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동, 딩동, 딩동, 딩동.
"아, 알았으니까 좀 기다리라고!!!!"
정신없이 요란하게 울려대는 초인종 소리에 신경이 바짝 곤두서버려 현관문을 향해 냅다 소리를 지르는 성열이었다. 날카롭게 날이 서있는 그러한 외침에 알았다고 대답이라도 하는 듯이 '디잉-동'하고 한 번 더 초인종이 울린다. 초인종 버튼을 꾸욱 눌렀다가 뗀 게 분명했다. 그게 더 속을 박박 긁어놓는다. 저 자식이!!! 당근 써는 것을 중단한 뒤 현관문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쥐고 있던 칼을 짜증스럽게 도마 위에 내려놓는다.
열어주지 않겠다고 말한 것도 아닌데, 좀 얌전히 기다릴 순 없는건지.. 혹여나 밖에 있는 녀석이 시끄럽게 구는 바람에 이웃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될까봐 슬며시 걱정이 된다. 이유? 그 이유는 정말이지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아파트 내에 '울림은하수아파트 102동 710호 청년'이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쫘-악 돌면 빠른 시일 내로 짐을 싸서 이사 가야하는데, 지금 당장은 수중에 그러할 돈이 없기 때문이다. 이게 다 2학기 등록금 탓이다. 게다가 왜 그러는 거냐고 묻는 가족들에게는 뭐라고 둘러댈 것인가!
아찔한 생각을 마친 성열은 손에 묻은 물기를 앞치마에 대충 쓱쓱 닦으며 신경질적으로 현관 앞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문 열면 두고 보자. 진짜 가만 안둘거야. 속으로 아주 단단히 벼르면서 말이다.
그거 몇 초도 못 기다리냐면서 따발총처럼 온갖 잔소리를 따다다다 마구 늘어놓으며 문을 열어주자, 장을 봐온 비닐봉지를 품에 한가득 안은 채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앳된 얼굴이 보인다.
"성열이 하이~"
미소를 유지하며 말하는데, 성열이의 눈에는 어찌 사랑스럽지 아니하리오? 한 살 어린놈이 반말을 날리던 말던 간에, 지금 그건 신경 쓸 바가 되지 못했다. 그는 바로 한 살 어린 연인 김명수. 이 몹쓸 사랑의 콩깍지가 단단히 낀 탓인지는 몰라도 어째 날이 가면 갈수록 그는 더 멋있어지는 것만 같다. 마치 자신과 만나지 않는 날은 쑥쑥 성장하고 다음날에는 한층 더 멋있어진 모습으로 자신을 만나러 오는 듯 한 기분이 드는 건, 그야말로 기분 탓이겠지? 생각하고 나니,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인가 싶다. 나 미친건가?! 아아.. 이게 대체 뭐람. 김명수가 나비도 아닌데 말이다. 본인을 만나지 않는 날엔 번데기 상태로 있는 것 마냥 쑥쑥 성장하고 있다니.. 본의 아니게 생각해낸 '김명수 번데기설'에 성열은 자신이 한심하게만 느껴진다. 하아..
"손님을 안으로 들이지 않는 건 실례 아니야?"
때마침 언제까지 밖에 서있게 할거냐면서 혼란스러움에 빠져있는 성열에게 말을 걸어오는 명수였다. 생각을 급히 접고 그를 쳐다보자, 들고 있던 짐을 보란 듯이 살짝 들어 올려 보인다. '나 이거 정말 무거워'라고 툴툴 투정 부리는 것처럼 말이다.
"어.. 그럼 들어와."
몸을 한 쪽으로 비켜주면서 집안으로 고갯짓을 하자, 명수는 씨익 웃더니 기다렸단 듯이 그를 지나쳐 집안으로 들어갔다. 어휴.. 가까이에서 보니 아침이라 그런지 외계 행성에서 내려온 꼴뚜기 같구나.. 골치 아픈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성열이었다. 그나저나 신발 좀 제대로 벗어놓지. 시선을 내리깔아 신발을 벗어놓은 꼬락서니를 보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아주 그냥 묘기 수준으로 희한하게 벗어놓았다. 쯧쯔.. 저렇게 벗어놓기도 여간 쉬운 일이 아닐텐데.. 몇 번이나 지적했는데도 늘 한결같이 이 모양이다. 김명수, 너란 남자.. 정말 한결같은 남자.. 하아.. 과연 저놈은 스물한살이 맞는건가 싶다. 실은 일곱살인데 지금 나한테 나이 속이고 있는거 아니야? 의심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성열은 속으로 궁시렁 거리며 현관문을 닫고는, 허리를 숙여 온기가 남아있는 명수의 신발을 11자로 가지런히 정리하였다. 어휴, 꼬랑내야...... 이놈의 꼬랑내...
