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안의 공기는 처음 봤던 아침과 달리 무겁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가는 동안 가볍게 몇 마디 더 주고받기도 했고.
아침처럼 또 어색함에 갇혀서 질식사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진짜 다행이었다.
그리고 바로 앞에 있다던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얼마 가지 않아 차는 다시 멈췄고
"도착했어요. 여기 좋죠?"
김석진 씨는 그의 질문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걸 보고서야 차에서 내렸고 아까처럼 내 쪽으로 와 차 문을 열어주었다.
완전 차문남이네. 차 문 열어주는 남자.
"아, 고맙습니다."
나 머리 부딪히지 말라고 내 머리 위에 손까지 올려서 보호해 주는 걸 봐! 이게 설렘 포인트가 아니면 뭐냔 말이야!
내 마음속은 폭발하기 직전일 정도로 난리가 아니었지만 겉으로는 애써 감추며 혼자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밀어 넣었다.
"이쪽 길은 좀 긴데 평평하고 저쪽 길은 짧은데 좀 가팔라요. 어느 쪽으로 가볼래요?"
김석진 씨는 손가락으로 이쪽 저쪽을 가리키며 내게 길을 설명했고 나는 당연히
"그럼 편한 길로 가요."
최대한 김석진 씨를 오래 볼 수 있는 평평한 길을 택했다.
"갈까요?"
김석진 씨는 웃으며 먼저 걸음을 옮겼고 난 주인을 쫓는 강아지처럼 뒤에서 쫄래쫄래 따라갔다.
놀러 가기 좋다고 느낄 만큼 선선한 날씨에 예쁜 공원 풍경에 잘생긴 남자까지. 뭐가 더 필요하겠어.
'방토 산책로' 라고 적힌 팻말을 지나 쭉쭉 뻗은 나무들 사이를 지나 예쁘게 조성된 인공 호수에 다다랐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반짝거리는 물과 호수 정중앙에서 튀어 오르는 분수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고 나는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와, 분수다."
"예쁘죠?"
호수 가장자리에 둘러진 쇠울타리로 다가가 그 너머로 고개를 내미며 구경을 하고 있자 어느새 김석진 씨가 내 옆으로 다가왔고
"네. 진짜 예뻐요."
저 말만 남긴 채 나는 약 3분 동안 분수쇼가 끝날 때까지 김석진 씨를 까맣게 잊었다.
어쩔 수 없다. 분수 진짜 오랜만에 봤단 말이야.
분수쇼가 끝나고 아쉬운 마음에 차마 발걸음은 못 떼고 제자리만 서성거리자 그런 내 모습을 본 김석진 씨가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러나, 싶어 내가 쳐다봤지만 김석진 씨는 그 뒤로도 한참을 웃었다.
나 때문에 웃는 건가, 싶어 내가 아까 했던 행동을 계속 생각해봤지만.
음... 전혀 모르겠다.
"이름씨 분수 되게 좋아하시나 봐요."
"아... 너무 오랜만에 봐서요. 반가운 마음에..."
"예쁘더라고요."
"그죠?"
김석진 씨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싶어 손뼉을 치며 말하자 김석진 씨는 내게 보는 사람 마음이 다 떨리게 하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분수 말고요. 성이름 씨요."
엄청난 설렘 폭탄에 심장이 잠깐 멈췄다 다시 뛰는 걸 느끼며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이자 김석진 씨가 내 옆에 다가와 내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좀만 더 가면 산책길 끝나요. 분수도 봤겠다, 이제 가볼까요?"
"네..."
쑥스럽고 민망하고 부끄럽고... 아무튼 20년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심쿵에 괜히 머리만 빗어대며 발걸음을 옮기는데 아까와는 달리 바로 옆에서 걷는 탓인지 김석진 씨의 향이 코에 확 끼쳤다.
향수 뿌리나? 아니 근데 무슨 남자가 향까지 이렇게 좋아.
