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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 독자님들...
너무 오랜만이라 전 내용이 기억이 안 나실까, 조금 수정도 해서 전 편 모두 가져왔습니다
전 편 내용을 안 보고 완결을 보시겠다 하는 분들도 계실 것 같아 접어두기로 둘 다 표시할게요!
브금은 편마다 다르지만 마지막화 브금으로 깔게요...



침체된 발악

밀레 作



침체된 발악 A

별이 밝게 빛나는 현재의 밤은 어두웠다, 입술이 텄고 자꾸 그것이 마르는 느낌이 거북스러워 혀로 입술을 핥았다. 갈수록 쩍쩍 벌어지는 느낌과 함께 고통이 느껴졌다. 그것은 미약했다. 찬 바람이 내 양 볼에 맞닿아 스쳐 지나간다. 곧 이 바람들은 붉은 벽돌로 높이 쌓아올려 진 집 담에 의해 사라짐을 맞는다. 바람은 늘 불어오고, 어딘가에 부딪히고 어디선가 다시 생긴다. 이러한 바람들은 늘 나를 스쳐 지나갔으며, 지금 역시 나를 스쳐 지나갔다. 바람은 냄새를 운반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사람이 죽은 듯이 고요한 이 밤 도시에서 사람의 체향을 운반해온다. 나는 그런 바람을 좇기 위해 언제나 바람을 마주하며 버텼고, 바람이 소멸 속으로 사라지는 그 순간마저 바람과 함께했다. 얼어붙은 이 밤의 도시에서, 방금 나에게 불어와 내 볼을 스쳤던 그 바람은, 내게 인간의 냄새를 운반해주었다. 바람이 일러주는 방향은 거짓을 내비추지 않았다.



날씨는 쌀쌀한데 겉옷을 아무것도 걸치지 않아서 몸이 시려온다. 하지만 몸에 무언가를 싣고 있으면 그만큼 내가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내 어깨에 실리는 그 짐들이 싫었다. 추위를 잘 타지 않게 된 것도 타고난 체질이라기보다는, 후천적으로 생긴 것일 것이다. 아마 어깨가 무거운 것을 싫어하는 내 체질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는 내 어깨에 자주 짐들이 실렸다. 그리고, 그 짐들을 나는 미워하지 않는다. 저벅이는 발 소리가 낮게 이 바닥을 끌었다. 바람은 또 다시 내게 그 냄새를 불어주고 소멸되었다. 나는 옳은 길을 걷는 구나, 그 냄새는 아까와 한결같았고 조금은 더, 진해져 있었다. 나는 직감이라는 게 발달해 있었다. 바람은 그것을 도왔다. 푹 눌러 쓴 검은색 모자를 조금 더 내렸다. 눈이 예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검은색 청바지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고 다른 한 손은 검은색 캐리어를 끌었다. 드르륵 거리는 그 소리, 비포장 도로에 울리는 이 캐리어 바퀴 소리와 내 발 소리가 울렸다. 백열등으로 수 놓인 주택가는 갈색 빛으로 시야를 밝혀주었다. 그마저도 완전히 밝은 것이 아니라 눅눅하고 더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불쾌한 적갈색의 조명과 좁은 주택가 골목길 비포장 도로, 검은색 캐리어와 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게 지도가 되어주는 온전한 바람. 바람은 다시 한 번 불어왔다. 향이 짙어져 있었다. 나의 입꼬리 끝은 서서히 말려올라갔다. 조금만 더 가면, 조금만 더 가면.




“…찾았다.”




사람이 없는 죽은 듯한 공간에 서 있어도 사람은 어디선가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사람들을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다. 이것들은 나의 감, 직감과 바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내가 찾았다고 외친 안 그래도 좁은 골목길에 가짓길로 난 더 좁은 골목길, 그리고 그 골목길 높은 담에 기대어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던 여성은 나의 말에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눈이, 예쁘다. 그만큼 예쁘진 않지만, 많이, 예쁘다. 저것이 화장으로 인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여자는 온 몸을 검은색 옷으로 차려입은 나를 보며 무언가 불안한 듯 기대있던 몸을 일으켰다. 나는 여전히 그 여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여자는 나를 보다가도, 나와 눈이 마주칠까 내 눈을 바라보지 못하는 듯 하였다. 왜, 나를 못 봐. 나를 봐. 그 예쁜 눈으로, 나를 봐.




“…….”

“…….”




검은색 신발을 신고 있던 나는, 캐리어를 잠시 손에서 놓고 발을 떼었다. 여자는 흠칫하며,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여자의 두 손은 떨리고 있었으며,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급하게 누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가 서서히 여자에게 다가가자 발발발 떨리던 여자의 손, 아니 여자의 몸은 결국 핸드폰을 온전히 잡고 있지 못하고 핸드폰을 비포장 된 골목길 위로 떨구어버렸다. 떨어진 핸드폰의 액정이 나간 듯 했다, 비싸 보였지만 그것은 내가 상관할 부분이 아니었다. 여자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여자는 겁을 먹은 듯 계속 해서 뒤로 향할 뿐이었다. 왜, 도망가. 그냥, 나를 봐. 여자는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을 하고는 뛰어 도망가려는 지 몸을 돌렸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잡았다. 어디를, 가. 여자의 어깨를 잡고 다시 돌렸다. 여자는 공포로 얼룩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표정 지으니까, 안 예쁘잖아. 좀, 웃지. 여자는 급기야 몸부림을 쳐대기 시작했다.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그 날카로운 목소리가 듣기 싫었다. 눈이 예뻐서 다행이다. 목소리는 듣기 싫었다. 여자는 결국 나를 때리고 힘으로 밀어내더니 내게서 벗어났다. 한숨이 나왔다. 여자는, 고분고분할 줄 알았더니. 여자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팔꿈치로 등 뒤의 급소를 가격했다. 여자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쓰러진 여자의 다리가 가냘퍼 보였다. 이 추운 날씨에, 자켓 하나와 풍성한 치마를 입은 여자는 나 못지않게 추웠을 텐데. 이 추위를 버티는 여자들은 선천적인 영향이겠지, 나만큼 짐을 싫어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짐을 진다. 여자를 들쳐 매고는 저기 있는 나의 검은색 캐리어를 향해 걸음했다. 캐리어는 크다, 아마도 이 정도의 여자를 넣을 수는 있을 것이다. 나는 작게 웃었다. 더 이상 이 공간에서 사람 냄새는 나지 않았다. 바람도, 사람 냄새를 실어다 주지 않았다. 나는 캐리어 앞에 와서 여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캐리어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여자를 곱게 접어 넣었다. 여자는, 작아서 좋았다. 머리 부분이 잘 들어가지 않았지만 억지로 쑤셔 넣으니 결국 들어갔다. 나는 모자를 한 번 벗었다가 다시 썼다. 밤은 여전히 추웠다. 캐리어를 잡았다. 그리고 다시 끌었다. 나는 돌아간다. 돌아, 간다.



네가 있는, 집을 향해 간다.



나올 때와 달리 캐리어는 묵직해져 있었다. 괜스레 뿌듯한 마음이 들어 휘파람을 불으며 적갈색의 조명이 불쾌한, 하지만 지금 다시 보니 그런대로 매혹적인, 이 주택가 비포장 골목길을 돌아간다. 바람은 사람 냄새를 실어주는 대신 시원하게 내 양 볼에 닿아주었다. 그리고 나는 바람이 불어오는 그 방향을 따라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바람은 언제나 나와 함께해 주었다. 다시 이 주택가는 적막으로 잠식되었다. 이러한 고요함은, 누군가에게는 불안함을 누군가에게는 안정감을 준다. 현재 나는 이러한 적막감 속에 나와있는 사람들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눈이 조금 예뻤던 그 여자를 캐리어에 싣고 돌아가고 있었다. 이 주택가는 미로 같이 길이 구불구불했다. 아마도, 저 멀리 상공에서 내려다 보면 아주 징그러울 정도로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주택가 끝 어딘가에 있을, 네가 있을, 집을 향해 걸어간다. 길을 잘 모르는 내가 돌아가는 방법은 늘 바람이었다. 나는 갈 때도, 올 때도 바람과 함께했다. 이 모든 것은 너를 위한 것이다.



쌀쌀한 바람이 부는 대로, 나의 특출난 직감이 향하는 대로 걷다보니 익숙한 골목길이 드러났다. 이 길을 따라서 좀 더 깊숙히 올라가면, 네가 있다. 루한, 잠자코 앉아서 내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을 네가 있다. 루한, 나는 너를, 너를 위해. ……. 집 앞에 도착했다. 캐리어는 여전히 무거웠다. 그 여자가 깨었을 지 안 깨었을 지. 나는 집 앞에서 조용히 너의 이름을 불러본다. 루한. 다른 집들과 조금은 더 떨어져 있는 좀 더 높은 곳에 위치해 주택가를 내려다 보는, 다른 주택과들과는 조금 떨어져 있는, 이 집에는 네가 있다. 이 곳은 저 밑 주택가와 다르게 조명이 하나도 있지 않았다. 가로등의 필요성도 사실 없었다. 나는 캐리어를 들고 대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은 적막이었다. 옛 주인이 남겨 놓고 간 개 집과 개 밥 그릇. 잔치된 그것들은 나도 루한도 치울 생각이 없었다. 나는 집 문을 열었다. 갸르릉거리는 숨 소리가 들렸다. 루한, 아직 살아있구나.




“루한.”

“…….”

“눈, 불편한 것 같던데.”

“…….”

“새 거 가져왔어.”




꽤 예쁜 눈이야, 너도 만족할 걸. 집 안으로 검은색 캐리어를 들였다. 그리고 불을 키려고 스위치를 향해 손을 뻗어 벽을 더듬거렸다. 탁―. 그 소리와 함께 집 안에 조명이 들었다. 나는 검은색 캐리어를 집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깊숙히, 저 안으로 당도하면 네가 있을 것이다, 루한. 저 방문을 열면, 네가 있을 것이다. 나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그 방문 앞에 섰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루한의 이런 모습을 마주하는 것은 참 힘들었다. 문고리를 잡았다. 갸르릉거리는 숨소리는 미약했다. 돌렸다. 딸깍 소리가 났다, 이 문을 열면….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방 문을 엶과 동시에 눈을 떴다.



…살아 있으면, 다행이야.




“루한….”

“…….”

“루, 잘 있었지?”




그렇게 묻는 세훈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루한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세훈은 벽을 더듬더니 불을 켰다. 켜진 불은 조금 탁했지만 루한의 모습을 보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갸르릉 거리는 숨소리가 여전히 그 방 안을 낮게 메웠다. 루한의 다리는 여전히 벽에 고정되어 있는 쇠 기둥과 연결되어 있었고 서 있는 세훈을 바라보는 루한의 눈빛 역시 세훈에게로 향해있었다. 일말의 증오도 고통도 애정도 없이, 그저 무언가를 애타게 갈구하다가 잠시 멈춘 그런 표정. 멍하게 세훈을 바라보던 루한은 이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짐승처럼 자세를 취하고 있는 루한은 자신의 앞에 있던 무언가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 무언가의 냄새는 역했으며, 바닥에는 알 수 없는 진물 혹은 살즙이나 피가 흘러 있었다. 역한 냄새였지만 세훈은 그저 말 없이 루한을 그대로 바라보고 있었고 루한은 그 무언가를 고개로 휘적여 뭔가를 뜯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입 안에 넣어 우물댔고, 세훈은 그것을 보고 있었다. 세훈은 자세를 낮췄다. 루한과의 시선을 맞추기 위해서 이다. 맛있어 루한? 세훈은 그렇게 물었다. 루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다시 그것에 열중했다.



세훈은 그것을 마냥 바라 보고 있다가 방문을 닫고 나왔다. 그리고 거실로 나와 캐리어에서 여자를 꺼냈다. 캐리어를 열고 옆으로 기울이니 툭하는 소리와 함께 여자가 접힌 그 상태 그대로 나왔다. 세훈은 여자의 손목 발목을 하얀 줄로 묶었다. 튼튼한 줄이었고, 세훈은 익숙하다는 듯이 매듭지었다. 세훈의 손이 조금 텄다. 그리고는 여자를 거실 벽에 기대어 놓았다. 언제 깨어날 지는 모르겠지만, 깨어나면 그 듣기 싫은 목소리로 빽빽일 것이다. 세훈은 마지막으로 여자의 눈 위로 안대를 씌워주었다. 예쁜 눈인데, 루한에게도 어울릴 거야. 세훈은 그리고 루한의 방문을 다시 열었다. 루한의 모습을 보기 힘들었지만, 세훈은 점점 이러한 루한에게 적응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니 되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세훈이 사랑하는 루한이었으니까.




“루한.”

“…….”

“…예전의 루한은 지금보다 예뻤는데.”




세훈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떨렸다. 루한의 모습을 들여다 보면, 한 사람의 모습이라고는 믿기 어렵게 피부 톤의 차이가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부분도 많았으며 양쪽 눈은 균형을 잃었고 그의 왼손은 여성의 것 같이 가냘펐다. 마치 헝겊 인형처럼 여러 사람의 일부를 덕지덕지 붙여 만든 그런 모습이었다. 하지만 루한 본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한 눈은 아주 맑게 빛이 나고 있었고, 그것이 향하는 시선의 끝에는 그 역겨운 무언가가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것은 무언가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의 범위를 벗어나 있다. 루한이 우물 거리고 있던 그 무언가는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손가락 다섯 개가 멀쩡하게 붙어 있었고 육즙이 흐르고 살이 더러워져 있지만 피부색은 인간의 것이 맞았다. 그러니까, 루한이 지금 먹고 있는 것은 인간, 이었으며. 세훈은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보고 있었다. 이 공간에는 무언가 어긋났다.



루한의 몸은 완벽히 루한의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으며, 루한은 지금 인간을 먹고 있다.



세훈은 그것을 보고 있다. 루한의 발에 묶인 사슬과 그것이 연결된 쇠기둥, 세훈은 그 기둥을 한 번 보고 루한을 한 번 번갈아보더니 루한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세훈에게는 역시 아무런 감정도 없는 표정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나른했다. 루한의 눈빛은 나른했는데, 세훈의 눈빛은 나른하면서도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그 때 세훈의 귀에 여자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높게 소리를 지르며 세훈의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그리고 루한은 여자의 소리를 듣자마자 인상을 찌푸리고 거칠게 그 인간, 으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뜯어냈다. 세훈은 다시 여자가 있는 거실로 향했다. 몸부림 치고 있는 여자는 어딘가 퓨즈가 끊긴 듯 미쳐 있는 듯 했다. 세훈은 여자의 앞에 가 다리를 쭈그리고 앉았다. 세훈은 무심한 눈으로 그녀의 몸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악! 풀어줘, 누구야…, 여긴 어디야. 제발…. 제발!”

“…거 되게 시끄럽네.”

“누구야, 누구야 날 왜 끌고 왔어! 왜!”

“좀 닥치고 있어.”




그리고 여자는 무언가 더 말을 하려다가, 세훈의 말에 묻어 있는 강압에 입을 꾹 다물었다. 앙 다문 그녀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세훈은 그녀의 안대를 풀어주었다. 조심스럽게 안대를 내린 세훈은 여자와 눈을 마주쳤다. 여자는 바로 시선을 내리 깔았지만 세훈은 여전히 여자의 두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가 계속 자신의 시선을 피하자 세훈은 여자의 턱을 잡아 자신과 눈을 마주치게 하였다. 그렇게, 억지로 세훈과 마주친 여자는 바들바들 떨며 세훈의 시선을 빗겨 나가기 위해 눈을 감으려고 했다. 하지만 세훈은 눈, 떠. 하고 강압적인 말을 하고는 여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억세게 잡고 있던 여자의 턱을 놓아주며 작게 웃었다. 눈이, 예쁜 건 좋네. 세훈은 그렇게 작게 중얼 거렸다. 근데 소리는 좀 지르지 마, 루한이 놀라거든, 듣기도 싫고. 그리고 세훈은 어디론가 걸음했다. 여자는 세훈의 등 뒤로 시선을 좇아 보냈지만, 이내 무언가 불길한 예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네 눈은.”

“…….”

“아마도 루한에게 기증될 거야.”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앞에 누군가 서 있는 느낌을 강력하게 받았다. 세훈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너무나도 크게 들렸다. 이것은 세훈이 자신 앞에 가까이 서 있다는 소리. 여자는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라며 울먹임 섞인 목소리로 빌었고, 세훈은 들은 체도 안 한체 그녀의 팔을 걷어 올렸다. 그러게, 이 밤 중에 왜 나와 있었어. 나는 좋았지만. 여자는 세훈의 손을 쳐내려고 손을 뒤로 뺏지만 그것은 아주 역부족인 짓이었다. 세훈의 악력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의 팔에 무언가 놓이는 그 느낌을 그냥 느껴야 했다. 세훈은 주방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주사기를 들고 와 그녀에게 주입했다. 아마도 마취제이겠지. 이제 이것을 루한에게도 주입시켜야 하는 구나. 세훈은 그녀를 자신의 어깨 위에 짊어졌다. 요즘 들어, 세훈은 짐을 자주 진다. 그리고 세훈은 루한이 있는 방이 아닌 다른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곳의 불을 켰다. 새하얀 형광등이 들어왔다. 유독 이 방은 새하얀 느낌이 강했다. 그 곳에는 차가운 수술대, 라기 보다는 그냥 쇠 테이블이라고 보는 게 나을 테이블들이 있었다. 세훈은 그 위로 여자를 눕혔다.



그리고 세훈은 걸음을 옮겨 주방 테이블 위에서 주사기 한 개를 더 꺼내 들고 테이블 위에 있던 열쇠도 손에 쥐었다. 그리고 세훈은 루한의 방으로 향했다. 세훈의 걸음은 언제나 무거워 보였다. 세훈은 그렇게 루한의 방 문 앞에서, 다시 한 번 그런 기괴한 모습의 루한을 바라보았다. 루한은 아직도 인간으로 추정되는 그것을 우물 거리고 있었다. 세훈은 루한에게 다가갔다. 세훈은 루한에게 늘 그렇듯 머리칼을 만지기 위해 다가가듯 손을 내밀었다. 루한은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훈은 손을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것을 루한이 눈치 채기 전까지의 그 짧은 찰나에 루한의 목에 주사를 주입했다. 이것도 몇 번째인지 세훈은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루한은 푹 쓰러졌다. 다행이도 인간으로 추정되는 그것이 있는 곳으로 고꾸라지진 않았다. 뇌수와 육즙들과 피들이 묻은 루한을 씻기는 것도 일이기 때문이다. 세훈은 열쇠로 사슬을 묶은 자물쇠를 풀고는 루한을 부축해 그 방으로 향했다. 세훈은 한 번 더 짐을 졌다. 루한 역시도 그 쇠 테이블 위에 눕혀졌다. 두 명이 테이블 위에 누워 있었다. 세훈은 수술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손을 청결히 한다며 주방 싱크대에 가서 깨끗히 씻었으며, 위생 장갑도 꼈도 알코올로 소독된 수술 도구들도 꺼냈다. 어시스트 없이 수술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 특히 이런 멸균이 확실치 않은 공간에서는. 하지만 세훈은 메스를 꺼내 들고 여자의 옆에 섰다.



루한은 사람이 아니니까, 무엇이 어떻게 흐르던 세균이 들어가던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리고 이 여자는 내가 지키고 싶은 존재가 아니니 상관이 없다. 나는, 루한을 지키기 위해 이 공간에 서 있는 것이다. 루한에게 좀 더 나은 눈을 주기 위해서 나는 지금 수술대 앞에 섰다. 메스를 든 손은 언제나 떨렸다. 하지만 나는, 괜찮다, 아무렇지 않다. 루한, 루한을 위해 나는 오늘도 메스를 들었어. 마취가 깨기 전에 이 여자의 눈을 루한에게 이식해야 한다. 심호흡을 하고 메스를 가져다 댄다. 설계는 이미 머리 속으로 끝났다. 루한, 제발 그 눈으로 나를 봐줘. 내가 지금 너에게 주는 눈으로 나를 사랑스럽게 쳐다봐줘.



주택가의 깊은 어느 집 안의 밤은 길었다.





전에 한 번 마쳤던 수술이라 눈을 루한에게 이식해 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여자의 형체를 바라보자 구역질이 나왔다. 루한이 먹는 그 시체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저 형체를 한 여자는 내가 한 짓이라니 조금 역겨웠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다. 루한의 눈의 형태는 전보다 나아져 있었다. 이 여자의 눈이 전에 루한의 안면 한 부분을 차지한 그 눈보다 더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루한은 여전히 수술대 위에서 잠들어 있었다. 여자는 아마 죽었을 것이다. 괜찮다. 어차피, 루한에게 던져 줄 밥이었다. 루한이 먹던 그 인간도 거의 다 먹은 것 같으니, 적절했다. 나는 피가 묻고 더럽고 역겨운 것이 엉킨 위생 장갑을 벗어냈다. 그리고, 루한을 들어 다시 그 방에 가져다 놓았다. 역시 사슬로 묶어 자물쇠로 잠갔다. 아무리, 아무리 나의 루한이라도 위험함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루한이 이 집을 벗어날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 두 가지 모두 두려워하는 겁쟁이였다. 그리고 그 여자는 여전히 수술대 위에 올려두었다. 수술복을 벗어내고 나는 싱크대에서 손을 씻고 욕실로 향했다. 나는 오늘도, 비인간적인 일 하나를, 인간이 아닌 루한을 위해 해냈다. 나는, 날이 갈 수록 괴물이 되어 가는 것 같았다. 루한은 괴물이 아니니까, 내가 괴물일 것이다. 헝겊 인형 같이 점점 바래지는 것 같은 루한의 모습이었지만 나는 그런 루한이라도 내 곁에 둘 수 있다는 것이 사랑스러웠다. 루한, 이런 나의 행동들을 알아 줄 수 있니. 물론, 그것까지 루한에게 바라지는 않는다.



밝고 하얬던, 수술을 위해 특별히 더 하얬던 그 방의 형광등을 껐다. 완벽한 어둠으로 뒤덮힌 그 곳의 방문을 닫았다. 저 안에서는 아마 한쪽 눈이 없는 역겨운 여자가 있을 것이다. 다리도 말랐던 여자이지만, 루한의 두 다리는 온전했기 때문에 나는 그것에 욕심을 두지 않았다. 루한은 루한 그 자체가 매우 아름다웠다. 저 여자의 눈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루한 본연의 그 눈만큼 아름답지는 못했다. 나는 그래서 더욱 아쉬웠다. 루한의 모든 것을 그대로 보존하고 싶었으나, 그것이 불가했다. 과거를 회상할 때마다 분노가 차오른다. 씨발 놈의 대한민국, 의학과 과학에 미쳐가는 세상. 나는 그것이 아주 불만스러웠다. 치매나 암에 대한, 뇌에 대한 연구 논문이나 쓰게 하던가. 나는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루한은 아마도 곧 있으면 깰 것이다. 아무 말도 못하는 루한이지만 나는 그와 소통하는 느낌이 드는 게 좋았다. 나 혼자 느끼는 것이겠지만, 루한과의 소통은 늘 내게 안식처와도 같았다.



밤이 지나간다, 아침이 밝아 올 시간이다. 루한의 방 안에 블라인드를 쳤었던가, 나는 루한의 방 안으로 들어가 블라인드를 쳐 주고 잠든 루한의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역한 냄새가 나는 것은 신경 쓰지 않는다. 해가 밝아 온다.