식탁에 짐을 내려놓고 비닐봉지를 부스럭 거리면서 요리 재료들을 분주하게 꺼내고 있는 명수의 뒷모습을 보니, 왠지 어정쩡한 기분이 든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번에는 화 좀 제대로 한 번 내보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는데, 현관에서의 그 미소에 넋이 나가버려 뜨거운 땡볕 아래에 놓인 초콜릿 마냥 흐물흐물 녹아버렸다. 나는 왜이리 지조가 없는걸까.. 좀 전에 했던 자신의 행동을 되짚어본 성열은 변덕스럽기 만한 제자신이 밉게만 느껴진다. 이 때 마침 재료들을 다 꺼냈는지, 할아버지처럼 둥글게 주먹쥔 손으로 허리를 통통 두들기며 뒤를 돌아보는 명수였다. 아이고, 허리야.. 그러고는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성열의 전신을 위아래로 한 번 쓰윽 훑더니 씨익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성열이 재빨리 벽에서 등을 떼며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왜! 뭐!! 왜!!!
"이제 보니, 앞치마 두르셨네?"
알록달록한 앞치마를 두른 생소한 모습에 흥미가 생겼는지, 성열에게 다가가서 그의 양어깨를 꽉 잡고는 한 바퀴 빙그르르 돌려본다. 마치 여자들이 문방구에서 스티커를 고르기 위해 회전식 진열대를 빙글빙글 돌리듯이 말이다. 이게 뭐야!!! 니가 돌면 되지, 왜 날 돌려!!! 본인이야 말로 순순히 돌지 말고 꾹 버티고 있으면 될 걸 가지고, 그저 바보같이 그가 돌리는 대로 빙그르르 돌면서 쫑알쫑알 대는 성열이었다. 떽떽거리는 게 살짝 시끄럽기는 하지만,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사랑이라는 달콤함에 퐁당 빠진 꼴뚜기 왕자 눈에는 그가 사랑스럽게만 비칠 뿐이었다. (솔로는 지금 당장 휴지로 눈물을 찍어서 닦습니다..☆★) 아, 이렇게 사랑스러우면 안되는데.. 슬며시 걱정이 밀려오자, 쉼없이 움직이고 있는 그의 입술에 살며시 검지를 갖다대는 명수였다.
쉿-
"뭐가 쉿이고 나발이야!"
꿋꿋히 할말을 하며 성열이 저항을 하자, 명수는 검지로 그의 입술을 더욱 꾸욱 짓눌렀다. 쉿! 그러고는 살짝 장난기 섞인 특유의 표정으로 눈을 살짝 감았다 뜬다.
오.마.이.갓.. 그 모습에 심장이 일순간 '쿵'하고 아래로 곤두박질 치는 느낌이 들더니, 이내 숨이 멎는 것만 같은 환상에 사로잡힌 성열이었다. 대체 이 느낌을 뭐라고 빗대야 옳은걸까. 심장어택? 아니야, 이건 너무 식상해.. 이건 마치 놀이공원에 가서 자유로드롭을 탄 느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유로드롭이 '뚝'하고 수직 하강하는 그 순간의 느낌이었다. 이건 너무 오버하는건가? 아무튼 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곤, 두 눈을 꿈뻑꿈뻑 거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밧줄로 꽁꽁 옭아매듯이, 성열이 꼼짝 못하도록 더욱 더 그윽한 눈빛으로 칭칭 옭아매며 내뱉는 명수의 한 마디.
"뽀뽀해도 될까?"
그 말을 들은 성열의 눈이 점차 커다랗게 변했다. 헐.. 날 죽여라, 이 꼴뚜기 왕자야!!!!!!!!!!!!!!!!!!!!!!!!!!!!!!!
이러한 분위기는 1초도 가지 못해, 명수의 입가에서 김빠진 탄산음료 마냥 피식 새어나온 웃음으로 인해 쨍그랑 깨지고야 말았다. '뭐야~ 그 표정은~'이라고 놀리면서 말이다.
