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수야,
이제 잠에서 깨었느냐? 너는 언제나 묘시에 일어나니 지금쯤이면 해도 떠오를 시간이겠구나. 아침이 밝았으니 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거라. 몸이 무거울테니 기지개도 한 번 켜고 말이다.
말 하지 않아도 너는 잘할테지만 먼 곳에 있으니 잔소리가 먼저 튀어 나가는 구나. 자식을 멀리 보낸 부모의 마음이 이러할까. 하나하나 다 걱정이 되. 긴 밤, 꿈은 어땠느냐. 또 평소처럼 악몽에 쫓혀 잠을 뒤척이지는 않았겠지. 아직도 나는 잠을 자다가도 네가 내 품안에서 눈물을 지을 것만 같아 종종 잠을 깨곤 한단다.혹 어제 달을 보았느냐? 둥그스름하니 모난 곳이 없고, 하얗고 미리내처럼 밝아 소담한 것이 꼭 너를 닮았어.
그래도 너 만큼 어여쁘진 않으니 투기하지 말거라. 사실 네 강새암은 가끔 무서울 정도이니.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네가 내 물음에도 답을 않고 입을 다물 때 마다 내 얼마나 노심초사 했는지 아느냐?너는 세상에 투기할 것이 없는 아이다.
세상 어떤 꽃이 너보다 진한 향기를 지니고 어떤 녹록이 너보다 맑은 눈망울을 지녔을까. 초승달도 네 웃음엔 한달음에 도망을 치니, 꽃을 쫓을 나비가 너를 찾아 오고 세상을 밝혀야 할 밤 하늘의 달마저 너를 비춘다. 네가 발을 딛는 곳은 죽은 꽃이 피어나고 마른 땅이 새싹을 틔운니 세상의 모든 것들이 너를 시샘했으면 시샘하였지 너는 어찌 나를 조급해 한 단 말이냐.
그러니 알겠느냐? 세상 가장 고운 너를 두고 한 눈을 팔지 않는다는 말이다.
네가 궁을 나간지도 어느덧 보름을 훌쩍 넘겨 그믐이 지났다. 아직 그믐 밖에 지나지 않았다니.. 어떠냐 너는.
내가 없는 시간이 빠르더냐 느리더냐? 내가 보고 싶더냐? 그렇다면 얼마나 보고 싶더냐.
네 대답을 들을 수는 없지만 이것 하나만은 내 다짐할 수 있다.
너보다 곱절을 더 너를 머리에 품고, 너를 연모하고, 너를 그리고, 너를 사모하고, 너를 갈망했다는 것을.
매일 너에 잠겨있는 것만 같았어. 사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좀 과하긴 하였다. 그래도 어쩌리. 사랑하는 임이 보고픈 마음을 누가 알아주랴. 너 밖에 알아줄 곳이 없으니 이렇게 하소연이라도 해야겠다.하지만 굳이 몸이 닿지 않아도 어떠느냐, 마음이 닿아 있거늘.
비록 너와 내가 있는 곳은 다르지만 같은 조선 하늘 아래 우리의 마음이 향하는 곳이 같지 않느냐.
같은 조선 하늘 아래가 아닐 지라도 나는 언제나 너를 향한다. 그 곳이 불구덩이일 지라도, 폭풍우가 치는 물바다속 일 지라도, 언제나 나는 너를 향할 것이다.
그전에 네가 폭풍우가 치는 물바다속이나 불구덩이에 있게 하지 않을 테니 염려 말거라.네가 늘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곧 태양을 품은 하늘이고 물을 담은 아라라고.
나를 믿거라. 태양 보다 뜨겁고 물보다 깊은 너를 품을 그릇이 될테니.
더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너를 다시 데려올 것이야.
조금만 더 기다리거라. 내 약속하마. 어진 임금이 되겠다고. 네 말대로 백성의 손을 먼저 잡는 왕이 될 것이다. 백성이 손을 뻗을 수 있는 임금이 될 것이야.하지만 나는 왕위에 오른지 2년이 흐른 지금 까지도 아직 어린 것 같아. 아직 내겐 시간이 많이 필요한 듯 해. 어제는 신하들과 경연이 있었다.
나보고 쓸 모 없는 곳에 국비를 낭비한다고 꾸짖는데, 혼이 날 뻔 했지 뭐냐. 네가 아닌 것들의 잔소리가 듣기가 싫어 경연을 중단하고 나와 버렸다.
나는 아직 좋은 왕은 아닌 가 보다, 경수야. 처소로 돌아오면서도 줄곧 네 생각이 났어. 네가 보고싶더라. 나를 보며 왜 그러셨습니까, 짐짓 낮은 목소리로 꾸짖는 네가 보고싶었어.
백성을 먼저 살피고, 나라의 안녕을 빌어야 할 한 나라의 임금이 연모하는 상대에게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아. 정인이 너무 아름다운 탓에 눈과 귀가 멀어버린 탓이다.
네가 이 말을 들으면 분명 날 꾸짖을게다. 그리고 혼자 책망할 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어떡하느냐. 몽중상심이라고, 꿈에서 까지 네가 보이니. 어제도, 그제도, 그그제도 네가 몽리에 찾아왔다.
그리움이 만들어 낸 허상인지 아니면 정말로 네가 찾아왔는 지는 오로지 너만 알겠지.
내 말에 너를 책망하지 말아라, 경수야. 단지 부끄러워 하거라. 나의 정인이 나를 이만큼이나 생각하여 주는구나, 사랑하여 주는구나! 이렇게 기뻐하고 부끄러워 하거라. 그거면 된다. 너를 책망하지도 말고 혼자 고민하지도 말거라.