침체된 발악 B

아침이 밝았다. 루한의 방에는 블라인드를 쳐두었으니, 그의 방안으로 들어가는 해의 빛은 많은 양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는 피곤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제, 있었던 수술로 인해 몸에 피로가 더 축적된 것 같다. 그 밤이 길었던 만큼 내가 쉴 수 있는 그 휴식은 너무나도 짧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아무런 불평도 할 수 없었다. 그 이유를 묻는다면 모두 내가 이렇게 되는 것을 자초한 일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은 맑았지만 그것을 루한과 함께 공유할 수 없다는 진실에 어두운 우울이 나를 잠식시킨다. 루한의 몸은 오래 햇빛을 쬐면 뜨겁게 달아올라 답답해한다. 그늘 아래 있어야 했고, 햇빛을 받으면 시야가 흐려지기도 한다. 밖에 나갈 일이 없으니 시야가 흐려지는 것은 상관이 없었지만 답답해하는 루한을 보면 괴로운 것은 루한 혼자가 아닌, 나 역시도 괴로워 루한에게 햇빛을 보여줄 수가 없다. 늘 혼자 맞이하는 햇빛은, 제길스럽게도 밝았으며, 맑았다.

일으켜 세운 몸의 중심을 잡고 심호흡을 가다듬어, 잠이 부족한 육신을 달랜다. 그리고 나는 서랍장으로 향해 갈아입을만한 검은색 후드티를 찾아 거실에서 갈아입었다. 모든 것이 피로하고 지쳐서 산다는 것에 대한 회의가 들 때도 있었다. 피폐해진 정신과 육신을 보며 나는 폐인 같은 삶에 대한 반성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루한을 위해 일고 있는 일들이니 나는 아무런 불평을 할 수 없었다. 검은색 후드티와 검은색 바지는 그대로, 그리고 챙만 빨간색인 검은색인 모자를 쓰고 현관으로 나와 검은색 컨버스화를 신었다. 검게 물들은 나지만, 하얀색이라면 진절머리가 날 정도이니 이러한 검은색에 나의 비인간적인 모든 만행을 담겠다. 검은색이 부디 나의 모든 과오를 가려주길. 하얀색은 나에게 있어서 좋은 색이 아니였다. 그래서 이렇게 검은색으로 몸을 꽁꽁 둘러싸고 다니는 것인지, 나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 둘러싸고 다니는 것인지 나조차도 불확실하지만 검은색은 내게 안정을 준다. 컨버스화를 다 신고 나서 현관문을 밀어 열었다. 그 때 문뜩 어제 다 먹어가던 시체가 생각이 났다. 그래서 다시 컨버스화를 벗어 던지고 수술실로 쓰는 방에 들어가, 벌써부터 수술 부위에 부패가 시작된 그 여자의 시신을 짊어졌다. 나는 이러한 짐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시신을 짊어지고 루한의 방문을,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고 떨리는 손으로 열었다. 늘 나는, 루한이 죽어 있을까 봐 두려웠고 루한이 없을까 봐 두려웠으며 루한의 그러한 헝겊 인형 같은 모습을 보기가 두려웠다. 하지만 방문을 열고 깨어나서 거의 다 먹어 치운 그 시체를 보고 루한으로 시선을 이동 시키고, 나는 안심했다. 아직 루한은 내게 남아 있었다. 온전한 루한의 모습은 아니였지만, 나는 그러한 것까지 바라기에는 이미 늦을 대로 늦었다는 것을 알기에 마음을 접는다. 루한의 앞에 짊어졌던 그 여자의 시체를 내려놓고 루한의 머리칼을 쓸어줬다. 그리고 뒷걸음질을 치며 루한을 끝까지 눈에 담았다. 나는 마른 입술을 떼어 말을 했다.


“다녀올게.”
“…….”
“잘, 먹고, 있어….”


그리고 나는 문을 열고 루한의 방에서 나왔다. 그 여자를 향한 기도를 해줄 생각은 없었다. 루한,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살아 있어 줘. 나는 다시 현관으로 향해 검은색의 컨버스화를 신었다. 빠르게 신고 현관문을 다시 밀어 나왔다. 그리고 주인 없는 개집과 개밥그릇을 한 번 쳐다보고는 대문을 밀어 나왔다. 산으로 올라가기 전, 다른 주택들보다 조금 더 높게 조금 더 깊은 곳에 위치한 나와 루한이 살고 있는 주택의 느낌은 쓸쓸했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어제 밤의 깊은 검은색 혹은 더러운 적갈색의 이 주택가를, 새하얀 햇빛이 드는 오늘의 아침으로 맞이해 그 곳을 걷고 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주택가를 내려가는 길이었다. 연구소를 그만 두고 내가 겨우 구할 수 있었던 알바는 아침부터 시작되어 저녁에서 밤사이까지 일을 하는 공사판이었다. 나는 머리 쓰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으며, 페이도 적당해 더 생각할 것 없이 그곳으로 매일 알바를 나갔다. 오늘 역시, 그 공사판으로 가는 길에 있었다. 아침에 불어오는 바람은 나에게 살내음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인간의 냄새를 목표로 좇는 것이 아니기에 집중해서 그것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기계처럼 입력된 공사판으로 가는 길을 따라 가면 되는 것이다.

주택가로 내려오며, 이 주택가에 거주하고 있는, 흔히 말해, 대한민국 아줌마들의 수다를 의도치 않게 엿 듣게 되었다. 그들은 인상을 찌푸린 채 나름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손을 내젓는 그 제스처에 흥미를 느껴 무슨 이야긴지 잠시 발걸음을 느리게 해 그 이야기를 들었다. 아줌마들의 목소리는 극성적이었으며, 작게 말한다고 해도 그 목소리가 크게 주택가 안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것의 내용은 주택가 내에서 벌어진 실종 사건에 관한 괴소문들이었다. 나는 그것을 들으며 작게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타인들에게 웃음처럼 보일지는 모르겠다.


“저번에는, 훈이네 막내 아들이 사라졌잖수. 아이고, 고 자식 참 싹싹한 아이였는데….”
“어디로 갔는지, 경찰들이 놓아버린 이 주택가에서 맘 놓고 살 수도 없고!”
“수현이 어멈은 오늘 이사 간다카던데, 민우 어멈은 언제 갈 생각인고?”
“말도 마, 당장 빨리 가야한다고 난리를 쳐서 오늘 가. 이제 여기 사는 사람도 없을 것이여.”


웬 살인마가 이 주택가에 살고 있다는 설, 어느 미친 싸이코가 사람들을 제물로 바친다는 설, 등등 아줌마들의 입에서는 예상치 못할 그러한 신기한 말들이 일었다. 하지만 세훈은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러한 사실들보다 충격적인 사실로 인해 그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간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 자신이니까 세훈은 그저 아무 말도 못 하고, 더 들을 것이 없다는 듯 그들을 지나쳐 내려갔다. 주택가에 끝에 다다르면 꼭 한숨을 내쉬곤 한다. 세훈에게 이 주택가를 벗어난다는 것은 익숙함과 떨어진다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연구소에서만 살아왔던 세훈은, 아직도 주택가조차 완벽한 길을 외울 수 없었다. 세훈은 그러한 능력이 부족했다. 그랬기에 공사판을 가는 길 그것 하나 겨우 외웠을 뿐이고, 이것 또한 위태로운 기억력에 의지하는 것뿐이었다. 세훈의 머리에 있는 완벽한 지도는 연구소 하나뿐이었다. 세훈은 그 한숨을 내쉰 후 주택가 밖으로 나왔다. 주택가 밖으로 나오고, 차들이 달리는 소리가 세훈의 귀에 박혔다. 바람을 가르는 그 소리들, 세훈은 지금부터 자신이 외운 그 길을 향해 발을 내딛는다. 

공사판으로 향하는 그 길에는 아무런 방해물도 없어야했다. 세훈은 한 걸음씩 걸음을 옮기며 후드 모자를 쓰고 고개를 숙여 걷기만을 반복했다. 주변 건물들을 보며 길을 외운 것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여기서 얼만큼 가서, 이쯤에서 왼쪽으로 돌고, 이런 식으로 길을 외운 세훈에게는 오히려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세훈이었다. 이러한 접촉은 연구소에서도 흔치 않던 일이라고, 세훈은 생각하며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곧 세훈은 공사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매캐한 모래 섞인 바람이 눈을 아프게 찔러 오고 공사판 특유의 소음이 귀로 날카롭게 날아온다면, 그 곳이 바로 세훈이 찾던 공사판이었다. 세훈은 그 안으로 몸을 들여 놓고 간이로 만들어 놓은 건물로 바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공사판 인부의 옷은 늘 먼지와 모래들로 매캐한 느낌을 가져다주었지만 세훈은 개의치 않고 그것을 입었다. 그리고 안전모까지 착용하고 세훈은 공사판으로 나왔다.

자신이 일을 하는 구역으로 들어가 세훈은 익숙한 몇몇의 공사 인부들이 건네는 인사에 가벼운 목례로 답을 했다. 세훈의 나이는 이들 중에서 어린 축에 속했고, 그것은 세훈도 아는 사실이었다. 이 공사판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한 가정의 가장이었으며, 나이도 꽤 들어 있었다. 그들은 정을 나누기를 좋아했다. 세훈에게 이것저것 말도 붙이며 어리다는 이유로 더욱이 챙겨주고는 했다. 세훈은 그것들이 익숙하지 않아 당황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럭저럭 적응을 하였다. 이런 것이 정을 나눈다는 것이구나. 나는 정에 대해, 이곳에서 미약하게나마 배워간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 모두 부질없는 것인 걸. 낮에는 이곳에 밤에는 주택가에만 있는 내가 정을 쏟는다면 그것은 루한이면 루한이지 타인일 리가 없었다. 세훈은 포대 자루를 등에 업고 그것을 옮기고 있었다. 세훈의 등에는 짐이 올려졌지만, 세훈은 그것을 미워하지 않는다.


“세훈아, 너 그 주택가에 산다고 하지 않았나?”


세훈이 포대 자루를 운반하고 돌아와서 다시 포대 자루를 들어올리며, 제게 포대 자루를 건네주며 자신의 주거지를 묻는 나이 든 인부를 쳐다보았다. 나이 든 인부의 얼굴에는 자글자글한 주름들과 다듬지 못한 수염들이 자라 있었다. 까맣게 탄 피부와 짧은 머리, 그리고 짙은 눈썹과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과 세훈을 쳐다보는 그 두 눈. 정을 나누기를 좋아하는, 세훈에게 말을 붙여주는 인부였다. 세훈은 그를 올려다보며 포대 자루를, 등에 업지 않고 두 손으로 들어 대답을 하며 운반을 했다.


“네, 저 거기 살아요.”
“요즘 그 주택가에 흉흉한 소문이 돌던데, 괜찮아?”
“네, 뭐 저는 괜찮아요.”
“그래도 거기 소문이 위험해서 다들 이사 가던 눈치던데, 너도 가야 하는 것 아니냐?”
“저는, 괜찮습니다. 거기서 살 겁니다.”


돈도 없는데, 어디로 이사를 가요. 괜찮아요. 세훈은 여전히 그 포대 자루를 운반하며 그 나이 든 인부에게 답을 했다. 그러한 세훈의 말에, 하긴 여기서 이렇게 뼈 빠지게 일해도 버는 건 별로 안 되니…. 하며 나이 든 인부는 수긍했다. 그리고 세훈과 나이 든 인부의 길지 않은 대화는 끊겼다. 세훈은 묵묵히 포대 자루를 옮기는 일을 했고, 나이 든 인부는 다들 힘내라며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그리고 시끄러운 공사장에는 끊임없는 기계 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한 주택가와는 다르게 늘 시끄러운 공사판이, 세훈은 적응하기 어려웠다.

포대 자루를 옮기다가 세훈이 있는 구역에 주어진 잠깐의 휴식 시간, 세훈은 생수 하나를 집어 들고 자신이 일하는 구역에서 잠시 벗어났다. 자신이 일하는 구역이 반쯤 지어진 건물에 의해 조금 그늘이 진 구역이라면, 세훈은 햇빛을 직면할 수 있는 장애물이 없는 구역으로 나와 섰다. 찡그린 두 얼굴로 햇빛을 향해 고갤 들어 올린다. 제대로 마주 할 수 없는 해, 를 감히 올려다본다. 찌푸려진 눈을 펼 수가 없을 정도로 해는 밝았다. 세훈은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차가운 생수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그 느낌이 형용할 수 없을 쾌감을 주었다. 그러한 쾌감에도 세훈은 웃지 않았다. 세훈은 웃지를 않았다. 남들에게 웃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웃지 못한단 것이 맞는 표현일까. 세훈은 그 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눈을 끔뻑거렸다. 해를 바라본다는 것은 어렵구나. 그리고 그런 세훈에게 바람이 살랑이며 불어 왔다. 고개를 숙인 세훈에게 불어 온 바람은 쇳덩이의 냄새를 담고 있었다. 이곳은 공사판, 쇳덩이가 난무하는 곳. 세훈은 비린 쇠 냄새를 맡고 고개를 다시 들었다. 이러한 비릿한 냄새에는 이미 익숙하다. 역한, 더러운, 비린 모든 냄새들이 공존하는 그 곳에서 살고 있는 세훈에게, 공사판의 쇳덩이 냄새는 아주 작은 것에서 그쳤다.

그리고 멀리서 세훈을 찾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일을 재개한다며 세훈을 불렀다. 세훈은 쇳덩이 냄새를 맡고 살짝 고였던 눈물을 속으로 삼킨 뒤 그 부름에 응하여 가볍게 뛰어갔다. 여전히 세훈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루한을 위해서라도 나는 모오든 것을 참고 견뎌 내야한다. 비위가 상할 역겨운 그 모든 것들도, 괴물이 되어가는 나도. 세훈은 가볍게 뛰어 공사 구역에 도달해 나이 든 인부가 건네는 쇳덩이 한 아름을 팔에 쥐었다. 커다란 그것의 무게에 세훈의 팔이 아래로 축 쳐져 내려갔지만, 세훈은 입술을 깨물고 그 짐을 운반하였다. 자신이 사실 짊어진 죄는, 이러한 쇳덩이보다도 무거우니 이것을 놓는다면 자신의 죄를 감당할 수 없었다. 세훈은 그것을 운반하며, 루한을 떠올렸다. 루한을 위해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버려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누구도 추천해 준 길이 아닌, 내가 스스로 걷기를 결심한 길이다. 세훈은 공사판에 먼지들을 온 몸에 붙이고 일을 했다. 그의 이마에는 땀이 맺혔다. 세훈은 이 모든 짐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세훈에게 공사판의 모래 바람이 불어왔다. 모래가 세훈의 시야를 가렸지만, 세훈은 쇳덩이들을 운반할 뿐이었다.

그렇게 운반하며 얼마의 시간을 흘려보냈을까. 시간이 늦자 해가 지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며 세훈과 다른 인부들의 땀을 식혀 주었다. 서늘한 바람이 부는 그 시간까지 세훈은 자재료들을 운반하기에 바빴다. 안전모를 쓰고 있던 세훈은 이것을 벗으며 잠깐 동안 주어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세훈에게로 불어오는 그 바람들을 맞으며, 모래 섞인 쇳덩이 냄새가 나는 그 바람들을 맞으며 세훈은 루한을 떠올린다. 지금 쯤, 무얼 하고 있을까. 라는 생각은 부질없었다. 당연히 그 여자를 먹어 치우고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세훈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이것 역시 웃음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세훈의 옆으로 나이 든 다른 인부가 앉았다. 세훈에게 담배를 건네며 필 생각이 있느냐 물었다. 세훈은 땀에 젖은 앞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며 됐다고 손짓했다. 인부는 그에 여기서 피워도는 되냐 물으며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들었다. 세훈은 그러라며 답을 했고, 인부와 둘이 앉아서 해가 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둘에게서 어색함이 보이진 않았다. 서로, 힘들고 지치기는 마찬가지였으니.

그리고 다시 재개된 공사 일, 세훈은 자재료를 운반하며 그의 하루를 보냈다. 재개된 공사 일은 얼마 안 가 매듭을 지었고, 내일 다시 이곳에 올 것을 기약하며 오늘의 할당량을 마쳤다. 세훈은 탈의실에 들어가 자신의 본래, 검은 후드티를 찾아 입으며 공사판의 그 회색빛 옷을 벗어냈다. 평범한 옷으로 갈아입은 세훈을 보며 주변 인부들은 역시 젊은이는 다르다며 농담을 던지고는 했다. 그에 세훈은 아주 어색하게 인조적인 웃음만을 지으며 그곳을 빠져나왔다. 웃음이라고도 할 수 없는 아주 이상한 표정이었지만, 세훈에게는 그 표정이 웃는 표정이었다. 세훈은 웃는 법을 잃었다. 루한을 잃은 그 순간부터.

세훈은 다시 기계적으로 입력된 그 길을 따라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발걸음을 재촉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진 않았다. 하지만 세훈은 여전히 소수라도 사람들과 공존한다는, 평범한 사람들과 공존한다는 것이 익숙치 않았다. 발걸음을 재촉하고, 아무런 거리의 풍경을 담지 않은 세훈은 금방 주택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원래 그 거리가 멀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돌아오는 그 길에만 집중하며 돌아 온 세훈이었기에, 더욱이 빨리 도착하는 것이 아닐까. 주택가 안으로 발을 들인 세훈은 뭔가 긴장감이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숙였던 고개를 들고, 모자를 벗었다가 다시 썼다. 그리고 바람과, 세훈의 직감으로 서서히 주택가를 올랐다.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올라가던 세훈의 후드티 포켓 안에서 진동이 울렸다. 지이잉―, 울린 진동을 세훈은 금방 느낄 수 있었고 후드티 포켓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핸드폰인 것 같았다. 세훈은 그것을 보며 발신인을 확인하고 있었다. 발신인을 확인하고 뭔가 놀란 눈치였다. 그리고 미약하게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아 그것을 귀에 가져다 대었다. 누군가와의 통화, 세훈에게 있어서 핸드폰이란 아주 소용이 없는 존재이겠지만, 한 사람 소통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아주 드물지만, 세훈은 그것을 굳이 도려내려고 하지 않았다. 구태여 그럴 필요성을 못 느낌도 있었고, 도려내지 않아도 피해가 오는 것은 없었다.


“…왜.”
[이번에 새로 진행되는 프로젝트가 있는데, 제발 다시 연구소로 돌아 와 세훈아.]
“끊어.”
[아직도, 루한 때문에 그래?]
“…끊어.”


세훈의 핸드폰 저편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미성이었으며, 올곧은 소리를 내었다. 세훈은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받치고 있었으며, 떨리는 숨소리와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답을 하고 있었다. 전화를 건 자는 남성이다, 세훈과는 무슨 관계인가. 세훈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숨소리가 아주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자리에 우뚝 서서 통화를 하는 세훈은, 주택가의 불쾌한 적갈색의 조명을 받고 있었다. 세훈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핸드폰을 들고 있을 뿐이었다.


[그건 아주 오래 전 일이야, 세훈아.]
“…그게 오래 전 일이야?.”
[이곳은 네가 필요해.]
“…루한도 내가 필요해.”
[오세훈, 정신 차리고 현실을 직시하자. 어?]
“형은, 나를 잘 알잖아. 내가 거길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준면이 형, 나를 잘 아는 형이 그러면 안 되는 거지…. 세훈은 말끝을 흐렸다. 그 말끝에는 울먹임이 묻어 있었다. 세훈의 몸은 점점 더 떨려오고 있었다. 준면이라 불린 핸드폰 너머의 사람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미안하다며 말을 했다. 그리고 핸드폰 통화는 끊겼다. 언제나 이런 식의 반복이었다. 세훈은 핸드폰을 쥔 손이 아닌 다른 손의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그리고 세훈은 핸드폰을 든 손을 떨구듯 내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루한이 죽은 곳인데, 내가 어떻게 거길 가…. 그리고 세훈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깊은 어둠 어딘가에 위치한 루한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까보다 빨라진 걸음이었으며, 아까보다 세훈은 더 작아 보였다. 그리고 적갈색의 조명은 더욱이 기분이 나빠져왔다. 이 주택가는 무언가, 이상하다.

세훈은 걸음을 빠르게 재촉해, 자신의 직감을 따라 집에 도착했다. 대문을 밀어 열고 안으로 들어가 현관문을 열었다. 어둠으로 가득 쌓인 그 집 안은 들어가기 무서울 정도로 까맸다. 이곳에 발을 내딛자마자 무언가가 튀어 나와 나의 목을 조를 것만 같다. 세훈은 그런 생각을 하며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현관으로 들어섰다. 역시 아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루한의 울부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갸르릉거리는 소리만이 들렸으며 세훈은 벽에 있는 스위치를 켜 빛을 밝혔다. 어둠 속에 묻혀져 있던 그 집 안을 살펴보는 것은 꽤 담력을 요구하는 짓이었다. 하지만 세훈은 이제 이것이 익숙함을, 익숙해야함을 알고 있었으며. 집 안으로 들어 섰다. 검은색 컨버스화를 벗고 들어 온 세훈은 가장 먼저 루한이 있는 방을 쳐다보았다. …살아 있으면, 다행이야. 세훈은 그 곳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것은 늘 두려웠다. 세훈은 그 방 문 앞에 서 다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역한 냄새가 문 밖까지 진하게 펴졌지만 세훈은 인상을 찡그리지 않았다. 그리고 방 문을 열었다. 이 문을 연다는 것은 참 무서운 일이다.

…루한.

세훈은 문을 열자 여자의 다리를 손으로 잡고 뜯어먹고 있는 루한의 모습을 마주했다. 갸르릉거리던 루한의 그 숨소리 대신, 무언가 짜여지고 무언가 뭉개지는 듣기 싫은 역한 소리들과 냄새가 퍼졌다. 세훈은 루한을 바라보며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루한은 세훈을 바라보지조차 않고 그 여자의 허벅지를 물어뜯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세훈은 바람 빠지는 한숨을 내 뱉고는 루한의 이름을 입 안에서 불렀다.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그것을 먹은 루한의 입가는 역한 액체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루한을 보며 세훈은, 한 명을 더 데리고 와야겠구나. 라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주택가의 밤은 언제나 소름이 돋는다.


“다녀…, 올게.”


세훈은 방문을 닫고 나갔다. 오늘도 역시 누구 한 명을 데리고 와야 한다. 오늘도 역시 나는 바람과 함께 사람을 찾아 나서야 한다. 세훈은 검은색 캐리어를 찾아 그것을 끌고 현관으로 나왔다. 적막으로 가득찬 검은색의 하늘을 생각하며, 검은색 컨버스화를 신고 현관문을 밀어 열었다. 오늘도, 이 밤의 바람은 차갑다. 세훈은 그 캐리어를 끌고 밖으로 나와, 생각했던 것과 같은 적막으로 가득찬 흑색의 밤을 걷기 시작했다. 세훈의 작은 발소리와 캐리어의 드륵거리는 소리가 섞여 주택가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세훈은 캐리어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바람을 기다렸다. 오늘도, 내게 인간의 냄새를 풍겨줄 수 있니, 바람아. 세훈은 찬바람이 일렁이는 그 주택가를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바람아, 어디로 가면, 사람을 만날까.

고요한 이 주택가에 사람들을 찾기는 쉽지 않았지만 나는 그 사람들을 찾아낸다. 이것이 신기할 법도 하지만, 집념으로 가득찬 나와 나의 직감과 바람이라면 어려운 일도 아니였다. 사람을 찾는 데에 바람이 가장 큰 역할을 한다, 나는 그 바람을 좇아 걸을 뿐이었다. 오늘도 찬바람이 내 양 볼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그것은 어딘가에 부딪혀 사라짐을 맞는다. 나는 그것을 보고, 다시 바람을 기다린다. 어디선가 인간의 냄새가 실려 오는 바람이 내가 불어 올 것을 알기에. 나는 캐리어가 드륵드륵 끌리는 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그리고 시린 이 밤에 몸을 한 번 떤다. 하지만 나는 늘 짐을 싫어한다. 하지만, 루한으로 인해 짊어지는 나의 모든 짐들은 미워하지 않는다. 그렇게 몇 분을 걸었을까.

