고 한 거. 근데 내가 먼저 만나자고 하는 건 염치가 너무 없는 것 같고, 그냥 알아서 연락이 오겠지 생각했어. 학교에 갔더니 잘 봐서 우는 애가 있고, 망해서 우는 애도 있고, 예체능은 넋나간 표정이야. 그래도 학교 일찍 끝나는 맛으로 간다. 영화는 지겹게 틀어 주고, 그렇게 교실로 보내던 선생님들이 이제는 강당에 왜 이렇게 많이 부르는지 모르겠어. 무슨 공연을 본다, 누가 공연을 한다 뭐 이런 거 말야. 알지? 반에서는 빙고는 이미 시시해졌고, 무슨 게임들이 그렇게 많은지 처음 알았잖아. 옛날에 부승관이랑 했던 거 생각나더라. 아, 부승관. 나한테 너무 큰 존재인가 봐, 얘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아무튼 그날도 그냥 그렇게 끝났어. 하교를 하려고 누구보다 빠르게 준비하고 나왔어. 딱 나오니까 보기 싫은 애가 있더라.
그 후배,
그리고 반대로 너무 보고 싶었던
부승관도.
사실 엄청 보고 싶어서 자꾸 생각나고 먼저 연락을 해야 하나 싶었는데, 막상 보니까 미안한 게 떠올라서 눈을 피했어. 만약 부승관 혼자 있던 거라면 내가 먼저 가서 인사도 하고 그랬을 텐데, 내가 싫어하는 후배가 딱 같이 있으니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여기에서 빨리 없어져야겠다는 생각만 들더라고. 빠른 걸음으로 교문을 나서서 집에 가려는데, 승관이가 내 손목을 딱 잡았어.
수능 끝났잖아, 반장.
후배가 특유의 짜증 난다는 표정을 하면서 팔짱도 끼고 부승관을 쳐다보더라. 그래서 내가 몸을 돌렸어. 어차피 여기서 얘기를 해 봤자 좋아질 상황도 아니고, 나는 후배가 정말 싫었어. 그리고 부승관, 후배, 나. 이 조합은 정말 상상도 하기 싫을 정도로 마주치기 싫었어. 그런 말이 있잖아. 뭐가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그 뭐같이 느껴지는 게 후배야. 나는 걔가 정말 싫거든. 그래서 내 손목을 잡고 있던 승관이를 밀어내고 나는 집에 가려고 했어.
그런데 승관이가 갑자기 내 손을 잡더라.
아,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어. 장난을 치는 중도 아니었고, 둘이 있던 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그 후배 앞이었으니까. 아무것도 안 들리고 온 신경이 부승관이랑 손을 잡았다는 거에 집중이 됐어. 거기서 그 후배가 부승관한테 지금 뭐하는 거냐고 따지는 것처럼 묻더라. 그러더니 승관이가 왜 나한테 인사 안 하냐고 하는 거야. 당황해서 바닥에서 시선 고정한 상태로 애꿎은 손만 꾸물거렸어. 그래도 놓기는 싫어서 나도 꼭 잡았던 것 같아. 날이 많이 추웠는데도 승관이 손은 따뜻하더라. 방금 자판기에서 뽑은 코코아처럼 승관이 손이 너무 따뜻하고 좋았어. 내가 신을 믿고, 종교가 있었더라면 아무 신한테 부탁해서 시간을 멈춰 달라고 했을 거야. 좋았던 것도 잠깐이지 그 후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내가 뭔데 인사를 하냐고 짜증을 내더라. 아, 진짜 듣기 싫으니까 그냥 꺼졌으면 좋겠다 생각이 들었어. 내가 부승관한테 작게 말했어. 나 보러 온 거면 그냥 무시하고 가고, 얘 보러 온 거면 손 놓고 가라고. 그랬더니 부승관이 그냥 잡고 있던 손을 깍지로 바꿔 잡으면서 아까보다 더 꼭 잡고 그 후배 눈 앞에 대고 살짝 흔들면서 보여 줬어.
안 보이냐. 내 여자 친구인 거.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부승관한테 들리는 건 물론이고 그 후배한테까지 들릴까 봐 조마조마했어. 후배는 자기가 나한테 했던 행동이랑 김치찌개 장인처럼 애들한테 자랑한 게 쪽팔렸는지 교실로 막 뛰어가더라. 울 것 같았는데, 나한테 부승관 여자 친구 행세했던 거 생각하니까 통쾌했어. 뭐라고 해야 하지... 걸리적거렸던 거 퇴치한 느낌? 그 후배 생각만 하다가 승관이랑 잡고 있는 손, 여자 친구라고 했던 게 딱 생각나서 손을 딱 빼고 물었어. 왜 이런 장난을 치냐고. 그랬더니 승관이가 내 손을 다시 잡고 그냥 걸어가더라. 대답도 안 하고 말이야. 그래서 내가 다시 장난 그만 치라고 했더니,
너는 이게 장난으로 보이냐.
이랬어. 아, 쫄았다. 맨날 웃는 부승관이 이렇게 진지하게 말하면 당연히 쫄지, 안 쫄겠냐고. 내가 이렇게 생각한 거 어떻게 알고 또 빙구처럼 방긋 웃더라. 귀여워 죽겠다. 승관이가 자기 외투 주머니에 나랑 잡은 손을 넣더니 말했어. 이제 그냥 친구 아니고 너 내 여자 친구다, 반장. 이렇게. 뭔가 내가 일 년 고생한 거 보상받는 것 같고 부승관한테 그렇게 대했던 게 미안해서 승관이 이름을 불렀어. 부승관은 내가 미안하다고 말할 걸 알았는지 사과는 안 해도 된다고 했어. 나 너무 떨렸어. 내가 좋아하는 애랑 지금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어. 우리는 손을 잡고 근처 카페에 갔어. 가면서 부승관이 하는 말이, 내 친구한테 물어보니까 여자애들은 카페에서 얘기하는 거 좋아한다고 해서 가는 거다. 내 취향 진짜 아니야. 알지? 이러는데 귀여워서 또 죽을 뻔했잖아. 가만히 있는 거 싫어하는 부승관이 나랑 얘기하는 것만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어.
승관이랑 나는 둘 다 커피를 별로 안 좋아해서 맨날 초코 인생이야. 그래서 핫초코를 먹었어. 자리를 대충 잡고 앉아서 제대로 얘기를 시작했지. 이제 친구 부승관 아니고 내 남자 친구 부승관이잖아. 근데 부끄러워서 눈도 못 보겠는 거야. 근데 승관이가 끝까지 나를 보면서 눈을 맞추려는 게 기특해서 딱 눈을 봤는데, 승관이가 어? 이러면서 예쁘다고 머리 쓰다듬어 줬어. 내가 승관이한테 사실 중학교 때부터 좋아했다고 말했어. 간부 수련회 갔을 때, 담력 훈련 그 무서운 거 자기도 무서웠으면서 센 척하고 자기 오른쪽 팔 꼭 잡으라고 했던 든든한 부반장이었던 얘기도 하고. 내가 귤 좋아하는 거 알고 급식으로 나왔을 때, 제주도에서 많이 먹었다면서 은근 나 챙겼던 부승관도 생각났어. 오랜만에 옛날 얘기 하니까 부승관도 막 웃더라.
그리고 나를 불렀어.
야, 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