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컨택
by Re.Ong
* * * * * * *
09.
머리의 두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참아야지, 그것이 내 나이에 주어진 유일한 책임이니깐.
무엇때문인지 손이 조금씩 떨려왔지만 종인은 그것을 견뎌냈다. 덕분에 하얀 연습장 위에 써내려지는 숫자들은 힘이 없었다.
몇번 숫자들을 써내려가던 손은 멈췄다. 어차피 문제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지금 자신이 무엇을 적는지도 몰랐기에 종인은 샤프를 책상 한쪽에 올려두고
조용히 공책을 덮었다. 무슨 일인지 노처녀 윤리선생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자습 이라고 크게 쓰인 칠판만 보였다. 종인은 주섬주섬 책을 정리하고 그것을
서랍에 넣어두었다. 지우개 가루가 아무렇게나 널려진 책상 위를 한번 쓸었다. 그 바람에 날려져 버린 지우개 가루들은 땅바닥 위로 추락해버렸다.
뻣뻣해진 목을 이리저리 돌리고선 그대로 엎드렸다. 양호실에서 세훈과 별 시덥잖은 이야기만 한다고 결국 쉬질 못해서, 이렇게라도 자고 싶다.
몸에 스르륵 닿이는 빳빳한 느낌의 와이셔츠가 자신의 몸을 갑갑하게 두른 것 같지만 몇번 몸을 움직이니 그 느낌은 사라졌다.
"저기 종인아."
감은 눈 위로 검은 그림자가 뒤덮였다. 종인은 혀로 입술을 핥고 억지로 눈을 떴다. 유진이다. 그녀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종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꽤나 가까운 거리에 흠칫한 종인은 슬쩍 머리를 뒤로 뺐다. 그녀는 한쪽팔위에 자신의 얼굴을 대고선 내려오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베개 줄까?"
".....아니."
"칫. 그래? 그럼 불편할텐데? 쥐도 나고?"
유진이 밉지 않게 투덜투덜거렸다. 종인에게 주려던 빵빵한 키티모양의 베개는 유진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것을 품에 꼭 껴안은 유진은 몇번이고 입을 움찔거렸다. 슬쩍 종인의 눈치를 보던 유진은 자신의 샤프를 쥐었다가, 빨간펜을 쥐었다가 조금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공책위에 이상한 그림을 자잘하게 그리던 그녀의 손이 우뚝 멈췄다.
"저기.."
"응."
"커피 마셨어?"
"커피?"
"아까 내가 책상위에 올려놨는데... 없더라구. 맛있지, 그거?"
"......."
"아- 내가 산건 아니고 친구가 두개 줬거든. 그래서 너하나 준거야. 이상한 생각은 마!"
"미안한데..."
"응."
"...커피..못 봤는데?"
화사하게 웃던 유진의 얼굴이 굳어져 간다. 못 봤다고? 그녀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갔다.
유진은 황급히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종인의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찌그러진 캔 하나 어디에도 없었다. 자신의 가방 안을 뒤져봤지만 갈색빛의 캔은
털끝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울상이 된 그녀가 재차 물었다. 정말 못 봤어? 종인은 엎드린 상태에서 고개만 끄덕였다.
양호실에서 돌아왔을 때, 자신의 책상위는 깔끔했다. 먼지 한톨도 없이 깔끔했다.
게다가 자신이 앞자리 녀석에게 주려던 쪽지도 사라져 있었다. 수리 시간에 어찌나 떠들어대는지, 선생님의 말소리보다 녀석의 웃음소리와 간간히 들려오는
상스러운 농담밖에 들리질 않았다. 가끔 발로 의자를 차도, 그 순간만 조용해질뿐 다시 그녀석의 웃음소리가 점점 켜졌다.
이 새끼가 나를 무시하나 싶어, 종인은 숫자만 가득한 공책 한 귀퉁이를 작게 찢어내 '좀 닥쳐라' 라고 썼지만, 이내 까먹고선 그것을 그냥 구겨버리고 책상 귀퉁이에 올려놨다.
그런데 그것이 사라졌다. 혹시 책상 쓸다가 날라갔나? 곰곰히 생각하던 것을 그만두었다.
