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윤기의 연애일기
2015년 2월 24일
집에서 뒹굴거리며 따분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때 종소리와 함께 네가 갑자기 찾아왔다. 안녕.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넨 너는 캐리어를 끌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김남준?"
내 물음에 너는 정말 자연스럽게 몇 달만 재워달란다. 무작정 찾아와서 하자는 소리가 재워달라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왔다. 괜찮죠 형? 내 머리에 손을 올리고 하는 말에 손을 탁 쳐내며 대꾸했다. 맘대로 해.
2015년 2월 26일
너와 같이 산지 삼일 째. 집안에 남아나는 물건이 없어졌다. 함께 아침을 먹고 부랴부랴 출근준비를 하는 나를 도와주겠다며 설거지를 시작한다. 몇 분은 물소리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들리더니 쨍그랑, 큰 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넥타이를 매던걸 멈추고 달려갔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깨진 접시 앞에 서 있는 네가 보였다. 저 마이너스 손한테 설거지를 맡긴 내가 잘못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너의 엉덩이를 뻥 차 주방을 떠나게 한 뒤 깨진 유리 파편을 치웠다. 미안한지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너를 한번 째려보고 쓰레기통에 파편들을 버렸다. 죄송해요. 낮무룩 해져서는 사과하는 그가 귀여워 까치발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키만 더럽게 커요 씨발. 현관으로 나서려는 내 손목을 그가 붙잡았다.
"아, 왜. 너 때문에 늦었.."
"단정한 민윤기가 이러면 안되죠."
네가 손을 들어 매다만 넥타이를 단정하게 정리했다. 그 특유의 향이 코끝을 스쳤다. 가슴이 간질거렸다. 쳇. 발을 들어 그의 정강이를 차버렸다. 악! 소리를 내며 무너지는 그에게 어린놈이 까불기는. 한마디를 내뱉고 집을 나섰다.
회사에서 내가 꽤 아끼는 후배 전정국이 내게 뜬금없이 물었다.
"선배 요즘 기분 좋은 일 있어요?"
"아니, 딱히. 왜?"
"표정이 좋아서."
표정이 좋다고? 정국이 말에 나는 문득 너를 떠올렸다. 여기서 그 새끼 얼굴이 왜 떠올라. 도리도리 고개를 저어 네 생각을 떨쳐버린 나는 갑자기 머리를 스쳐가는 생각에 정국에게 되물었다.
"그나저나 너, 짝사랑한다던 외국인은 어떻게 됐어?"
"아 슈가요?"
"어."
아직도 짝사랑중이죠. 정국이 날 보며 씁슬하게 웃었다. 힘내. 정국의 어깨를 두번 툭툭 쳐준 난 업무를 하기 위해 내 지정 자리에 앉았다. 검은 모니터 화면에 내 얼굴이 비쳤다. 고개를 돌려 이리저리 살펴봤다. 표정이 좋아졌나? 난 아무리 봐도 똑같아 보였기에 관두고 컴퓨터를 켰다. 할 일이 산더미였다.
2015년 3월 9일
추위는 점차 물러가고 봄 냄새가 성큼 다가왔다. 집에 있는 DVD로 그와 영화를 보려했다. 책장 가득 꽂혀 있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보고 네가 물었다. 영화 매니아에요 형? 고개를 끄덕였다. 밖을 싸돌아 다니는걸 싫어하는 성격 탓에 집에서 할 일을 찾다보니 만만한게 영화였다. 기계를 하나둘 모으다보니 거실 한 구석엔 작은 영화관이 생겨버렸다. 그가 긴 손가락을 뽐내며 책장을 뒤적였다. 그의 쭉 뻗은 검지 손가락에 걸린 DVD. 장르가 뭐냐는 내 물음에 알고 보면 재미없다며 무작정 영화를 튼다. 뭐, 공포 영화 빼고는 상관 없는 나였으니 불만 않고 보기는 개뿔이 씨발. 골라도 공포 영화를 처 골라온 그 때문에 저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분명 이 새끼는 내가 공포 영화를 못본다는걸 알고 있을 터였다. 욕을 한바탕 퍼부어줄 생각으로 입을 열었으나 큰 손이 입을 틀어막아 소리는 입 안에 머물렀다.
"무서우면 오빠한테 기대 윤기야."
지랄도 병이다 씨발아.
라고 큰소리를 외쳤던 나는 정말 매우 많이 후회중이다. 징그러워도 정도가 있지 저건 얼굴이 거의 뭉개져 형태를 알아 볼 수도 없는 정도였다. 귀신새끼가 나올 때마다 그는 화면 대신 내 반응만 쳐다보고 있다. 꼴에 자존심은 지킨다고 눈도 가리지 않고 꿋꿋하게 봤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몸은 통제 할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너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세상 어떤 갓난아이보다도 더 환한 웃음이었다. 개새끼.. 결국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버리고 그 뒤에 숨어서 봤다. 그의 등은 정말 든든했다.