이놈의 새끼가..! 민망해진 성열의 손바닥이 명수의 머리를 향해 날아간다. 탁! 머리와 손바닥이 찰지게 맞닿는 소리가 났다. 이왕 할 거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바로 바로 돌진할 것이지, 물어봐놓고 웃어버리는 건 뭐란 말이야!!!!!!!!! 으아아아아아아아!!!!!!!! 긴장과 동시에 설레어하는 티를 잔뜩 냈던 나만 괜히 바보 됐네!!!!! 아우씨!!!!!!! 보기 좋게 꼴뚜기 왕자에게 농락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성열이었다. 이건 정말이지 민망하다 못해 어디 쥐구멍이라도 없나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싶을 정도다.
"창피해 죽겠지?"
그 맘 다 알아~ 퍽이나 재밌는지 혼자 꺄르륵 웃더니 두 팔을 활짝 벌려 성열을 꽉 껴안고는 얼굴을 바짝 들이민다. 나랑 뽀뽀~♡
얘가 왜 이러나 싶어 고목나무에 붙어있는 매미 마냥 자신에게 딱 달라붙어있는 그를 쳐다보는 성열이었다. 그러던지 말던지, 명수는 입술을 삐쭉 내밀더니 볼을 내미는 아빠에게 뽀뽀하는 아이처럼 성열의 볼에 입술을 '콕' 찍는다. 나름 애교라면 애교라고 봐줄만한 그 만의 애교였다. 이걸 어느 상황에 볼 수 있었냐면, 성열이에게 무안함을 안겨준 상황에서만 볼 수 있었다. 미안함을 느끼고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가끔, 아주 가끔가다 볼 수 있는 희귀한 애교였다.
"야, 저리 치워라~"
보는 사람은 없지만 낯간지럽기도 하고 쑥스러워서, 손으로 명수의 얼굴을 바깥으로 밀어내며 귀찮은 듯 짜증 아닌 짜증을 낸다. 근데, 실은 되게 좋다. 캬캬캬캬캬캬캬캬캬!!!!!!!! 요 사랑스러운 놈!!!! 볼이라도 한 번 꼬집어서 왕창 흔들어주고 싶다. 그 맘을 알 리 없는 명수는 성열의 시큰둥한 반응에 기운이 빠져 조용히 팔을 푼다. 그리고 본인이 장을 봐오는 동안 뭐하고 있었냐고 물으면서 조리대로 발걸음을 옮기고는 도마에 초점을 맞춘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마 위에 규칙 없이 어지러이 퍼져있는, 썰리다 만 당근 조각들이었다.
"보면 모르냐?"
민들레씨처럼 나풀나풀 날아다닐 것만 같은 마음을 애써 침착하게 가라앉히려고 무던히 노력하는 성열이었다. 좀 전에 했던 행동이 있는지라, 기분이 좋지 않은 척을 유지하며, 세상만사 모든 게 귀찮은 듯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퉁명스럽게 답했다. 요리하고 있었잖아.
"왜 썰다 말았어?"
명수가 도마 위로 손을 뻗더니 그 중에서 가장 색깔이 뚜렷하고 탐스러운 당근 조각 하나를 집어서 한 입 베어 문다. 앞니로 인해 '똑'하고 당근이 두 동강 나는가 싶더니, 그의 턱은 부지런히 당근을 씹어대느라 위아래로 움직이기 바쁘다. 턱근육은 올록볼록하게 옆으로 튀어나왔다가 사그라들다를 수없이 반복한다. 조금 있으니 목울대에서 움직임이 보였다. 꿀꺽. 그러고 난 뒤, 눈을 잔뜩 찡그리는 명수였다.
"으으~ 당근 맛이 뭐 이래?"
정말 맛이 없다는 표정이다. 저 호구....
"당근 맛이 당근 맛이지, 뭐긴 뭐야."
못 먹겠으면 이리 줘. 손바닥이 보이도록 손을 내밀자, 어린아이 마냥 싫다며 강하게 도리질을 치고는 남은 당근 조각을 입으로 쏙 집어넣는다. '아이고~ 맛있다~'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말투와는 다르게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우물우물 씹어 먹는다. 안 먹으면 내가 때린다고 했냐.. 기가 차서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데, 입을 앙다물고 가만히 음식물 분해 운동을 하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마치 '왜?'라고 말하는 것처럼 양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려 보인다. 성열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근데 오늘 요리 뭐할거야?"
"안 알려줘!"
딱 잘라서 단호하게 말하는 성열이 때문에, 재빨리 눈을 굴려 조리대와 식탁에 펼쳐놓은 요리 재료들을 한 번 훑어보는 명수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성열은 명수의 눈길이 머무는 것들을 쳐다보았다.
