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탕탕!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는 일곱 명의 무한지구대 이야기
<응답하라112>
- 미스터몽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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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에피소드는 2009년에 벌어진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쓰여졌습니다.
소설 속 인물과 사건은, 재구성 및 창작 되었으므로 사실과 혼동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2012.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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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이랑 동네에서 오토바이를 타다가 그만…."
하던 말을 매듭짓지 못하고 죄책감에 고개를 푹 숙여버리는 소녀에게 잠시만 기다려 보라면서 타이핑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동우였다. 이호원 순경 자리로 걸음을 옮기자, 서류를 살펴보던 이순경이 고개를 들어 흘끔 쳐다봤다. 그의 모니터 옆에 놓여있는 코코아 통을 집어 들고는 그를 향해 가볍게 흔들어 보이자, 손가락으로 오케이 표시를 한다.
고맙다며 미소를 지어 준 뒤, 정수기로 걸어가면서 귓가에 대고 코코아 통을 흔들어보니 가루가 통에 부딪히면서 서걱서걱 거리는 소리가 제법 크다. 2012년도 3분기를 호원과 함께 했던 이 녀석도 이제는 양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정수기 앞에 서서 뚜껑을 열어보니, 역시나 하얀 밑바닥이 언뜻 보인다. 내일 모레는 휴가니까 마트에 가서 호원이가 좋아하는 코코아 한 통 좀 사다줘야겠다. 2012년도 4분기 코코아 말이다. 정수기 위에 가득 쌓여있는 종이컵을 하나 쑥 뽑은 뒤, 코코아 통을 기울여 제일 맛있을 법한 알맞은 양을 쏟아 부었다. 그러고 나서 힘을 주어 뚜껑을 꽉 닫았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종이컵 안을 들여다보며 긴가민가하는 동우였다. 머그컵으로는 자신 있는데, 종이컵에다가는 오랜만에 타는 거라서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만 하다. 음…. 아마도 맛있을 거야.
온수 버튼을 눌러서 빨간불이 켜지자, 종이컵을 대고는 뜨거운 물을 부었다. 앗뜨뜨…! 얇은 종이컵 덕분에 뜨거운 기운이 손에 닿는 바람에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움찔거린다. 물 붓는 것을 잠시 중단하고 종이컵을 하나 더 뽑아서 밑에다가 끼운다. 그러고 나서 다시 물을 쪼르르 따르고 나니,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게 눈에 훤히 잘 보였다. 여름인데 이건 좀 그런가? 아이스티를 타줄 걸 그랬나…. 티스푼으로 종이컵 안을 휘젓는데 갑작스레 후회감이 밀려온다.
제자리에 코코아 통을 갖다놓고 자리로 돌아온 장경장은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아있는 소녀 옆으로 다가가 코코아를 내밀었다. 이거 마셔. 경찰이 내민 것이 코코아란 것을 확인한 소녀는 받을까 말까 망설이는 듯 쭈뼛쭈뼛 두 손을 내밀더니 결국에는 고맙다는 말을 하며 받았다. 그 말에, 맛있으면 더 타주겠다며 방긋 웃고는 책상을 빙 돌아서 자리에 앉았다.
음…. 그러니까 사건 시간은 오후 9시 6분 경, 친구들과 오토바이를 타다가 어떤 아이를 쳤는데 그냥 달아났다 이거지…. 조사서가 어느 정도 작성되어 있는 모니터를 응시하며 소녀가 말한 내용을 차근차근 되짚어본다.
장동우 경장 앞에 앉아있는 이 소녀는 뺑소니를 자진 신고하러 온 것이었다. 소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오토바이를 같이 몰았던 친구들이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어린아이가 다친 것을 생각하니 자신은 너무나도 큰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이곳의 문을 두드린 거라고 했다. 지구대 문을 열기 직전까지 참 많은 갈등을 했을 텐데, 이렇게 용기 있는 결정을 해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소녀는 아이를 치고 난 뒤에 바로 신고한 게 아니라, 사건 현장을 떠나버렸기 때문에 뺑소니 죄가 성립되어 가중처벌을 받게 될 게 뻔했다. 오토바이로 쳤으니 피해자는 상해를 입었을 게 분명한데, 그렇게 되면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 5조 3, 제1항 제2호'에 의거하여 1년 이상의 유기 징역 또는 500만원 이상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게 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처벌받지는 않겠지만, 자칫해서 피해자 부모가 합의를 해주지 않는다면 꼼짝없이 소년원에 갈 신세였다.
"아혼양, 코코아 더 타줄까요?"
