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의 미학
02
연락이 띄엄띄엄 되더니 결국 아침에 아주머니께 전화로 상황을 들었다. 튼튼하다고 자기는 절대 감기 걸릴 일 없다고 그렇게 자신만만 하더니 독감이랜다, 독감. 밥은 챙겨먹었는지, 병원에서 처방받아 온 약은 제대로 먹었는지 이것저것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펜을 잡고 수업을 듣고는 있는건지, 집중이 하나도 안됐다. 선생님을 쳐다보고는 있지만 머리는 이미 김종인으로 꽉 차있었다. 워낙 한 번 아프면 심하게 아파버리는 김종인이 걱정됐다. 부모님 두 분 다 회사 가셨을텐데 혼자서 끙끙 앓고 있을 김종인이 눈에 아른거렸다. 오늘부터는 야자도 해야하는데.. 김종인이 다 나을 때 까지만 야자는 미뤄두는걸로.
"네 남자친구 학교 안 왔던데."
"아, 응. 아프대."
"밥 혼자먹냐?"
"..음, 그.."
"같이 먹자."
대답을 할 새도 없이 고개를 돌려버린 변백현 때문에 결국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시간에 변백현과 같이 급식실로 내려갔다. 오랜만에 마주보고 앉아 밥을 먹으려니 어색함이 감돌았다. 변백현은 늘 가깝게 있어도 대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그냥 분위기부터 다가가기가 힘들기도 하고..
급식을 받아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변백현 뒤를 쫄쫄 따라가서 앉았다. 짜장은 애초에 별로 좋아하지를 않아서 급식으로 짜장면과 함께 나온 탕수육만 계속 집어먹었다.
"아직도 짜장 안 먹냐?"
"응, 맛 없어.."
"맨날 편식하니까 키가 그 모양이지."
변백현은 탕수육을 집어 내 식판 위에 올려주고 다시 밥을 먹었다. 마음 속이 꿀렁거리는 기분이였다. 아직 변백현은 나한테 너무 대하기 어려운 친구지만 늘 먼저 다가와주고 티 안나게 챙겨주는게 고맙기도 했고, ..그냥. 고마웠다.
마지막 정규 수업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미리 가방을 싸두었다. 김종인이 좋아하는 새우죽도 사서 가야지. 변백현에게는 오늘 같이 있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축구를 그렇게나 좋아하면서 축구하자는 남자애들의 말도 거절하고 교실에서 나랑 있어줬으니까.
종이 치자마자 부랴부랴 학교를 나왔다. 원체 종례를 안하시는 담임 선생님이라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을 확인하는데 김종인의 연락이 한 통도 없었다. 진짜 많이 아픈가보네.
죽 집에 들러 김종인이 좋아하는 새우죽을 샀다. 조금이나마 더 빨리 가려고 택시를 잡아 탔다. 김종인네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탔다.
"어,"
"..."
"성이름? 맞지?"
"어.. 안녕."
"변백현네 집 온거야?"
엘리베이터 안에는 우연찮게도 박찬열이 타있었다. 어색하게 인사를 하니 밝게 웃으며 변백현네 집에 왔냐고 묻는 박찬열이였다. 내가 변백현네 집에 왜 가..
"아, 여기 종인이도 살아."
"헐? 대박. 김종인? 변백현도 여기 사는데."
"신기하다."
"어. 남몰래 둘이 이웃이었네."
..그것도,
옆집.
김종인네 비밀번호는 이미 알고 있던 거라서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정말 시계 소리밖에 안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식탁에 죽을 두고 종인이 방 문고리를 조심스럽게 돌렸다. 세상 모르고 자고있네.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지만 잠에 푹 빠져있는건 확실했다. 평소에도 잠이 많기는 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잘 애는 아닌데. 종인이 이마에 손을 짚었다. 항상 종인이가 흔들어서 쥐어주는 뜨거운 핫팩 마냥 이마가 뜨끈뜨끈 했다. 수건을 올려줘야 할것 같아서 챙기러 나가려는데 뜨끈뜨끈한 손이 내 팔목을 잡았다.
"..이름아, 언제 왔어."
"방금. 나 수건 가져올게. 너 너무 뜨거워."
대야에 찬 물을 담았다. 수건도 챙겨 종인이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김종인은 눈만 느리게 끔뻑이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책상 위에 대야를 놓고 수건을 적셔 물기를 짜냈다. 종인이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고 열이 펄펄 끓는 이마 위에 수건을 올렸다.
"밥 안 먹었지? 약은 있어?"
"거실에.. 있을 걸."
"뭐라도 먹고 약 먹었어야지. 쭉 잔거야?"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종인은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나는 김종인 품에 껌딱지처럼 딱 붙었다. 김종인은 나를 끌어안고는 내 뒷통수를 손으로 연신 쓸어내렸다.
"왜 이렇게 예뻐."
"..."
"누구 여자친구길래."
"누구긴 누구야, 독감걸린 애 여자친구겠지."
입을 삐죽이며 대답을 하면, 김종인은 그런 내 눈을 마주치면서 웃었다. 나도 피식 웃음이 났다. 진짜 예뻐. 김종인의 한 마디에 모든 피로가 싹 풀려버린 것 같았다. 두 눈이 마주쳐있으니 심장이 간질거렸다.
식탁에 올려둔 새우죽을 그릇에 덜어서 김종인 방으로 챙겨 들어왔다. 먹여달라는 김종인의 어리광에 못이겨 숟가락으로 한 가득씩 떠서 입에 넣어주었다. 김종인은 어린 애처럼 웃으면서 죽을 받아먹었다. 너가 먹여주니 더 맛있다며 사탕 발린 말을 자꾸만 해댔다.
약까지 챙겨 먹이고 벗어뒀던 겉옷을 입었다. 집에 갈 준비를 하니 일어나려는 김종인을 말렸다.
"몸도 안 좋으면서 데려다주게? 그냥 누워있어."
"밖에 어두워. 위험하니까 데려다줘야지. 너가 약 먹여줘서 이제 괜찮아."
"됐거든요? 일어나기만 해."
"아, 안되는데."
"무서우면 다시 올게. 됐지?"
끝까지 일어나려고 하는 김종인을 재차 다시 눕히고 인사까지 한 후에 김종인네 집을 나왔다.
"어.."
"..."
"변백현?"
현관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변백현의 옆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