마음 같아선 옷자락을 붙잡고 향을 맡아보고 싶었지만 그건 변태 같아 보일 테니 그냥 숨을 깊게 들이쉬는 걸로 만족했다.
숨 쉴 때마다 훅훅 들어오는 남자다운 향이란... 설레 죽겠네.
그 뒤로 뭔 얘기를 꺼내야 할지 몰라서 고개만 푹 숙이고 걷는데 김석진 씨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내 앞에 섰다.
뭐지?
뭔가, 싶어 고개를 살짝 들자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김석진 씨의 얼굴이 보였고
"왜 그러세요?"
"고개를 계속 내리고 계시길래 어디 아프기라도 하신 건가, 해서요."
말을 마친 김석진 씨는 내 이마와 볼에 손을 대며 어디 안 좋아요? 라고 물었다.
지금 손이... 손이... 이게 다 그쪽 때문이잖아요. 이 사람아...
그나저나 이 분 아픈 거 되게 싫어하시나 보네. 뭐만 하면 안 좋냐고 물어봐.
"아니에요. 괜찮..."
그쪽이 아까 한 말 때문에 이런다고 할 수가 차마 없어서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대답을 하던 그때,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울렸다.
"아, 잠시만요."
전화가 올 사람이 없는데 엄마인가, 싶어 전화를 꺼내 받으니
"여보세요?"
"이름 학생?"
주인집 아주머니의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웬일이시지.
"네. 아주머니. 왜 그러세요?"
"지금 밖이야?"
"네."
"어떡하나. 빨리 와봐야 할 것 같은데."
듣는 사람까지 급해지는 아주머니의 목소리에 단순한 일이 아닌 것 같아 무슨 일이냐며 물으니
"학생 집 보일러가 터진 것 같아. 지금 보일러 밑이 물바다야, 물바다. 어떡하나 이거..."
..... 헐?
"아, 알겠어요. 지금 바로 갈게요."
전화를 급하게 끊고 김석진 씨를 보자 통화 내용이 들린 듯 심각한 표정의 김석진 씨가 보였다.
"어떡하죠. 제가 지금..."
"괜찮아요. 빨리 가요."
참. 생각해보니 거기 김석진 씨네 집이었지.
서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급하게 차로 돌아가 집으로 가는 동안 김석진 씨는 내게 괜찮을 거라며 애써 위로해주었다.
"이름씨, 그럼 오늘 집에서 못 잘 텐데 주변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요?"
차가 신호에 걸려 잠시 멈춰있는 틈에 김석진 씨가 물었고 오늘은 집에 가서 자야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집에 가서 자면 돼요."
"여기서 가까워요?"
"네. 별로 안 멀어요."
"다행이네요."
김석진 씨는 다행이라며 내게 웃어 보인 후 다시 차를 출발시켰고 5분쯤 지났을까. 드디어 집 앞에 도착했다.
도착하기 무섭게 차에서 내려 계단을 뛰듯 올라가자 집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계시는 아주머니가 보였고
"아주머니!"
"이름 학생! 이거 어째."
아주머니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열린 방문으로 잔뜩 고인 물이 보였고
"헐..."
집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가자 거실마저 얕은 물로 차있는 모습이 보였다.
"기사님께 전화를 해봤는데 내일이나 오신다네. 오늘 여기서 못 잘 것 같은데... 우리 집에서라도 잘래?"
아주머니는 내가 다 미안해질 정도로 미안해하셨고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애써 괜찮은 척 대답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주머니가 잘못하신 것도 아닌데요, 뭐. 오늘은 집에서 가서 자면 돼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라며 계속 걱정하시는 아주머니를 겨우 진정시키고 밑으로 내려오자 김석진 씨가 앞에 서있었고
"아들? 아, 지금까지 우리 아들이랑 같이 있었던 거야? 말을 하지-"
아주머니는 내 어깨를 톡 치며 나와 김석진 씨를 번갈아 봤고 그에 당황한 나를 본 김석진 씨는 아주머니를 집 안으로 들여보내셨다.
"이름 씨, 많이 당황했죠?"