코코아를 호호 불어가며 홀짝홀짝 마시던 소녀는 괜찮다며 손사래를 친다. 소녀의 이름은 백아혼. 특이한 이름을 가진 소녀이다. 나이는 한창 친구들과 노는 것과 꾸미기를 좋아하는 여리디 여린 꽃 같은 열아홉. 생김새를 보면 왠지 모르게 백아현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렸을 것만 같다. 얌전하게 생긴 외모와는 다르게 폭주를 즐기는 이 화끈한 소녀는 우리 지구대에서 악명 높은 취객과 같은 동네에 사는 인근 학교 여고생이었다. 인피니트팰리스는 울림구에서 제일 부유한 동네인데, 특이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유난히 많이 사는 것 같다. 알코올 중독이 의심되는 20대 남성부터 폭주 뛰는 10대 여고생까지…. 잘사는 만큼 그에 대한 스트레스 또한 만만치 않은가 보다. 그들도 그들만의 세상에서 매일같이 그들끼리 경쟁하며 살다보니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그러는 걸까? 백날 아등바등 거려봤자 한낱 월급쟁이인 경찰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이지만 말이다.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한참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단축키 Alt+S를 눌러 문서를 저장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손가락을 바삐 놀려가며 모바일 메신저를 하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코코아를 말끔하게 비워낸 종이컵은 책상에 올려놓은 채였다. 소녀를 자세히 살펴보니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에 꽤나 집중하고 있는 듯 보였다.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조심스레 종이컵을 집어 들고는 정수기까지 가서 옆에 있는 사각형 모양의 파란 휴지통에 버리는 장경장이었다. 으휴…. 휴지통에 쓰레기가 한 가득이다. 이걸 지금 내다버려야하나? 아니면 쓰레기가 조금 더 찬 뒤에 버려야하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바짝 밀착하며 양팔로 허리를 감아왔다. 장경장은 새어나오려 하는 웃음을 꾹 참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자신의 허리를 감고 있는 손에 손을 얹어서 벨트를 채우는 것 마냥 꽉 잡았다. 그러고는 뒷사람의 손등을 검지로 살살 긁었다. 그러자 별로 아파하는 것 같지도 않은 어투인데, 아프다고 귓가에 속삭이면서 꽉 껴안는다.
"혼 좀 나볼래, 성열아?"
뒤를 돌아보며 말하자, 성열이 헤헤 웃으며 팔을 풀고는 항복한다는 듯 두 팔을 반쯤 들어올렸다. 에이, 들켰다! (호원이라고 생각한 독자는 fail….)
"나인 거 어떻게 알았어?"
"음식 냄새 나잖아~ 너 또 밖에서 돈가스 먹고 왔지?"
한 손으로는 코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냄새를 쫓아내듯이 허공을 휘휘 저어가며 말하는 장경장을 보며, 고개를 반쯤 돌려 어깨 부근에 대고 킁킁거려보는 이성열 순경이었다. 내 코가 이상한건가? 나는 왜 안 나지? 그 말에 장경장이 까치발을 들어 머리를 콩 쥐어박아주자 '아야!'하며 맞은 곳을 박박 문지른다.
"바보야, 이가 썩은 사람도 자기한테 입 냄새 나는 거 모르는 법이야. 그리고 너 농땡이 좀 치지 마! 뒷문으로 몰래 왔다갔다 거리는 거 CCTV에 다 찍힌다고."
장경장의 요상한 비유법에 이호원 순경이 저도 모르게 '풉-' 웃었다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기 위해 재빨리 표정을 굳히고 입을 앙다물었다. 일반 근무자와 교대하고 야근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괜히 서류를 뒤적거리며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하는 척 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의 모든 감각들은 동우의 뒤만 열렬히 쫓고 있었다. 장경장이 무심코 내뱉는 말들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모든 신경을 한 데로 모아 집중하여 하나하나 귀담아듣고 있던 걸, 혹여나 성열이 눈치챌까봐 괜히 마음 한 구석이 쿡쿡 찔려왔다. 아무에게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너무나도 비밀스러운 사내 연애이기 때문에 더 그런 걸지도 모른다. 이런 사랑이 힘들기는 하지만, 그만큼 아주 묘한 긴장감 같은 게 있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호원이었다. 어쨌든, 동우가 무얼 하던지 간에 그저 사랑스럽게만 느껴지니 이거 참 큰일이다. 라디오를 청취하는 사람 마냥 동우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다가 또 다시 무의식적으로 웃기 전에 아주 잠깐이라도 일에 집중해야 할 것 같다.
