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층 방에 딸린 작은 발코니 커튼을 가볍게 걷어냈다. 그러자 방 가득 환하게 들어차는 따뜻한 햇살이 나의 눈을 따갑게 만듦과 동시에 어두운 방 안의 경계를 이루다 사라졌다. 나는 그에 맞게 큰 기지개를 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냥 단지 따뜻한 햇살과 잘 어우러지는 싱그러운 봄 내음을 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의 바람과 달리 내 코를 자극하는 것은 싱그러운 봄 내음이 아닌 썩은 시체 냄새와 더불어 시끄럽게 으르렁거리는 좀비들의 울음소리였다. 한순간 나의 기분을 확 상하게 만든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 미간을 찌푸려버렸다. 그와 함께 나는 발코니 난간을 손바닥으로 팡팡 두드리며 발길 닿는 이곳저곳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있을 좀비들을 향해 허공에 대고 시끄럽다며 소리쳤다.
분명 조용해질 것이라 자만하며 했던 행동이지만 나의 상상과는 달리 좀비들은 오히려 더 시끄럽게 울어대며 집 앞까지 몰려드는 역효과를 불러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란 채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 아주 제대로 미쳤네. "
벽에 몸을 숨기고 있던 나의 귀로 굵직한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나는 살며시 고개를 내밀어 하나밖에 없을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나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고개를 두어 번 저어 보이는 김태형이었다. 내 방의 커튼을 걷었을 때만 해도 김태형의 방 커튼은 쳐져 있었는데, 활짝 걷어진 것으로 보아 김태형은 방금 잠에서 깨어난 게 분명했다.
아침마다 내게 자신을 보여줄 때 웃통을 까고 있었던 김태형은 여느 때와 같이 구릿빛 피부를 자랑했다. 그는 지금 막 옷을 입으려는 것인지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티셔츠 한 장을 집어 들고는 주섬주섬 자신의 몸에 끼워 넣었다. 김태형은 잘 때 웃통을 까고 자는 버릇이 있다. 저런 바람직한 버릇 덕에 나 또한 그런 김태형을 보고 개의치 않아 했다.
저런 모습을 내게 보여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까 말이다.
자신에게 알맞은 티셔츠를 입고서는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그 손길만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에 자신의 방에서 나의 방으로 가볍게 넘어오는 김태형이었다. 아, 우리 집과 태형이네 집 사이는 조금 가깝다. 아니, 사실 무지 가깝다. 안 그래도 가까운 집 사이에 각자 방에 딸려 툭 튀어나온 발코니까지 있으니 얼마나 가깝겠나. 나는 여자라 김태형의 도움으로 그의 방으로 넘어가지만, 김태형을 비롯한 웬만한 남자들은 나의 방까지 거뜬히 넘어오니 그만큼 집 사이가 가깝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특이한 우리 집과 김태형네 집 구조 때문에 우리 둘은 서로의 집에 넘나드는 것이 일상이었다. 갑작스럽게 발코니를 통해 제 집 마냥 내 방으로 들어온 것도 모자라 침대까지 차지해 누워버리는 김태형 때문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 야, 네 방으로 안 꺼질래? "
잘 놀다 평소와 다른 사뭇 다른 표정을 짓는 모습에 나는 김태형의 얼굴을 천천히 바라보다 그의 이름을 부르려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자 먼저 선수쳐 내 말을 막는 태형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놀랍게도 작은 욕지거리였다.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다가 갑작스러운 행동을 보이니 적응이 되지 않는 건 당연했다.
나는 김태형의 욕지거리를 듣다가 그 말이 곧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는 고개를 까딱거렸다. 곧 숨을 죽이고 발코니 너머로 보이는 김태형의 방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조금은 조용해진 공간의 흐름을 집중하니,
' 쿵, 쿵. '
김태형의 방문이 미세하게 진동을 보이며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소리를 냈다.
" 태형아. "
" 한동안 조용하더니. "
" 김태형. "
나는 한 번 더 김태형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그러자 아까와는 다른, 확연히 날카로워진 김태형의 눈빛이 나를 향했다. 김태형의 날카로운 눈빛을 피하지 않고 계속 마주 보며 그의 팔목을 살짝 쥐어잡으니 그제야 굳어진 표정을 서서히 푸는 김태형이었다. 일정한 속도로 계속 쿵쿵거리며 울려 퍼지는 소리에 나는 그 소리의 원인이 곧 김태형네 어머니 일 것이라고 굳게 확신했다. 김태형이 보고 싶은 것인지, 아님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인지, 김태형의 어머니는 항상 저런 식으로 가끔, 방문을 다소 거칠게 두드려댔다. 초반 김태형은 저 상황을 쉽게 적응을 하지 못했었지만 이제는 제법 많이 익숙해져 있는 듯했다.