드디어, 바람이. 인간의 냄새를 내게 실어다 주었다.

나는 그 바람을 좇아 걸음을 옮겼다. 날이 추우니 빨리 돌아가고 싶단 생각을 하며 바람이 인도한 그곳으로 빠르게 걸었다. 긴 적갈색의 조명들이 나를 비추고 그것에 생기는 그림자를 보며 나는 붉은 느낌이 왠지 모르게 이 주택가와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기분 나쁘고 역한 조명이었지만, 이 주택가 역시 기분 나쁘고 역한 주택가이니 잘 어울리는 초이스라고 할 수도 있었다. 나는 바람을 맞으며, 또 그 바람을 가르며 거리를 걸었다. 주택가의 좁은 그 길목들을 걸어 내가 느낄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 도달했다. 그 인기척은 조심스러웠다. 흉흉한 주택가 소문을 들은 사람인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을 몸소 직접 체험하게 해줄 텐데. 나는 캐리어를 끌며 다가갔다. 그 인기척은 캐리어 소리에 놀란 듯이 행동했다. 그리고, 그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아, 몸집은 조금 작았다. 나는 캐리어를 그 곳에 세워두고 작은 몸집의 사람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이내, 그 사람이 시야에 들어찼다.

아, 아침에 보았던 아줌마 무리 중 한 명이네. 그 아줌마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식겁했다. 긴장한 듯 땀을 흘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 아주머니에게 다가섰다. 그러자 질색을 하며 뒷걸음질을 친다. 뭐야, 어제 그 여자랑 다를 게 없네. 나는 그 아줌마에게 다가갔고, 겁에 질린 듯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어제 그 여자의 높은 목소리보다 듣기 싫은 목소리였다. 내가 듣고 싶은 건 루한의 목소리인데, 이러한 목소리들만 듣고 있으니 속이 좋지 않았다. 아줌마의 목을 치고, 쓰러진 아줌마를 짊어진 채 캐리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조금 무거웠지만, 나는 이 짐을 미워하지 않는다. 캐리어에 작은 몸집의 아줌마를 구기듯 넣어 놓고 문을 닫아 캐리어를 끌고 유유히 돌아간다.

바람은 불었으며, 나는 걸어온 길을 돌아간다. 감과 바람으로 이루어진 나의 주택가 지도는 혼잡했다. 눈을 감고 찬바람을 느끼며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루한, 네가 있는 집으로. 한 걸음 두 걸음, 걸음을 옮기며 오른 주택가의 길을 비포장도로로 불편했다. 이런 곳에서 캐리어를 끌고 다니기는 꽤 골치인 일이었지만, 나는 이제 익숙해서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어둠으로 향하는 그 골목길을 걸으며 어둠으로 잠식해 가는 길 역시도 아무렇지 않다. 그리고 집 앞에 거의 다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문뜩 뒤를 돌아보았다. 이 주택가의 적갈색 조명이 수놓인 그 모습을 보고싶었다. 그리고 나는 그 주택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적갈색의 이 주택가는 죽어 있었다. 충분히 그렇게 보였다. 이 주택가는 죽었다. 그리고 이 주택가는,


너를 위해 나의 모든 악이 시작되는 곳.


루한, 너를 위해 나의 모든 악이 시작되는 곳이야. 입술을 깨물고 좀 더 길을 올라 집 앞에 서서 흑색의 하늘 보았다. 흑색으로 까아만 하늘을 보며 세훈은 저 하늘이 내려와 이 모든 것을 잡아먹어 버리길 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곧 그것이 부질없는 것임을 알고 대문을 열어 그 안으로 캐리어를 끌고 들어간다. 그리고 무표정의 얼굴로 현관문을 열고 아까 불을 끄지 않아 밝은 거실과 마주한다. 그리고 그 안으로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캐리어에서 아주머니를 꺼내 테이블 위에 있던 정도가 심한 마취제를 들어 그녀의 팔에 주사를 했다. 그리고 세훈은 혹시나 마취가 깰까 싶어서, 그녀의 발목과 손목을 묶어두고 하얀 천으로 두 눈을 가렸다. 그리고 그 상태로 아주머니는 거실 한 구석에 놓여있었다. 세훈은 깊은 마취제이니 깰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루한의 방 문 앞에 섰다. 그리고 늘 두려운 그 마음으로 방 문을 열었다.

천천히 열린 방문과 입에서 역한 액체를 흘리며 우걱우걱 무언갈 씹고 있는 루한의 모습, 헝겊 인형 같이 극단적으로 나뉜 피부색과 눈, 그리고 한 손. 세훈은 그것을 보면 자기가 한 짓임에도 불구하고 울컥하는 생각이 차오른다. 근본적인 원인은 내가 아닌데, 하고 세훈은 위로를 한다, 스스로를. 세훈은 루한에게 다가간다. 루한은 세훈을 아무 감정 없이 바라본다. 먹이가 있으니, 세훈을 향해 줄 관심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식욕만을 가지고 죽었지만 살아있는 존재, 루한은 가엾은 존재이다. 세훈은 루한의 머리칼을 쓸어준다. 푸석푸석하다. 하지만 씻기기에는 아주 귀찮은 일들이 뒤따르며, 루한이 원치 않아 했다. 세훈은 그래서 그저 루한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웃는다. 그리고 세훈은 입을 열었다.


“…사랑해.”
“…….”
“너무, 사랑해 루한.”


루한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세훈도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훈은 루한을 향해있던 손을 거둬 올리고 뒷걸음질 치며 끝까지 루한을 눈에 담으며 방 문을 열어 나왔다. 그리고 거실 한 바닥에 놓여진 이불을 끌었다. 세훈은 이것을 덮고 잔다. 루한에게도 덮어주고 싶었지만 루한은 거절하는 그것. 세훈은 오늘 밤은 그래도 짧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밤은 다시 깊어 온다. 세훈은 아까, 준면과의 통화에 울컥하는 감정을 짓누르며 잠을 억지로 청해본다.



침체된 발악 C1

나는 어렸을 때부터 철저히 외부와 격리된 채, 아니 내가 격리를 선택한 채 연구소에서 자라왔다. 나의 부모님이 누구인지조차 나는 모른 채 그렇게 연구소에서 키워졌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연구소에 있으며, 연구원들은 어린 나를 보고 귀찮아하기도 했지만 소장님의 말씀 하에 나에게 이것저것을 가르쳐주었다. 어릴 때부터 실습실에서 자랐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나는 무수히 많은 실험들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보아왔다. 원래는 다 극비리에 진행되는 프로젝트였기에 연구 담당자와 소장님 빼고는 볼 수 없었지만, 소장님의 권한으로 나는 그것들을 볼 수 있었다. 논문을 먼저 보고, 그것을 보면서 나는 이렇게 하면 이게 되는 구나, 저기에 저걸 하면 이상 작용이 일어나는 구나. 하고 혼자 깨달으며 배워나갔다. 그리고, 내가 조금 더 컸을 때, 그 때 나는 연구원 한 명이 나를 가르치겠다고 나서서 과학에 더 다가갈 수 있었다. 그 연구원은 의학을 전문으로 하는 전문의였는데, 그랬기에 내가 다른 과학 학문들보다 의학을 더 잘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연구원 이후로 다른 연구원들도 나를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고, 소장님도 그것을 뜯어 말리시지 않으셨다. 그 이론 가르침과, 실험 실습을 보는 것. 그것으로 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고 할 수 있을까. 조금 다른 개념이지만, 과학 천재들이 모여 있는 이 연구소에, 그 연구원들이 직접 가르치고 그 연구원들의 실험을 본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랬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내가 천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고 변명해 본다. 어렸을 때부터 그 유능한 연구원들의 가르침에 살아왔다. 글과 덧셈 뺄셈 등의 기본적인 것들은 아주 어릴 때, 실험실을 볼 수 있기 전에 소장님이 붙여주신 가정 교사로부터 배웠다. 아마, 그 교사는 나에게 습득력이 빠르다고 칭찬을 해주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에 부족할 나이에 나는, 초등학교 과정을 쉽게 습득해나갔다. 그리고, 13살이 되기도 전에 이미 초등학교에서 배울 모든 내용을 익혔다. 그래, 익혔다. 그리고 나는 혼자 소장님의 서재에 있는 과학 관련 서적들을 읽었다. 그 때는, 제대로 된 뜻도 모르고 전체적인 내용만 이해하며 읽었다. 그리고 나는 실험들을 보면서 그 때 읽었던 내용들을 다시 떠올렸다. 그렇게, 여기저기가 모두 과학으로 이루어진 연구소에서 나는 자랐다.

내게 처음 의학을 가르쳐 준 연구원은 예쁘장한 여자 연구원이었다. 예쁘고, 성격도 좋아 인기가 많았었던 것 같다. 연구소에는 남자들이 많은데, 그 남자들이 모두 그 누나를 쫓아다녔다. 하지만 누나는, 그들이 제안하는 커피나 밥을 모두 거절하고 나에게 의학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초등학교 재학 중일 나이였지만, 실험들을 보아 온 경험과 책을 읽은 경험으로 대충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에 용어들은 어려웠다. 그것을 익히는 데에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 의학 용어들을 모두 익힌 뒤에는, 어떠한 책을 보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중간중간 막히는 부분은, 그 연구원 누나에게 물어보곤 했다. 누나는, 나를 귀찮아하지 않았다. 누나는 이론들과 논문들을 내 앞에 펼쳐보이며 이것저것 설명을 했다. 나는 그것들을 보며 하나하나 익혀갔다. 나중에 알았던 사실이지만, 누나는 의학의 모든 분야를 공부했지만 제일 중요히 연구하는 것이 뇌라고 했다. 뇌, 인간의 뇌에 대해 누나는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누나와 각종 이론들을 깨치다가 나는 외과적인 부분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나는, 모든 의학 분야를 내게 가르쳐주었지만 그런 나의 성향을 깨달았는지 수술에 대해서 더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사람에 관해서도, 동물에 관해서도. 그리고 나는 그것을 막힘없이 잘 배워나갔다. 누나는 그런 나를 예뻐해주었다. 하루는 누나가 웬 고양이를 안고 왔다. 그리고는 내게 속삭였다. 세훈아, 고양이 해부해 볼래? 죽이진 않을 거야! 나는 좋았었다. 나도 실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커다랬던 시절이었다. 누나의 말에 빈 실험실 하나에 들어가 고양이를 마취했다. 마취제를 맞은 고양이는 축 늘어졌다. 나는 수술을 하기 위해 고양이의 털을 짧게 잘랐다. 고양이의 예쁜 주황색 털이 썰려 나갔다. 누나는 내 옆에서 숨 죽이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메스를 들어 고양이의 배를 갈랐다. 그리고 책에서나 볼 수 있었던 내장 기관을 직접 두 눈으로 보았다. 그게, 나의 첫, 실습이었다.

나는 수술 장갑을 낀 손으로 내장 안을 살폈다, 누나는 내 옆에서 그게 위야! 거기를 자르면 절단이 되는데, 나중에 네가 진짜로 해부할 일이 생기면 잘라서 뒤집어 봐! 라며 내게 명칭을 가르쳐주었다. 아, 이런 게, 실험이구나. 나는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끼며 고양이 배를 닫고 꿰매기까지 했다. 그리고 마취에서 풀린 고양이는 빨빨 잘 돌아다녔다. 털이 깎인 부위가 조금 우스웠지만. 나는 그렇게 첫 실습을 잘 마쳤다. 그리고 누나는 그 이후에도 나를 여전히 가르쳤다. 그리고 나의 학습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린 것인지, 누나가 나가고 난 뒤 내 방에는 화학을 연구하는 형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형이 나간 뒤에는 생물학, 분제과학, 물리학, 지구과학, 생명과학, 첨단과학 등등등 많은 연구원들이 내게 가르침을 주었다.

나는 정신차릴 틈도 없이 그 모든 것을 받아 들였다. 다들 나의 학습 능력을 신기해 했다. 누나는 뿌듯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나는 몇 년 간 그러한 가르침을 받으며 지내왔다. 여전히 나는 과학 관련 서적을 읽었으며, 실험을 같이 관찰했다. 소장님은 나를 말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리고 소장님은 어린 날의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 박사 학위를 따는 것이 어떠니. 아무리 내가 학습 능력이 좋아도 그것을 무리일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소장님은 뛰어나다며 내게 논문을 쓰게 하였다. 나는 무수히 많은 논문을 써냈다. 그리고 나는 대학원에 나가지 않았음에도, 소장님이 주시는 문제를 풀고 논문을 제출한 것으로 박사 학위를 가질 수 있었다. 물론 나의 첫 박사 학위는 의학이었다. 누나는 뛸듯이 기뻐해 주었다. 소장님은 나에게 그것 말고도 많다며 더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 했지만, 나는 의학 박사 학위로도 충분했다. 그것으로 누나를 기쁘게 할테니. 하지만, 누나는 내가 박사 학위를 딴 그 해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연구원 형들에게 물어봐도 모른단 대답 뿐이었다. 소장님께 물었을 때엔, 아무 대답이 없으셨다.

나는 이렇게 많은 연구원들과, 소장님과 소통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내게 진짜로 소통한 사람은, 의학을 연구하던 누나 한 명뿐이었다. 모두들 내게 진심을 내비춰주지 않았다. 나는 암울한 어린 시절을 살았다. 의학을 연구하던 누나는 그렇게 사라지고, 내게 남은 것은 어둠 뿐이었다. 나는 방 안에 갇혀 실험실을 보지도 않았으며 연구원 형들에게 무언갈 배우지도 않았다. 그저, 엄청난 양의 과학 서적과 누나가 내게 남긴 주황색 털의 고양이를 보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았다. 내가 누나를 지켜주지 못했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방 안에 틀어박혀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건드리지도 않았다. 나는, 나는 이 연구소에서 철저히 외로운 사람이었다. 나는, 괴로운 사람이었다. 그렇게 나는 암울한 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문에 기대서 고양이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문 밖에서 여연구원 들의 수다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것에 귀를 기울였다.


―들었어? 웬 짱깨 하나가 낙하산으로 들어온다며.
―아, 걔? 근데 걔 어리다며.
―어리지, 소장님이 데리고 있는 그 애보단 아니지만
―아무튼, 무슨 생각인지, 원.


누군가가 연구소의 이슈가 되었나보다. 그것이 누구인지 나는 딱히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고양이가 물고 있는 털뭉치를 손에 쥐어 빼내려고 하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뇌를, 연구하겠다고 했다며?
―뇌?


뇌를 연구한다는 말에 나는 고양이에게서 뺏은 털뭉치를 떨어뜨렸다. 고양이는 그것을 다시 입에 물어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뇌, 뇌를 연구한다. 그것은, 마치 누나와도 같았다. 나는 이 답답하고 어두운 방에서 잠시 나가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오랜만에 다시 잡는 문고리에 심호흡을 하고 그것을 열었다. 역시나 하얀 연구소의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나를 따라나선 고양이와 함께 방을 나왔다. 나는 이때 역시도 어렸었다. 나는 그 하얀 복도를 따라 걷고, 걸었다. 그 걸음걸음이 얼마나 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걷고, 나는 메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걷다가 계단이 있는 곳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곳에 다가가며 걸음을 조금 느리게 하였다. 흰 티에, 청바지를 입고 있던 나는 계단 앞에 다다르자 걸음을 멈추었다. 끌리던 슬리퍼가 굳어섰다. 그리고 주황색 털의 고양이도, 내가 멈추자 내 옆에 멈췄다. 그리고 나는 계단을 올라오고 있던 누군가와 마주쳤다.


―…….
―…….
―…어, 안녕 누구야?옷을 보니까 연구원은 아닌 것 같아.


약간 어눌한 한국어 억양과, 끝의 맺음이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그의 말. 금발의 머리칼을 하고 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큰 눈은 마치 바다와도 같아서, 내가 쳐다보기에 너무 깊었다. 나는 그 큰 눈에 빨려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의 얼굴을 예뻤다. 나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어색한 듯 웃으며 어? 라는 말을 덧붙여 내게 독촉을 했다. 아, 내가 누구냐면….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러자 그가 먼저 무어라 입을 열었다.


―나는 루한이야, 오늘부터 이 연구소 연구원이 되다…, 음 뭐.
―…루한?
―어? 말한다. 그리고 나는 뇌를 연구해, 너는?

―…오세훈, 의학 박사.


딱히 연구하는 것도 없고 직업도 없지만 연구소에 얹혀 살아. 라고 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의학 박사라는 사실을 덧붙였다. 그러자 루한은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의학 박사? 너 완전 어려보이는데! 선배인가? 라며 내게 친한 척 말을 걸어주었다. 그러다가 내가 대답을 않자, 내 옆의 고양이를 보고는 그것을 안으며 예쁘게 웃었다. 얘는 이름이 뭐야? 나는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천사와도 같았던 것 같다. 흰 연구복을 입은 채 내게 말을 하는 루한. 루한이 환하게 웃으며 내가 말을 거는 그 순간을 내 말 소리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면 그것은 변명일까. 그러고보니 이름이 없다, 저 고양이. 그저, 누나를 생각하는 수단이었을 뿐이다.


―…이름, 없어.
―진짜? 내가 지어줘도 돼?
―…응.
―주황색이니까… 오렌지 어때 오렌지! 나 오렌지 좋아.


어눌한 한국말로 보아도, 뇌를 연구한다는 것을 보아도. 아까 그 여연구원들이 말하던 그 새 연구원이 틀림없었다. 그 나이에 걸맞게 예뻤다. 그리고 나는, 루한의 정확한 나이를 알고자 루한에게 나이를 물었다. 물론 루한이 그 고양이랑 놀고 있을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쳐다보다가 앉고 있던 오렌지, 라는 이름을 갖게 된 고양이를 내려 놓을 때 말을 했다. 몇 살이야? 나는 그것을 루한에게 묻고는 생각했다, 아 존대 써야하나. 하지만 루한은 개의치 않고 답해주었다. 나는, 23살. 너는? 그래도, 나보다는 나이가 많구나. 19살. 짤막하게 대답을 했다. 그러자 루한은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너, 19살인데 의학 박사라고?


―우와, 세훈 천재구나.
―…아니야.


천재라는 말은 누나도 종종 내게 해주었던 말이다. 그것을 루한의 입을 통해들으니까 새로웠다. 오렌지라는 고양이는 루한이 놓아주자 내 다리 뒤로 와서 숨었다. 주확생 털이 내 다리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루한은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뜩 뭔가 생각난 듯, 한 손을 주먹 쥐고는 다른 한 손의 손바닥 위로 내리쳤다. 그리고는 내게 인사를 했다.


―세훈! 나 소장실 가는 길이다.
―…어.
―있다가 보다. 안녕!


여전히, 그의 한국어는 어색했다. 하지만 그는 내게 안녕하고 손을 흔들어 주고는 나를 지나쳐갔다. 하얀색의 이 연구소에는 파스텔 톤의 누군가가 들어왔다. 나는 그 누군가를 만났다. 까만색이던 나에게 파스텔 톤의 분홍색이 묻었다. 그것은 서서히 나를 물들여갔다.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오렌지라는 주황색 털의 고양이를 한 번 보고는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다시, 까만색으로 빛이 없는 나의 방으로 돌아가야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고양이가 따라왔다. 이 하얀색 복도와 주황색 고양이, 그리고 까만 나.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걸음을 옮겨 방 앞에 도착해 문고리를 잡고 열었다. 내 방은 여전히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나는 그 방 안으로 들어갔다, 고양이도 따라 들어왔다. 나는, 침대에 누웠다. 고양이도 따라 올라와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입을 열어 고양이에게 말을 했다.


―…오렌지.


고양이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너도, 오렌지가 마음에 들어? 아까 환하게 웃던 루한의 미소가 생각났다. 저런 미소는 어떻게 지을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원체 표정이 없던 녀석이라 루한의 웃음이 새로웠다. 그러한 웃음을 내게 지어준 사람은 누나와, 루한 둘 뿐이었다. 소장님조차 나를 이렇게 대하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준면이 형 생각이 났다. 생각해보니 누나와만 소통을 했던 것이 아니다. 준면이 형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초등학교 과정을 끝마침과 동시에 준면이 형은 유학을 갔다. 준면이 형은 소장님의 아들이었다. 준면이 형은 내게 처음으로 정을 주었던 사람이었다. 내게 무언가를 처음 가르쳐준 사람도, 누나가 아니라 준면이 형이었다. 잊혀졌던 준면이 형을 떠올렸다. 그 웃음도, 참 좋았는데. 준면이 형은 돌아오지 않았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다. 다만, 나는 그를 완벽하게 잊지 않아서 다행이다. 준면이 형은 좋은 사람이다.

준면이 형이 보고싶어졌다. 누나와, 루한으로 이 각박한 삶을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누나는, 누나가 남긴 이 고양이만으로 존재하고 있는데 내가 그것을 어떻게 버텨낼까. 루한은, 루한은 아직 나를 호감으로 생각하는 것인지조차 불투명하다. 그래, 나는 지금 위태로웠다. 나는 위태로운 19살이다. 옆에 널브러져 있던 이불을 몸에 안착 시켜 눈을 감았다. 고양이 역시도 몸을 움츠렸다. 오늘은, 루한을 만났던 날이다.





루한을 만나고 난 뒤, 나의 삶은 침체 속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루한은 나를 보면 아는 척을 해주며 내게 인사를 건넸고, 나는 어색하게 그것을 받아칠 뿐이었다. 이러한 관경을 본 연구원들은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방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일단 놀라웠고, 내가 누군가와 인사를 한단 사실 역시도 놀라울 것이다. 그리고 그 상대가 신입 연구원이라는 사실 또한. 나는 주위 시선들이 신경 쓰였지만, 그것을 개의치 않아하는 루한의 행동에 나 역시도 모두 묵살하기로 했다. 그리고 루한은 내게 이것저것 알려주기를 좋아했다. 누나와 닮았다. 내게 뇌 사진을 보여주며 자신은 지금 뇌에서 느끼는 감정들에 대한 심층 연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누나는 무슨 연구를 한댔더라.

나는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누나에 관련된 모든 것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누나의 연구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연구를 한댔더라. 무슨, 연구를…. 입술을 깨물었다. 루한은 싱글벙글 웃다가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왜? 라며 물어왔고 나는 그것에 아무것도 아니라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루한은 누나와 같이 사라지지 않아야만 한다. 준면이 형처럼 떠나보내지도 않아야만 한다. 나는, 루한과 함께 연구소 복도를 걸었다. 하얀색 연구소와 파스텔 톤의 루한과, 검은색의 나. 그리고, 그런 나에게 파스텔을 입혀주는 루한. 나는 이런 생활을 이어 나갔다. 의학 박사라는 학위를 가지고 있음에도 연구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던 나는 루한을 만나면서 타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정도까지 되었다.