"엥? 뒷문은 사각지댄데?"
입꼬리를 아래로 축 늘어뜨리며 입가에 팔자 주름을 소환하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의 성열을 보고, 꺄르륵 웃는 동우였다. 그 모습을 보며 오늘도 한 건 했다는 뿌듯함을 느끼는지 성열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MISSION SUCCESS. 얼굴로 쉽게 남을 웃긴다는 건 참으로 보람찬 일이었다. 한참을 뒤로 웃어젖히던 장경장이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김경위가 너 야근 기록 보더니, 네가 야근할 때마다 CCTV에 안 잡힌다고 위치 조절했어~"
뭣이라!!!!!!!!!!!!!!!!!!!!!!!!!!!!!!
"언제!!!! 언제 설치했는데!!!!!!!! 그걸 왜 이제 말해줘!!!!!!"
일순간에 난폭해진 성열이 팔을 뻗어 양손으로 옷깃을 잔뜩 움켜잡고는 마구 흔들어대는 통에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른 채 그대로 흔들리고만 있는 동우였다. 도와달라는 표정으로 애타게 호원을 바라보지만, 하필 그는 일에 바짝 집중하고 있어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만 같다. 윽…. 호원아! 여기 좀 봐주라…!
*
유리창에 신문을 붙이며 태풍맞이로 한창 열을 올렸던 며칠 전이었다. 야근을 하고 있던 김경위가 그날따라 할 일이 없어서 꽤나 심심했는지 근무일지를 뒤적거렸다. 뭐하냐는 장경장의 물음에 '그냥 심심해서. 태풍 때문에 오늘은 취객도 안 오네. 강풍을 타고 날아와야 할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라고 무덤덤하게 말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종이를 팔랑팔랑 넘겼다. 주 1회에 서너 명이서 야근을 하는 형식인데, 다들 정해진 순서에 맞게 꼬박꼬박 근무해온 것을 확인하고는 소리 나게 근무일지를 덮었다. 다들 알아서 잘하네. 그러다 문득 '다들', '알아서', '잘하네' 이 세 어절 중에 단 한 가지도 해당되지 않는 이가 떠올랐으니…. 그게 바로 이성열 순경이었다. '다들 알아서 잘하네.'와는 정반대인 '이성열은 시켜도 못하네.'라는 세 어절에 하나같이 쏙쏙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쯧쯧, 그러기도 쉽지 않을 텐데….
오해일리는 '절대로' 없겠지만, CCTV를 돌려서 이순경이 야근하던 모습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결과는 예상대로 참혹했다. 잠시도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제 집 돌아다니듯 지구대 안을 바삐 누비고 다닌다. 엉덩이에 뿔 달려서 자리에 못 앉나 싶기도 하다. 평소에는 김명수 의경이랑 온종일 투닥투닥 거리다가도 김의경이 퇴근하고 나면 조금은 잠잠해 보였는데, 역시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었나보다. CCTV 화면 속에서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고 있는 이순경은 김의경 없이도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며 혼자서도 잘 놀고 있었다. 오히려 일반 근무보다 야근에 더욱 흥미를 느끼고 있는 듯한 분위기다. 내가 없어서 그런지, 더욱 활개를 치고 다니는 느낌 정도?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기가 찬다. 똑같이 방범 순찰을 돌아도 다른 동료보다 늦게 귀환하는 식인 그를 누가 말릴쏘냐….
갈수록 태산인 게,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화면에 잡히지도 않는다. 아이고, 두(頭)야…. 자리에 얌전히 앉아있는 것도 아니고 돌아다니는 것도 아닌 걸 보면,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무르거나 밖으로 나갔다는 식으로 밖에 얘기가 되지 않는데…. 엉덩이에 역마살이 낀 이성열이라면 한 곳에 오래 있지 않을 터. 해답은 CCTV 사각지대인 '뒷문'에 있음이 틀림없다. 이놈의 자식이…. 감히 근무지 이탈을 해? 근데 엉덩이에 역마살이라니…. 응? 엉덩이에 역마살?! 자기가 생각해놓고도 웃긴지 배를 부여잡고 음소거로 깔깔대는 성규(`▽´)였다. 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도저히 웃겨서 안 되겠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CCTV를 확인하고 나온 성규는, 자리에 앉아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후임에게 뒷문이 나오도록 CCTV 위치 좀 조절하라고 명령을 내린 뒤 씰룩이는 광대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앞문으로 나가버렸다. 하도 웃었더니 광대가 욱씬욱씬 거려왔기 때문이다. 밖에 나가서 더 웃다가 들어와야지~
그리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동우였다.