영화를 본 후 너는 잠깐 나갔다 온다 했다. 영화의 후유증 때문에 나는 자존심이고 뭐고 널 붙잡았다. 거의 울먹거리는 나를 달래며 결국 집을 나섰다. 이불을 꽁꽁 싸매고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네가 언제 올지, 오직 너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딩동, 경쾌한 종 소리가 집안의 침묵을 깼다. 나는 불에 데인 듯이 튀어올라 재빨리 달러가 현관문을 열었다. 너라는 내 기대와는 달리 전정국이 서 있었다. 양 손에는 검은 봉지가 들려 있었다. 봉지를 흔들며 정국인 웃었다.
"무슨 일이야?"
"오랜만에 한잔 하자고 왔죠."
신발을 벗고 안으로 몸을 옮긴 정국이 봉지를 내려놓자마자 화장실로 뛰어갔다. 저 새낀 오자마자 화장실이냐. 혀를 쯧, 차며 봉지에 들어있는 소주병을 하나둘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안주거리라도 찾을 생각으로 선반을 뒤지는데 정국이 화장실에서 요란스럽게도 나왔다.
"아 쌀 뻔 했다."
"다 커서 그러고 돌아다니냐."
"그럴수도 있죠. 근데 선배."
"왜."
"누구랑 같이 살아요? 저번에 왔을 땐 칫솔이 하나였는데."
"김남준이랑 며칠 전부터 살게 됐어."
아, 찾았다. 오징어포를 꺼내고 테이블로 가려던 나는 정국의 차갑게 식어버린 얼굴에 그대로 굳을 수 밖에 없었다. 정국인 유일하게 나와 김남준의 사이를 알고 있었다. 설마 김남준이 덮칠까봐 걱정돼서 저러는건 아니겠지.
"걱정마. 아무때나 발정하는 새낀 아니니까."
"언제부터 살았는데요?"
"어?"
정확히, 언제부터. 테이블로 돌아가려던 내 어깨를 붙잡고 정국이 매섭게 쏘아붙였다. 처음 보는 그의 표정에 당황한 나는 말을 더듬으며 답했다.
"이, 이주 전?"
이주.. 중얼거린 정국이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듯 했다. 심각한 그의 표정에 팔을 붙들며 웃어보였다. 왜 그래~ 표정 풀어~ 응? 정국이는 날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다시 물었다. 행복해요? 너무나 맑은 눈에 거짓말을 할 생각조차 못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니 그래요. 하며 한숨을 내쉰다. 그리곤 의자에 걸쳐두었던 외투를 들고 현관으로 향한다. 어디가? 다급한 내 물음에 정국이 뒤도 안돌아보고 답한다.
"한잔 할 기분이 싹 날아갔어요. 나중에 하죠 선배."
탁. 현관문이 열렸다 닫혔다.
전정국이 그렇게 나가고 네가 들어왔다. 시무룩해져있는 날 보더니 무슨 일이 있었냐 물어왔다. 다정한 너의 말에 나는 전정국과 있었던 일도 다 잊고 넓은 가슴에 안겼다. 너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날 안아줬다. 너의 그 무심함이 난 좋았다.
2015년 4월 1일
너와 같이 산지 한달 하고 좀 넘은 시간이 지났다. 나른한 오후에 우리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무료하게 TV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너는 채널을 돌리다가 공포 영화가 나오는 영화 채널에서 멈췄다. 한 대 쥐어박아주고 싶었으나 지루했던 참에 재밌겠다 싶어 가만히 놔두었다. 생각보다 별로 무섭지 않은 탓에 나름 즐기며 보고 있었는데 네가 내 팔을 덥석 잡았다. 그리곤 표정을 굳히고 느즈막이 말한다.
"내가 아직도 김남준으로 보여?"
"장난치지마라. 노잼."
내 단호한 말에도 다시 한번 묻는다.
"내가 아직도 진짜 김남준으로 보여?"
"그럼 넌 내가 아직도 민윤기로 보이냐?"
내 물음에 너는 굳혔던 얼굴을 피고 쌍커풀 없는 눈으로 너답게 웃었다. 네가 웃는 얼굴에 덩달아 나도 웃었다. 웃음이 잦아들때쯤 네가 양손으로 내 얼굴을 붙잡더니 쪽, 짧게 입맞췄다. 이, 이 미친..! 얼굴로 피가 쏠리는 걸 느끼며 뭐라 한마디 퍼부어주려는 찰나 네가 그 긴 검지손가락을 두터운 입술에 갖다 대었다. 쉬잇.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에 입을 다무니 네가 다정하게 눈을 맞추며 나른한 오후에 딱 맞는 나긋한 목소리로 물어온다.