어차피 쓰레긴데 뭐.
"미안."
"어? 아니야. 네가 왜 미안해."
"그거 맛있어?"
"응. 꽤 맛있는건데. 아까워."
"나중에 사줄게. 미안."
"정말? 아니야, 네가 왜 미안해. 난 괜찮아-"
굳어졌던 그녀의 얼굴이 다시 풀어졌다. 내려갔던 입술도 다시 올라갔다. 화사하게 웃은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펜을 집어들었다.
그러고선 책에 죽죽 그어가는 자세가 꽤 귀여웠다. 얼핏 보니, 색색의 줄들이 난무했다. 심지어 페이지 맨위에는 붉은 별이 크게 박혀있었다.
종인은 멍하게 그녀를 보다,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저릿해진 오른쪽 팔을 내리고 왼쪽 팔을 책상위에 올렸다. 그것을 베개삼아 다시 엎드려 눈을 비볐다.
한순간에 깔린 어둠에 여러가지 색깔의 이상한 것들이 벌레처럼 기어다니다,
사라져버렸다.
* * *
세훈이가 조퇴했다.
아직도 달아나지 않은 녀석의 얼굴 위 멍 때문에 병원에 가야만 했다. 다른 곳도 검사할 겸, 약도 받을 겸 그들의 부모님이 세훈을 억지로 끌고 갔다.
이거 좀 맡아줘, 라고 속삭이며 자신의 자켓주머니에 담배와 라이터를 쑤셔댄 세훈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종인은 녀석을 배웅했다.
혹시나 담배냄새가 나지 않을까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킁킁 거렸던 세훈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종인은 녀석이 준 담배와 라이터를 바지 뒷주머니에 넣었다.
괜히 작은 자켓 주머니에 넣었다가 흘리기라도 하면 어쩔까-. 종인은 두둑해진 뒷주머니를 툭툭 쳤다.
오늘의 석식은 형편없다.
쉰내가 날것같은 시든배추김치와 김가루들. 특유의 이상한 소스가 끼얹여진 해물오징어, 그리고 싸구려 햄이 가득 넣어진 부대찌개.
말만 부대찌개지만 든건 겨우 멍든 김치와 햄밖에 없다. 종인은 몇 입 입에 넣다, 손도 대지 않은 반찬들과 밥을 국그릇에 퍼담았다. 입맛만 버렸네. 하지만 다행히
핫도그가 나왔다. 나무젓가락에 박힌 이 핫도그도 햄처럼 싸구려일테지만, 케찹을 몽땅 짜내고선 그것을 입에 넣었다.
퍽퍽한 빵이 입에 들어왔지만 그래도 아까의 반찬들보단 나았다. 종인은 반아이들이 틀어놓은 여걸그룹들의 뮤비를 천천히 감상했다.
홀딱 벗어 재낀 한 여자아이돌이 다리를 천천히 쓸어 내리자 컴퓨터 앞에 몰린 녀석들의 입에서 환호성이 튀어나왔다. 죽인다-!
아예 컴퓨터 안으로 빨려들어갈 기세다. 녀석들은 입술에 케찹을 뭍히고선, 꽥꽥 소리만 질러댔다. 누나 짱! 누나, 날 가져요!
붉은 색의 자켓을 벗자 드러나는 어깨는 뭘 발랐는지 번들번들거린다. 풍만한 가슴을 못 견딘 와이셔츠는 빵빵하게 부풀러 있었다.
오-. 핫도그를 쩝쩝 거리던 종인의 입에서도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너도 남자구나?"
"응?"
"저게 좋아? 난 모르겠던데."
유진은 어느새 다먹었는지 치약을 뭍힌 칫솔을 손에 든채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녀의 다른 손에는 키티그림이 그려진 조그만 컵이 있었다.
핫도그를 반이나 해치운 종인은 그녀를 무심히 보고선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화려한 허리돌림이 나오자 또 사내놈들이 소리지른다.
"난 별론데. 천박해보여. 저게 뭐가 좋다고, 에휴. 남자들이란."
"그래? 섹시한데."
"헐- 종인이 너 그럴줄 몰랐어."