"볶음밥 같은데?"
아..아닌데?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입으로는 아니라고 더듬더듬 변명을 해본다. 등골이 싸해지면서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기분이었다. 눈치 빠른 놈.. 그런 성열과 시선을 진득하게 맞추며 으레 잘난 척하는 미소를 짓고 있는 명수였다.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의기양양한 미소였다. 그 미소가 성열에게는 어째 불편하게만 다가온다. 손아귀에 놀아나는 것처럼 아주 손쉽게 간파 당하는 느낌이었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면 명수가 입을 열었다.
"아닌 게 아닌데? 볶음밥 같은데?"
또 깐족거린다. 성열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김명수에게 장을 봐오라고 하지 말걸 그랬나 보다. 미안할 정도로 항상 받기만 해서, 한 번쯤은 깜짝 놀래켜주고 싶은 마음에 야심차게 준비했던 첫요리였는데 말이다. 그것도 어제 저녁에 요리 블로그를 샅샅이 살펴가며 찾은 게 바로 새우 볶음밥이었는데.. 하아.. 게다가 포스트잇에 재료와 요리 방법도 깨알같이 적어놨는데.. 기운 빠지게 이게 뭐람.... 요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알아맞힌 명수가 얄밉게만 느껴진다. 그래, 요리해줄 생각에 긴장해서 밤잠 설친 내가 바보지! 이거 왠지 괜한 헛수고만 한 것 같다.
이 때 또 성열의 눈치를 살살 살피다가 와락 껴안아 버리는 명수였다. 이번에는 저리 비키란 소리도 하지 않은 채 얌전히 있는 성열이었다. 삐졌냐고 물어봐도 시원스레 대답 한 마디 해주지 않는다. 안되겠다 싶었는지, '나랑 뽀뽀~♡'를 다시 한 번 외치고 입술을 삐쭉 내민다. 드그륵 득득, 드그륵 득득, 요란하게 머리 굴리는 소리가 성열의 귀에는 훤히 들리는 것만 같다. 저거 또 머리 굴리네.. 시큰둥하게 바라보며 손바닥으로 입술을 때찌해주자, 재빨리 입술을 집어넣고 토라진 척하는 명수였다.
"볶음밥 말고 내가 먹고 싶은 거 해줘. 사오라는 대로 재료도 다 사왔잖아."
애교가 먹히지 않자 살짝 심통이 났는지, 과자를 사달라고 엄마의 옷 끝을 잡아당기는 아이 마냥 입이 댓발 나와서 볼멘소리로 말한다. 허허.. 이 놈 보소. 허허... 성열은 모든 걸 포기하는 마음으로 새우 볶음밥을 단념하고는 말했다.
"그래, 말해봐."
그 말에 좀 전까지 짓고 있던 표정을 싹 뒤바꾸며, 진짜?라고 되묻더니 성열을 품에서 떼는 명수였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자, 침을 꼴깍 삼키고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으로 성열과 시선을 마주한다. 뭐지? 얜 지금 뭘 먹고 싶어서 이러는거지?
"우선, 때리지 않기로 나랑 약속해."
싫어. 의심스러워서 고민할 필요도 없이 단칼에 거절하자, 그건 안된다며 성열의 손을 잡더니 제 손과 새끼손가락을 포개어 엄지로 약속 도장을 꾹 찍게 한다. 야, 이 새끼야. 성열이 반대편 손으로 명수의 머리통을 때렸다.
"그냥 말하면 될 걸 가지고 웬 호들갑이야.. 너 뭐 먹고 싶어서 그러는데?"
그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너."
힉.. 놀라운 사실을 들은 사람 마냥 성열의 눈이 매우 커다랗게 변했다. 성열이 도망칠라, 명수는 그의 두 손을 재빨리 자신의 두 손으로 감싸서 붙잡았다.
"저..저리 안가?!"
으르렁 거리며 성열이 협박하는 어투로 말했으나, 명수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손을 더 꽉 잡았다. 손에 힘을 얼마나 줬는지, 성열의 손을 덮고 있는 그의 손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게다가 손목에 힘줄이 선 게 뚜렷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미쳤네.."