"우리 여행 갈래요? 단 둘이서."
"이것도 거짓말인건 아니지?"
내 의심스런 눈초리에 너는 다시 한번 깊게 입을 맞추었다. 내 숨이 막힐 때까지 키스한 너는 벌개진 눈을 나와 맞추며 말했다.
당연히 아니죠.
드디어 너와 약속한 날이 왔다. 마지막으로 짐 가방을 확인한 나는 지금까지 써왔던 일기를 읽은 후 마지막 장을 폈다.
2015년 4월 24일
꽤 오래 여행을 다녀올 것 같다. 아마 당분간 일기 쓰기는 그만둬야 할 것 같다. 내가 지금까지 써왔던 일기를 보니 창피해졌다. 집을 나서기 전에 이 일기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둬야 할 것 같다. 아, 김남준이 밖에서 부른다. 이만 오늘은 여기서 마쳐야 할 것 같다. 난 이제 떠난다. 김남준과 함께 영원히.
나는 너와 영원히 함께다.
"그거 들었어? 옆집 총각 죽었다는 거."
"어머머, 무슨 일이래? 진짜야?"
"그렇다니까! 내가 직접 봤다니까?"
"정말?"
"그래. 얼마 전에 어떤 남자가 찾아왔는데 문을 엄청 두드리지 뭐야. 내가 시끄러워서 집에 없는 거 아니냐고 물어보니까 아니래. 분명 있을거래. 그러더니 힘이 엄청 강했는지 문을 그냥 부셔버리더라?"
"어머 웬일이래! 그래서?"
"집으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옆집 총각을 들쳐 업고 다급하게 나오는거야. 그리고 날 부르더니 구급차를 불러달래. 진짜 얼굴이 완전 창백해져선."
"응, 응."
"그래서 나도 덩달아 다급해져서 구급차를 불렀지. 남자는 계속 옆집 총각을 흔들면서 깨우려는거야. 그래서 내가 가까이 다가가 보니까 왜, 산 사람치곤 전혀 생기가 없었어. 아무리 기절했더래도."
"아이고.."
"이상해서 더 자세히 보니까 숨을 안쉬고 있더라고. 깜짝 놀래서 숨을 안쉰다고 말했더니 남자는 울면서 아니라고 살아있다고 애처롭게 말하는거야. 근데 어쩌겠어. 이미 죽었는걸. 구급대원들이 와서 죽었다고 말할때서야 수긍하더라. 살면서 그런 절망스런 표정은 처음이었어."
"안타까워라.. 근데 옆집 총각은 뭣땜에 죽은거래?"
"약물 중독이라더라."
"어머머, 마약?"
"응. 집에서 엄청난 수의 마약이 나왔어."
"뭔 일이래 이게!"
"근데 이상한건 방에 무슨 금방이라도 떠날 사람처럼 캐리어에 짐을 다 싸놨더라고."
"자기가 죽을 줄 몰랐던건가?"
"모르지. 그나저나 참 안됐어."
"그러게말이야.."
두 여인이 대화를 마치자 TV에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옆집 총각의 소식이 나왔다.
[다음 소식은 정말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OO구에 혼자 사는 민 씨가 약물 중독으로 인해 사망한 사건입니다. 약 2개월 동안 약을 복용한 사실이 밝혀졌는데요. 최초 발견자는 같은 회사 동료인 전 씨이며……]
전정국의 연애 일기
2016년 3월 9일
오후 3시. 나른한 시간에 집에서 뒹굴거리며 따분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때 종소리와 함께 네가 갑자기 찾아왔다. 안녕.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넨 너는 캐리어를 끌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윤기 선배?"
내 물음에 너는 정말 자연스럽게 몇 달만 재워달란다. 무작정 찾아와서 하자는 소리가 재워달라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왔다.
"괜찮지?"
"전 좋은데.. 집에 들어오기전에 손 좀 줘봐요."
손? 되물으면서도 얌전히 내놓는 손에 피식 웃으며 주머니를 뒤적였다. 손에 잡히는 시계를 꺼내 얇고 흰 네 손목에 채웠다. 네 입술처럼 강렬한 붉은색의 끈이 너의 흰 피부와 제 주인을 찾은 듯 정말 잘 어울렸다.
"생일 축하해요."
윤기 선배, 아니 나의 슈가.
윤기의 손에 채워진 붉은 시계는 9시 1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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