"섹시하기만 한대? 너도 남자아이돌 많이 보잖아."
"몰라!"
앙칼지게 팩 쏜 그녀가 입에 치약을 물고 홱 사라졌다. 왜 저래. 종인은 빵부스러기만 더덕더덕 붙어있는 나무막대기를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골-인!
완벽하게 들어간 나무막대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식판을 들고 일어섰다. 파란색의 커다란 통안에 다른 아이들이 버려놓은 잔반들은 이미 몰골이 흉하다.
김치 쉰내가 쏟아져나오자 종인이 인상을 찌푸리고 버리듯 식판을 던지고 돌아왔다. 여전히 TV에선 화려한 노랫소리와 함께 여자아이돌이 흥겹게 춤을 추고 있다.
종인은 조그만 단어책을 들었다. 오늘따라 교실이 너무 꽉 막힌 것같아, 옥상으로 올라가고 싶었다.
시원한 바람이 땡긴다. 물론 요즘은 더운 바람이 바닥을 기어다녔지만, 그 탁트인 어둠이 보고싶어서 종인은 옥상을 찾았다.
아- 오늘 세훈이가 없네.
종인은 아쉬운듯 입맛을 다시며 옥상위로 올라갔다.
* * *
역시나 옥상은 종인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보는 어둠과 커다란 달. 가끔씩 들려오는 새소리는 평화로운 느낌을 더해주었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지만서도,
드넓은 세상을 혼자 가진것 같아 마음이 풍족해졌다. 종인은 옥상 문과 조금 떨어진 곳에 털썩 앉았다. 벽에 기대자 등에 시원한 느낌이 퍼져온다.
갑자기 세훈이가 떠올려진다. 녀석과의 첫키스. 바로 이곳에서 했다. 벽에 기댄 채 가만히 앉아있던 종인은 그 생각이 나자 서둘러 단어책을 펼쳐들었다.
완벽하게 잠기지 않은 옥상문 틈 사이로 종소리가 울린다.
이제 곧 야자시간.
알고보니 학주는 복도만 돌아다닐 뿐 절대 교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덕분에 몰래 뺀 녀석들도 들키지 않았고, 자신도 들키지 않았다.
그것을 알아낸 종인의 마음은 오늘따라 더욱 더 편안했다. 단어책을 몇번이고 훑어내렸다. 가끔 아는 단어가 나와서 반가웠지만 그 다음에 튀어나오는
꽤 어려운 단어는 골치가 아프다. 눈을 감고서 어려운 단어를 몇번이고 머릿속에서 재생했다. 멍하게 외우다가, 잠시 생각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머릿속에서 단어를 생각해냈다. 완벽히 떠오르자, 다음 단어로 넘어갔다.
besiege, 둘러싸다.
중얼거리던 입술끝은 텁텁한 맛이 그리웠나보다. 벽을 짚고 무릎을 일으키고선, 뒷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들었다.
오세훈 이 착한 놈. 비닐도 뜯기지 않은 새 담배는 녀석의 센스를 보여줬다. 비닐을 까기 위해 요리조리 담배를 돌리다, 담배에 끼워진 메모장을 보고 실실 웃었다.
머리가 아플땐, 담배가 최고!
깨알같은 녀석의 글씨가 올망졸망하게 모여있었다. 이거 모순아냐? 종인은 메모장을 떼내어 자신의 자켓안에 집어넣으며 중얼거렸다.
머리가 아플땐 담배라니, 오세훈 너 답다, 너다워. 종인은 비닐포장을 쫘악 벗겨내고 새 담배를 꺼내들었다. 아주 약간 울퉁불퉁한 흠이 있는 기다란 것을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켰다. 화르륵, 거창한 소리와 함께 붙여진 불은 이내 미약하게 벌건 빛만 간간히 뽐내며 흰 연기와 함께 타올랐다. 크게 들이마쉬자, 안개같은 연기가
입 안을 가득 채웠다. 그것을 맛이라도 보겠다듯이, 혓바닥을 갖다댔지만 연기는 달아나버렸다.
담배연기는 사라졌지만, 끊어진 거미줄처럼 그것은 혀를 칭칭 감았다.