전에 내게 공부를 가르쳐주었던 연구원들과는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나는 첨단과학팀과 나노기술팀에서 진행되고 있는 초소형 카메라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것은 아주 초소형으로 만들어서 사람의 혈액 속에 집어 넣을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의학 이론을 바탕으로 하기 위해 참여 연구원이 되었다. 나는, 이 사실을 빠르게 루한에게 알렸다. 그러자 루한은 마치 자신의 일이라도 되는 것 마냥 신이나 좋아해주었다. 나는, 그렇게 첫 연구를 시작했다. 루한은 여전히 뇌를 연구하고 있었고, 나는 초소형 카메라를 개발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야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루한, 루한으로 인해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까맣던 나에게 색을 입혀주고 어둠 속에서 꺼내준 사람. 나는 루한을 천사라고 하고 싶었다. 내가 처음 맡은 연구는 그런대로 잘 흘러갔다. 하지만 바빠서 루한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루한은 연구가 힘든지 조금씩 지친 안색을 하고 나와 만났다. 루한, 괜찮아? 그러면 루한은 늘 괜찮다 했다. 하나도, 안 괜찮아 보였는데.

우리 팀의 연구는 성공으로 끝이 났다. 긴 연구였지만, 막대한 양의 돈을 들여서 완성된 초소형 미니 카메라는 나타났다. 이것이 아주 고도의 기술을 요해서 실패도 많이 했지만 결국에는 성공으로 끝냈다. 나는 이것이 너무나도 기뻤다. 루한을 찾아가 바로 자랑스럽게 말을 했고, 루한은 축하해주었다. 하지만 루한의 안색은 파리했다. 루한에게 이유를 묻자 여전히 아니라고만 했다. 하지만 끈길기게 묻자, 논문이 안 써진다며 그래서 밤을 새서 그렇다 했다. 나는그것을 보고 도와주겠다며 루한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은 혼자 방을 쓰는 루한의 방은 깔끔했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 루한이 작성 중인 논문을 보았다. 노트북 옆에는 뜯겨진 커피 믹스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얼마나, 마신 건지 걱정이 되었다. 루한의 논문 앞에서서, 예전에 누나에게 들었던 모든 자료들을 기억해내 타이핑을 했다. 루한은 옆에서 그것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대충 루한이 막혔던 부분을 뚫어주자 루한은 기뻐하며 나를 꽉 안아주었다. 고마워, 세훈! 나를 꽉 안던 루한의 그 손길이 나는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루한은 나를 꽉 안았고, 나는 어쩔줄 몰라했다. 나는, 루한이 나를 안았을 때 정말로 표현할 방법을 모를 감정을 느꼈었다. 좋은데, 묘한 그 애매모호한 감정을 나는 잊을 수 없다. 하지만 루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내가 일어난 자리에 앉아 남은 논문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왠지 그 모습에 나는 씁쓸할 감정을 느꼈다. 루한은 열중해서 남은 논문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나는 루한의 침대에 앉아 무료하게 루한을 기다렸다. 루한이 타이핑 하는 소리가 경쾌했다. 그것을 들으며 멍하게 있다가, 타자 소리가 멎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내 앞에는 루한이 있었다.


―끝! 진짜 고마워, 세훈.
―다 했어?
―응응! 다 했어, 세훈 나 너무 기뻐.


그러면서 다시 나를 껴안 듯 내 위로 쓰려졌다. 그로 인해 침대 위에 나와 루한이 엎어져 있었다. 루한은 여전히 마냥 예쁘게 웃고 있었고, 이 상황에 알 수 없는 터질듯한 감정을 느끼는 건 나뿐이었다. 괜스레 묘한 느낌이 들어 빠르게 루한을 밀어내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루한은 침대에 앉아 나를 올려다보며 말을 했다. 세훈아, 밖에 나갔다 올래, 같이? …그러고보니 나는 아직 연구소 밖을 나간 적이 없었다. 누나를 찾으러 나간 적도, 준면이 형을 배웅해주러 나간 적도, 아니 그냥 나간 적이 없었다. 그래, 루한은 지금 내게 바깥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것이 두려웠지만 거절을 하진 않았다. 루한은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시계를 보았다. 그러더니 늦었다며 다음에 시간을 내서 가자고 했다. 그리고 나를 방으로 돌려 보냈다. 아쉬웠다. 다음을 기약한 채 나는 방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누웠다.

고양이가 있었다. 나는 오늘 카메라도 완성시켰고, 루한의 안색도 풀리게 했다. 나는 점점 사람다운 사람이 되가는 것이 맞을까. 나는 책상 위에서 번쩍이는 디지털 시계를 한 번 보았다. 아, 루한의 말대로 시간이 많이 늦었다. 연구소에는 창문이 별로 없었다. 그것은 루한의 방도, 나의 방에도 없었다. 내가 들어갔던 실험실들 역시 창문이 없었다. 소장실에는 창문이 있지만 늘 소장님이 블라인드로 가리고 계신다. 그러고보니 나는 밖을 본 적도, 없었다. 나의 19년은 그렇게 연구소 내부에서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서 빨리 루한과 밖을 보고 싶었다. 하얗기만한 연구소를 벗어나 보고 싶었다. 내가 보아 온 밖은 모두 책 속의 것이었으니, 나는 궁금했다. 루한도, 외부도, 나도.



침체된 발악 C2

아침이 밝았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시간을 나타내주는 시계가 다였다. 내 방에는 창문이 없었다. 시간은 9시 21분. 안정적인 시간에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나를 덮고 있던 이불이 스르르 풀려 내려 바닥으로 추락했다. 주황색 털의 고양이는 여전히 구석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잠 들어 있었다. 아무런 빛이 들어오지 않는 나의 방은 깊은 밤처럼 어두웠다. 문학 책에서는 늘 아침이 밝다고 하였지만, 나는 그것을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연구소 내부에 켜져 있는 불들이 밝았다. 햇살이 밝다는 말은 과학책에서 접하기도 힘들었고, 연구소 내에서도 접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나는 과학책을 많이 읽었고, 연구소 내부에서만 있었다. 햇살은 소장실에 쳐져있는 블라인드에서 새어나오던 그 소량의 빛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하며 방 안의 불을 켰다. 아침을 표현하는 것처럼 밝은 형광등이 켜졌다. 그리고 나는 옷장에서 옷을 꺼냈다. 나의 옷장에는 연구원들이 입는 가운이 없었다. 나는 무언가 내 어깨에 올려지는 것을 싫어했다. 나를 억압하고 짓누르는 그런 것이 싫었다. 나는 그 옷들을 들고 내 방에 연결되어 있는 샤워실로 들어갔다. 나는 독방을 쓰며, 샤워실도 혼자 쓴다. 그래서 홀로가 편한 건지, 홀로가 편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소장님은 내게 이 방을 주셨다. 샤워실로 들어가 나는 입고 있던 츄리닝을 벗었다. 아무것도 나의 몸을 억압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샤워기의 물줄기가 나의 몸을 적셨다. 마치, 내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샤워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정장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나왔다. 젖은 머리칼 위에 수건을 올려놓고 털며 샤워실에서 나와 드라이기를 들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 침대에 앉아서 머리를 말렸다. 샤워하는 사이에 주황색 털의 고양이, 루한이 오렌지라고 했던 고양이는 잠에서 깬 건지 내 옆으로 와 있었다. 씻겨줘야 하는데, 귀찮은 일은 뒤로 미루게 되었다. 고양이 털을 쓸어주며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렸다. 그리고 다시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연구소 아이덴티티 카드를 목에 걸었다. 딱히 내가 맡고 있는 프로젝트나 연구 논문은 없었지만, 초소형 카메라 연구 이후로 격식을 갖춘 복장과 아침 기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차피 오늘은 기억 공유 장치 실험 이론 설명을 하는 것을 들으러 간다. 실험 과정을 모두 볼 수 있게 해준 소장님의 권한은 아직 종료되지 않았다. 나가기 전에 샤워실 앞에 있는 거울에서 현재 내 상태를 한 번 보았다. 그리고는 문 앞으로 걸어가 그 문고리를 잡았다. 차가운 그 문고리의 느낌에 손이 시렸다, 그리고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정 없이 하얀 연구소 복도가 보였다. 나는 그 길을 걸어야 한다. 19살에게는 어쩌면 창백하다 못해 불쌍할 정도로 새하얀 그 복도를 나는 아무런 감정 없이 걸을 수 있다. 나는 이미 열아홉이 아니다. 내가 이곳에서 겪었던 것들은 열아홉의 내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열아홉이었던 적이 없다. 그리고 그러한 열아홉을 건너서 나는 스물이었다.

연구소 복도에는 시계가 없었다, 이론 설명에 늦을 것 같은 마음에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걸음을 재촉해서 계단에 섰다. 루한을 처음 보았던 때가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리고 처음 루한에게 느꼈던 희미했던 감정들이 생각이 났다. 루한에게 느꼈던 알 수 없는 그 감정들에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 앉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순간적으로 멈춰섰다. 하지만 이내 늦을 것 같다는 생각에 걸음을 재촉해갔다. 기억 공유 장치 실험, 누군가에게 나의 기억을 공유할 수 있다면 내 기억을 공유 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밖에 나가 본 적도 없는 이의 기억에는 뭐가 있으리라 공유 받겠는가. 구태여 공유 받고 싶은 사람은 아마도 나의 과학 실험 관찰 기억을 공유 받고 싶어할 것이다. 많은 경험을 원하는 과학자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나는 내 기억을 쓸데없는 기억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밖을 많이 경험한 사람의 기억을 공유 받고 싶었다. 그리고, 루한의 기억을 공유 받고 싶었다. 루한의 모든 것을 내가 알고 싶었다.

복도에는 창문이 없었다.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에도 창문은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서 이론 설명이 이루어질 곳을 찾는다. 원래 참여 연구원들끼리 하는 것이라 큰 방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간단한 작은 회의실들로 사용되는 2층에서 나는 문 앞에 쓰여져 있을 기억 공유 장치라는 문구를 찾아 걸었다. 그리고 얼마 안가서 찾을 수 있었다, A205, 나는 그곳의 문고리를 잡았다. 내 방 문고리와 같이 차가운 느낌이 짙게 났다. 나는 그 문고리를 돌리고 들어갔다. 무엇을 말하고 있던 것인지 보드 앞에서 흰색 가운을 입고 있던 연구원이 마카를 들고 보드에 무언가를 적다 말고 나를 보았다. 그리고 실험 참여 연구진들도 나를 보았다. 갑작스레 나에게 쏠린 시선에 괜히 민망해져 헛기침을 하고 가운데 놓여있는 테이블 맨 뒤쪽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모두는 다시 보드로 시선을 옮겼다. 아니, 한 명은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루한? 루한이 있었다. 루한은 나를 보고 생긋 웃으며 손 인사를 해주었다. 나는 멍하니 그의 인사를 보았다. 그리고 루한도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렇게 멍한 상태로 루한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론 설명들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뇌에 강한 자극을 주어…, …현재까지 성립된 이론 중…, 부분과 부분일 뿐인 이론들이 스쳐지나갔고 나의 모든 감각들은 루한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루한을 쳐다보다가 문득 든 생각에 시계를 찾아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회의실 내부에도 시계는 없었다.

그렇게 이론 설명을 다 듣고, 나가도 좋다는 말이 떨어졌을 때 연구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루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연구원 중 한 명이 내게 지나가게 자리를 비켜달라는 말을 건네서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그 이론을 생각하려고 하며 자리서 일어났다. 그리고 루한은 내 옆으로 걸어 와 섰다. 루한은 나를 보고 작게 웃었다, 나는 그 웃음에도 멍하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루한은 내게 팔짱을 꼈다. 그리고 내게 말을 해주었다. 그렇게, 기억한다.


―세훈, 여긴 왜 왔어?
―…이론 들으려고.
―내가 이번에 참여하는 프로젝트야. 근데 가상으로만 만든다고 했다.


여전히 루한의 한국어는 서툴렀다, 의미만 통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그것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루한은 내게 그렇게 말하며, 나의 팔을 잡고 이끌어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연구소 복도는 하얬고 루한은 파스텔 톤이었다. 루한은 제 손목에 있는 시계를 한 번 보더니 시간을 말해주었다. 아직 오전이네, 세훈 다음 스케줄 있어? 루한은 그렇게 내게 물었다. 나는 오늘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하루종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그저 실험하는 것을 보고, 루한과 함께할 생각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잠이나 날 생각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고 대답했고, 루한은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크게 웃어주었다. 나는 루한을 따라 작게 웃었다. 이 웃음이 루한에게도 웃음으로 보일지 나는 모르겠지만, 내 나름 웃어보였다.


―그럼, 밖에 나가자.
―…밖에?


나는 외부와 접촉한 기억이 없다. 나는 철저히 연구소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어, 세훈이랑 나가 보고 싶어.
―…나랑?


두려움이 앞섰다. 연구소 밖에 꽃 예쁘게 폈어, 라며 루한은 나를 재촉했다. 루한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나는 그 웃음을 더 보고싶었다. 꽃이라, 꽃은 생물책에서 본 적이 많다. 그것이 예쁘다는 생각은 딱히 해본 적이 없었다. 딱딱하게 그 구조를 알기 위해 찍혀진 사진이 예뻐 보이기란 쉽지 않았지. 나는 루한이 말하는 예쁘게 폈다는 그 의미를 알고 싶기도 하고, 루한이 환히 웃는 모습을 너무나 보고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밖에 나가자 루한. 그러자 루한은 나를 껴안으며 말을 했다. 나 꼭 세훈과 밖에 나가고 싶었어. 그 말이 왜 그리 설레였는지, 나는 그 순간 처음으로 열아홉이라는 느낌을 알았다.

루한은 팔짱을 끼고는 내 팔을 끌었다. 루한도 나처럼 설레고 있었을까. 루한은 빠르게 복도를 걸어 계단에 섰다. 그리고는 말을 했다. 계단에세훈과 같이 서니까, 첫만남 생각나. 그리고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내려갔다. 루한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구나, 나 혼자만 그것을 생각했던 것이 아니구나. 나는 아까 들었던 기억 공유 장치 이론에 대해 곰곰한 생각을 했다. 루한과 기억을 공유하고 싶었다. 루한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고, 한참을 걸어서 나는 밖으로 이어지는 문에 설 수 있었다. 나는 건물과 건물 사이를 이어주는 통로를 통해 이 건물 저 건물을 건너 다녔다. 그러라고 설계된 건물이었으며, 그것이 편했다. 그래서 나는 구태여 밖을 나갈 일이 없었던 것이라고 변명해본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는 통로는 계단과도 너무 멀었다. 내가 그 길을 걷고 나서 느낀 점이었다. 밖으로 향하는 출입문은, 내가 이제껏 보아온 칙칙한 알루미늄이나 철의 문이 아닌 유리문이었다.

루한이 앞에 서서 문 손잡이를 잡고 밀자, 문이 열렸다. 나는 멍하게 그 유리문을 바라보았다. 유리문 밖으로 펼쳐진 분홍빛의 그, 꽃들이 참 예뻤다고 생각했다. 루한이 유리문을 열자 그 색이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루한은 내 손목을 잡고 나를 이끌었다. 그것이 내가 처음으로 밖과 마주한 시간이다. 루한에게 물었다, 저 꽃의 이름이 무어냐고. 루한은 대답했다, 벚꽃이라고. 벚꽃 나무 위에 연한 분홍색의 그 꽃들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예쁘고, 예뻤으며 그것 밖에 표현할 말이 없었다. 한동안 멍하게 그것만을 바라보았다. 비록 그 나무들 사이에 있던 공간이 주차장일지라도 벚꽃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책에서 본 벚꽃은 시들시들해 예쁘지 않았다. 정말로 창백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본 벚꽃은 달랐다. 파스텔 톤의 그 아름다운 색깔이 마치, 루한과 닮아있었다.

그때 바람은 차가웠다. 아직 따뜻하기엔 이른 시간인 탓도, 이른 계절인 탓도 있었지만. 왜인지는 모르게, 그 차가운 바람과 그 따스한 벚꽃이 만나는 것이 묘하게 대조되어, 마치 나와 루한 같았다. 벚꽃은 루한, 나는 바람. 벚꽃을 떨어트리는, 바람. 몸이 시린 기분이 들었다. 벚꽃을 보다가 루한을 보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주차장 한 가운데에 루한이 뱅글 돌아서며 웃고 있었다.


세훈아, 너무 좋다 그치?


그것은 마치 봄날의 소녀 같았다. 루한은 그랬다, 봄날의 소녀처럼 수줍었고 예뻤고 벚꽃과 어울렸다. 벚꽃 속에 어우러진 루한의 모습은 아주 아름다웠다. 벚꽃길, 그 안에 놓인 주차장 그리고 그 가운데의 루한. 나는 이러한 풍경과 처음으로 만나 벅찬 감정을 루한을 보며 한 번 더 느꼈다. 그리고 바람은 내게 자꾸만 불어왔다. 루한의 향을 실어주었고, 벚꽃의 향을 실어주었다. 루한은 이미 저 한 가운데에서 내게 오라고 손짓을 하는데 나는 문 앞에서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 공간인 것만 같았다. 벚꽃향이 나를 간지럽게 했지만,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루한은 내게 재촉을 하였고, 나는 발걸음을 떼었다.


―너무 보기 좋다, 세훈아.
―…벚꽃 향기가 너무 진해.


발걸음을 떼어서 루한의 곁으로 간 나는 그렇게 말했다. 벚꽃은 이곳에서 하늘을 바라보듯 보는 것이 훨씬 예뻤다. 하지만 진한 벚꽃향이 퍼졌다, 나는 루한의 향을 맡고 싶은데. 그러자 루한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벚꽃 향기가 진하다고?
―…응.
―향기 없는 꽃으로 유명한데.


아, 책에서 읽었던 것 같다. 벚꽃은 향이 진하지 않다고. 그런데 나는 지금 벚꽃향이 너무 진하다고 생각되고 있다. 바람이 자꾸만 내게 불어와서 그런 것일까. 나는 연구원의 흰 가운을 걸치지 않은 어깨를 잡았다. 날이 추웠다. 바람은 내게 벚꽃향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벚꽃향을 맡아본 적이 없음에도 이것이 벚꽃향인 걸 알았다. 루한은 아무런 냄새도 안 난다고 말을 했고 나는 진한 벚꽃 향기에 녹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루한은 내 손목을 잡고 더, 더 외부로 나아갔다. 나는 뒤를 돌아 연구소를 바라보았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나는 연구소에 살면서 이 연구소를 직접 모두 눈에 담을 수가 없었었다. 그리고, 연구소는 아주 컸다.

나는 좀 더 외부로 나아가, 벚꽃의 한 가운데에 루한과 함께 섰다. 루한은 찬 바람을 맞으며 벚꽃들을 보았고, 나는 그러한 벚꽃들 사이의 루한을 바라보았다. 같은 파스텔 톤, 루한은 위화감이 없었다. 그리고 루한은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바람을 느끼는 듯 두 팔을 벌렸다. 나는 그러한 루한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벚꽃의 아름다움과 루한의 아름다움, 나는 그 둘을 모두 시야에 담기 위해 애를 썼던 것 같다. 그리고 루한은 뻗었던 두 팔로기지개를 피는 듯한 행동을 취하고 감았던 두 눈을 떴다. 언덕 같은 곳에 위치한 우리 둘, 그리고 나에게로 불어오는 진한 바람. 루한은 입술을 열었다.


―세훈.
―…어?
―네가 너무,
―…….
―좋다.


그리고해사하게 웃는 루한이었다. 나는 그런 루한을 보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를 바라보며 그 말을 하고 해사하게 웃는 루한은 정말로, 천사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도, 입증할 수도 없는,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 진하게 나를 물들였다. 그리고 루한은 날이 춥다고 말하며 자신의 두 손을 맞대에 입김을 불어넣더니 내게 이제 그만 들어가자고 말했다. 나는 루한이 그 말을 할 때 내게 풍겨오던 루한의 향을 잊을 수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진했다고, 나는 말할 수 있었다. 루한은 먼저 발걸음을 뗐다, 나는 그 벚꽃을 아주 조금 더 남아 서서 바라보다가 루한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처음이었다. 루한도, 벚꽃도.

그리고 연구소 내부로 들어와, 루한은 점심을 먹자고 했다. 나는 연구소 내에 비치되어 있는 식당으로 갔다. 원래 밥을 잘 먹지 않았다, 영양소들은 대충 약들로 떼우는 편이었다. 하지만 루한과 만난 이후로 나는 식당에서 밥을 먹곤 했다. 연구원들이 저마다 모여서 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구내식당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들이 나누어주시는 급식을 받아 루한과 테이블에 마주 앉아 점심을 먹었다. 식당 안에서 창문은 없었다. 나는 아까의 그 벚꽃을 잊지 못했다. 내 방에, 창문을 만들고 싶었다. 루한은 밥을 먹으며 아까 벚꽃이 너무 예뻤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것에 네가 더 예뻤다고 해주고 싶었지만 밥과 함께 그것을 속으로 밀어넣었다. 루한은 여전히 예쁘게 웃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루한이 조잘대는 말을 들으며 밥을 먹고 있었다. 한창 밥을 먹고 있었는데, 한 연구원이 나와 루한 앞에 섰다. 그리고는 내 어깨를 가볍게 치고는 무어라 말을 해주었다.


―있다가 소장실로 올라오라고 하셨어.
―…….
―알았지?


그리고 그 연구원은 사라졌다. 평소 나와 친분이 있던 연구원도 아니고 루한과도 친분이 있는 걸로 기억하지 않았다. 그저 소장님의 심부름을 해준 것이라고 생각하며 고갤 돌려 밥을 마저 먹었다. 루한은 내가 뭐 잘못한 것이 있냐며 쓸데없는 걱정을 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런 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한적하게 벚꽃 구경을 하고 나와 루한은 한적하게 밥을 먹었다. 그리고 그 한적함을 나는 기억한다. 루한은 나를 걱정하던 일을 뒤로 하고는 다시 웃으면서 이번 실험을 잘 마치면 다음 스케일이 큰 대형 프로젝트에도 참여할 수 있을 것이라며 웃었다. 나는 그런 루한에게 나도 같이 하고 싶다며 어설프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다 먹은 급식판을 들고 일어서 높게 급식판들이 쌓여져 있는 곳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루한과 함께 다른 건물로 이어지는 통로를 따라 들어갔다. 여전히 루한은 내게 말을 하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들어주었다.


―세훈, 소장실 가야해.
―어?
―세훈 소장실 가야한다고, 안 가?


그러다가 루한이 소장실에 가야한다는 말을 꺼냈다.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루한과 더 있다가 갈 생각이었는데. 루한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계단으로 나를 밀었다. 같이 가자며 생긋 웃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소장실로 나는 루한의 손에 이끌려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 소장실로 향했다. 소장실에는 창문이 있는데, 블라인드로 가려졌지만 나는 오늘 그 창문 밖을 볼 수 있길 바래보았다. 그 벚꽃을 다시 보고 싶었다. 다시 나가기엔 멀고, 다시 보고는 싶었다. 나는 그렇게 하얀 복도를 걸었다. 시계는 없었다. 루한의 손목에 시계가 채워져 있었지만 나는 딱히 시간이 궁금하지는 않았다. 점심을 먹었으니, 대충 이른 오후겠지 싶었다. 그리고 나는 소장실로 걸어, 소장실 앞에 섰다. 그리고 차가운 문고리를 잡았다. 루한은 내 옆에 서 있었다. 하얀색 가운은 루한에게 많이 잘 어울렸다. 나는 문고리를 돌려 당겼다. 문이 열렸고, 소장실 내부가 보였다. 꽤 어두웠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소장실에, 소장님만이 있는 것은 아니였다.

나는 소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블라인드가 쳐져 있었다. 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루한은 소장실 밖에서 웃으며 혼나지 마! 라고 말을 했다. 그리고 소장실 문은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닫혔다. 소장님과 나, 그리고 내가 모르는 누군가. 나는 경계를 풀 수 없었다. 소장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아날로그한 시계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한 번 보고 나는 그 타인을 쳐다보았다. 숨이 막혔다. 누군가를 닮았다. 누구일까. 그리고 바로 소장님을 쳐다보았다. 소장님은 인자하게 웃으시더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스무 살일 때의 일이다.


