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반자카파 - 그날에 우리
사각사각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
책들이 가득 꽂혀있는 책꽂이 사이를 지나갈 때마다 코 끝을 스치는 은은한 책 특유의 향기.
그런 향기 사이로 조심스레 비집고 들어오는 향긋한 커피의 향기까지.
나는 고타츠 안에 발을 집어넣고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쿠션을 끌어안았다.
너는 내 옆에서 엎드려 만화책을 읽고 있었다. 우리가 자리잡은 테이블 위에는 이런저런 간식들이 놓여있었다.
과자 봉지 옆에는 내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너의 카페모카가 자리잡고 있었다. 테이블 아래로는 너와 내가 갖고 온 만화책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우리는 지금 만화카페에 와있었다.
연하랑 연애하는 법
08
w. 복숭아 향기
"영화 볼래요?"
"지난번에도 영화 봤잖아. 개봉한 거 또 있어?"
"음... 그럼 멀티방?"
"너 지난번에 멀티방 갔다가 위 그거 물어줬던 거 기억 안나지?"
"노래방은 선배가 싫어하고... 피씨방은 둘 다 싫어하고... 카페도 이제는 지겹고."
"어디가지?"
데이트를 할 때마다 나오는 골칫거리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어디가지?'라는 질문이었다.
늘 같은 곳만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해서 계속 먹으러만 다닐 수도 없으니까.
너도 나도 시끄러운 곳, 정신 사나운 곳은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더더욱 한정되어있었다.
노래방은 당연히 패스. 멀티방은 지난번에 전적이 있으니 무서워서라도 패스. 피씨방은 담배냄새 때문에 패스. 영화도 이제 너무 지겨우니까 패스.
그냥 집에 갈까?
집 가서 전기 장판 위에서 뒹굴거릴래?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오랜만에 데이트라고 나름 차려입고 나온 너를 보면 차마 내뱉을 수는 없었다.
사실 나도 오랜만에 입은 치마가 아까워서라도 밖에 있고 싶었다. 그런 날 있잖아. 뭔가 집에 일찍 들어가기 싫은 날.
조금이라도 더 밖에서 놀다가 저녁이 되면 술도 마시고 그러면서 집에 늦게 늦게 들어가고 싶은 날.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
"근처 카페 갈래요?"
"나 어제도 하루종일 카페에 있다 나왔는데..."
"어..."
그럼 저기는 어때요?
너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만화 카페'라고 쓰여있는 작은 간판이었다.
-
지하로 들어가는 계단을 천천히 내려와 들어가본 만화카페는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언젠가 어릴 때 몇 번 가봤던 만화방하고는 차원이 다른 그런 곳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흔히 볼 수 없는 고타츠도 몇 개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 괜찮은데?
여기 있을까요?
너와 나는 서로 마주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카페라지만 뭐랄까... 분위기 자체가 매우 조용해서 그런지 대놓고 대화를 나누는 건 좀 그랬다.
간단하게 음료를 주문하고 시간을 결제하고 자리를 잡았다. 물론 고타츠가 있는 가장 구석 쪽 자리가 우리의 자리였다.
그렇게 너와 나는 조용히 그리고 여유롭게 만화책을 읽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읽는 거라서 그런가. 전공책이나 문제집을 읽을 때와 달리 책장은 막힘없이 술술 넘어갔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엎드려서 책 읽는 데 집중한 네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조명을 받아 더욱 반질반질한 네 뒤통수는 오늘따라 더욱 동글동글해 보였다.
그러고보니 네 정수리를 보는 거 자체가 거의 처음이네.
늘 아랫공기를 마시는 나와 다르게 너는 항상 윗공기를 마시며 지내고 있었으니까.
고타츠 속에 있는 발을 꼼지락거렸다. 스타킹을 신고 있어서 그런가... 고타츠 안에 있는 다리가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날씨가 추워서 이렇게 입었는데... 입고 있던 치마를 다시 가지런하게 정리를 했다.
괜히 고개를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별로 먹을 생각도 없었던 과자를 부스럭거리기도 했다.
옆에서 내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데도 너는 아랑곳하지 않고 책을 읽고 있었다. 재미있나? 재미있겠지. 얼마만에 여유롭게 읽는 책이겠어.
나 역시도 책을 꽤나 좋아하는 편에 속했다.