역시나 씁쓸하다.
하지만 군데군데 느껴지는 단맛이 핀지 겨우 하루인데, 지옥같이 끌린다. 종인은 계속해서 연기를 들이 마셨다. 가끔 허공에 뿜어내기도 했고
가끔은 삼키기도 했다. 폐 속을 가득 채운 연기가 느껴졌다. 가끔 목을 잘못 스쳐, 기침이 터져나왔지만 괜찮다. 어차피 담배가 이런거니깐.
이미 단어장은 종인의 옆에 널부러져 있었다. '뜯어먹는 영단어'. 조금은 허접한 단어장의 표지를 흘끗 보다 덮어두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세훈의 말이 맞았다.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두통이 담배연기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머릿속이 탁 트였다. 눈을 지끈지끈 누르던 통증도 사라졌고, 찌뿌둥한 몸도 시원해졌다.
종인은 자신의 손가락 가까이에서 다 타버린 담배를 땅바닥에 지져 구겨버렸다. 스머프처럼 조그맣게 구겨진 담배를 벽 가까이에 두고선 다시 담배를 꺼내들었다.
새하얀 것.
신기하게도 담배 하나하나는 맛이 다틀렸다. 은근히 다른 맛을 찾아내는 것은 마치 아주 어릴적 소풍때, 선생님이 숨겨놓은 보물쪽지를 찾아내는것 같았다.
종인은 다시한번 라이터를 켜고선, 피워올라오는 담배연기를 천천히 감상했다. 코근처를 맴도는 연기는 어두운 밤위로 끝없이 타고 올라간다.
끼익.
낡은 옥상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종인은 손가락에 끼워진 담배는 미처 치우지 못했다.
빠르게 다리옆으로 내려놓았지만 길게 올라오는 담배연기는 숨기기가 불가능했다. 종인은 열려진 문을 쳐다봤다. 복도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어두컴컴한 옥상 바닥 위에 드리워지다, 그 끝에선 흐릿해졌다.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지만, 훤한 빛때문에 그 모습이 잘 보이질 않았다.
종인은 노오란 불빛이 눈에 익숙해지기만을 기다렸다. 체구를 봐서 학주나 선생님은 아니었다.
교복바지가 보였다. 그 위로 정갈하게 정리된 와이셔츠가 보였고, 이내 빛에 익숙해진 눈에는
변백현이 보였다.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옥상에서 다이빙하는 것 같았다. 철렁 내려진 심장은 이미 흙먼지가 덮인 운동장 위에 떨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몸은 아니다. 몸은 멀쩡하다. 녀석을 봐도 얼굴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벽에 느슨히 기댄 몸은 그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너만 보면 내가 이래. 종인은 항상 백현과 있으면 모든 것이 따로놀았다. 머리와 몸은 항상 백현을 보자 서로 반대방향으로 달아나려 했다.
그바람에 항상 달아날순 없었지만.
뚜벅 뚜벅 걸어오던 백현은 종인의 옆에 피워올라오는 연기에 발걸음을 멈춰섰다.
이렇게 어두운 곳에선 하얀 연기는 검은 도화지 위에 흩트러진 실처럼 너무도 잘보인다. 백현은 종인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 가만히 서있었다.
종인은 한번더 담배를 입에 물고, 깊이 마셨다. 이번에는 더욱 더 깊게.
후 하고 연기를 뽐내자 세상에서 백현의 모습이 지워졌다, 다시 나타났다. 그게 참 악몽같다.
"학주쌤이 너 찾더라."
"....."
"오늘은 교실 안에 들어왔어. 너 어딨냐고 하길래, 그냥 화장실 갔다고 했어."
"그래서."
".......알았대."
"........"
"웃긴다. 그지."
"뭐가."
"나랑 찬열이는 화장실에서 만나고..."
"......"
"너랑 오세훈은 옥상에서 만나고..."
웃긴다, 그지. 종인이 좋아하는 미소를 입에 머금은 백현의 얼굴은, 일그러진다.