"아, 아니에요."
말은 아니라고 했지만 분명 어색한 손짓하며, 말 더듬은 거 하며 대놓고 티가 나는 행동에 어색하게 웃어 보이자
"집에 데려다줄까요?"
김석진 씨가 차를 가리키며 물었고 더 신세를 질 수는 없다는 생각에
"아니에요. 버스 타고 가면 금방인데요, 뭐."
과장된 몸집으로 어디 있는지 정확히 기억도 안 나는 버스 정류장을 떠올리며 대답하자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김석진 씨가 재차 괜찮겠냐며 물었고 그렇게 한참을 괜찮다고 설득시킨 끝에
"그럼 조심히 가요. 도착하면 전화하고요."
라며 집 안으로 들어갔고 문이 닫힘과 동시에
"흐어어....."
긴장감에 다리가 탁 풀리는 걸 느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걸음도 마음대로 못 걷고 하루 종일 내숭 떠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렇게 바닥에서 한참을 진정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계단 위로 올라갔다.
집에 갈 때 가더라도 기본적인 건 챙겨가야지. 나 배터리 충전해야 되는데. 충전기도 물에 젖은 거 아니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집 안으로 들어가 내일 아침까지 당장에 필요한 물건을 챙기고 있는데
"이봐요, 성이름 씨."
창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바로 앞에서 들리는, 오랜만에 듣는 정전국 씨의 목소리가 들렸고
"왜요."
"보일러 터졌다면서요."
살짝 놀리듯이 말하는 목소리에 괜히 욱해서 정전국 씨를 보자 창틀에 팔을 얹고 턱을 괸 채 생글생글 웃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지금... 웃어?
"웃겨요, 이게?"
"아뇨. 전혀."
말은 아니라고 하면서 왜 표정은 그렇게 밝은 건지.
어이없음에 헛웃음을 치며 창문을 닫으러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자
"아, 차가워."
어느새 창문 앞까지 흘렀던 물에 양말이 잔뜩 젖어버렸다.
양말 젖기 싫어서 일부러 물 안 고인 쪽만 골라 다녔는데...
다 젖은 양말을 내려다보며 축축함에 인상을 쓰자 정전국 씨가 고개를 빼꼼 내밀어 우리 집 안으로 들이밀었고
"그럼 오늘 어디서 잘 거예요?"
"집에서요."
"세 정거장이라면서요."
"네. ..... 그걸 어떻게 알아요?"
세 정거장인 건 어떻게 안 거지?
바닥만 내려다보던 나는 정전국 씨의 말에 고개를 들어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고
"저번에 말해줬잖아요. 딸기 먹은 날."
아 참.
그날의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아... 잊고 살았는데.
그걸 여태 기억하고 있었구나, 싶어 의외의 기억력에 그를 새롭게 느끼고 있을 즈음
"뭐 하러 그래요. 우리 집에서 자요."
"알았.... 네?"
밥 먹었냐고 물어보듯 자연스럽게 말하는 정전국 씨의 말에 나도 모르게 알았다고 대답할 뻔했다.
내가 진짜 여자로 안 보이나? 대체 뭐라는 거야?
"허, 참나. 저 여자거든요."
"아, 여자였죠. 그래서요?"
정전국 씨의 말에 잠시 멍하게 있던 나는 손을 들어 올려 가슴을 가리며 그를 이상하게 쳐다봤고
"뭐 하는 거예요, 지금? 애써 생각해줬더니만. 싫으면 말고요."
그런 내 행동에 정전국 씨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창문을 닫아버렸다.
저 인간, 진짜 미친 거 아냐?
"내가 왜 거기서 자. 완전 변태 아냐?"
창문을 닫으며 한참 정전국씨 욕을 하다 집에 간다고 말할 생각으로 엄마한테 전화를 걸자
"응- 딸-"
"엄마. 나 오늘 집에 가서 자도 돼?"
"응- 안돼-"
..... 엥?
"왜?"