만화책도 좋지. 근데 만화책은 진짜 머리 질끈 묶고 전기장판 위에서 뒹굴거리면서 읽는 게 제맛이란 말이야.
중간중간에 컵라면도 먹고. 그러면서.
여기가 불편하다는 건 아닌데 뭐랄까... 그래도 집이 더 편한 건 사실이잖아.
물론 문제집이나 다른 책들보다는 술술 넘어가기는 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불편한 마음이 드는 나였다.
그러니까 심심하다고.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테이블 위에 엎드린 채로 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
너는 아직도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네 옆에 있는 작은 과자 봉지 속 과자는 전혀 줄어들지를 않고 있었다.
너가 제일 좋아하는 감자칩이었다. 과자를 먹는 것도 잊을 정도로 재미있다는 건가? 집중하느라 꼼짝도 않고 있는 네 정수리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읽고 있던 만화책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동글동글한 정수리 사이로 보이는 가르마를 쿡 누르고 싶어졌다.
근데 말하고 하면 또 좀 이상해지겠지. 소리를 내지않고 조용히 손을 내밀어 네 정수리를 꾹 눌렀다.
그러자 너는 돌아보지도 않고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왜요."
"그냥."
"심심해요?"
"응."
"다 읽었어요."
"아니."
"근데 왜 심심해요."
"그냥."
심심하면 이리와요.
너는 네 옆자리를 탁탁 두드리며 덮고 있던 고타츠 이불을 살짝 들어보였다. 나는 주변 눈치를 한 번 살피고는 네 옆에 같이 엎드렸다.
뜨끈한 느낌이 다리를 훑고 지나가자 기분이 노곤노곤해졌다. 졸리다. 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안고 있던 쿠션을 가지고 와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너는 그런 나를 한 번 바라보고는 다시 읽고 있던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만화책만 잔뜩 갖고 왔던 나와 다르게 네가 읽고 있는 책은 소설책이었다. 슬쩍 고개를 들어 내용을 훑어봤지만 패스.
표지를 봐서는 판타지 소설인거 같은데... 너는 꽤나 집중을 하며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내가 심심하다고 말했는데 보지도 않고. 그냥 책만 읽고.
물론 책 읽으러 온 거가 맞기는 한데 뭔가 되게 섭섭해졌다. 이래서 사람은 기대를 하면 안되는 거야.
말도 안되는 억지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고개를 홱 돌려버리고는 고타츠 이불을 두 손가락을 만지작 만지작거렸다.
옆에서 네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뭐. 웃어서 뭐 어쩔 건데. 나는 네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나름 삐친 티를 팍팍 내는 중이었다. 나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는데. 너 때문에 진짜 별 짓을 다해보는 나였다.
"선배."
"왜."
"나 봐요."
"싫어."
"진짜로?"
네가 손을 뻗어 내 볼을 쿡쿡 찔러왔다. 하지마. 내가 손을 밀어내도 너는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볼을 건드리던 손은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가 내 허리를 끌어안고 부둥거리고 있었다. 허리랑 옆구리 만지지 말라니까.
미간을 찌푸린 채로 고개를 홱 돌려 너를 바라보자 너는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진짜... 또 당했어.
"저리가."
"자리 없어요."
"나 일어날 거야."
"내가 싫어요."
"혼난다?"
"쉿. 다들 지금 책 읽고 있어요."
너 진짜 짜증나...
짜증나는 마음에 네 가슴팍을 밀어봤지만 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남자라는 건가. 만화카페 가장 구석자리에 자리잡아가지고 고타츠 안에서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아르바이트생도 다른 사람들도 딱히 우리를 신경쓰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신경쓰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말고도 고타츠 안에 엎드린 사람들이 몇몇 있기는 한데... 남녀가 이렇게 같이 엎드린 사람은 없잖아.
"나 일어날래."
"싫은데."
"내가 일어나는 거거든?"
"선배 사이즈가 딱 안기 좋아요."
"뭐래..."
"근데 살 빠졌나보네... 선배. 오늘 저녁 피자 어때요? 치즈 크러스트로 해가지고."
"야..."
"샐러드바까지 내가 살게요. 선배가 오늘 술 사면 되잖아."
그러면 공평하죠?
너는 내 머리를 살살 쓸어내리며 말하고는 다시 내 입술에 입술을 포개왔다.