입에 담배를 물던 종인은 황급히 비벼껐다. 그것도 오세훈이 가르쳐준거야? 백현의 말소리가 느닷없이 분 바람과 함께 귓가 근처로 날라왔다.
종인은 비벼 끈 꽁초를 내던졌다. 오세훈의 말이 맞다. 담배를 피면 두통이 가라앉고, 담배를 피지 않으니
두통이 다시 생겼다.
머리가 너무너무 아프다. 입안은 바싹바싹 마르고 다시 온 몸이 떨려오고, 땀이 저절로 솟아나왔다.
벽에 기대선 종인이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백현이 천천히 쪼그려 앉자, 시선이 정확히 마주쳐왔다.
녀석의 입은 그 어느때보다 환하게 웃고있는데,
눈은 일그러져있다.
"호모 싫다며..."
"....."
"담배냄새도 싫다며...."
"......"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백현의 마지막 말과 끝으로 녀석의 눈에서 다시 물기가 터져나온다. 몇일동안 머릿속을 점령했던 녀석의 붉은 눈가가 다시
내 눈앞에서 재생된다. 대체 왜 우는거야-! 버럭 화가 났지만, 마음은 초조했다. 왜 울어. 달래주고 싶은데, 화내고 싶은데 도저히 못하겠다.
다시 머릿속이 엉망이다. 대체 뭐하자는건지, 종인은 도통 모르겠다. 하지만 달래주고 싶었다. 그래서 비틀비틀 일어섰다. 이제 백현은 땅바닥에 앉아서
두 손으로 자신의 눈을 덮고 있었다. 그 밑으로 줄줄 새어나오는 눈물은 달빛에 번쩍 거려 너무나도 잘보였다. 너무나도 잔인하게.
"변백..현."
"오지마."
"백현아."
"오지마."
" 왜 울어. 울지마."
"거짓말쟁이."
"울지마."
너나 오지마. 부들부들 어깨를 떨며 우는 녀석은 뭐가 그리 맘에 안 들었는지 점점 다가오는 종인에게 빽 소리를 질렀다.
붉은 눈가는 벌써 벌개져있었고, 코끝도 벌겋다. 가까이 다가선 종인이 녀석의 어깨위에 손을 올려두자 뿌리친다. 만지지마! 녀석의 외침이
빈 옥상 위에 울려퍼진다. 메아리가 된 녀석의 외침은 점점 잦아든다. 허공에 멈춰진 종인의 손이 민망하다.
"학주가 너...오늘만 찾은 줄 아니?"
"...."
"어제도 찾았고, 그저께도 찾았어. 그 전에도 찾았었어."
"아...."
"그때마다 너 화장실갔다 했어. 배아프대요, 선생님. 이렇게 말하고 내가 너를 찾았어."
".............."
"그때마다 옥상에 있더라고. 왜 그러나 했는데..."
"....."
"세훈이는 친구아니지?"
"....."
"그치? 아니지? 친구 아니지?"
"맞아."
"아니잖아."
"맞아."
"그럼 친구끼리 누가 키스해!"
"그건.."
종인은 할말을 잃었다. 무슨 얘기를 해야하나. 뭐 어떻게 해야되지?
전에 옥상 문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왜냐하면 항상 우리 둘밖에 없었으니깐, 김종인과 오세훈밖에 없었으니깐.
그런데, 손님이 있었다.
절대로 보고싶지 않았던, 절대로 이 상황만큼은 보여주기 싫던 손님이.
종인은 벌벌 떠는 백현의 굽어진 등을 감싸주고 싶었는데, 뭣 때문인지 박찬열의 말이 자신의 몸을 사슬처럼 옭아맸다.
변백현 노리지마.
꽁꽁 감추고 있었던건데, 나중에 살며시 열어보려고 꽁꽁 숨겨놨는데, 박찬열이 먼저 그것을 열어보았다. 그래서 다시는 그것을 열어볼수가 없었다.
열어볼 자신도 없고. 남자를 좋아한다, 김종인이. 그것도 변백현을 좋아한다. 그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들켜버리니깐 한순간에 모든게 엉망이 됬다.
꼬리가 잘려나간 도마뱀이 된것 같다.