*
"그걸 왜 이제 말해줘!!!!!! 벌써 1주일이나 지났잖아!!!!"
으아아앙!!!!! 미쳐버리기 일보 직전인 성열은 머리를 잔뜩 헝클어뜨리며 발광했다. 엄연히 김경위 손바닥에서 놀아난 셈이었다. 환청이라도 들리는 것 마냥 김성규 그 인간의 사악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맴 맴돈다. 이 악마 같은 인간!!!!!! 이걸 죽여, 살려?
동우는 자아분열을 하고 있는 성열에게 힘내라고 어깨를 두어 번 두들겨준 후, 자리로 돌아와서는 아직도 모바일 메신저를 하고 있는 소녀에게 살갑게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아혼양~ 오늘 완전 수고했어요!"
다리를 꼰 채 혼자 앉아 있다가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황급히 잠금 버튼을 누르며 핸드폰 화면을 끄는 소녀였다. 방금 전까지 알록달록 다양한 색상으로 가득 찼던 액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까맣게 변해버렸다. 핸드폰에서 시선을 뗀 소녀는 긴 생머리를 귓바퀴 쪽으로 넘기며 고개를 들더니, 당황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네?
응? 그 모습을 바라본 장경장은 소녀에게 이상한 기운이 감돈다고 순간적으로 느꼈지만, 이내 부정을 하고는 직업병 탓으로 돌리며 애써 떨쳐내고자 했다.
"오늘 수고 많았다고요. 아참, 피해자와 연락 닿으면 곧장 집으로 연락갈 거에요. 부모님께 잘 말씀 드려놔요~"
아무렇지 않은 척 밝게 웃어 보이며 말을 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자신이 뭐라고 내뱉고 있는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 장경장이었다. 정상적이라면 머릿속으로 충분한 생각을 거친 뒤에 말이 나와야 하는데, 이건 마치 입이 별개의 생명체가 되어버려 제 멋대로 지껄이는 것 같다.
소녀가 알겠다면서 대답을 마치기 무섭게, 그녀의 손에 쥐여있던 핸드폰 액정이 켜지며 짧게 진동이 울렸다. 소녀가 고개를 숙여 화면을 바라보는 그 타이밍에 맞춰 슬쩍 내려다보니 모바일 메신저 알람이 온 모양이다. 그러다 갑자기 난데없이 고개를 드는 소녀 때문에 시선을 다른 곳으로 재빠르게 돌리는 동우였다. 왠지 모르겠지만, 눈이 마주치면 안 될 것 같은 강한 느낌이 본능적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저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의자 등받이에 걸어놓은 가디건을 우겨넣으며 서둘러 가방을 챙기기 시작하는 소녀였다. 그리고 핸드폰에 꽂혀있는 이어폰도 쏙 빼더니 대충 돌돌 말아서, 이 역시 가방 속으로 넣었다. 어렸을 적 피아노를 쳤었는지 유난히 마디가 길고 늘씬하기 만 한 손을 바삐 움직이면서 소지품을 정리하더니, 이내 가방 지퍼를 여닫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서서 바라보던 장경장은 소녀의 움직임에 정신을 가다듬고는 옆머리를 긁적였다.
"으이구…. 집에 가보게요? 그래, 시간이 많이 늦었네…. 부모님이 걱정하시겠어요."
제자리에서 가방을 매던 소녀가 좀처럼 가방끈을 찾지 못해 한쪽 팔을 허우적대자, 재빨리 뒤로 다가가서 끈을 잡아주는 장경장이었다. 게다가 팔을 이리로 빼라며 친절히 알려주기까지 한다. 소녀는 그 끈에 팔을 통과시켜 가방을 매고는 제자리에서 뜀뛰기를 한 번 했다. 왜 그러냐는 장경장의 웃음기 묻은 물음에 '이렇게 안하면 가방을 제대로 맨 것 같지 않거든요.'라며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답했다. 그 말에 장동우 경장은 으하하 웃고 말았다. 학창시절에 자신이 하던 행동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런다만….
소녀는 좀 전에 했던 그의 행동에 고맙다며 허리를 굽혀 꾸벅 인사를 한다. 그러자 동우는 손사래를 치며 '아니에요! 그러지 말아요!! 왜 그래요!!!'하며 발바닥에 불붙은 사람 마냥 어쩔 줄 몰라서 펄쩍펄쩍 뛴다.
"근데 여자 혼자서는 밤길이 위험할 텐데 데려다줄까요?"