이번에는 가볍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진하게 혀를 섞은 것도 아니었다. 두 입술이 서로 맞물리도록 조심스럽게 천천히 그렇게 입을 맞춰왔다.
나는 고타츠 이불을 더욱 세게 그러쥐었다. 따듯한 고타츠 안에 있는 것도 아닌데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
"다시는 만화카페 안와."
"왜요? 난 좋은데."
"난 싫어."
"나는 좋아요."
"나는 싫어."
"선배 나는 어때요?"
"나는 싫어."
"와. 선배 나 싫어요?"
어? 이게 아닌데...
너는 허리를 살짝 숙인 채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또 말렸어. 나는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며 눈동자를 데록데록 굴렸다. 내가 뒤로 물러날 때마다 너는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와씨. 이거 실제로 당해보니까 진짜 무섭잖아.
"내, 내가 언제 너 싫다그랬냐."
"아까 그랬잖아요. 나 상처."
"안받은 거 알거든."
"와. 그 말에 한번 더 상처."
"아씨... 나보고 뭐 어쩌라고."
상처받은 거 풀어줘야죠.
이 새끼가 아까부터 뭐래니...
뒤로 물러나는 내 발걸음은 점점 더 빨라져만 갔다. 원래도 좀 스킨십 많고 능글맞긴 했는데 오늘따라 쪼매 심한 거 같아.
받는 거는 익숙해도 해달라고 하는 건 익숙하지 않단 말이야.
그렇게 계속해서 뒤로 물러나고 있는데 갑자기 너가 내 손목을 확 끌어왔다. 그 반동으로 나는 네 품에 그대로 폭 안기는 꼴이 되고 말았고.
"남준아?"
"뒷걸음질 칠거면 뒤에 좀 보고 다녀요."
"..."
"계단 쪽으로 가면 어쩌자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네 품에 안긴 채로 꿍얼거리며 옆으로 슬쩍 물러나려했다. 너는 내 손목을 더욱 단단히 붙잡으며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내가 누난데. 내가 선밴데. 가끔 너가 이런 표정을 지을 때면 나도 모르게 네 눈치를 보게 되는 나였다.
진짜... 성이름.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냐...
"아까 나 상처받게 한 거랑 이번에 내가 선배 목숨 구해준 거까지 다해서."
"저기..."
"소원 하나 들어줘요."
"응?"
"싫으면 소원 2개 들어줘요."
"그건 무슨 논리..."
"네? 좋다고요? 그쵸? 아무래도 두 개보다는 한 개가 선배한테는 더 좋을 거에요."
"남준아?"
쪽.
너는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배시시 웃어보이며 내 손에 깍지를 끼고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디가? 응?
피자 먹으러요.
소원은 또 뭐야.
지금 안 빌거에요. 나아아중에 말할 거야.
지금 이 상황 뭐지? 나 속은 거야? 나 속은 건가? 나 지금 사기 당한 건가? 너에게 이끌린 채로 피자집에 가는 내내 나는 머릿속을 데굴데굴 굴려댔다.
그리고 나온 결론은 하나였다.
씨발. 고 놈의 소원이 또 뭔데...
나 진짜 이러다가 호구 되는 건 아니겠지?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걱정이 되는 나였다.
그나저나 소원은 또 뭐려나... 이상한 거 비는 건 아니겠지?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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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남을 쓸 때마다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하나에요.
커퀴는 물러가라.
만화카페 생각보다 괜찮은 곳입니다.
언니가 알바하는 곳이라서 한 번 가봤는데 고타츠 진짜 신세계에요. 언니 알바 끝나는 거 기다리면서 고타츠 안에서 잠도 자고 그랬어요.
진짜 다음에 돈모아서 꼭 사고 싶은 것들 중 하나랍니다.
오늘 연달아서 세 소설 모두 올렸네요.
허허허... 늘 말하지만 저는 성질이 매우 급하답니다.
사실 공부해야할 것도 있는데 왜 이러는 건지...ㅠㅠㅠ 그래도 쓰는 게 재미있어요.ㅎㅎㅎㅎ
남준이 소원이 뭔지 알아채는 탄소는 천재.
오늘도 제 글 읽어주신 분들 감사드립니다.
암호닉은 10화에서 추가로 받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