―세훈아, 너무 어릴 때 보아서 기억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준면이 형이란다.
―…….
―너 잘 챙겨줬었는데, 기억 안 나니?


안 날 리가 없었다. 준면이 형이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준면이 형은 나를 보고는 옅게 웃어주며 손을 들어 안녕, 이라고 인사를 했다. 나는 그런 형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주먹을 쥐었을 뿐이다. 내 기억 속에 사는 사람은 누나와 준면이 형이었다. 그리고 준면이 형이 지금 내 앞에 있었다. 지난날들, 준면이 형을 잊기에 충분했다고 변명해보지만 준면이 형은 아주 어렸던 나에게 아빠와도 같이 친절했다. 분명 그 날들은 준면이 형도 많이 어렸던 날들일텐데, 왜 그리 어른 같아 보였는지. 준면이 형은 여전히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보았다.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나는 애써 열리지 않는 입을 떼었다. 오랜만에 만난 나의 소중한 사람에게, 인사를 해야했다.


―…형.
―응, 세훈아….
―왜, 이제 와.


나는, 너무 외로웠었다.

준면이 형이 없는 시간을 누나가 채웠다면, 누나가 없는 시간은 누가 채워줬던가. 지금이야 루한이 그 자리를 채우지만, 준면이 형이 남겼던 여백은 아주 길었다. 하지만 나는 준면이 형을 잊었었다. 그리고, 누나마저 잊어가고 있었다. 준면이 형은 입술을 열어 말을 해주었다. 미국으로, 유학 다녀왔어. 그렇게 말을 하고 웃는 준면이 형의 웃음은 정겨웠다. 새하얗고 창백한 형의 피부가 안쓰러웠다. 준면이 형도, 아마 이 연구소 안에서 일을 하게 되겠지. 결국엔 형도 나도 루한도 모두 연구소에 살 것이다. 그리고 그때 블라인드는 쳐져 있었지만 창문은 열려 있던, 그 틈 사이로 바람이 불어왔다. 진한 벚꽃 향기가 내게 닿았다. 블라인드 새로 보이는 벚꽃은 아름다웠다. 루한이 생각이 났다. 준면이 형은 마르고 창백했다. 나는 정이 없는 아이라 그에게 무어라고 말할 수 있을지를 몰랐다. 하지만 준면이 형은 웃고 있었다. 내게 소중한 사람, 앞으로도 소중할 사람이기를 바랬다. 그리고 소장님은 나와 형을 보며 웃었다. 그만 나가봐도 좋다고, 하셨다. 그리고 나는 지체없이 뒤를 돌았다. 밖에 있을 루한이 보고싶었다. 그리고 걸어 나갔다. 소장실의 찬 문고리를 잡아 돌리고,그곳에는 루한이 있었다. 나는 루한을 안았다. 루한은 영문도 모르고 내게 안겨주었다.

나는 루한과 처음으로 외부에 나가 벚꽃을 보았고,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준면이 형을 보았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준면이 형에 대한 일부를 이미 나는 잊었다. 나는 과연 그 부분을 채울 수 있을지 의심되었다. 루한을 안은 채 그런 생각을 했다.




준면이 형은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금의환향을 했던 것이다. 형은 연구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마치 누나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과 별개로 그저 루한과 평소처럼 지냈다. 하루는 루한이 내게 물었던 적이 있다. 준면이 형이 누구냐고, 나는 말했다. 나의 아빠 같은 존재. 하지만 그 말은 이미 의미를 상실했다. 준면이 형은 과거의 소중한 존재이다. 현재의 소중한 존재는 루한이다. 하지만 준면이 형은 아직도 나를 챙겨주었고, 나와 함께 다니는 루한을 많이 예뻐했다. 그렇게 나와 루한은 준면이 형의 보호 아래로 들어섰다. 루한은 그것을 싫어하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조금 불편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준면이 형은 늘 누군가를 챙겨주는 것을 좋아했으니까.

시간은 많이 흘렀다. 연구소에서 그 오랜 시간을 살아온 나는, 준면이 형과의 시간도 누나와의 시간도 루한과의시간도, 관계 없이 이곳에 아주 오랜 시간 있었다. 나는 루한과 만난지도 오래였고, 준면이 형의 보호 아래에 다시 놓여진 것도 오래였다. 그러니까 나는 이미 많이 자라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루한이 맡았던 기억 공유 장치의 가상 현실화는 실패로 돌아갔다. 루한은 그것에 매우 속앓이를 했었다. 그 날 이론 설명 후 나는 보고서를 보면서 느꼈지만 이론이 많이 부족하단 것을 알았다. 이것은 현재로써는 어려운 문제라며 루한을 위로했지만 루한은 여전히 그 아픔을 간직했다. 나는 무어라고 위로할 수 없어 그저 루한을 끌어안고 가만히 있어주었다. 그리고, 그 후로 루한은 조금 밝아졌었다. 나는 그것이 기뻤었다. 그리고 나는 혼자 논문을 쓰고 있었다, 변종 바이러스를 막을 수 있는 슈퍼 백신을 위한 자료 연구를 맡았다. 이것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이어질 것이라고 소장님은 내 부담을 덜어주셨다. 이것이 과연 가능성 있는 이야길지, 나는 잘 모르겠었다. 하지만 나는, 연구에 돌입했고 루한도 그런 나를 응원했다. 그것은 준면이 형도 마찬가지였다.

루한은 그 이후로 연구소 내에서 공부를 더 하고 있었다, 실험진이 아니라 공부를 더 하고 있었다. 루한에게 프로젝트 권유가 없던 것도 아니였다. 루한은 똑똑했다. 루한은 꽤 성과를 거두는 연구원이었기 때문에 모두 루한을 좋아했다. 하지만 루한은 모든 권유를 거절하고 늘 전문 서적이 즐비한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나 또한 그 도서실에서 바이러스 서적으로 자료를 찾았다. 루한에게 방해가 되지 않지 위해 꽤 먼 곳에 앉아서 자료를 찾았다. 소장실에 있던 책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서적들에 나는 넋을 놓을 뻔했었다, 처음 도서관을 보았을 때. 하지만 나는 이제 이 도서관에서 바이러스 관련 서적이 넘친다는 것을 깨닳고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나는 의학 박사가 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누나가, 좋아했으니까. 이제는 완전히 흐릿해졌을 뿐인 누나의 잔상에 나는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주황색 털의 고양이는 예전에 소장님이 놓아주시라고 하여 놓아줬다. 오랜 시간 함께 했고, 이미 늙을대로 늙어서 놓아주시자고 했다. 나는 그것에 동의했다. 많이, 나이를 먹었다. 고양이도, 나도.

평소처럼 도서관에서 루한은 뇌에 대한 서적을, 나는 바이러스 관련 서적을 뒤적이고 있을 때였다. 루한이 내게 와 캔 커피를 건네며 말을 건넸다. 세훈, 많이 바빠? 내가 늘 바쁘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루한은 그렇게 물었다. 나는 바쁘지 않았다. 이 자료 연구는 어느 때 해도 상관이 없었다 무기한 과제였으므로. 루한은 늘 상냥했다. 나는 바쁘지 않다고 대답을 하고는 적막 속에 있는 그 도서실에서 캔 커피를 들고 일어났다. 무엇을 말하고 싶어 나를 부른 것일까. 루한은 생긋 웃으며 나를 이끌고 도서관을 나왔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루한은 깊숙한 조용한 연구소 구석으로 나를 끌고 왔다. 실험 폐기물들 처리를 위한 엘리베이터가 놓인 곳까지 와서야 루한은 나를 놓았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흰 가운을 입은 루한을 쳐다보았다. 루한은 수줍게 웃었다. 나는 아무 말 않고 있었다, 무어라 내게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세훈아.
―…….
―나, 연구해.


이제껏 들어온 연구 권유 모두 거절한 것으로 알았었는데 그것이 아니였다. 루한은 무언가 말하면 안 될 것을 말하는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했다. 이러한 구석에 와서 말하는 것도 그렇고, 나는 뭔가 찝찝한 마음에 무슨 연구냐고 물었다.


―…이거, 비밀 연구인데.
―…….
―겉으로는, 인간 피부 재생 시간 단축을 위한 연구이지만, 사실….
―…뭔데?

―언데드 바이러스 연구, 즉 좀비 바이러스라는 거 연구 하는 거야….


하, 헛웃음이 나왔다. 언데드 바이러스 연구라니. 그런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인 걸까. 내가 이제까지 보아온 모든 실험 중 생화학 무기를 바탕으로 하는 실험은 없었다. 아, 나에게도 비밀로 붙여졌던 것일까. 나는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루한은 말을 계속 이었다. 예전부터 진행되어 오던 건데, 이번에 빈 자리가 나서 내가 채워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내가 그러겠다고 했어…. 잘한 거지? 내게 대답을 종용하는 루한의 모습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위험한 실험에 참가한다는데 내가 네게 잘했다고 해주어야 옳은 것일까. 나는 머리가 아파왔다. 이 깊은 곳까지 들어온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 하지 않고 진짜 비밀리에 진행되는 건데, 세훈 너는 알아둬야할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하는 루한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게 숨김 없이 말을 해준 것은 고마웠다. 하지만, 이것은 위험한 것이었다. 나는 문뜩 벚꽃향이 생각이 났나. 내가 좋다던 루한. 나는 입술을 열었다.


―…안하면, 안돼?
―…싫어?
―위험하잖아.


나는 네가 위험한 게 싫어, 루한. 그말까지 덧붙이고 싶었으나 나는 입을 다물었다. 루한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연구소의 불행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었다. 루한은 굳게 다문 입술을, 열었다. 사실 나, 이 연구 때문에 연구소 들어올 수 있었던 것 같아.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나는 루한의 말에 입을 닫고 귀를 열었다. 그 내막을 알아야했다.


―처음부터, 이 연구를 목적으로 날 받아준 것 같아.
―…….
―난, 박사 학위도 없어.


그리고 루한은 계속해서 말을 했다. 처음부터 나를 위했다는 것처럼 처음 권유를 받고 거절했을 때, 소장님까지 내려오셔서 나를 설득했고 그 연구실로 들어가자 나를 위해 비치된 개인 실험대와 실험 도구들이 있었고…. 그렇게 말하는 루한의 몸이 떨렸다. 루한도 구태여 그 실험을 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리 머리가 좋다고 해도 박사 학위도 없는 어린 중국인을 데려와 쓴다는 것이 일단 의심이 가는 부분이었다. 위험성 많은 실험을 위해 데리고 왔다면 얼추 맞는 것도 같았다. 이 실험을 안 하면 어떨지 모르겠다며 루한은 거의 울듯이 말을 했다. 나는 그런 루한을 내 품에 끌어안고 토닥여줄 뿐이었다.

그런 루한에게 나는 그 비밀 연구실 위치와 들어갈 수 있는 루한의 아이덴티티 카드를 복사 받고 나서 괜찮을 것이라고 말했다. 늘 한가한 내가, 늘 찾아가겠다며. 조용히 찾아가면 괜찮을 것이라고 했고, 소장님에게 걸리지만 않는다면 나는 안전할테니 걱정말라고 했다. 다른 연구원들은 내가 소장님 말씀 하에 연구실 어디든 갈 수 있는 걸로 알고 있을 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루한은 그 근처에 경호원들이 있다고 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그 근처를 서성일테니 나와서 나를 찾으라고 했다. 위험한 것 같을 때에는 경호원에게 화학 약품을 뿌려서라도 들어가겠다고, 내 나름의 농담도 덧붙였다. 루한은 웃었다. 나도 작게 웃었다. 나는 너무나 불안했지만 억지로 웃었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루한은 그 비밀 연구에 참여하고도 도서실에 나와서 공부를 했다. 그 시간대가 새벽이 되었고 짧아졌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나는 도서실에서 늘 루한과 함께 했다.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자고 루한이 연구실에 있을 동안 다른 실험들을 보다가 정말로 루한이 있을 비밀 연구실 주변을 서성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밥을 먹기 위해 나온 루한과 밥을 같이 먹고, 새벽에 도서실에서 루한과 책을 읽었다. 나는 각종 자료를 모은 것을 바탕으로 각종 이론들을 대입 시키고 있었고, 루한은 생화학 서적들과 뇌 관련 서적들을 뒤적였다. 나는 그것을 보며 가슴이 아팠지만, 집중하는 루한의 모습은 예뻤다. 정말로, 예뻤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루한의 연구에는 아직까지 특별한 재난이 없이 진행되어 가고 있었으며 나도 바이러스 서적들의 대부분을 정리해 갔다. 그리고, 루한과 함께 밤 늦게까지 도서실에 있다가 늦은 시각까지 자고 일어났을 때, 누군가 나를 불렀다. 방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부스스한 상태로 나가 문을 열었더니 준면이 형이 있었다. 나는 의아한 눈빛을 하고 준면이 형을 쳐다보았고, 형은 그저 씨익 웃으면서 소장실로 오라고 전해달라셨다며 말을 마쳤다. 그리고 요즘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냐며 내게 걱정 섞인 물음을 던졌고 나는 그에 고개를 내저으며 형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여느 아침이 그렇듯,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나는 방문 밖으로 나와 소장실로 향했다. 왠지 모르게 그 주황색 털의 고양이, 오렌지가 보고싶었다.

소장실로 향할 때도 연구소 복도는 하얬다, 때가 타지 않은 것인지 그것을 지우는 것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그냥 하얬다. 그리고 이 하얀 복도를 따르다보면 소장실이 나온다. 나는 소장실의 차가운 문고리를 다시 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돌려 당겼다, 소장실에는 찬 공기가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불길했다. 나는 그 찬 공기를 가르고 소장님이 뒤를 돌아 창문 밖을 내다보시고 있는, 그 앞으로 걸어갔다. 소장님은 뒤돌아 있던 몸을 돌려 내 쪽을 바라보고는 소장실 의자에 앉으셨다. 그리고 늘 그렇듯 웃음을 지어보이시며 내게 안부를 물었다. 건강을 물었고 논문 진행 정도를 물었다. 나는 늘 건강하다고 했고, 자료 정리 중이라고 대답했다. 여전히 소장님은 웃고 계셨다. 근데 그러시다가 갑자기 표정을 싹 굳히셨다. 웃고 있던 얼굴이 싸늘하게 굳자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어 두 손을 주먹 쥐었다. 그리고 소장님이 하실 말씀을 기다렸다.


―세훈아,
―…예,
―루한이랑 많이 친하니?


불길한 예감은 들어 맞는 경우가 다반사라더니, 이 경우도 예외는 아닐 것만 같았다.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네, 루한이랑 많이 친합니다.


―가까이 지내지 말도록 하여라.
―…….
―그 아이는 지금 위험해.


소장님의 이러한 말들로써 나는 확신이 서버렸다. 루한이 추측하던 그 사실에 나는 확신이 섰다. 처음부터 온전한 목적으로 루한을 이곳 연구소에 들인 것이 아니다.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그 자리에서 입을 열었다가는 나조차도 내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잘 모르겠었기에 입을 꾹 다물고 목례를 한 뒤 소장실을 나왔다. 찬 공기의 소장실에서 나와 문을 닫으니 온 몸에 힘이 쭉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루한, 루한은 결국…. 실험체와 다를 것이 없었단 소리였다. 실험체로 사용할 작정으로 루한을 이곳으로 들인 것이다. 루한은 아무것도 모르고 이곳에 들어왔다. 이곳은 더럽고, 추악했다. 치가 떨리도록, 추악했다. 내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느꼈지만 나는 지체 없이 힘이 풀린 몸을 다잡고 내 방으로 향했다.

내 방으로 가던 길 도중에 준면이 형과 다시 마주쳤다. 형은 늘 웃고 있었다. 그러다나 내 상태를 보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준면이 형이 걱정스레 내민 손을 쳐냈다. 준면이 형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었지만, 소장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역겨웠다. 나는 그렇게 그 날 하루를 방 안에서 꼬박 앓기만 했던 것 같다. 그것은 내 인생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 연구소에게 느꼈던 배신이었다. 내가 인간답게 살게 해준자에게 인간만도 못한 짓을 하려고 하는 것, 나는 그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어떻게 하면, 그것을 그만 둘 수 있을까. 하지만, 나에게는 힘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다음날에 초췌한 몰골로 연구소를 돌아다녔을 것이다. 그 몰골로 실험 과정을 보고 다녔다. 바이러스 관련 서적을 뒤적이고 있는 그런 병신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이 연구소를 위해 내가 노력할 이유는 없었다. 루한과의 만남을 있게 해준 장소라며 좋아했던 내가 병신 같았다. 그 벚꽃향에 취해서 좋아하던 내가 병신 같았다. 나는 연구소 구내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도 생각했다. 이 구역질 나는 공간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내가 향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많이 피곤해보이는 루한과 함께 저녁을 먹고 도서관에서 루한을 기다리는 일만을 했다. 루한은 전보다 말이 없어졌다. 많이 피곤한 것 같았다. 나는 루한에게 먼저 말을 붙이지도 않았다. 루한은 휴식이 필요했다. 그곳에서 정신을 바싹 세우고 하루종일 실험을 하는데, 진이 안 빠질 리가 없었다.

그런 피곤한 루한과 지내온 것도 꽤 되었다. 나는 슬슬 변화에 지치기 시작했다. 루한이 너무 피곤해 아파했다. 나는 도서관에서 쓰러져버린 루한을 부축해 루한의 방에 놓아주었다. 의학 박사라지만 내가 여기서 아무런 진단을 내리고 아무런 약을 먹일 수는 없었다. 루한이 어떤 화학 약품을 섭취했는지도 나는 알 수 없었기에 그저 쓰러져버린 루한에 놀라 멍청하게 가만히 있다가 그를 안고 그의 방에 가 그를 침대 위에 눕혀주었을 뿐이다. 나는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나는 내 존재가 너무나 작아 보였다. 준면이 형이 이 소식에놀라 달려와 진찰을 하고 연이 난다며 해열제를 먹이고는 푹 쉬어야 한다고 말해주었을 때 나는 마음이 놓였다. 이러한 간단한 진찰도 나는 할 수가 없었다. 그 프로젝트의 놀라운 비밀을 안 것의 대가는 컸다. 나는 새근새근 자고 있는 루한의 옆에 섰다. 루한의 책상 앞에 있는 의자를 빼 그 위에 앉아 여전히 나는 루한을 보고 있었다.

루한이 곤히 잠든 모습은 마치 어린 아이와도 같았다. 나는 루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예쁜 속눈썹이 보였고, 오똑한 코가 보였고, 붉은 입술이 보였으며 발갛게 달아오른 볼이 보였다. 나는 또 형용할 수 없는 감정 속에 빠졌다. 수면 위로 떠오르려고 해도 그것이 쉽지는 않았다. 나는 그렇게 멍하게 루한을 쳐다보다가 빨라지는 심장박동에 자리를 박차고 문을 열어 나와버렸다. 이상하다. 이 감정에 대해,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상하다, 고.




그 일이 있은 후 루한에게는 조금의 휴식기가 주어졌었다, 하지만 나는 루한과 만나지 않았다. 내 몸의 이상 증세도 한 몫 했지만 루한에게는 절대 안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나는 만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휴식기가 그치자 루한은 여전히 초췌한 몰골로 방에서 나와 연구실로 향하고는 했다. 나는 걱정되는 마음에 비밀 연구실이 위치한 곳 근처를 뱅뱅 맴돌기를 반복했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지루한 공간이었지만, 루한에 대한 걱정으로 나는 그곳에 서 있을 수 있었다. 루한을 위해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내게 삶을 알려준 루한인데, 나는 그런 루한에게 삶을 지켜줘야 하는 의무가 있다. 나는 그렇게 연구소 내의 비밀 연구실 근처에서 시간을 무료하게 보냈다.

루한은 안 좋은 몸을 이끌고 늘 나에게 웃었다. 나 부축해줬다며? 고마워. 매일 기다리는 거 지겹지 않아? 루한의 목소리는 메말라 있었지만 나는 그 목소리마저 듣기 좋았다. 하지만 안쓰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루한을 꽉 안주었었다, 루한 역시 내게 꽉 안겼다. 그리고 눈물은 흐르지 않았지만, 서로 눈물을 흘린 것과 비슷한 감정을 주고 받았다.

그리고 나의 불길함 감이 들어 맞은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늘 그렇듯 늦은 시간에 기상해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비밀 연구실이 위치한 곳으로 자리한다. 경호원들이 늘어서 있지만 그들이 나를 찾을 수는 없는 곳에, 나는 그리고 늘 수시로 약물 주사기 하나를 들고 다닌다. 마취제였다. 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사용할 날이 올 거라는 것은 나도 생각치 못한 일이었다.

불행은, 순식간에 시작되었다.

나는 그 날도 마취제 큰 통을 들고 그곳을 서성였다. 경호원들은 나를 볼 수 없지만, 나는 실험실 문을 볼 수 있었다. 루한의 것을 복사한 아이덴티티 카드가 있어서 이 정도까지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예전에 배워뒀던 CCTV 화면 조작 방법으로 내 얼굴을 인식한다거나 홍채를 인식하는 것 정도는 가볍게 넘겼다. 나는 과거 익혔던 여러 과학 기술들에 감사했다. 그렇게 접근해 늘 그렇듯 문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었다. 그런데 불길한 기운이 갑자기 탁하게 내 기분을 망쳤다. 피어오른 불길한 기운은 사그라들 생각을 하지 않았고 점점 더 크게 나를 잠식시켰다. 나는 기분이 나빠 인상을 찌푸리고 문을 바라 보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비상벨이 울리면서 그 연구실의 문이 벌컥 열린 것은.

나는 그와 동시에 문 앞에 서 있던 경호원에게 마취제 통을 급히 들이부어버리고는 바로 그 근처로 다가갔다. 문에서부터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남성 연구원 하나가 그 문 밖으로 내팽겨치듯 튕겨져 나왔고, 그 뒤로 튕겨져 나온 것은 루한이었다. 나는 놀란 마음에 눈을 크게 떴다. 이것이 무슨 상황인지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었지만 특수한, 위험한 상황임을 인지하고 숨을 쉬는 것을 멈췄다. 시야도 가리는 게 옳았지만 루한의 상태를 보기 위해 나는 그 상태로 루한에게 다가갔다. 루한의 모습은 많이 피곤하고 많이 힘들어 보였으며, 손에 무언가에 물린 자국이 있었다.

무언가에, 물린 자국이, 있었다.

비상벨이 울린 탓에 경호원들이 몰려왔다. 나는 직감적으로 무언가 이미 많이 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경호원들이 몰려와서 아까 루한보다 먼저 나온 그 남자에게 총을 쏴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나는 그것을 멍하니 보고 있었을 수밖에 없었다. 참고 있던 숨은 이미 당혹감에 풀어진지 오래였다. 그리고 그 남성 연구원의 형체가 알아볼 수 없게 총알로 수놓였다. 나는 불안한 직감이 들었고, 그것은 빗기지 않고 쓰러져 있는 루한에게로 총구가 돌아갔다. 그리고 루한은 억울한 표정으로 슬프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 옷깃을 잡고 입을 열어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세훈, 세훈, 그렇게 말하는 루한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씨발, 꼬맹이 비켜!