네? 제가 아니라 밤길이 위험하다고요?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하는 소녀. 그리고 그녀와 같은 표정, 같은 말로 되묻는 장경장이었다. 네? 밤길이 위험하다고요?
도대체 이 대화는 어디서부터 미궁으로 빠지게 된 걸까. 생각의 시간을 잠시 갖은 소녀는 방금 전 장경장이 했던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머쓱하게 웃더니 손사래를 치면서 괜찮다고 했다. 말을 제대로 이해 못했었다는 말과 함께.
"어차피 아혼양 아파트 단지까지 순찰 반경에 포함돼서 상관없어요. 관할 지역이거든요~"
오직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사람 마냥, 믿어달라는 듯 호소력 짙게 눈을 동그랗게 뜬 동우도 소녀를 마주보며 손사래를 친다.
호원의 자리 뒤편에 있는 하얀 벽에 등을 기댄 채, 커피를 여유롭게 후루룩 마시며 그 장면을 주시하던 성열의 눈이 가느다랗게 변했다. 저것들은 뭐한다냐…. 바보들의 대화도 아니고…. 혀를 쯧쯧 차자, 그 소리를 들은 호원이 쥐고 있던 펜을 소리 나게 내려놓고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회전식 의자를 빙글 돌리며 뒤를 돌아본다.
"너는 꼭 내 뒤에서 커피 마시더라. 시끄럽게 하지 말고 저리 가면 안 되냐?"
어, 안 돼♥
*
"그래,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요~"
"네! 경찰 아저씨도 수고하세요~"
"저 아저씨 아닌데…!"
마음속으로 눈물이 삐직 새어나온다. 아직 쓸 만한 25살인데 벌써부터 아저씨 소리를 듣게 되다니 그저 너무 억울하기만 하다. 내가 그렇게 늙어 보이나…. 속으로 땅을 치면서 엉엉 대성통곡하고 있는데, 유리문을 밀어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뒤를 돌아보더니 장경장의 가슴팍에 시선을 고정한 채 뚫어져라 쳐다보는 소녀였다. 옷에 뭐 묻었나? 왜 그러지? 의아함을 느낀 장경장이 고개를 숙여 제복 상태를 이리저리 확인한다. 그러다가 '장…동…우…?'하며 띄엄띄엄 그의 이름을 한 번 읊어보는 소녀 때문에 고개를 든다. 시선이 마주치자, 소녀가 빙긋이 웃는다.
"고마워요, 장동우 경찰 오빠."
오빠?
자기가 말해놓고도 참 민망했는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소녀는 재빨리 한쪽 어깨로 유리문을 밀어서 도망치듯이 밖으로 나갔다. 몇 걸음 걷는 듯하더니 이내 멈춰 서서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뭐에 홀린 것 마냥 우두커니 서있는 장경장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소리 없는 인사를 건넨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한낱 뺑소니를 자수하러 온 불량 청소년일 뿐인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던 장경장의 행동 때문에 헤어짐이 다만 아쉬울 뿐이었다.
손가락을 '딱' 튕기는 최면술사의 행동에 최면에서 풀려나는 사람처럼, 소녀의 손짓에 정신을 '번쩍' 차린 동우 또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잘 가라는 의미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 마음은 동우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을 보면, 남녀노소 판단할 것도 없이 제일 먼저 다가가 도움을 주었지만 항상 그저 '경찰'로만 불릴 뿐이었다. 고마워하는 그들의 마음은 충분히 잘 알고 있지만, 장경장의 귀에는 '경찰'이라는 단어 자체가 위계질서를 세우는 것처럼 너무나도 딱딱하게 들려와서 그동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저는 한낱 시민일 뿐인데, 그런 저에게 도움을 주신 당신은 경찰입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이 말이다. 경찰이라는 불편한 허물에서 벗어나 시민들에게 살갑고 편안한 존재는 결코 될 수 없는 것일까. 그렇게 반포기 상태였었는데, 뜻하지 않게도 '경찰 오빠'라고 드디어 누군가 친근하게 불러줬다. 처음 있는 일이라서 그런지 그저 얼떨떨하기만 하다.
장경장의 손 인사에 고개를 끄덕이고 뒤를 돈 소녀는 양손으로 가방끈을 움켜잡고 기분 좋게 집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야에서 소녀가 사라질 때까지 쉼 없이 손을 흔들고 있던 동우는, 문득 정체를 알 수 없는 싸한 느낌이 어깨 뒤편을 가로지르며 스쳐지나가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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