"오늘 집에 엄마 친구들 와. 너 있으면 괜히 불편하니까 오지 마."
"아빠는?"
"모임 갔어. 오늘 안 들어온대."
아니 이게 무슨...
"너는 엄마가 집까지 구해줬는데 뭐 하러 집에 와. 다음에 와. 다음에. 끊는다-"
그렇게 허무하게 끊긴 전화에 이미 꺼진 화면만 멍하니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어 창문을 바라봤다.
지금 가서 아주머니께 집에서 자겠다고 하기에는 분명 아주머니가 김석진 씨에 대해 물어볼 게 뻔했다.
그럼 나는 불편하고 어색한 마음으로 웃는 것 밖에 할 일이 없겠지.
그럴 바에야 차라리...
아니 근데 정전국 씨는 남자잖아. 그래도 나를 여자로 안 보.... 아니지. 혹시 모르는 거잖아.
남자랑 여자가 한집에 았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날 리가... 있지. 그래. 혹시 모르잖아. 정말 마음에서 우러난 친절일 수도 있지.
저녁 내내 김석진 씨에 대해 듣는 것보다는 편하지 않을까?
그래도 남자 혼자 사는 집인데...
그렇게 혼자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나는.
"이봐요. 정전국씨. 나 거기서 좀 자도 돼요?"
불안하지만 편안한 밤을 택하기로 했다.
갑자기 열린 창문에 깜짝 놀란 정전국 씨가 나를 빤히 보다 웃음을 터뜨렸고
"왜 웃어요! 이게 웃겨요? 예?"
"여기서 안 잔다면서요."
"내가 언제요! 싫다고는 안 했어요!"
그렇게 대답 없이 한참을 웃는 정전국씨를 가만히 보고 있으니 시간이 지나도 끊이지 않는 웃음소리에
"재워줄 거예요, 말 거예요?"
기다리다 지친 내가 먼저 묻자 정전국 씨가 겨우 웃음을 멈추고 손을 까딱거렸고
"알았어요. 재워줄게요. 건너와요."
그의 말에 밖으로 나가려 하자
"어디가요?"
"건너오라면서요."
"이리 건너와요. 창문은 괜히 있나?"
정전국 씨가 창문을 툭툭 건드렸다.
저기... 창문은 그러라고 있는 게 아닌데요.
"진심이에요?"
"그럼요?"
"그냥 평범하게 문으로 들어가는 게..."
"평범하게 사는 건 재미없어요. 빨리 와요."
정전국 씨는 진심이었는지 베개 두세 개를 가져와 창문 밑에 깔았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지금 재밌자고 거기로 들어가라는 거야, 뭐야. 난 길고 얇게 살고 싶은데.
"처음 왔을 때 계란으로 내 이마 때렸던 때처럼 와봐요. 금방 오겠고만."
아니 왜 또 그때 얘기를 꺼내고 그런담.
불안하긴 한데 저렇게 진지하게 내밀어진 손을 보니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수백 번의 내적 갈등 끝에 이렇게 되나, 저렇게 되나 달랑 30cm인데 뭔 일이라도 있겠나, 싶어 짐을 잔뜩 챙긴 가방을 정전국 씨에게 내밀었고 내 가방을 받아 바닥에 내려놓는 정전국 씨를 보며 심호흡을 크게 한 후 창문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 아!"
생각보다 짧은 거리에 쑥 들어간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해 내 몸은 정전국 씨네 집 바닥과 그대로 부딪혔고 아까 깔아둔 베개 덕에 다른 곳은 괜찮았으나 내 머리는 바닥과 부딪혀버렸다.
이거 진짜 아프네. 아... 내 머리...
머리를 싸맨 채 바닥에 드러누워있자 정전국 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난 한 쪽 손으로 부딪힌 부분을 문지르며 다른 쪽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훅 들어올 줄 몰랐는데. 괜찮아요?"
"안 괜찮아요."