경호원은 총을 루한에게로 조준한 뒤 금방이라도 울것 같은 표정의 루한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총을 쐈다. 당연하게도 그것은 루한에게 맞았으며, 나는 이 모든 것을 직감하고 있었음에도 막을 수가 없었다.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었다, 고 나는 생각했다. 루한의 눈가에 총알은 맞았으며 그곳에선 피가 흘렀다. 루한은 경악에 찬 표정으로 절규하듯 소리를 내질렀고, 나는 그런 루한을 꼭 안고 있었다. 주변인들이 루한에게서 떨어지라고 윽박을 질렀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내 모든 것을 잃고 나 혼자 살아남는 것보다는, 내 모든 것과 함께 묻히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나는 루한에게 속삭였다.


―루한, 죽은 척 해. 제발.


나는 짧은 시간 내에 상황 파악을 끝냈다. 루한은 좀비 바이러스 감염자다, 저 남성 연구원도 감염자다. 씨발, 좆 같은 연구소. 나는 루한을 부축해 들었다, 아직까지 변이가 활성화되지 않았다. 백신 만들어 놓은 것이 있을까 싶어서 소리를 질렀다. 백신 있어요? 하지만 주변은 두려움에 찬 눈빛으로 나와 루한을 바라볼 뿐 아무런 대답을 주지 않았다. 비속어가 흘러나왔다. 씨발, 경호원은 총을 장전하고 한 번 더 루한에게 겨눴다. 나는 거의 발악에 가까울 정도로 소리쳤다. 그것은 루한을 위한 나의 발악이었다. 아주 처절한, 나의 발악이었다.

이미 루한은 죽었어요, 씨발 쏘지 말라고요. 시체라도 온전하게 좀 놔둬요, 네? 나는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댔다. 비밀 연구실을 에워싼 통로에는 나의 목소리가 처절하게 울려퍼졌다. 루한은 정말로 죽은 것인지, 내 말을 듣는 것인지 축 내려져 있었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발악에도 불구하고 경호원은 루한에게 총을 한 발 더 쐈다. 그리고 그것은 루한의 왼손에 맞았으며, 그 강도가 너무나 셌기 때문인 걸까, 루한의 손에는 많은 양의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씨발, 다 꺼져요. 영안실로 갈 거니까, 꺼져요.


나는 입술을 깨물고 여전히 발악에 가까운 외침을 지르고 있었다. 루한을 엎고 나는 이 통로와 연결 되어 있는 영안실로 간다. 사람의 시체들이 있는 곳이 아닌 곳이지만 나는 그곳에 간다. 아마도 이 바이러스 감염자들은 따로 특수한 처리를 하겠지만, 나는 그것을 막아야 한다. 나는 루한의 인간적인 삶을 지켜주지 못했으니, 루한의 죽음을 막아야 했다. 나는 그렇게 뛰어, 악에 받쳐 뛰어 영안실에 도착해 루한을 벽에 기대 놓고 귓가에 속삭였다. 루한, 여기서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기다려. 루한이 들었을지 아닐지는 모른다 다만 나는 아무도 이곳에 함부로 들어올 수 없게 잠금 잠치를 조작하고 나왔다. 루한의 피로 흥건해진 내 옷들에 불쾌감을 느끼며 나는 계단을 올랐다. 씨발, 나는 소중한 사람들을 지킨 적이 없었다.

피에 젖은 옷차림새를 하고 비밀 연구실로 향하는 출입 제한 구역을 벗어나자 연구원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집중되는 시선이 익숙치 않았지만 그런 것들을 모두 뒤로 하고 나는 소장실로 향했다. 이 모든 재앙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 나의, 모든 것을 위해 나는 책임을 물어야만 한다. 이 좆 같은 상황이 무언지 설명도 들어야 한다. 나는 지금 제 정신이 아니다.계단 올라가 나는 소장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갔다. 소장님은 그곳에 계셨다. 피 범벅인 나를 보고는 적잖이 놀란 듯 하다. 이미, 그 아래 있던 일은 다 알고 있을 것이면서. 역겹고, 추악하고, 징그러웠다. 씨발, 나는 분노를 억제하며 두 손을 꽉 말아쥐고 입술을 열었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소장님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무슨 일이 있었는가라며 물었다.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건 모르는 것일까. 헛웃음이 났다.


―비밀 프로젝트,
―…….
―누가, 그딴 거 하래요, 씨발.


원래 감정이 없었던 나였는데, 지금 이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익숙하지 않은 비속어들이 입 밖으로 튀아나왔다. 그에 소장님도 당황한 것 같았다. 나는 말을 이었다. 누가 그런 거 진행하래요, 누가 그런 거 억지로 강요해서 루한… 루한 저렇게 만들래요, 씨발. 네? 답 좀 해봐요. 루한이 뭘 잘못했다고, 저렇게 만들어요.

분노로 시작한 처절한 나의 발악은 점점 울음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부르짖던 내 목소리는 어느새 축축히 젖어가고 있었고 나는 말할 수 있었다. 루한, 내 모든 것인 루한을 왜 죽였어요. 나 마저도 죽게. 소장님은 조용히 내 말을 듣고 계셨다. 하지만 소장님은 그러한 말을 했다. 연구소에서는, 아무런 책임도 질 수 없다네.

연구소에서는, 아무런 책임도 질 수 없다네.

나는 그 말을 듣고 솟구치는 분노를 감당할 수 없어, 연구소를 나가겠다고 외쳤다. 소장님은 아무 말이 없으셨다. 그렇게 나의 처절한 울음은 잠겨져버렸다. 이것 또한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이 나고 말겠지. 루한의 시체는 제가 가지고 나갈 겁니다, 제가 식 치뤄줄 겁니다. 제발, 간섭 없게 해주십쇼.

소장님은 망설이더니 그러라고 했다, 소장님의 눈꼬리가 슬퍼 보였지만 나는 그에게서 경멸을 느꼈다. 나는 방으로 돌아가 당장 아무 가방에나 짐을 챙겨 넣었다. 옷가지들만 챙기면 되었기에 나는 그 옷가지들을 챙기고는 피 묻은 옷을 갈아 입었다. 그리고 나는 옷가지를 챙긴 까만색 캐리어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그것을 끌고 아까 그 영안실로 향했다. 영안실로 가는 시간 내내 나는 안타까움을 느끼고, 분노에 몸을 어쩔 줄 몰랐다. 그리고 도착한 영안실에서 나는 루한을 들쳐 업고 나왔다. 내 어깨가 무거워졌다. 나는 짐을 싫어하지만 루한은 짐이 아니다. 루한은 내 인생의 모든 것이다. 나는 그리고 루한과 처음으로 닿았던 유리문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나는 그 문을 열고 나왔다. 벚꽃은 없었다. 초라한 주차장만이 그곳에 남아 있었다. 벚꽃은 졌다. 루한을 닮았던 벚꽃은 오래 전에 져버렸다.

하지만 나는 이 연구소를 벗어난 적이 없다. 나는 갑자기 밀려 오는 두려움에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충동적으로, 충동적으로 이행하였다. 하지만 후회는 들지 않았다. 루한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떨리는 몸으로 연구소 밖으로 걸음을 떼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가야하는 길을. 그렇게 걷고 있는데 내 소식을 들은 것인지 누군가 내 앞에 차를 끌고 와서 멈췄다. 바람에 홀린 듯 걷고 있던 나는 그 장애물을 한 번 보고는 멈춰섰다. 차, 운전석에는 준면이 형이 있었다. 형은 심각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했다.


―세훈아, 일단 타.
―…….


준면이 형은 분명 그 경멸스런 연구소장의 아들인데,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꼴로 어딜 간다고, 타.


그리고 나는 바람이 마치 타라고 하는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져서 홀린 듯이 준면이 형의 차에 탔다. 피를 흘리는 루한은, 준면이 형이 하얀 천을 꺼내 덮어 주었다. 그리고 나와 루한은 준면이 형의 차에 탔다. 연구소와의, 완벽한 이별이었다. 나의 평생을 살아온, 하지만 결국에는 배신으로 얼룩진 그 연구소를 떠났다.




이것이 과거 연구소에서 있었던 나의 발악이었다.

뒷이야기를 덧붙이자면, 준면이 형은 우리가 머물 주택가의 집을 구해주었고 내게 연구소에서 준 것이라며 돈을 쥐어주고 떠났다. 아, 핸드폰도 내게 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 돈을 태워버렸다. 필요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루한은 기절을 했던 것인지, 깨어나자마자 먹을 것을 요구했다. 물론, 사람들이 먹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먹을 사람들을 요구했다. 나는, 루한을 위해 모든 것을 받칠 준비가 돼 있다. 그래도, 시작은 주택가에 놓인 전 주인이 버리고 간 개였다. 루한은, 개를 처음 먹었었다. 나는 분노에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루한은 입가에 피가 묻은 채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사람을 갈구 하는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이러한 과거를 가졌고, 루한도 이러한 과거를 가졌다. 우리는, 침체된 발악 속에 살고 있었다.



침체된 발악 D

아침이었다. 속에서 무언가 역류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밥을 안 먹은지 꽤 된 것 같았다. 나는 머리를 한 번 쓸어넘기고는 덮혀져있던 이불을 끌어 몸 위에서 내렸다. 그리고 나는 햇빛이 비치는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저 햇빛, 연구소 내에서는 보기 드물었던 저 햇빛이 나를 비춰왔다. 나와 루한을 같이 비추지 못하고 나만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늘 이것이 참 씁쓸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루한과 함께하고 싶어도 함께하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루한과 같이 밥을 먹을 수도 없었고 루한과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었으며 루한과 어디 나갈 수도 없었다, 사진조차 찍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같은 공간에 공존한다는 것과 같은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 정도가 같이 할 수 있는 것일까. 연구소에서 그 사건이 발생하기 전의 그 날들이 그립다. 루한과 같이 밥을 먹고, 같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 불행은 반복이 되겠지. 차라리 루한이 연구소에 안 들어왔다면…. 그것은 나의 이기적인 욕심으로 인해 무너진다. 루한이 연구소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살아있었겠지만, 나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 끔찍한 연구실 어딘가에서 연구를 하고 있었겠지. 나의 이기적인 욕심으로, 루한을 내 인생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너를 위해 내 모든 악을 바치잖아, 루한. 나는 그렇게 합리화를 시키고 있었다.

몸을 일으켜 세워, 숨을 고르고 루한의 방으로 향했다. 원래 루한의 존재는 죽으면 안 되는 존재이지만 불완전한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기 때문에 언제 죽을지도, 언제 폭주할지도 몰랐다. 나는 늘 그것 때문에 가슴을 졸이며 문을 열어야했다. 이미 죽은 존재한테 죽는다는 표현이 과연 어울릴지는 모르겠다, 행동이 모두 멈추는 것이라고 해야할까. 하지만 아직 루한이 살아있다고 믿고 싶기 때문에 나는 루한의 모든 행동이 멈추고 차갑게 식었을 때를 죽는다고 표현하고 싶다. 나는 루한이 죽거나 폭주하지 않고 조용히, 부디 조용히 나와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부디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마음을 네가 평생 깨닫지 못하더라도 너와 함께한다면 나는 내 모든 인생을 너에게 바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너를 사랑한다.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해도 나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었기 때문에 더 이상 되돌릴 수는 없었다. 루한의 방 문 앞에 섰다. 문 손잡이를 잡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안에 네가 살아있을까.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문고리를 돌려 밀었다. 갸르릉거리는 숨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아, 아직 살아있구나.

아직 살아있어서, 살아있어 줘서 너무 다행이야. 질끈 감았던 두 눈을 떴다. 루한은 눈을 감은 채 갸르릉거리는 숨을 고르고 있었다. 나는 이것을 수면 상태라고 칭한다. 과연 자고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지만, 그 프로젝트의 연구에 참여하지 못했던 나는 루한의 몸 상태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기본 상식선에서 준면이 형한테 들은 것들을 접목시켜 이론을 만들어 낼 뿐이었다. 나는 그래서 늘 나의 작은 실수로 루한이 부숴져버릴까 걱정이 된다. 그래, 나는 그렇다. 제대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루한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고 하는 나를 생각하니 내가 생각해도 내가 너무 우스웠다. 헛웃음이 났다. 나는 곤히 잠든 루한에게 다가가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푸석푸석했다. 나는 루한이 깰까봐 조용히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방을 나왔다. 거실로 햇빛이 밝게 비추었다. 블라인드가 쳐진 루한의 방은 그렇지를 못했는데. 나는 그 거실을 걸어 나와 대충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도 나는 까만색 옷들을 입었다. 까만 티셔츠와 까만 팬츠를 입었다. 그리고 나는 현관으로 가 까만 컨버스화를 신겠지. 공사판에서 불편하긴 하지만 내게 있는 신발은 이것뿐이라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리고 문을 열고 집을 나왔다. 철컹―, 하며 열린 현관문을 밀어 나왔다. 그리고 허한 마당을 지나 대문을 열어 완전히 집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뒤를 돌아 주택가에서 조금 더 떨어져 있는 나와 루한의 집에게 인사를 했다. 부디, 루한이 살아있게 해줘. 나는 그리고 가볍게 걸어 주택가를 내려왔다.

가벼운 걸음으로 비포장 도로인 주택가를 내려가는데, 오늘 따라 유난히 조용한 느낌이 들었다. 바람도 불지 않았다. 나는 정말 적막 속의 주택가를 걷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았다. 나 혼자 이곳에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괜히 오싹해지는 느낌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바람도 불지 않았으며 사람의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나는 빠르게 그 고요한 주택가를 가르며 내려왔다.

기계적으로 외운 그 공사판으로 가는 길에는 역시나 아무런 장애물이 없어야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그 기계적으로 외운 길로 공사판을 향해 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나는 보는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에는 조금이라도 시선이 닿는 것이 느껴졌는데 지금은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세훈은 익숙하지 못했던 것에 익숙해져 가던 찰나에 일어난 새로운 익숙하지 못한 것에 대해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훈은 기계적으로 외운 길로 공사판에, 무심히 걸어가고 있었다. 세훈의 발걸음은 안정적이지 못했지만 그것은 늘 있었던 일이니 크게 신경 쓸 것이 아니었다. 세훈은 그 불완전한 걸음걸이로 공사판에 도착했다. 매캐한 공기가 세훈의 눈을 찔렀다. 아직 기계가 돌아가는 것은 아닌지 아주 시끄러운 소음은 없었다. 세훈은 공사판 안으로 들어가 간이 건물에서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인부들이 입는 옷, 회색빛의 그 점프수트와도 같이 생긴 옷은 모래와 먼지들에 절여 있어 매캐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세훈은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챙겨 입고 나와, 자신의 구역으로 향했다. 자신의 구역에 나이 든 인부들이 세훈을 보고 수근대는 모습을 세훈은 보았다. 괜히 무언가 찝찝한 마임이 든 세훈이었지만, 곧바로 들리는 걱정 어린 목소리에 그 마음이 풀렸다.


“세훈아, 네가 사는 구역 모두 이사갔다는데, 정말 안 가도 되는 거니?”
“제가 돈이 어딨다고요, 괜찮아요.”


세훈은 늘 그렇듯 웃으면서 거절의 의사를 나타냈다. 그 흉흉한 소문의 출처가 나였다면 과연 이 사람들은 믿을까. 세훈은 그런 생각을 하며 다른 인부가 건네 주는 자재료를 받아 들었다. 여전히 나이 든 인부는 걱정 어린 목소리로 세훈에게 이사를 권했다. 거기, 경찰들도 손 쓰지 않는 동네인데 네가 진심으로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다, 세훈아. 너도 어서 이사 가. 하지만 세훈은 웃으면서 아니라고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그곳의 납치 소문, 그것에 원인이 전데 제가 왜, 가야합니까. 세훈은 이 말을 속으로 삼키면서 자재료를 운반했다. 햇빛이 달군 바닥이뜨거웠다. 바람은 불어오질 않았다. 세훈은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자재료를 운반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이 든 인부도 더 말을 하지 않고 세훈과 함께 자재료를 운반했다. 이 구역에서 일하는 모든 이들은 그리 높은 페이를 받지 못하지만, 나름 다들 웃으며 살고 있었다. 그게 겉모습일 뿐인지 나는 모르지만 왠지 그게 참 행복해 보였다. 나이 든 인부들은, 살아있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부러웠고. 젊은 인부들은 아직 희망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이 부러웠다. 세훈에겐 주어지지 않던 그것들. 세훈은 이마에 맺힌 땀을 눈물을 지우듯 팔로 닦아냈다.

그렇게 자재료를 운반하다가 쉬는 시간이 되었다. 세훈은 물 한 통을 들고 햇빛이 비치는, 세훈의 작업 구역에서 벗어난 곳을 향해 갔다. 늘 세훈이 쉬는 시간이 주어지면 가는 곳이었다. 햇빛이 쨍쨍하게 세훈을 비췄으며 세훈은 그것을 맞으며 물을 삼켰다. 세훈의 입을 타고, 그리고 목을 타고 내려가는 물은 시원했을까, 세훈이 잠시라도 쾌감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세훈은 그리고 물통을 손에 쥔 채로 햇빛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세훈을 향해 바람이 불어왔다. 진한 쇳덩이 냄새가 담겨 있는 바람, 세훈은 그 바람을 맞았다. 그리고 직감했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다가온다고. 세훈이 고개를 돌려 바람이 불어온 방향을 확인하고, 다시 고개를 올려 세훈이 있던 곳 위를 바라보자 거대한 철근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미 도망치기엔 늦었다. 세훈은 뒤로 돌아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그 자리에 멈췄다.

쾅―.


안타깝게도 철근은 그대로 세훈의 어깨에 부딪혔다. 세훈은 그것과 충돌함과 동시에 쓰려졌다. 공사판 사고였다. 잦다면 잦고, 위험하다면 위험하며 제대로 보상받을 수 없다는 공사판 사고였다. 세훈의 직감은 틀리질 못했다. 세훈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철근에 눌린 자신의 몸이 처량하다고 생각했다. 어깨 쪽의 고통이 너무 심해 세훈은 이를 악무는 수밖에 없었다. 대충 이런 기분이었을까, 루한은. 세훈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곧 세훈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왔다. 어떡해! 119를 불러! 아니 총책임자를 불러야지! 주변은 시끄러웠다.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세훈은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하지만 철근으로 인해 눌린 한 팔을 맘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곧 어느 인부가 중장비를 끌고 와 나를 누른 철근을 들어올렸다. 심하게 눌린 것은 아니라 팔이 심각하게 골절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어깨의 고통이 너무 심했다. 나는 어깨를 부여잡고 일어섰다. 모두가 나를 보고 있었다. 이런 관심이 익숙하지 않은데, 자꾸 나의 목을 졸라오는 것처럼 나를 죽여온다. 세훈은 비틀거리며 원래 구역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세훈의 작업 구역의 인부가 세훈을 부축해 세훈을 작업 구역으로 데려갔다. 모두가 세훈에게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다.

세훈은 돌아와서 오늘은 그만 쉬고 돌아가는 게 어떻겠냐는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세훈은 그것을 거절하고 자재료를 받았다. 당연히 자연스레 따라오는 고통에 세훈은 인상을 구겼다. 나이 든 인부는 세훈이 걱정되어 잠시만 더 쉬라는 호의를 베풀고 그 자재료를 자신이 대신 들어 운반하였다. 세훈은 그늘 진 세훈의 작업 구역 구석에 앉아 어깨를 움직이고 있었다. 다른 인부가 쥐어준 파스도 붙였다. 이것이 소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큰 고통에 절로 찌푸려지는 인상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어깨를 부여잡고 앉아 있었다. 아, 있다가 진통제 받아서 먹고 가야겠네. 연구소에는 정말 효능이 센 진통제가 있었는데, 세훈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금 커지는 어깨의 고통에 앓는 소리를 냈다. 연구소, 심적으로도 거부하고 육체적으로도 거부하는 것일까. 세훈은 구석에서 건물에 몸을 기대어 구역의 인부들을 바라보았다. 나도 저렇게 돌아다니고 있었겠지. 세훈은 그들을 보다가 회색의 매캐한 모래 투성이인 자신의 옷을 쳐다보았다. 그만 두고, 집에 가서 루한을 보고 싶다.

여기서 그만두면 지금까지 노동의 댓가를 받을 수 없는데, 세훈은 그런 생각을 하며 이 악물고 부여잡은 어깨를 놓고 일어섰다. 나 때문에 괜히 더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잖아, 나로 인해 불행해진 사람은 루한 하나여야 하는데. 나는, 나는 루한만을 책임질 수 있는데. 세훈은 인부에게 가 자재료를 받아 들었다. 조금 쉬어서 그런지 괜찮았다. 하지만 인부들은 모두 같이 걱정 담긴 눈빛으로 세훈을 보았다. 이런 관심, 나는 필요 없는데. 세훈은 그리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고 자재료를 운반했다. 어깨의 고통은 심했으며 이마에는 땀이 맺혔다. 세훈은 공사판에서 처음으로 다쳤다. 그것도, 크게 다쳤다. 다친 어깨를 부여잡고, 세훈은 짐을 짊어졌다. 세훈은 이 짐들은 절대 미워하지 않는다. 아까 그 철근도, 세훈은 미워하지 않는다.

그렇게 이 악물고 자재료를 운반하며, 가쁜 숨을 고르고 나니 해는 점점 져 갔다. 아직 위태롭게 떠 있는 태양, 세훈은 인부 하나가 사 온 도시락을 받아 열었다. 오랜만의 밥이었다. 점심 시간이 원래 주어지기는 하나 세훈의 작업 구역이 너무 바빴기 때문에 그 시간에도 일을 하고 있었어야 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제 일 때문이 아닐까 세훈은 미안한 감정을 가졌다. 세훈은 그 도시락을 열어 밥을 조심스럽게 입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그것을 입 안에 넣었고, 그 순간 루한의 모습이 생각났다. 세훈은 차오르는 토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도시락을 내려놓고 근처 하수구에 가 헛구역질을 했다. 루한이 씹어먹던 그것들, 내가 한 짓들. 어깨가 아릿하게 아파왔다. 머리가 어지러워 도시락을 먹지 못하고 배고파 하는 다른 인부에게 건넸다. 오늘따라 내 몸이 잘 따라주지 않았다. 기분이 나쁜 직감들이 자꾸만 적중한다.

세훈은 익숙하게 담배에 불을 붙여 그것을 입에 물고는 자재료를 운반하기 시작했다. 어깨가 아프니, 담배에라도 의지해야지. 세훈은 담배를 공사판의 인부들에게 배웠다. 인부들도 늘 담배를 피우며 일하기 때문에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세훈의 팔 위에 놓여진 자재료들, 이것들은 과연 세훈의 짐이었을까. 세훈은 그것을 들고 운반했다. 그 왔다갔다 하는 길의 길이가 너무가 긴 것 같았다. 세훈은 어지럼증을 느꼈다. 캄캄한 밤의 그 긴 그림자가 세훈의 몸을 휘감아 세훈의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세훈이 지금 몽롱하다는 이야기이다. 세훈은 마른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깨물고 자재료를 운반했다. 그리고, 세훈이 집에 갈 시간이 왔다. 세훈은 빠르게 옷을 갈아 입고 빠르게 집으로 향했다. 어깨가 욱신욱신 아파 와 어서 집에 가고 싶었다.