너는 단지 내가 성군이 되기까지의 시간을 내 곁을 지켜주면 된다. 네 할 일은 그뿐이다. 어명이 아니다. 부탁이다. 한 나라의 왕이 아닌 한 사내로써의 부탁. 지켜다오 내 곁을. 더 이상 멀어지지 않고 그 곳에서 계속 있어주거라. 그렇다면 내가 성군이 되었을 때 너를 지키러 갈 것이니. 그 때까지만 내 곁을 지켜주거라.이 편지가 당도하였을 쯤이면 아마 하루를 넘긴 뒤 일테다.
같은 하늘 아래 있건만 어찌 이리 좁혀지지 않는지. 오늘따라 네가 지은 시조 한 수를 듣고 싶구나. 등나무에 걸린 달을 그대로 담아 놓은 경회루의 연못을 앞에 두고 달빛 한 조각이 비추는 어여쁜 얼굴을 마주한 채 네 고운 목소리로 읊어 주면 더 좋을 텐데. 네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하구나.
오늘은 시를 한 편 지어 보거라. 나를 생각하면서 지어보라 하면 봉숭화 꽃 한 떨기 처럼 볼을 붉힌 채 송구합니다 라고 말하겠지. 송구할 것도 없는데 넌 늘 그렇게 말하더구나. 그렇게 부끄러우냐?
강요하는 마음은 없다. 때가 되면 언젠가는 들을 수 있겠지. 우리가 혼례를 올릴 즈음이 어떠냐? 첫 날 밤 촛불 하나를 앞에 두고 네가 나를 노래하는 시를 읊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기쁜 일이 아니더냐.
하지만 그 때는 시를 끝까지 읊지 못할 테야. 이유는 네가 더 잘 아리라 믿는다. 오늘은 농이 지나치냐? 네 얼굴이 또 다시 봉숭화 꽃 떨기가 되었을 것 같으니 이만하겠다.세상 네가 지은 시라면 어떠한 것인들 좋지 않겠느냐. 무엇이든 좋으니 꼭 지어 보거라. 어명이다. 나중에 다 살필 것이니. 그 때까지 차곡차곡 잘 모아 두어야 한다.
요즘도 춤은 추는 것이냐? 어떤 춤을 연습하느냐? 전 보다 더 잘 추느냐?
얼마 전에 궁에 연회가 있었다. 늘 그렇듯 장안에 내놓라 하는 여식들이라며 모인 계집들이 이리저리 몸을 가누며 춤을 추는데, 매일 네 춤만 보다 계집애들의 춤을 보니 여간 흥이 안 사는 게 아니다. 네 춤사위가 그리워. 한 떨기 떨어지는 꽃잎과도 같고, 꽃을 맴도는 나비와도 같고, 유유히 흐르는 냇물과도 같는 그 몸짓이. 온통 그리운 것들 뿐이구나. 온통 그리운 것 뿐이야...어제밤 기수에 누워 너와 한 약조들을 떠올려 보았다.
어느날 자시에 함께 은월각으로 몰래 산책을 나갔을 때 같이 아라를 보러 가자고 한 약조를 기억하느냐?
여름이 가기 전에 꼭 약조를 지키고 싶었는데 이리 쉬운 약조 하나 지키지 못하니, 나는 네게 있어 형편 없는 정인이구나. 한 번도 좋은 정인이 었던 적이 없어.
내가 밉지 않느냐? 못 해준 것이 너무 많아 가슴에 사무친다. 너를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진 않은데 이게 다 내가 모자란 탓이야.그래서 고맙다. 모자란 내 곁에 있어 주어서. 기다려 주어서. 외롭고 힘들텐데 잘 버텨 주어서.
오늘 네 꿈엔 내가 나왔으면 좋겠구나. 분명 단꿈이 될께다.
그리고 오늘 내 꿈에도 네가 또 찾아오거라. 함께 만나 몽유를 즐기자.
네가 좋아하는 조청도 준비해 놓을 테니 꼭 오거라.
오늘 밤은 길지 않을 터야.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겠다. 꿈에서 보자 꾸나.
- 꿈에서 만날 너의 정인이
김종인 (?~?) : 스무 살 부터 스물 네살 까지 4년 간 왕위에 오름. 궁에서 춤을 추던 무용수와 남색을 즐겼다고 한다. 왕이 스물 둘이 되던 해, 왕과 정을 나누던 사내가 외척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자신의 어미 현화부인의 속임에 사내가 현화부인의 보살핌 아래 궁 밖으로 쫓겨난 줄만 알던 왕은 2년동안 600여통의 편지를 사내에게 보냈다고 전한다. 왕의 편지는 왕이 편지를 부탁하던 왕의 호위무사가 모두 보관 하였으며 그 편지들은 왕이 스물 넷이 되는 해, 모든 진실을 안 왕이 스스로의 손을 잘라 자결하면서 외척 세력들에 의해 모두 불에 태워져 현재 전해지는 것이 없다. 김종인은 남색을 했다는 이유와 역대 왕실에 없던 왕의 자결이라는 불미스러운 죽음을 이유로 장례와 동시에 재위 기간인 4년 간의 모든 기록이 불에 타 없어졌다. 김종인에 관한 기록은 지금까지 전해지는 어떠한 역사책에서도 찾을 수 없으며 왕실 내 김종인을 안타깝게 여긴 몇몇 신하들에 의해 대(待 : 기다릴 대)연(燃 : 불탈 연)군으로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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