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가 철벽을 쳐요 /채셔
13. 끝이 다가온다면, 기꺼이
무슨 정신으로, 어떻게 병원에 온지 모르겠다. 아저씨에게 몇 번이고 아프다 말했지만, 아저씨는 받아주지 않았고. -아마 장난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기댈 데 없어진 나는 동아줄 잡듯 정국에게 전화를 했던 것 같다. 비밀번호를 가르쳐준 뒤, 쓰러지듯이 잠에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너무 깊이 잠에 빠져들어서 그런지, 정국이 몇 번을 깨웠는데도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여차저차 오게 된 곳이 이곳, 병원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옆자리에는 아저씨가 아닌 정국이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왔는지 모를 지민도.
"으으……."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세상이 빙빙 도는 기분이었다. 시야가 잔뜩 흐려진 틈에 간호사 몇이 내게 다가왔다. 환자 분, 무리하시면 안 돼요. 누워 계세요. 간호사의 말에 몸을 뉘이고, 정국과 지민에게 물었다. 아저씨는…? 정말 아프긴 한 모양이었다. 잠깐 입을 뗐는데도 형편 없이 목소리가 갈라지는 걸 보니. 불안한 눈빛으로 묻자 지민은 뒷머리를 긁적였고, 정국은 입 꼬리를 당겨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내가 뭘 바란 걸까. 여자친구가 생기면 그 책임감 때문에라도 한눈을 팔지 않을 사람인 걸 제일 잘 아는데. 머릿속을 끈질기게 파고드는 벌레 같은 통증에 나는 눈을 감았다. 순간 분위기가 저 바닥 끝까지 침전되는 듯 했다.
"정국아."
"…으응?"
"나,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뭔데요? 정국이 이불을 끌어올려주며 물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하얀 형광등이 눈에 담기는 순간, 더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에 눈을 감았다. 집 비밀번호 알지? 열이 채 다 빠져나가지 못해 아직도 뜨거운 머리를 한 번 부여잡으며 정국에게 물었다. 정국은 바로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정국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짐 좀 다… 싸줄래? 정국은 벙찐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는 정국이 제일 잘 알았으니까. 짝사랑의 종말이라는 거, 어떤 느낌인지 제일 잘 알 법한 사람이 정국이니까. 적어도 제 주인이라던 여자를 짝사랑하고 있는 정국에게는 더 그랬을 거다. 누나…… 하고, 정국은 이불을 꽉 잡았다. 뒤에서 지민이 입술을 꾹 깨무는 게 보였다. 이런 결말은 정말 원하지 않았는데.
"정말 짐 다 챙겨요?"
정국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마음을 다 꺼내보였는데도 아저씨가 여자를 사귀는 거라면, 아저씨의 대답이 무엇인지는 너무 명확하다. 길을 잃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떠나는 것 밖엔 없다. 여동생도 아닌데 이렇게 불알친구처럼 애매한 동생으로 남아있자면, 아저씨의 인생에 민폐가 될 게 뻔하니까. 이제까지 그랬다. 아저씨의 여자친구들은 모두 하나같이 나를 미워했다. 나와 멀어지라고 하면, 아저씨는 여자친구에게 화를 내고, 혼을 내고, 심지어 헤어지기까지 했었다. 그러니까… 내가 있으면 끊임없이 민폐가 될 테니, 아저씨의 인생에서 빠져주는 것.
아저씨는, 봐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른답게 굴라는 아저씨의 말처럼, 나는 어른이 되기로 결심한다. 끝이 온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테니, 이번에는 그 결심이 무너지지 않길. 다시 열이 오르는 기분이다. 쌕쌕거리며 고열의 숨을 내뱉자, 정국과 지민이 크게 간호사를 불렀다. 귀에서 소음이 웅웅대다 결국 흩어져버린다.
'여기, 열이 너무 많이 나요!'
'해열 주사 처방해드릴게요.'
'그러니까, 어른처럼 굴어.'
'나 진짜 아파….'