처음 이 사태가 발생하고 정부가 전국에 내린 공문으로 전국 곳곳에 있는 학생들과 직장인은 시급히 귀가 조치가 떨어졌었다. 그저 평범한 같은 대학교 같은 과 학생이었던 나와 김태형은 모두가 그렇듯 영문도 모른 채 얼떨떨하게 집에 돌아가야 했다. 바로 옆집이었던 우리는 항상 각자의 집에 들어가기 전 발코니에서 보자는 말을 끝으로 헤어지고는 했다. 여느 때와 같이 발코니에서 보자는 말과 함께 각자의 집으로 들아갔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나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샤워를 한 뒤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말리고 있었을 때였다. 갑자기 발코니 쪽에서 우당탕하는 큰 소리가 나더니 어느 순간 김태형이 나의 방으로 넘어와 있었다. 처음에는 김태형이 나를 놀래키려 일부러 그런 것인 줄 알고 놀란 마음에 온갖 새끼란 새끼는 다 찾으며 그를 쫓아내려고 했지만, 평소에 보이던 장난기가 묻어있기는커녕 무언가에 홀린 듯 바들바들 떨고 있었기에 김태형에게 타박을 주던 행동을 멈춰야 했었다. 헤어지기 전, 발코니에서 보자며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던 그 모습과는 너무 다른, 너무나도 이상한 김태형의 모습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울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인지 묻고 싶은 것은 많았으나 나는 김태형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니, 물을 수 없었다. 그 후로 나는 어머니는 왜 안 보이냐며, 어디 계시냐며 딱 한 번 물어봤을 때 서서히 굳어가는 김태형의 표정을 아직까지 잊을 수가 없다. 마침 딱 그 타이밍에 뉴스에서는 좀비에 대한 속보가 화산 폭발하듯 줄줄이 보도되고 있었고 그때도 지금처럼 그 방문이 쿵쿵거리며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게 울려 퍼지는 소리를 애써 못 들은 척하려는 김태형을 보고 그제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때 일이 마음에 걸린다. 물론 아직까지도 말이다.
" 김태형. "
" 왜 불러. "
" 그냥. 배고파서. "
" 참나, 가지가지 하네. "
" 밥 먹자. 어차피 곧 밥 먹을 시간이잖아. "
" 아, 진짜? "
어느새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다. 밥 얘기에 다시 빙구 웃음을 지어 보이며 손뼉을 치는 김태형의 모습에 나도 덩달아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가끔이지만 김태형이 몸만 컸지 아직도 애가 분명하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나는 김태형에게 방에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내 방에서 나와 1층 거실로 내려갔다.
마지막 계단을 밟고 거실 바닥에 발을 딛자 따뜻한 온기 하나 없이 먼지만 날리는 썰렁한 분위기에 괜스레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바로 눈앞에 자리 잡은 식탁을 바라보니 여행을 떠난 뒤로 아직까지 소식 없는 부모님이 그리워졌다. 갑자기 울컥하려는 마음을 바로잡고 이것저것 먹을 것이 있을 부엌 찬장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다소 높은 자리에 붙어있는 찬장을 올려다보며 까치발을 들고 손을 쭉 뻗었다.
손잡이가 손에 닿을 듯 말 듯 버둥거리고 있으면 내 뒤로 손 하나가 쑥 올라와 손쉽게 찬장 문을 열었다. 뻗은 손이 괜히 민망하여 팔을 거두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김태형이 보였다. 김태형은 나의 얼굴을 보자마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 내가 이럴 줄 알고 혹시나 해서 내려와 봤더니, 정말 헤매고 있었네. "
" 혹시나가 사람 잡았네. "
" 야, 넌 언제 키 클래? "
" 죽고 싶으면 계속 입 놀려라? "
나를 놀려대는 김태형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세게 내려치자, 손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감싸고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아픈 시늉을 하는 김태형이었다. 그런 그의 장난에 나는 또 속아 괜찮냐고 안절부절못하면 김태형은 질끈 감았던 두 눈 중 하나를 살며시 뜨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 행동을 눈치챈 내가 다시 한 번 이를 악물고 한번 더 가슴팍을 내려치면 이번에는 호탕하게 웃어버리는 김태형이었다. 덩달아 나까지 웃어버렸다.
