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Ocean C
온몸이 붕 뜨는 느낌이다. 머리가 점점 지끈거리고, 속이 메슥거리는 불쾌한 기분. 한참을 뒤척인 뒤 꼬옥 닫혀 있던 눈꺼풀이 스르르 열린다. 그러자 학연의 눈 앞에 보이는 것은 허름하고 낮은 천장이 아닌, 깔끔하고 높은 고급스러운 베이지 색의 천장. 여긴 어디지. 살짝 상체를 일으키니 머리가 더욱 어지러웠다. 넓은 방의 모양이 아무래도 호텔 같은데. 기억을 되짚어 봤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어제, 바에서 술을 먹다 필름이 끊긴 것 같은데. 내가 왜 이런 곳에 있는거지.
"일어났어?"
당황스러운 와중에 귀에 꽂히는 여린 미성. 학연의 동그란 눈이 소리의 근원지를 따라 움직인다. 침대의 오른쪽 벽에 기대어 자신을 쳐다 보고 있는, 새하얀 피부의 낯선 남자. 멀뚱히 가만 쳐다 보고만 있자 남자가 발을 한번 탁탁 구르고는 벽에서 한 발짝 걸어 나온다.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서 그런가, 남자의 모습이 마치 나른한 고양이를 보는 것 같았다.
"어제 바에서 술 먹고 늦게까지 진상 피우길래, 그냥 여기로 데리고 왔어."
"누구세요?"
"그건 차차 알게 될거고, 난 이제 나가 봐야 하는데."
남자가 별안간 학연에게서 등을 돌린다. 곧 이어 자그마한 발자국 소리와 차가운 철문의 소리가 연달아 방 안을 울렸다. 알 수 없는 말만 하고 가는 택운에 학연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진다. 차차 알게 될 거라니, 그게 무슨 소리일까. 낯선 이에 의해 호텔에서 잔 것도 찝찝한데, 자신이 누구인지 시원하게 밝히고 가지 않는 저 새하얀 남자 때문에 더욱 찝찝하다. 술 좀 적당히 마시는건데. 한숨을 쉬던 학연이 이내 손을 움직여 휴대 전화를 찾는다. 어디 있지? 여기, 주머니에 넣어 놨었는데.
보이지 않는 휴대 전화에 이리 저리 눈을 굴리며 주변을 훑었다. 그러자, 침대 옆의 탁상 위에 곱게 놓여 있는 학연의 휴대 전화. 다행히 떨어 뜨린 건 아니었구나. 재빨리 홀드 버튼을 눌렸다. 밝게 켜지는 액정 위로 초록색의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부재중 전화 16통'
학연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 부재중 전화의 주인공은, 아마도. 괜히 긴장된 마음으로 부재중 표시를 꾸욱 누른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부재중 전화를 열 여섯 통이나 건 장본인은, 재환이었다. 차마 재환에게 다시 전화를 걸 용기가 없었다. 지금까지 재환의 전화를 무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 쯤 재환은 엄청나게 화가 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전화를 무시했다는 이유로, 학연을 갈궈댈 것이 뻔했다. 벌써부터 서러움이 복받힌다.
틑어져 있는 남방 셔츠의 단추를 꼭꼭 잠그고, 재빨리 호텔 방을 벗어났다.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고싶지 않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만은 자유롭고 싶다.
아버지의 기일이니까. 오늘 만큼은.
택운이 걸을 때마다 조용한 건물의 정적이 깨진다. 새하얀 바닥을 메우는 택운의 그림자가 천천히 앞으로 이동한다. 나른한 몸짓으로 들어오는 택운을 발견한 데스크 여직원이 급히 일어나 고개를 숙인다.
"좋은 아침입니다, 사장님. 저……. 전해 드릴 것이 있습니다."
"……."
"LH 그룹 이재환 사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무표정으로 여직원을 바라보고 있던 택운의 표정이 미묘하게 틀어진다. 이재환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라. 똥줄이 많이 타신건가? 손수 여기까지 찾아 올 줄은 몰랐는데.
택운의 눈동자가 번뜩거렸다. 미친 놈을 상대하기에는, 미친 방법을 사용 할 수 밖에 없지. 새하얀 목을 양 옆으로 가볍게 풀어주는 행위에 단정하게 정돈 된 택운의 옷 깃이 조금 흐트러졌다.
"웬 일이야?"
"……."
드넓은 세미나실 한가운데에 앉고서 눈을 치켜 뜬 채 한 곳을 응시하는 재환의 표정이 차가웠다. 돌아보지 않는 재환에 택운이 세미나실 문에기대어 섰다. 머지 않아 재환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구두 끝이 와닿는 바닥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퍼졌다.
"차학연이랑 잤냐?"
"그게 궁금해서 찾아 왔어?"
"묻는 말에 답이나 해."
"잤다면 어쩔 건데?"
신경을 살살 긁는 듯한 택운의 말투에 재환의 입술이 짓이겨졌다.
알 수 없는 분노가 끓었다. 자신의 밑에서 앙앙 울어대던 차학연이 다른 새끼랑 잤다, 라. 재환의 입꼬리가 비틀어져 올라갔다.
한 계단 한 계단, 문 쪽을 향해 걸어 올라오는 재환의 시선과 택운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힌다.
어느새 택운의 옆 까지 당도한 재환이 스쳐가듯, 속삭이며 택운에게 말한다.
깝치지 마. 이 새끼야.
학연에게서 여전히 전화 한 통 조차도 오지 않는다. 어두 컴컴해 진 밖을 바라보던 재환이 블라인드를 탁, 치고서 의자에 앉았다. 손깍지를 끼고 있는 재환의 표정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살벌했다. 어제 학연에게서 걸려 온 전화에 내심 놀랐다. 지금까지 한 번도 먼저 학연 쪽에서 전화를 걸어 온 적은 없었기에 조금은 들뜬 기분으로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전화기에서 들려 오는 것은 학연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얘 이름이, 차학연이야?'
남자 치고는 조금은 높은 듯한 목소리. 정택운. 재환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학연이 지금 자신의 곁에 있다, 다리가 예쁘다, 얼굴이 귀엽다, 목덜미가 가늘다… 택운의 입에서 술술 흘러 나오는 말들에 재환이 잠시 멍해졌다. 차학연이, 내가 아닌 다른 새끼랑 같이 있다. 기분이 몹시 불쾌했다. 내 물건과도 다름 없는 차학연이, 정택운과 함께 있다.
재환의 손이 거칠게 인터폰의 수화기를 잡아챈다.
- 예. 사장님.
"차학연, 당장 찾아 내."
- …알겠습니다.
타악-. 던지듯이 끊은 수화기 저편에서 전화가 끊겼다는 신호음이 새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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