애초부터 연인도, 피가 섞인 사람도 아니었는데. 멀어지는 거, 어렵지 ………않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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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인생은 직진이라고 했어요
허겁지겁 병원에 도착했을 때에는, 나에게 전화를 수십번 했던 이는 온데간데 없고 지민만이 남아 의자 앞에 앉아있었다. 천천히 다가가자 지민은 자리를 비켜주었다. 꼬맹이는, 고열에 지친 건지 잠들어 있었다. 아주 깊이. 지민이 내 어깨를 두어 번 쳐주었다. 어떻게 왔어, 너. 지민에게 지친 투로 묻자, 지민은 차분히 제가 온 경로를 설명해주었다. 정국이 꼬맹이를 데려왔고, 꼬맹이의 번호를 뒤지다 내게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아서 계속 찾다보니 제가 아는 이름이 있어 다행히 전화를 걸었다고. 혼란스러워 하는 나를 바라보던 지민은 천천히 고민하다 무언가를 말했다. 형, 음료수라도 사올게요. 기다려요. 어딘가로 천천히 걸어가는 지민을 잠시 바라보다, 나는 꼬맹이의 이불을 끌어올려주었다. 삐쭉 나와있는 손도 조심스레 이불 안으로 넣어주고. 얼마나 땀을 흘렸으면 머리가 온통 젖어 있었다. 그때, 꼬맹이가 심각하게 아프다는 걸 알아챘어야 했는데. 기댈 데 없이 혼자서 울고 있었을 꼬맹이에게 미안해져서, 나는 꼬맹이의 머리를 정리해주다가도 몇 번씩 고개를 떨굴 수 밖에 없었다.
"미안해."
"………."
"미안해, 내가."
하아, 하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꼬맹이의 얼굴도, 달려오면서 깨물고 뜯었던 내 손톱도 말이 아니었다. 땀에 젖어 붙어있는 머리칼을 세심히 떼어내고, 멍하게 꼬맹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내 다가온 지민이 내게 따뜻한 음료수를 건넸다. 음료수를 받아들고, 괜히 꼬맹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지민은 의자를 끌고 와 내 옆에 앉았다. 형, 왜 이제 왔어요. 지민의 물음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친구, 만나고 왔어. 내 말에 지민은 아휴, 하고 안타까운 추임새를 내고, 음료수를 한 번 길게 들이켰다.
"형."
"…어."
"왜 형답지 못하게 그러고 있어요."
사실은 정곡을 찌르는 말에 지민을 바라보았다. 정신이 확 드는 기분에 지민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지민은 웃고 있었지만, 동시에 웃고 있지 않았다. 지민의 말에,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꼬맹이를 바라보았다. 지민은 팔짱을 끼고 가만히 내 대답을 기다렸다. 헤어지면 영영 못 보는데, 그걸 어떻게 견뎌. 시작 안 하는 게 낫지.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지민에게 말했다. 지민은 입 꼬리를 밑으로 축 내리고 나를 지켜본다. 그리고 다시 음료수를 쭉 들이키고, 내 등을 툭툭 쳐주었다.
"형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네요."
"………뭐?"
예상하지 못한 말에 당황한 눈길로 쳐다보자, 지민은 내 쪽으로 몸을 돌려 말했다. 정국이, 여주 씨 짐 싸러 갔어요. 나는 지민의 말에 입을 천천히 벌렸다. 정국이 말 들어보니까 한국 영영 떠날 것 같던데. 나는 떨리는 숨을 내뱉고 꼬맹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걸 몰랐다. 이제껏 내 손으로 키워오고, 같이 자라왔던 앤데 그거 하나를 몰랐다. 제가 가지고 싶은 건 꼭 가지고야 말던 그 골 때리던 성격. 반대로 갖지 못하면 미련까지 모두 떼어버리고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는 성격. 헤어질 때에 영영 못 보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어지지 않으면 영영 보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나는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걸까.
"형, 원래 인생은 직진이라고 했어요."
"………."
"여주 씨 잃을 거 아니면, 삽질 그만 하고 전부 제자리로 돌려놔요."
형 지금 하는 연애도, 형답지 않은 거 알잖아요. 지민의 말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이제야 하나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 제자리를 찾은 기분이다. 나는 벙찐 얼굴로 꼬맹이의 얼굴을 쳐다보다… 고개를 숙였다. 왜 그것 하나를 몰라서, 이까지 상황을 벌려놓은 걸까. 지민의 손이 내 등을 툭툭, 두어 번 두들겼다. 하아, 하고 떨리는 숨을 내뱉자 지민은 자리를 비켜주었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다. 그리고 지독하게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 이불을 꽉 쥐었다가 꼬맹이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내가, 내가 미안해. 진작에 알아채지 못해서, 상처 줘서 미안해. 하아, 하고 한숨을 쉬곤 지민이 줬던 음료수를 들이마시려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발신자를 확인했다.