그 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성열은 명수가 대답하기까지 영원같이 느껴지는 시간동안 꼼짝하지 않고 기다렸다. 무거운 공기에 짓눌려 서서히 숨이 막혀오는 것 같다. 김명수, 무슨 말이라도 해보란 말이야. 이 불편한 상황을 그가 먼저 깨주길 바래본다. 명수가 육체적으로 자신을 원하는 이런 상황은 지금껏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내게 닥칠 일이 아니라면서 너무 막연하게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 우리 둘 다 성인이고, 둘 다 남자인데.. 왜 이 문제를 지금까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건지 모르겠다. 명수가 싫어서 생각지 못한 게 아니었다. 물론 자신도 명수를 굉장히 좋아하고 있었다. 항상 뭐든지 아닌 척, 모르는 척, 무심한 척, 온갖 척이란 척은 다 했지만, 사실 알게 모르게 그를 너무나도 많이 좋아하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모바일 메신저를 확인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재미나는 TV 프로그램을 볼 때면 '걔도 보고 있을까?' 싶었고, 친구와 짬뽕을 먹다가도 '매운 거 못 먹는 명수라면, 분명히 짜장면 먹었겠지?'하면서 짬뽕 국물을 후루룩 들이키곤 했다. 은연중에 문득 문득 명수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성열의 일상생활을 절반이나 차지하고 있었다. 그 '절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깊게 파고들지 않아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이제와서 '단지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을 뿐이야.'라고 제 자신에게 변명 아닌 비겁한 변명을 해본다. 어찌 보면 명수는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표현할 만큼 나를 좋아한다는 건데.. 아, 모르겠다.. 난 정말 바보인가 봐..
여기까지 생각을 마치자 성열의 표정이 눈에 띄게 복잡해졌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명수는, 잡고 있던 그의 손을 엄지로 부드럽게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진심이야."
이 말에 갑자기 심장 박동이 천천히 증가하면서 목구멍까지 가득히 차올랐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몰라, 성열은 애꿎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기만 한다. 그러다 힐끗 명수를 바라보는데, 그가 가만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성열은 명수를 보며 단념하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좋아?"
좋지, 그럼! 명수가 입술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큰소리로 씩씩하게 말했다. 성열은 몸이 부르르 떨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쉽게 쉽게 생각하자. 우리 서로 사랑하는 건데 아무렴 어때!
"나도 너 좋아~"
말을 마치자마자, 명수가 손을 놔주더니 갑작스레 그의 뺨에 힘껏 뽀뽀를 선사했다. 쪽~♡ 그런 명수가 너무 귀엽게만 느껴져서 성열은 저도 모르게 와하하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그 순간, 명수가 그를 번쩍 들어 안았다.
"볶음밥은 이따가 먹자!"
인터폰에서 흘러나오는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가 요란스레 집안을 휘감는다. 이게 벌써 몇 번째인지.. 제 풀에 지쳐 그만 둘 때도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전화하는 걸 보니, 아래층이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잠깐, 잠깐.'이라며 자신의 위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명수에게 손으로 왼팔뚝을 찰싹찰싹 때리며 제지하는 성열이었다. 왜 그러냐면서 명수가 내려다본다.
"아래층 뿔난 것 같은데.. 받아봐야 하는 거 아니야?"
잔뜩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빛이 역력한 성열이 명수를 올려다보며 말하자,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씨익 웃었다.
"괜찮아, 괜찮아~ 아까 처음 전화 왔을 때 깔끔하게 얘기 다 해놨다니까? 제사 준비 때문에 하루 종일 마늘 빻느라 시끄러울 거라고?"
"뭐..뭐?!"
야, 이 새끼야!!! 너 당장 내 위에서 내려와!!!!! 빨리 나랑 싸우자!!!!!!!! 성열이 다부지게 주먹쥔 손으로 명수의 팔뚝을 무차별적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인상을 찌푸린 채 '아야!' 거리기만 하면서, 차마 성열을 때리지는 못하고 X자로 팔을 교차시켜 열심히 방어만 하는 명수였다. 그러다가 더는 안되겠다 싶었는지 그의 두 손목을 꽉 붙들어 잡는다. 좋은 말로 할 때 이거 놓으라면서 성열이 으르렁 거리자,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아, 정말.. 울림은하수아파트 주민분께서는 눈치도 참 없지.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면 안되나?"
니가 병신같이 아랫집에 그렇게 말해놨으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목에 핏대를 빳빳하게 세우며 뭐라하는 성열의 말을 야무지게 무시한 명수는, 자신의 등에 반쯤 걸쳐져 있는 하얀 이불을 잡고 퐁당 뒤집어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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