이상하게 꼬리는 재생이 안된다. 왜? 무엇때문에? 잘려나간 꼬리가 외치자, 종인이 대답했다.
다시 잘려나갈 것 같아서.
울고있는 백현때문에 종인도 울상이 되었다. 너랑 나는 왜 이렇게 힘드냐. 말없이 녀석의 등을 쓰다듬어 주자, 녀석도 말없이 받아들인다.
부들부들 떨리던 등도 잠잠해졌다. 녀석이 품으로 만든 동굴사이로 흐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정말로 친구야?
대답하려고 했는데, 이번엔 세훈이 내 혀를 잡아챘다. 녀석의 키스가 혀끝에서 느껴졌다. 말하지마. 귀에 속삭이는 세훈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래, 나도 가슴이 떨렸으니깐.
종인은 구겨진 웃음을 내보였다. 엉망이 된 얼굴은 종인의 마음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다. 이미 그가 엉망이었으니깐.
"세훈이랑 너랑 친구야?"
".....백현아."
"나 왜 이러고 있지?"
"...."
"어차피 우리 둘 아무 사이도 아닌데 말야."
"백현아."
"친구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데 말야."
"...."
"그냥 단지 나는 네 짝이였었는데 말야."
"백현아."
"미안해. 그냥 더러운 호모가 잠시 미쳐서 이랬다고 생각해."
"변백현!"
녀석이 달아난다. 황급히 일어선 녀석은 종인의 몸을 밀어냈다. 그 바람에 휘청인 종인은 열려진 문으로 달아나는 백현의 뒷모습만 볼수밖에 없었다.
땅바닥에 닿인 자신의 발에 힘을 주었다. 다다다다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백현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난간을 잡아 계단밑을 내려본 종인은
백현을 외치려던 자신의 입을 다물었다.
"야, 이 새끼야. 어디 갔다 왔어!"
버럭 소리를 지른 학주의 머리통이 보인다. 계단을 내려가던 백현은 학주에게 귀가 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녀석은 고개만 숙인 채 미동도 않는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말야. 중얼중얼 거리는 학주의 말에 백현은 끝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종인의 입에서도 '변백현'이란 말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학주가 무서워서? 잡힐까봐?
"너도 따라와, 이 새끼야."
난간 아래로 언뜻언뜻 보이던 노란 머리가 툭 튀어나온다. 종인은 결국 백현을 부르지 못했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귀에는 못 모양의 검은 피어싱이 박혀있다. 그것이 종인의 입에 박혔다. 종인은 벙어리처럼 말을 열지 못했다.
박찬열의 얼굴이 보인다.
녀석의 굳은 얼굴은 종인을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 아무말 없이 서로를 보던 둘은 학주의 고함소리로 무참히 깨져버리고 말았다.
네-네 갈게요. 능글맞게 중얼거리던 찬열은 마지막으로 한번 더 종인을 올려다보았다.
녀석의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 열렸다, 닫힌다.
녀석의 뒷모습이 사라져버리자, 종인은 난간을 붙잡고 천천히 주저 앉았다.
건들지 마.
이상하게도, 난 박찬열이 두렵다.
b.
레옹입니다.
제 글을 보시던 독자님은 아시겠지만...잠시 제가 글을 썼죠^^
코믹한것도 좋아서 ㅜ 썼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암호닉을 신청하신
방구 님. 달래 님. 다크다크해 님. 알로에 님. 카희 님. 딘듀 님.
그리고 그 외의 독자님들.
언제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솔직히 처음엔 댓글 많이 신경썼어요. 댓글이 많이 안달리면 내글이 너무 재미가 없나? 이러면서
다른 작가님들의 작품과 비교하고, 우울해지고, 자괴감에도 많이 빠졌었어요;
솔직히 제 글이 굉장히 자극적이지도 빠르지도 않잖아요.
뭔가 느릿느릿해서, 시선을 못 뺏었나 이런 생각도 많이 했엇는데요
그래도 열심히 제 글에 댓글을 달아주시는 독자님들덕분에 힘이 납니다.
글이 계속 질질 끌어가는것 같지만(죄송;)
그래도 끝까지 봐주세요.
감사합니다.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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