조금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묻는 말에 안 괜찮다고 대답하곤 머리를 문지르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자 집안이 눈에 들어왔고 어째 우리 집보다 깨끗한 것 같은 모습에 의외라고 생각하고 있을 즈음
"근데. 양말은 좀 벗어줄래요?"
정전국씨가 잊고 있던 축축한 내 양말을 가리켰고 양말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이 내가 서 있는 쪽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아, 미안해요."
내가 급하게 양말을 벗어 우리 집 창문으로 휙 던졌지만 이미 바닥에 고인 물에 최대한 미안한 표정으로 정전국 씨를 보자 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보던 정전국 씨가 바닥에 깔려있던 수건을 가져와 발로 바닥을 슥슥 닦았고
"화장실 저쪽이에요. 물 더 흘리지 말고 가서 씻고 와요,"
문 하나를 가리키며 말하는 정전국 씨의 말에 급하게 화장실로 들어갔다.
손도 씻고, 발도 씻고, 깔끔해진 기분으로 화장실에서 나오자 거실 한복판을 차지한 소파 위에 드러누워 텔레비전을 보는 정전국 씨가 보였고
"어? 뭐야. 정전국 씨도 이거 봐요?"
뭘 보나, 싶어 슬금슬금 다가가 화면을 보니 내가 요즘 보고 있는 드라마가 나오고 있어 반가운 마음에 정전국 씨를 쳐다보자
"성이름 씨도 이거 봐요? 잘 됐네. 같이 봐요."
누워있던 정전국씨가 일어나 자기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고 나는 불과 몇십 분 전, 남자 혼자 사는 집은 위험하다며 불안해하던 건 까맣게 잊고 정전국씨 옆으로 쪼르르 달려가 소파 한 쪽을 꿰차고 앉아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그래. 저 여자가 저럴 줄 알았다니까요."
"나는 저 남자가 제일 문제라고 생각해요. 저게 뭐 하는 짓이에요."
"저런 게 남자 망신인 거죠. 저런 남자는 만나면 안 된다니까요."
"저거에 넘어가는 여자도 문제에요. 대체 왜 저러는 거예요?"
그렇게 한참을 드라마에 빠져 얘기를 하다 보니 우리 사이가 생각보다 가깝다는 것도 잊은 채 서로 얘기를 하기 바빴고 드라마가 끝나자 둘 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쳐다봤다.
"성이름 씨. 배 안 고프..."
"정전국 씨. 집에 먹을 거..."
고개를 돌리자 바로 앞에 있는 서로의 얼굴에 놀라 소파의 양 끝으로 떨어진 우리는 갑자기 어색해진 분위기에 눈치만 보며 손만 꼼지락거렸다.
아니 왜 하필 그때 옆을 봐가지고... 왜 하필이면...
차라리 김석진 씨 얘기를 듣는 게 나을 뻔했나...
이런저런 생각에 정전국씨 눈치만 보고 있는데
"이봐요."
"ㄴ, 네?"
"짜장면 좋아해요?"
갑자기 짜장면 얘기를 꺼내는 정전국 씨의 말에 고개를 돌려 정전국 씨를 보자 전단지를 흔들어 보이는 정전국 씨가 보였고
"좋아하죠."
"그럼 이거 시켜 먹을까요."
짜장면 2개에 탕수육과 서비스 만두가 추가된 세트 메뉴를 가리키는 정전국 씨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정전국 씨는 미련 없이 주문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세트 1번 주문하려고요. 주소가..."
전화를 하는 정전국씨를 보다 불과 두 시간 전, 초밥을 배 터지게 먹었던 나 자신이 기억났다.
아니 근데 나 두 시간 전에 밥 먹었는데.
... 아, 모르겠다. 우리 엄마가 먹는 게 남는 거랬어.
"근데 정전국씨. 돈은 어떻게 해요?"
"어... 그냥 제가 낼게요."
심지어 공짜라면 당연히 먹어야지.
이미 내 머릿속에는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는 건 관심 밖이었다.
아주머니 집에서 안 자기로 한 건 오늘 내 신의 한수였어. 장하다. 성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