나는 찬장을 올려다보며 그 안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어느 정도 꽉 차 있을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텅텅 비어있는 찬장을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다른 찬장도 뒤져보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김태형이 거실에서 먹을 것을 가지고 올라와 내 방에서 같이 끼니를 해결했었다. 씻을 때 빼고는 거실로 내려올 상황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우리 집 찬장 사정을 잘 알 리가 없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은 했었는데 그날이 이렇게, 너무나도 빠르게 다가올지는 몰랐다.
" 문제가 생겼어. "
" 응, 뭔데? "
" 점점 식량이 바닥을 보이고 있어. "
" 에? 벌써? "
" 응. 누구 덕에. "
온 집안을 다 뒤져 찾은 것이라곤 라면 한 봉지, 참치 캔 5개, 그리고 과자 몇 봉지가 다였다. 한 달 동안 김태형과 우리 집에 있던 식량을 나누어 먹은 결과였다. 내가 워낙 집 밖으로 나가는 걸 귀찮아하기 때문에 집은 항상 먹을 것으로 넘쳐났었다. 하지만 이런 좋지 못한 상황에 김태형의 일까지 덮쳐버려 자신의 방 밖으로 나가길 꺼려 하는 그 때문에 쌓여서 줄어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음식들이 빠르게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김태형은 음식 말고도 자신의 집 방 밖에서 해야 하는 것들은 모두 우리 집에서 처리를 하였다. 씻거나, 화장실을 간다거나, 밥을 먹는다거나. 또 저번에는 나한테 손 벌리기 싫다며 방 밖으로 나가는 것을 시도했다가 영영 이 세상과 작별 인사를 하기 직전까지 갔기에 지금은 아예 내 집이 김태형의 집이 되어 버렸다.
아무튼, 말이 길었다. 결론은 이제 우리 집에는 먹을 것이 다 떨어졌다는 소리다. 이때까지 아무 탈 없이 잘 지내왔는데 이제 와서 이대로 굶어 죽을 수는 없었다. 어디선가 먹을 것을 구해야 했다. 예를 들어 김태형네 집을 가야 한다던가, 밖으로 나가야 한다던가, 또 김태형네 집을 가야 한다던가, 밖으로 나가야 한다던가 말이다.
내가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고 또 언젠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우리는 밖으로 나가야 했다. 지금도 좀비들이 시끄럽게 우는 통에 소름이 끼칠 지경이지만 정말 굶어 죽을 수는 없었다. 나와 김태형은 집에서 싹쓸이 한 음식들을 전부 들고 2층으로 올라왔다.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음식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그거 아니지? "
" 네가 생각하는 게 뭔데? "
" 밖에 나가자는 거. "
" 잘 아네. "
" 미쳤다. 난 안가, 아니 못해. "
" 야, 남자 새끼가. "
남자 새끼가, 라는 말 한마디에 김태형의 눈썹이 심하게 꿈틀거렸다. 그럼 너 굶어 죽을 거니? 검지를 쫙 펴서 김태형의 이마를 콕콕 찌르며 묻는 그 순간이었다.
' 탕- '
강렬한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순식간에 장악했다. 귓가에 울려 퍼지는 이 소리는 누가 들어도 총성이었다. 한적한 동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소리였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김태형은 가뜩이나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 또한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그렇게 말없이 한참 동안이나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다시 한번 탕, 하는 큰 소리와 함께 좀비들의 울음소리가 크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시끄럽게 지저귀며 허공으로 흩어지는 새떼의 날갯짓 소리까지. 김태형은 발코니로 나가더니 집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런 김태형의 뒷모습만 한참 바라보고 있자 어느 순간 그의 입이 떡하니 크게 벌어져 있었다. 왜, 뭔데. 왜 그러는데. 나의 물음도 김태형은 들은 것인지 못 들은 것인지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한참을 그러다 갑자기 나를 바라보고 자신의 두 눈을 비비며 한다는 말이,
" 야, 언제부터 우리나라가 총기 소지 국가가 됐냐? "
"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
" 김여주, 아무래도 내가 헛것을 보나 봐. "
김태형은 발코니에서 내 방까지 빠른 걸음으로 걸어 들어오더니 내 손목을 급하게 붙들고 발코니로 끌고 나가갔다. 발코니로 나온 김태형은 나를 툭툭 치더니 이내 검지를 쭉 뻗어 한곳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김태형이 손가락으로 콕 집은 곳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머리색이 휘황찬란한 한 남자가 권총 하나로 좀비 여럿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나는 아까 전 김태형이 내게 보여주었던 표정을 똑같이 지으며 그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총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그 손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선을 그리듯 감탄을 자아내는 행동에 눈을 떼지 못하고 저 사람이 우리의 구조대다, 라고 생각하는 찰나,
그 남자와 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