세훈은 여전히 비틀거리는 완전하지 못한 걸음으로 기계적으로 외운 길을 향해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깜깜한 밤의 적갈색의 기분 나쁜 퀴퀴한 주택가를 향해 세훈은 걷고 있었다. 사람들은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세훈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인기척이 없었다. 세훈은 왠지 불쾌한 느낌에 몸을 저 쪼그려트리고 걸었다. 주변의 아무것도 보지 않은 채 다시 그 주택가로 돌아가는 길, 세훈은 빠르게 주택가의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검은 차림을 한 세훈은 금방이라도 그렇게 검은 밤의 어둠 속으로 녹아들 것 같았다. 세훈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세훈은 주택가 안으로 발을 뻗었다. 유난히 고요한 밤이었다. 세훈은 주택가를 오르기 시작했다. 아직도 주택가는 고요했다. 세훈은 어깨를 부여잡고 걸음을 옮겼다. 주택가에서 조금 더 떨어진, 루한과 내가 공존할 수 있는 그 장소로 세훈은 걸음을 옮겼다. 비포장 도로의 울퉁불퉁함이 검은 컨버스화를 통해 느껴졌지만 세훈은 그것에 불만을 품지 않았다. 조금 더 빨리, 루한을 보고싶었다. 루한 자체를 그리워함도 있었지만, 나는 루한의 생사여부를 알 필요가 있다. 내가 부디 1초를 늦음으로써 죽음이 이르는 일이 생기지는 않길. 세훈은 빠르게 그 도로를 올랐다. 그리고, 그곳은 매우 조용했다.

주택가의 불쾌한 조명은 세훈을 비추고, 거리를 비췄다. 개미굴 지도 마냥 징그럽게 붙어 있는 골목길의 주택가들, 세훈은 직감으로 그곳을 걸어 집으로 향했다. 그 옹기종기 붙여있는 집들보다 조금 더, 산 위에 가깝게 떨어져있는 집. 세훈은 불쾌한 그 가로등을 뒤로한 채 바삐 걸음을 놀려 루한이 있는 집 앞에 다다랐다. 세훈은, 느리게 대문을 열었다. 해괴한 끼이익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고, 바로 보이는 마당을 지나 세훈은 현관문 앞에 섰다. 세훈은 숨을 고르며 집 문을 잡아 열었다. 잠겨져 있지도 않은, 까맣게, 아주 까맣게 어둠에 잠겨 있을 집에 대한 두려움. 세훈은 문을 잡아 끌어 그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아주 까만 그 어둠 속에서 세훈은 그런 생각을 한다. 루한이 나와서 나를 못 알아보고 물어버리면 어떡할까. 루한을 쇠사슬에 묶어둔 자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세훈은 그런 생각에 시달렸다. 자신의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였다. 루한이 후에 어떻게 살아야하는 것인지가 두려웠다. 세훈은 그런 생각을 하며 열린 문 안으로 들어온 자신의 손으로 거실의 불을 켰다. 그리고 검은 컨버스화를 벗고 루한이 있는 방 안으로, 바로 세훈은 발걸음을 옮겼다. 제발, 살아있어줘. 루한의 방 문 앞에서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슬며시 떴다. 루한이 살아 있음을 알리는 숨소리와, 무언가를 씹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아….”
“…….”
“…루한.”

벌써 다 먹었어?



세훈은 그 여자의 발 끝을 보고 있었다. 루한은 그것을 쥐어 잡고 있었다. 세훈은 허탈한 듯 웃음을 지어보이고 루한은 잠시 세훈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다시 그 여자의 발 끝을 씹었다. 세훈은 다시 아파오는 어깨의 통증에 어깨를 부여 잡고 루한에게 싱긋 웃었다. 루한에게 세훈은 그런 소리를 했다. 살아있으면, 다행이야. 다음 고기, 줄게 루한. 세훈은 루한이 있는 방문을 닫고 걸어 나왔다. 거실 한 구석에 쓰러져 있는 아줌마. 세훈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무심하게 그 몸을 들어 올리고 루한의 방으로 다시 가 문을 열어 그 아줌마를 루한의 앞에 놓았다. 그리고 세훈은 웃었다. 아줌마를 들며 어깨의 고통이 조금 더 심해졌지만, 루한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그 또한 괜찮았다.


“많이 먹어.”
“…….”
“예뻐, 사랑해.”


세훈은 루한의 주변에 놓여져 있는 다른, 루한의 먹이가 되었던 이들의 뼈 조각을 수습했다. 방 안에 있던 비닐 아무거나에 뼈 조각들을 담아 들고 루한의 방에서 나왔다. 루한을 오래 보고 싶었지만, 오래 보면 토기가 몰리는 모순스런 자신을 저주한다. 세훈은 자신이 경멸스럽다는 생각을 하며 그 뼈 조각들이 담긴 비닐을 들고 나와 세훈과 루한이 공존하는 집 뒤에 있는 나무들이 무성한 숲처럼 보이는 곳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리고 세훈은 일정한 곳에서 멈춰 거기 놓여 있던 삽을 들고 땅을 팠다. 무엇을 하는 것일까. 세훈은 어느 정도 파인 땅 위에 그 비닐을 올려 놓았다. 무덤일까, 아니면 그저 쓰레기 처리라고 해야할까. 세훈은 아무 말 없이 그 위로 다시 흙을 덮었다. 주택가는 모두가 잠든 것처럼 고요했다. 세훈은 다시 루한과 공존하는 집 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세훈은 생각했다. 루한을, 되돌릴 방법은 정말 없을까. 세훈의 어깨의 고통이 저리는, 밤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세훈은 심해진 어깨 통증에 입을 열지도 못하고 루한의 방에 다시 들어가지도 못한 채 바로 거실에 쓰러져 버렸다. 오늘은, 오늘은 밖에 캐리어를 끌고 나가기 힘든 밤이라고, 세훈은 생각했다. 이대로 아픈 어깨에 지쳐 눈이 감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세훈은 구태여 몸을 일으며 루한의 방에 다시 들어갔다. 아까 마지막으로 여자의 발을 씹고 있던 루한은, 그것을 다 먹은 것인지 여자의 발은 안 보였다. 하지만 루한이 무언가를 씹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었다. 저 입 안에 들어 있다고, 루한의 입에서 흐르는 역겨운 액체에 세훈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틀어 막았다. 그리고 루한에게 더 가까이 갔다. 그제서야 세훈은 손을 내렸다. 세훈은 애처롭게 웃었다. 그리고 루한에게 말했다. 루한, 루한, 루한


“…….”
“사랑해, 루한….”
“…….”
“네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지, 나는, 나는 루한 너를 너무.”
“…….”
“사랑해.”


그렇게 말을 하고 있던 세훈의 눈에는 액체가 고였다. 그리고 곧 그것은 그 양을 감당하지 못하고 세훈의 볼 위로 흘렀다. 이 밤에서 세훈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세훈은 풀썩, 루한의 방 안에서 쓰러졌다. 그대로 세훈은 잠이 들었다. 피로가, 쌓일만 하다. 세훈에게 오늘 밤은 길지 않았다. 세훈의 어깨는 저렇게 그냥 방치해두어도 괜찮은 것일까. ……, 루한은 루한은 이 모든 세훈의 헌신을 알고 있을까. 내일의 아침이 곧 밝아올 것이다.




이게 새로 쓰여진 화입니다.

침체된 발악 E

안쓰러운 세훈의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운다. 세훈은 한 팔로 바닥을 짚고, 누워 잠들었던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팔을 바닥에 닿아, 힘을 줌과 동시에 느껴지는 강한 통증에 소리조차 못 지르고 바닥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 세훈은 다른 팔을 이용해 지탱해 겨우 상체를 들어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현재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두리번거렸다. 세훈은 부시시한 눈을 억지로 치켜 뜨고는 블라인드 쳐진 창문 밑에 두 눈을 감고 갸르릉거리는 것을 응시했다. 아, 물론 그것은 루한이었다. 세훈은 가만히 루한을 응시했다. 한 쪽밖에 남지 못한 루한의 온전한 눈, 그 눈은 참 아름다웠다. 세훈이 만나 본 몇 안 되는 사람 중 가장 맑은 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눈은 이제 생기를 잃고 초점을 맞추지 못하지만…. 세훈은 루한의 짙은 속눈썹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데, 그것은 빛을 잃었다.



“루한….”



세훈이 조심스럽게, 루한의 이름을 불렀다. 같은 방에서 잔 것인가. 세훈은 그렇게 생각을 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위험했다. 세훈은 심호흡을 하고 다치지 않은 팔로 자리서 일어났다. 퀴퀴한 방 안의 공기가 세훈의 후각을 자극했다. 세훈은 어지러움을 극심히 느꼈다. 그 와중에도, 세훈의 시선에는 루한이 닿아있었다. 하지만, 루한은 세훈을 쳐다보지 않았다. 루한은 눈을 감은 채 거친 숨소리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세훈은 한참을 그렇게 루한을 바라보다가, 겨우 발걸음을 떼었다. 루한의 방문을 열고 나와 거실로 나왔다. 얼마 없는 옷 중 흰 티셔츠 하나로 갈아입고, 세훈은 현관으로 검은 스니커즈를 신고 나갔다. 늘 습관처럼 같은 시각에 일어나 공사판으로 향하던 세훈이었기에, 걸음을 재촉했다. 어깨가 아파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지지만, 세훈은 개의치 않아 했다. 세훈은 마당으로 나와서 대문을 열고, 비포장 도로를 걸었다.


걷고, 걷고, 걸었다. 바람이 불지도 않았으며, 사람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 아침은 고요했다. 쓸쓸한 찬 아침 공기가 세훈의 살결에 닿았다. 세훈은 하,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피어오르는 얼은 입김은 세훈의 얼어붙은 마음과도 같아 보였다. 세훈은 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기계적으로 입력된 그의 공간으로 빠져들었다. 그가 걷는 것, 그 기계적인 공간 속으로 세훈은 녹아들었다. 공사판으로 가는 길 세훈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넓은 등이 쓸쓸해보였다.


세훈이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개미굴과도 같던 그 주택가의 끝을 지나 도로의 이질감을 감수하며 도착한 공사판은 여전히 시끄러운 소음으로 가득했다. 세훈은 멍하니, 매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그 공사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인부복으로 갈아입고, 상비약을 가지고 있는 책임자에게 가서 진통제 하나를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수돗물과 함께 삼키고는 익숙하게 본인의 구역으로 찾아 들어갔다. 그렇게 넓은 공사판을 걷는 세훈이 보였다. 안쓰럽고, 그의 어깨가 패여보였다. 짐이, 짓누르고 있어보였다.



“어깨는, 어때. 괜찮아?”



나이 든 인부가 세훈에게 어깨가 괜찮냐고 물음을 던졌다. 세훈은 그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사는, 여직 안 갔고?”

“네, 전 괜찮아요.”



세훈은 어색하게, 웃는 표정을 흉내 내어 보였다. 웃음을 잃었지만, 흉측하게 웃는 모습이 얼굴 위에 생긴다. 인부는 그런 세훈의 모습을 보고 다치지 않은 어깨 쪽을 두드려주었다. 저기서, 자재료 운반해오면 돼. 세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부가 가리킨 곳으로 걸어갔다. 어깨의 통증, 진통제를 먹어도 잘 듣지를 않는 건지 고통은 그대로다. 세훈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곳에서 얹어주는 짐을 받아 들었다. 세훈에게 몰리는 관심은 어제와 다름이 없었다. 괜찮냐는 물음이 세훈의 귀에 계속 들어왔다. 세훈은 괜찮다고 말하며 웃음을 흉내 내기 바빴다.


지겹다.


세훈이 생각하는, 공사판 내의 자신의 기분이었다.


자재료를 운반 하면서, 진통제가 조금 듣는지 세훈은 끔찍했던 고통에서 조금 풀려날 수 있었다. 성치 못 한 몸을 혹사시키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고, 어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루한을 버리고 이 정도의 부상을 고칠 수 있는 큰 병원으로 갈 수는 없었다. 언제 어디서든 루한과 함께해야 했다. 사실, 지금 이렇게 공사판에서 움직이는 것도. 생활비가 아니면 그만 두고 루한과 같은 집에 있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같은 방에서 루한의 모습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내가 원망스럽다. 세훈은 그렇게 자재료를 운반하다가, 쉬어도 좋다는 소리에 박스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 철근이 떨어졌던 그 자리로 갔다.


그 자리는 어제 철근의 무게 때문인지 많이 패여있었다. 짓눌린 자국이 선명했다. 나는 어제의 사고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서서 생수 한 모금을 들이켰다. 나는,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 많이 두려웠다. 일정한 패턴이 반복되던 연구소 생활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랬던 것일까. 그래서, 이러한 생활에 적응하기도 많이 어려웠었다. 루한의 발악에 나는 어찌해야 하는 것인지 갈피도 못 잡고 방황했었다. 차라리, 연구소로 돌아가 루한을 이 상태로라도 보살펴 달라고 할까. 그런 생각조차 했다. 그 끔찍한 연구소를 다시 제 발로 찾아갈 생각을 했을 정도로 나는 고통이 심했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가 그것에 점차 익숙해지면서 지금에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루한, 그는 내 삶의 전부이다.


바람이 불었다. 쇠붙이들의 냄새, 그 냄새들이 모두 바람을 타고 실려왔다. 아아, 비릿한 이 냄새. 마치 피와도 같았다. 연구소에 있었을 때는 피를 많이 봤었는데. 의학을 공부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외과 일이 즐거웠었는데…. 그리고 그 연구소 시절에는 온전한 루한이 있었는데. 그래서 즐거웠던 것일까. 아름답게, 나를 향해 웃어주던 루한이 있어서. 지금처럼 불완전한 루한이 아닌, 완벽한 루한이 있어서, 그래서 그런 것일까…. 하지만 난 현재의 루한을 사랑한다. 과거의 루한도, 현재의 루한도 결국엔 같은 사람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며 내가 보살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루한의 진과 위의 여부를 가릴 필요는 없었다. 나는 루한을 사랑하고, 루한은 지금 내 곁에 있다. 그러니 나는, 루한을 지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생수를 한 모금 더 마셨다. 텁텁한 입안이 조금 나아졌다. 루한이, 보고 싶었다.


젊은 인부가 멀리 떨어져 있는 내게 다시 돌아오라 손짓했다. 그의 손에 점심 도시락이 들려 있는 것을 보아하니 점심을 먹으라는 소리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가볍게 뛰어 그곳에 도달했다. 그리고 점심 도시락을 배급 받아, 매캐한 먼지가 쌓인 회색의 철근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낮게 옆으로 세워진 철근에 걸처 앉아 도시락을 열어 먹었다. 일용할 양식,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밥을 퍼올려 먹었다. 입 안을 채우는 밥알. 세훈은 그것을 천천히 씹어먹었다. 맛을 음미하지는 못했다. 세훈은 그저 차갑게 불어오는 시린 바람이 닿는 것을 느끼며, 루한을 회상했기 때문이었다. 세훈은 도시락을 그렇게 천천히, 평소보다 많이 먹었다. 소화가 되지 않을 것 같았지만 루한을 생각하며 의식이 없는 것처럼 먹었더니 배부르게 먹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집에 있을 루한의 모습은 토기를 불러오기 충분하지만, 과거의 루한은… 과거의 루한과 밥을 먹던 추억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세훈은, 그것을 회상했다.


공사판 일이 재개되었다. 세훈은 자재료를 넘겨 받아, 먼 곳으로 운반을 했다.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이 오래 걸려 세훈은 성치 않은 어깨로 무게가 평소보다 두배 가까이 될 자재료를 짊어지고 다녔다. 세훈은 다시 어깨가 아픔을 극심히 느꼈다. 통증에 앓는 소리가 절로 났지만, 자신 때문에 고생을 더 할 사람들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인지 아무 말 없이 입술을 꾹 깨물고 자재료를 옮긴다. 세훈의 인상은 많이 찌푸려져 있었고, 그의 이마에서 흐르는 땀의 양은 상당했다. 노동과, 고통이 합쳐지며 세훈에게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공존하게 된 것이다. 세훈은 어깨를 부여잡았다. 하지만 노동은 끝이 나질 않았다. 세훈은 다시 자재료를 운반했다. 있다가, 책임자에게 다시 진통제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세훈은 그 노동을 마치고, 저녁 시간에 점심을 많이 먹었기에 저녁 도시락을 찾지 않고 책임자에게 찾아가 진통제를 달라고 했다. 이것은 세훈의 생활 패턴을 깨는 행동이었지만, 극심한 고통에 세훈은 그것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책임자를 찾아갔다. 하지만 책임자는 남은 진통제가 없다고 말을 했다. 세훈은, 돈을 좀 들고 나와 약을 살 걸 그랬다는 생각을 했다. 세훈은 다시 자신의 구역으로 돌아와 어깨를 부여 잡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루한은 괜찮을까. 루한은, 좀 괜찮은 것일까. 세훈은 그런 생각을 했다.


세훈의 구역의 일은 저녁 시간을 짧게 마치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세훈은 여전히 그 아픈 어깨로 더 길어진 길이의 공간을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걷게 되었다. 세훈은 짐을 지는 것을 참 싫어했는데. 하지만 세훈은 지금 이 짐을 미워하지 않는다. 짐을 받아들고, 자재료 운반을 시작했다. 무리하게 사용하는 어깨의 고통이 심각하다. 세훈은 이것이 심각함을 알고 있지만, 고칠 생각은 없었다. 루한을 위해서, 나는 희생되어야 할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는 세훈의 생각 때문이었다. 세훈은 아픈 어깨에 신음하며 그 재료들을 운반했다. 입술을 아무리 깨물어도, 고통에 찬 신음이 그 입술 새로 새어나왔다. 새훈은 이를 악물고 그 노동의 고통을 참아냈다. 밤은 이미 굉장히 어두워져 있었다.





세훈은 공사판에서의 힘든 노동을 마치고 주택가로 돌아왔다. 유난히 세훈에게 힘들었던 오늘의 노동은, 세훈의 발걸음을 더욱 지치게 했다. 느린 걸음을 재촉해, 혹시라도 죽어있진 않을까 싶은 루한과의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주택가를 오르는 세훈의 어깨는 철근이 아직까지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축 쳐져있었고, 고통이 동반하고 있었다. 세훈은 어깨를 부여잡고 인상을 찌푸린 채 그 길을 올랐다. 진통제, 진통제, 진통제…. 세훈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약을 사고 싶었다. 진통제를 이리도 다급하게 찾던 날이 얼마나 있을까. 집에 들러 돈을 가지고 약국에라도 다녀와야겠다고, 세훈은 생각했다. 세훈은 바람이 없고, 그저 시린 기운만 남은 주택가를 올랐다. 고요했다. 세훈은 루한이 살아있기를 바랬다.


대문을 열었다. 마당은 늘 그렇듯 적막함만이 머물러 있었다. 세훈은 그 마당을 지나 현관문을 열었다. 낡은 문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세훈은 그곳으로 발을 들였다. 컨버스화를 벗고, 거실로 들어왔다. 공기는 눅눅해져 있었다. 세훈은 인상을 찌푸리고는 가장 중요한, 가장 우선시 하는 루한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발, 살아, 있어, 줘. 세훈은 그런 눈빛으로 루한의 방문 앞에 섰다. 그리고, 그 문고리를 한 손으로 쥐었다. 달칵, 그리고 세훈은 그것을 돌렸다. 끼익, 세훈은 문을 열었다. 아, 세훈은 내뱉었다, 탄성을.



“루한.”

….”



세훈은 말없이 루한을 쳐다보았다. 루한은 입가에 묻은 피를 제 것이 아닌 손으로 쓸어내렸다. 손이 비틀려진다. 루한은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루한의 앞에 놓인 시체는 모든 것이 뜯겨져있었다. 온전히 남은 구석이 없었다. 아아, 벌써 다 먹은 거야 루한? 세훈은 작게 웃음 비슷한 탄성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루한은 멍하니 이 더러운 공기 속에서 자신의 먹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보면서 손을 움직여 뜯어먹지를 않으니, 분명 루한은 이 시체 속에서 먹을 모든 것을 먹었다. 여기저기 늘어진 터진 장기들과, 뼛조각들. 세훈은 비릿한 표정으로 루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리고 세훈은 자신이 간과한 사실을 깨달았다. 루한이 이것을 다 먹었다고, 그저 그 자리에 굳어 있어야 할 것이 아니라 다음 먹이를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세훈은 다치지 않은 쪽의 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캐리어를 끌고 밖으로 나가야지. 그저 루한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루한과 한 방에 공존하며 루한과의 과거를 회상하고 싶었는데. 벚꽃의 향을 맡던 그 순간을 회상하고 싶었고, 오렌지라는 이름을 지어주던 그때를 회상하고 싶었다. 하지만, 루한은 그러한 시간을 허락하기에는 실험의 오차가 불러온 욕구를 눌러담지 못했다. 세훈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바로 나가려는 듯 문 밖을 바라보다가, 루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루한.”

….”

…사랑해.”

….”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


세훈은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눈가가 뜨거워지고, 목이 메이고, 코 끝이 찡해지는 그 기분을 느꼈다. 눈물이 고이는 것 같았다. 세훈은 목이 메여, 채 그 말의 맺음을 마치지 못했다. 고맙다는 말을 목 아래로 삼켜버린 세훈은 루한에게서부터 고개를 돌려 나와 문을 닫았다. 세훈은 문을 닫고, 그 문 앞에 주저 앉았다.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 정말, 고마워 루한. 내가 살아갈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내게 삶이란 게 무엇인지 가르쳐 줘서, 고마워. 루한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게 고마워. 늘, 그냥, 모든 게, 고마워. 고맙고, 고마워. 그리고, 그리고 미안해. 미안해 루한….


세훈은 입을 틀어막고 그 방문 앞에 주저 앉아서 눈물을 삼켰다. 세훈의 눈물이 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을, 루한은 알지 못할 것이다. 세훈은 처음으로, 눈물을 터트렸다. 과거의 루한과 현재의 루한을 교차하며 바라보다가 결국 그 그늘에 목이 메여서 울음을 삼켰다. 세훈은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훈은 팔을 들어 눈물을 지워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루한에게 줄 먹을 거리를 찾기에 시간이 촉박하다. 세훈은 언제 울었냐는 듯, 차가운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세훈은 일단 공사장에서의 먼지를 털어내기 위해, 욕실로 옷들을 챙겨 들어갔다. 씻는 것조차 기억에서 지울만큼 세훈은 루한과 루한의 생계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훈은 잊혀졌던 것들 중 하나인 씻는 것을 약 일주일 만에 기억해, 그것을 이행하려고 하고 있었다. 세훈은 옷가지를 벗었다. 짐이 없어진다. 몸이 가벼워진다. 그것을 느낀 세훈은 착잡한 마음을 추스리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얼핏 비친 거울 속 세훈의 어깨는 파랗게 멍이 들어있었다.


솨아아, 샤워기를 틀고 세훈은 그 물을 맞았다. 차가운 냉수가 세훈의 머리와 몸을 적셨다. 세훈은 고요히 눈을 감았다. 연구소에서의 사고, 까만 시야 위로 떠올랐다. 그 짧은 순간의 사고. 물방울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소리가 잘게 부셔졌다. 그리고 문이 열리고, 남성 연구원과 루한이 등 떠밀려 나오는 그 형상. 세훈은 눈 위로 떨어지는 물줄기에 그 눈을 뜨지는 못 하고 고개를 저었다. 남성 연구원과 루한을 겨냥하던 그 총들. 세훈은 더욱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 오래된 예전의 사고는 아직도 한 남자의 목을 세게 조르고 있었다.


세훈은 결국 손으로 샤워기를 끄고 눈을 떴다. 세훈의 손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세훈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샴푸를 짰다. 머리를 감으면서 세훈은 그 참사를 곱씹었다. 지나간 사고, 그리고 그 사고로 인해서 비정상적인 삶을 살게 된 세훈과 루한. 단 샴푸향이 세훈의 코 끝을 자극했다. 세훈은 왠지 익숙한 샴푸 냄새에 그 샴푸통을 쥐어 들었다. 매일 이 샴푸를 쓰긴 했지만, 오늘따라 향수를 자극하는 향이었다. 세훈은 그 샴푸 밑에 쓰여져 있는 글자를 읽었다.



“벚…꽃, 향?”



벚꽃 향. 다시 봐도 그것이 맞았다. 세훈은 연구소 밖을 처음 나갔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세훈은 그 자리에서, 어지러운 벚꽃 향과 함께. 그 시절의 루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봄날의 소녀 같았던, 벚꽃과 함께였던 루한. 내가 좋다고 하던 벚꽃 빛 입술. 세훈은 다시 붉어지는 눈시울을 주체할 수 없었다. 세훈은 빨리, 빨리 자신의 눈물을 씻고 싶었다. 샤워기를 틀었다. 다시 물줄기가 세훈의 머리를 적신다. 벚꽃 향이 피었던 세훈의 머리가 빠르게 적셔져 간다. 거품들이 사라지고, 그것들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아, 쓰러지던 루한과도 같았다. 세훈은 욕조 옆 벽면을 세게 주먹 쥐어 내려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과거와 연관 되어 보였다.


루한, 나는 루한을 사랑한다. 그리고 루한은, 나를 사랑하는가. 아니, 나는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 루한은 그저 살아 있어야 한다. 루한은, 내게 삶을 쥐어줬던 사람이다. 루한은, 루한은…. 루한은 나의 하늘, 바다, 바람… 아니. 루한은,


루한은 나의 세상이었다.


루한으로 이루어졌다. 루한이 내 세상이다. 나는 나의 세상을 사랑한다. 내게 살아있다는 것을 일깨워준, 나의 세상을. 루한이 없으면 모든 것이 멈춘다. 루한이 내 삶의 주인이고, 원동력이다. 루한, 그래 루한이 나의 삶 그 자체인 세상이다. 루한은, 내 세상이다. 푸르렀던, 허나 지금은 빛을 잃은 나의 세상이었다.


세훈은 벚꽃 향기가 아직 머물러 있는 자신의 머리를 팔로 감쌌다. 보호적인 자세를 취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세훈은 무엇을 하고 있던 것일까. 곧이어 세훈은 샤워기를 끄고, 수건을 대충 찾아서 물기를 닦아내었다. 불안해하던, 사람의 눈동자. 세훈은 그 눈을 가지고 있었다. 챙겨 들어온 옷을 빠르게 챙겨입고, 수건을 욕실 안 세탁기에 집어 넣었다. 세탁기 안은 수건들과 몇몇 옷가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세훈은 욕실에서 나와서 검은색 캐리어를 잡아 끌고, 검은색 컨버스화를 신었다. 도망치듯이 현관을 빠져 나와 대문을 열었다. 시린 공기가 세훈에게 닿았다. 세훈은 한숨을 내뱉었다.


불안에 잠겼던 눈동자가 안정을 되찾았다. 세훈은 불안을 달랬다. 그리고 세훈은 캐리어를 끌면서, 평소와 같이 정처없이 걸었다. 입술이 바싹바싹 마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지를 않았다. 바람이, 세훈의 양 볼에 닿지를 않았다. 세훈은 고요히 바람이 자신을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정처없이 걸음을 했다. 세훈은 초조해하며 적막하고 불쾌한 적색의 개미굴과도 같은 주택가를 거닐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미동도 없는 공기를 보며 세훈은 의아함을 느꼈다. 고요하고 고요하다, 고요함만이 공기에 묻혀있었다. 세훈의 눈동자에는 다시 불안이 그려졌다.


세훈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바람이 불어주기를 기다렸다. 바람이 내게 다가오기를 바라며 걸음을 재촉했다. 캐리어가 끌리는 소리만이 적막한 주택가 안에서 크게 울렸다. 드르륵, 세훈의 저벅이는 발소리와 캐리어 소리만이 주택가 안을 꿰차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지를 않았다. 바람은 어디에, 어디에 존재하고 있을까. 오늘 내게 바람이 실어주는 것이 있기는 할까. 세훈은 고개를 흔들었다. 불길한 생각은 말자. 아무것과도 접촉을 하지 않고 있는 세훈은 마치 루한을 만나기 전 연구소의 세훈과도 같아 보였다.


추운 것인지, 불안한 것인지 세훈의 몸이 떨렸다. 캐리어도 바르작대듯 드르륵거리기 바빴다. 세훈은 걸음을 옮겼다. 개미굴처럼 지어진 이 주택가, 세훈은 그 사이를 비집고 바람을 찾아 다녔다. 하지만 바람을 불어오지를 않았다. 세훈은 절실했다. 세훈의 눈에 불안의 그림자가 깊게 자리했다. 세훈은 자신의 어깨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도 잊은 채 팔을 들어 마른 세수를 했다. 그제야 느껴지는 통증에 세훈은 아, 하는 신음 소리를 냈다. 고통이 동반되었다. 꿈은 아니다. 바람이, 불지를 않았다.


드르륵, 드르륵, 탁. 주택가를 울리던 캐리어 소리가 멈추고, 세훈의 발걸음도 멈췄다. 세훈은 지금 절벽 끝에 서 있었다. 그러니까, 세훈은… 주택가의 끝에 당도한 것이다. 주택가 끝이었다. 더 이상 정처없이 거닐을 공간조차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세훈을 향해 바람이 불어왔다. 그것은 주택가에서 불어온 바람이다. 세훈은 양 볼에 맞닿는 바람을 느꼈다. 적막한 주택가에서 불어온 바람은,


사람 냄새를 담고 있지 않았다.


세훈은 그것을 깨닫고 몸을 사시 나무 떨듯 떨었다. 주택가에서 불어온 바람은 사람의 체취를 담고 있지 않았다. 모두 죽은 듯 고요했던, 숨소리조차 없던 주택가에는 사람이 남아있질 않았다. 사람이, 사람이 남아있질 않았다. 세훈의 불안감과 공포감이 극대화되었다. 세훈은 캐리어를 쥔 손에 힘을 실었다. 주택가를 나가야 하는 것일까. 주택가를 나가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이 주택가를 나가면, 나는 과연 돌아올 수 있을까. 세훈은 한계에 도달했다. 주택가라는 좁은 범위 내에서, 오래 있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지만. 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지친 자신은 아무런 힘이 없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원래는, 주택가를 나와서 사람을 가져다 주는 게 옳다고, 주택가가 죽으면 그래야겠다고 세훈은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갑작스러웠고, 세훈은 많이 지쳐있었다.


세훈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다시 그 주택가 끝에 쭈그려 앉게 되었다.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고자 세훈은 몸을 끌어안았다. 진정하자, 진정하자. 세훈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세훈의 몸은 발발 떨렸다. 캐리어는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아무것도 실리지 못한 캐리어. 세훈은 두 팔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절망, 세훈은 지금 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캄캄하다. 세훈의 시야와, 세훈의 마음, 그리고 세훈이 느끼는 감정 모두가 캄캄하다. 세훈은 두 눈을 감았다. 다시금 그 사고가 세훈의 뇌리를 스쳤다.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 그리고, 피로 물든 루한과 역겨운 소장까지.


세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캐리어를 끌었다. 어깨가 아프다. 어깨가 너무 아프다. 세훈은 많이 지쳐 있었다. 세훈은 캐리어를 끌고, 감에 의지해서 주택가를 올랐다. 감에 의지해 오르는 주택가 길은 아까와 많이 달라보였다. 사람이 하나 없는 죽은 도시, 그리고 그 속에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한 채 버려져 있는 나와 루한. 지금 이 넓고 적막한 적색의 주택가 속을 거닐고 있는 게 나 혼자라고 생각하니 새롭다. 이 주택가 중에서 집 안에 존재하는 것이 루한 하나라니 그것도 새로웠다. 격리 조치가 된 것만 같았다. 아, 세훈의 발걸음이 휘청인다. 세훈은 휘청휘청 위태롭게 주택가를 올랐다. 루한을 향해서, 처음으로 빈 캐리어를 들고 그 주택가를 올랐다.


덜컹덜컹, 위태로운 걸음걸이 때문에 덩달아 온전치 못하게 끌리는 캐리어가 요란하게 소리를 내었다. 가벼운 캐리어, 세훈은 그것을 끌고 가면서 루한의 모습을 생각하고 있었다. 많이 굶주려 있겠지, 그렇겠지? 세훈은 입술을 깨물고, 주택가를 다 올라 대문 앞에 섰다. 텅 빈 캐리어와, 텅빈 세훈의 눈동자가 보였다. 대문을 열고 세훈은 그 안으로 걸음했다. 터벅터벅, 허무함이 겉으로 다 들어나게, 세훈은 행동했다. 빈 캐리어가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세훈은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세훈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까만 그 공간의 문을 연다는 것은 언제나 공포심을 동반했다. 루한이 갑자기 튀어나오진 않을까. 세훈은 초조해하며 문을 열고 그 안으로 걸음했다. 끼익, 캐리어까지 들이고. 세훈은 벽면을 툭툭 치며 불을 켜려고 했다. 그리고 불은 오래 걸리지 않아 켜졌다.


거실은 고요했다. 루한은 아직 방에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갸르릉대는 소리가 크게 세훈의 귓가를 자극했다. 세훈은 캐리어를 놓고 거실로 들어섰다. 살아 있는 거지, 루한. 그런 생각을 하며 세훈은 루한의 방 앞에 섰다. 아까 떨어트린 눈물은 말라서 보이질 않는 것 같았다. 세훈은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그리고 열어제치자 날카로운 루한의 눈빛이 보였다. 온전한 것은 한 눈밖에 남질 않았지만. 그 매서움에 세훈은 움츠려들 수밖에 없었다. 캐리어는 비어 있었고, 루한의 앞에 있던 시체는 살점이 남아있지를 않았다. 세훈은 갸르릉대는 루한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과거의 네 생각을 많이 했어.”

….”



루한에게 다가가자, 루한은 날을 세웠다. 세훈을 노려보면서, 평소와는 다른 태도를 취했다. 그에 세훈은 놀라 더 다가가질 못하고 굳어 섰다. 루한. 세훈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루한은 그저 날을 세운 채 매섭게 세훈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아, 세훈은 앓는 소리를 냈다. 어깨의 통증이 심각해졌다. 그리고 루한은 그의 신음 소리에 형언할 수 없는 큰 소리를 냈다. 마치, 다 죽어가는 누군가의 발악과도 같은 비명소리 같기도 했으며, 짐승의 포효와도 같이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에 세훈은 놀라 멍하니 루한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루한과 살아오며, 이런 적은 처음이라 세훈은 굳을 수밖에 없었다.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할 때 일어나는 현상인가. 하지만 세훈은 루한은, 루한이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며 루한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루한의 머리칼을 쓸어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루한은, 그 손길에 응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세훈의 손을 물려는 듯 입을 벌렸다. 세훈은 놀라서 그 손을 뒤로 뺐지만, 루한은 여전히 매섭게 세훈을 노려 보고 있었다. 세훈은 멍하니 루한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루한처럼 보이질 않았다. 세훈은 느리게 뒷걸음질을 쳤다. 루한이, 루한이 아니다. 세훈의 머리 속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떠돌아 다녔다. 루한이 가지고 있는 욕구는 식욕 하나, 제어 불가능하게 크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에 자제력은 없다고 들었다. 루한은 지금 많이 신경이 날카롭고, 먹을 것을 갈구하고 있었다. 세훈의 몸은 아까 주택가 끝에서처럼 바르작대며 떨렸다. 세훈은 뒷걸음질을 치다가 방의 벽면에 부딪히고야 말았다. 아아, 세훈은 루한의 눈빛을 보았다. 루한은 세훈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저, 세훈을 하나의 먹잇감으로 보고. 세훈은 빠르게 문을 열고 나왔다. 사슬을 채워두어서, 루한이 이 문을 열고 나올 일은 없겠지만 세훈은 큰 충격을 받았다.


루한이, 나의 손을, 먹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세훈은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내쉬고 고개를 흔들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은 무엇이었을까. 세훈은 고개를 숙였다. 자신은 이 시점에서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도대체 무엇을 해야, 내 세상을 지킬 수 있을까. 세훈은 겨우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고 거실에 널브러져 있는 물건들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할까.


. 그리고 그 순간 세훈의 시야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핸드폰. 준면과의 연락이 닿는 핸드폰. 세훈은 급하게 그 핸드폰을 쥐어들었다. 세훈은 그것을 열고, 급박한 마음에 벌벌 떨리는 손으로 준면의 번호를 찾았다. 다행이, 저장되어있었다. 세훈은 이제 준면에게 어떻게 도움을 청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했다. 그때, 루한의 방에서 아까 세훈이 들었던 것과 같은 해괴한 소리가 들렸다. 루한이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세훈은 급히 준면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제발 좀 받아요, 형. 세훈은 루한의 방문을 초조하게 바라보며 응답을 기다렸다.



[여보세요. 웬일이야, 오랜만이ㄷ….]

“인사는 생략할게요, 형. 형, 저 어디 살고 있는 지는 알죠?”

[어어, 그럼 알지.]

“빠른 시일 내에 이쪽으로 와주세요. 아, 올 때 살아있는 무언가. 루한이 먹을 무언가를 들고 와야 해요.”

[어? 뭐라고?]

“제 말 똑똑히 들어요. 빠른 시일 내에 우리 집으로 와서, 루한 좀 살려달라고요.”



세훈은 다급하게, 화가 난 듯이 준면에게 쏘아붙였다.



“형. 제발, 제발 부탁이니까 좀 들어줘요.”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냥, 그냥 와서 루한이 먹을 것 주고 루한 좀 돌봐달라고요. 제발, 다시 연구소로 데리고 가도 돼. 근데, 제발 실험은 하지 말아 줘. 형,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형 하나니까 하는 부탁이야. 제발, 내 세상을 구원해 줘.”

[알았어, 집으로 가라는 소리지?]

“어, 형. 그리고 많이 고마웠어. 루한과 누나 이전에 형이 전부였어.”

[왜 그래? 어디 가?]

“고마워, 미안해. 끊을게요.”



세훈은 전화를 마치고 핸드폰을 꽉 쥐었다가 그것을 다시 거실 바닥 위로 떨어트렸다. 세훈은 흉측한 울음소리를 내고 있는 루한의 방 쪽으로 다가갔다. 준면이 형을 믿어야 한다. 지금은 시간이 촉박하다. 나는 나의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 루한의 방문 앞에 섰다. 사슬이 움직이면서 내는 쇳소리가 방 내부에서 울린다. 루한은 지금 발악을 하고 있었다. 나는 방문의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아아, 루한의 매서운 눈빛이 내게 꽂힌다. 그래 루한, 잘 있었어?


루한은 그르렁댔다. 나를 쳐다보면서, 내게 달려들려고 몸부림을 쳤다.



“루한.”

….”

“나의 세상.”



세훈은 아려오는 어깨를 부여잡고, 루한을 쳐다보았다. 루한은 여전히 몸부림을 치며 발악을 하고 있었다.



“오늘 주택가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

….”

“많이 배고프지? 나의 세상.”

….”

“조금만 버티면, 준면이 형이 너를 구하러 올 거야.”



세훈은 루한에게 다가갔다. 위험한 행동이었다. 거리가 좁았다. 루한이 캬르릉거리면서 세훈을 경계했다. 세훈은 루한을 바라보았다. 둘의 시선이 맞닿았다. 둘은 눈을 맞추고 있었다. 세훈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루한을 보고 있었고 루한은 그저 날이 선 눈빛으로 세훈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훈은 그렇게 루한을 바라보다가 싱긋 웃었다. 웃는 법을 잃어버린 세훈이, 괴상한 표정도 아니고 웃음을 흉내 내는 것도 아닌 진실된 웃음을 지었다. 세훈은 싱긋 웃고는 루한에게 더 다가섰다.



“내가 주는 마지막 식량이야.”

….”

“루한.”

….”

…오늘은, 나를 먹어.”



세훈은 루한과 밀착하게 발걸음을 옮겼고 루한은 세훈에게 달려들었다. 세훈은 고요히 눅눅한 공기 속에서 눈을 감았다. 루한은 세훈의 목덜미를 첫 번째로 물었다. 세훈은, 어깨의 고통보다 큰 고통을 마지막으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세훈의 발악은 그렇게, 끝이 났다.










침체된 발악, 終.






























별로 내용은 많지 않으나, 세루 대란이 일어났을 때 불현듯 기획하고 일을 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끌다가 끌다가 이제서야 끝을 내리네요.

저의 첫 완결작입니다. 이대로 끝이냐고요? 절대 아니요. 외전을 써야죠. 근데 구상만 해두고 기록을 안 해둬서 쌩판 처음부터 구상해야 되게 생겼습니다.

지금까지 침체된 발악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버블버블, 싱라미, 둥둥, 또르르, 또라에몽, 딸기밀크, 세루의정석, 라즈베리, 디톡스, 통통, 핑구, 그대를위한잡채

암호닉 분들 모두 사랑합니다.

드디어 완결을 냈네요. 감격스럽지만 이 감격을 좀 자제하겠어.


아무튼 결론은 침체된 발악 본편 終

세루 팬픽 활성화를 위하여...!


<저 끝까지 구독료 안 달았으니까 칭찬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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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헐 통통 선댓이요ㅠㅠㅠㅠ
12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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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2
하하. 밀레님 ㅠㅠ ㅠㅠㅠ 열심히 쓴 댓글이 펑펑 날라가버리고 말았어요. 모티로 짱짱 길게 썼는데..ㅠㅠ 어쨌든 밀레님 ㅠㅠ 정말 보고싶었어요. 잘 지내고 계셨나요? 가끔씩 침악을 정주행하면서 제가 발리는 분위기에 흠뻑 젖고 갔었는데, 이렇게 침악이 막을 내렸네요. 사실 여러번 정주행 하면서 결말이 어떻게 될까 라는 상상을 많이 했었어요. 개인적으로 밀레님의 결말이 bb 인것 같네요. 제목하고도 잘 어울리는 결말 ㅠㅠㅠ 자신의 전부에게 몸과 마음을 다 내준 마지막 발악 ㅠㅠ 엉ㅇ어으 이번 편에서 세훈이가 루한이와 자신의 관계라던가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독백부분들이 너무 좋았어요ㅠㅠ 완전 제취향 ㅠㅜㅠ
정말정말 밀레님ㅠㅠ 제가 더 길게 감상평을.남기고 싶지만 시험공부하다 들어온 것이라서 ㅠㅠㅠ 다음에 중간고사 끝나면 다시 올게요ㅠㅠ 이시간까지 공부한 제가 기특할 정도네여↖(^o^)↗ 밀레님 글에 일등으로 댓글을 달다니ㅠㅜ 정말 행복합니다. 침악과 함께해서 즐거웠어요.

12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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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그 댓글 날아감의 슬픔 저도 잘 아는데요 날라갔다가도 다시 길게 써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좋은 피드백 보고 기운이 납니다ㅠㅠ 저도 보고싶었어요 잘 지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통통 님도 잘 계셨나요ㅠㅠ 보고싶었습니다... 이렇게 막을 내니 시원씁쓸합니다 정말... 그래도 외전 열심히 써야겠죠ㅠㅠ 결말만을 바라보고 쓴 글인데 결말을 제일 못 쓴 것 같아서 매우 슬퍼요ㅎ... 세훈이의 그 혼란스러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하다가 독백을 어수선하게 했는데ㅎ... 좋았다면 다행이에요ㅠㅠ 시험 공부 열심이 하시고 시험 잘 보고 오세요! 감사합니다!
12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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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3
헐이거므야뭔진몰라도엄청난금픽인거가트니일단슼슼 시간날때봐야긋다
12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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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4
으아 진짜 분위기 짱인거같아요ㅠㅠㅠㅠㅠㅠ 금손이시네요 진짜 짱짱! 혹시 브금좀 알려주실수있나요..ㅜㅠ?
12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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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스웨덴세탁소의 버려진 것들입니다! 재밌게 읽으셨다면 다행이에요ㅠㅠ
12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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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5
헐ㅜㅜ내가 이런 금픽을 지금 발견하다니ㅜㅜ저 지금 한번에 끝까지 다 읽었어요ㅜㅜ세훈이의 희생,사랑,헌신 진짜 모든게 느껴지는 글이였어요ㅜㅜ마지막에 결국 자신의 모든걸 주는 세훈이가 그렇게 안쓰러울 수가 없네요ㅜㅜ외전도 내신다니 전 감사합니다ㅜㅜ이대로 끝나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아요ㅜㅜ혹시 암호닉 받으시나요?아직도 받으신다면 레퐁으로 신청하고 갑니다.
12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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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정주행해주셔서 감사해요ㅠㅠ 보잘 것 없는 픽을... 세훈이가 참 안쓰럽죠ㅠㅠ 루한이도 너무 안쓰럽고... 외전을 준비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튼 너무 감사합니다 레퐁 님 기억할게요!
12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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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6
헐.....................어째서 이런 픽을 지금에서나 본거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외전 내신다니 감사드립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12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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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ㅠㅠㅠㅠㅠ재밌게 읽으셨다면 감사합니다 제가 더 감사해요ㅠㅠㅠㅠ
12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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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7
헐..이제 발견한게 너무 안타까운..ㅠㅠㅠㅠ세루가 너무 안쓰럽네요..ㅠㅠ..외전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2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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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8
이것저것 검색해보다가 너뮤ㅠㅠㅠ이런멋진픽을 발견하게 되서 진짜 너무 영광이에요 작가님ㅠㅠㅠㅠㅠㅠ한시간 내내 읽으면서 가슴이 먹먹해서 제가ㅠㅠㅠㅠ진짜 울 뻔 했어요ㅠㅠㅠ원래 댓글 잘 안 남기는데 이 글은 진짜ㅠㅠㅠ인 남기고 가면 실례가 될 정도로 제가 너무 몰입해 잘 읽어서 댓글 남겨봐요ㅠㅠ세훈이 헌신적인 사랑도 그렇지만 놓질 못하고ㅠㅠㅠㅠㅠ루힌일 붙잡고 마지막까지 자신보단 우선으로 하는게ㅠㅜㅜ진짜 세훈이의 세상에 루한이 전부란 게 실감이 나서 둘 다 너무 안쓰럽고ㅠㅠㅠ아댓글쓰면서 되새기다가 결국 울었ㅅ어요 저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신알신...몇달 전 글지만 혹시 몰라 신알신하고가요ㅠㅠㅠ
12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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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헐 인티도 잘 안 들어오고 있었는데 이런 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ㅜㅜ 이런 댓글을 받으니 너무 감격스러워서 으어ㅓ어ㅡ 감사해요 독자님 내가 너무 고마워요 유유유유유유 세훈이의 전부가 루한이고 그런 루한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던 건데 ㅠㅠ 세훈이의 세상은 오로지 루한으로 차 있었고 죽어서라도 그 세상을 지키고 싶던 어휴 진짜 감사합니다 ㅠㅠ 울지 마세여 ㅠㅠㅠ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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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9
밀레님!!!!!!! 홈에서 비밀글 안풀리길래 계속 기다리고있었는데.....여기서 연재를 하셧ㅅ었군요!!!!!!!! 내리다가 익숙한 제목떼문에 놀랐어요!!!!대받.... 홈에 올리실 생각은 없는건가요....??ㅠ.ㅠ.....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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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0
밀레님아...ㅠㅠㅠㅠ저 밀레님과 친분 있는 니니...ㅠㅠㅠㅠㅠㅠ홈이 없어져서 어디로 가야할지 길을 잃었어요..☆★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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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 저 진짜 간만에 로그인을 했는데 홈이 펑 폭파 되었어요 또륵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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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아니요 저는 기억을 잃은 자예요 ㅎ......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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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1
홀...어떻게하징....ㅠㅠㅠㅠㅠ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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