[여자친구]
…여자였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전화를 받았다. 소리를 치거나 울먹일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여자는 차분하게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나에게 어디인지를 물었고, 그곳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나는 미안하다고 말했고, 여자는 괜찮다고 말했다. 여자의 말에는 어떠한 당황스러움도, 그리고 비참함도, 그렇다고 원망스러움도 담겨 있지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 단조로울 것 같은 톤으로 여자는 내게 몇 번이고 괜찮다는 말을 건넸다. 어쩌면 모든 것이 정갈하게 정리되어가는 시점에서, 관계의 끝을 미리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죄를 저지르고 있다, 정말.
여자는 얼마 되지 않아 도착했다. 병원 앞 카페에서 만난 여자는, 저를 만나주지 않을 줄 알았다며 푸스스 웃어보였다. …세상에서 제일 슬픈 얼굴을 하고서는. 아무 말 없이, 죄송하다고 말하자 여자는, 아까 찍었던 사진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아, 네. 하고 핸드폰을 꺼내어 여자에게 보낼 사진을 클릭했다. 보내주려고 클릭을 하려는 순간, 나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내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억지로 웃어서 그런 건지 오히려 우스꽝스러워진 표정에 나는, 당황하며 '눈을 감았다.'는 변명을 대며 보내주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죄송하다고 말하며 황급히 핸드폰을 넣는 나를 보던 여자는, 입술을 깨물며 웃으려고 노력했다.
"뭐가 그렇게 죄송해요."
"……."
"아까 느꼈어요, 저는 안 되겠다는 거."
"……우연 씨."
"정말 도박이었거든요, 가지 말라고 했던 거."
"…………."
"윤기 씨는 가고, 식어있는 음식 보니까 알겠더라구요."
"……,"
"아, 이 관계는 답이 없는 거구나."
여자의 말에 아무 것도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여자는 윤기 씨, 하고 조용히 불렀다. 손 한 번만 줘볼래요? 여자의 말에 나는 그 의도를 채 알아채지 못하고, 손을 내밀었다. 여자는 내밀어진 손을 잠깐 보다, 내 손을 잡고 몇 번 흔들었다. 악수였다. 의외의 행동에 여자를 바라보자, 여자는 웃으며 말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우연 씨."
"…우리 그만 해요, 이제."
여자의 말에 나는 벙쪄, 가만히 여자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됐어요, 멋진 윤기 씨랑 연애도 해봤고. …전 이제 다른 분이랑 행복한 연애 할래요. 여자는 서글프게 웃었다. 정말 웃음이 예쁜 여자였다. 첫만남과 같이, 여자는 수줍은 미소도 예뻤지만 울음이 묻어나는 미소까지도 빛이 났다. 남들이 보면 제가 비운의 여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찬 거예요, 윤기 씨. 여자는 최대한 밝게 이별을 말했다. 나는 눈을 감고, 다시 한 번 죄송하다고 말했다. 해줄 말이, 그것밖에는 없었다.
"셋이 아픈 것보다는 하나가 아픈 게 낫죠."
"제가 정말……."
"저도 행복한 연애 할래요. 윤기 씨도 알죠?"
"…………."
"윤기 씨, 저랑 연애할 때 완-전 나쁜 놈이었다는 거."
그러니까 저 이거 한 번 뿌리고 끝낼래요. 여자는 물을 흔들어 보였다. 처음부터 드라마처럼 시작했으니, 끝도 드라마처럼 끝내자고 말했다. 여자의 말에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 웃음에 비로소 여자도 웃었고… 나는 눈을 꼭 감았다. 눈을 감은지 얼마 되지 않아, 내 얼굴에 물이 뿌려졌다. 차가운 물의 온도에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턱 끝으로 뚝뚝 흘러 내리는 물을 소매로 닦으며 여자를 바라보자, 여자는 웃으며 일어섰다. 좋아하는 여자 분이랑 잘 되길 빌어요. 그동안 행복했어요. 여자는 예의를 갖추며 인사를 했다. 나는 일어서서 여자에게 인사했다. 여자가 끝을 내지 않으면, 내가 끝을 낼 관계였으니까. 차라리 이게 제일 나은 시나리오였다. 여자를 한 번 꼭 안아준 뒤, 택시 승강장으로 배웅을 나가주었다. 이제 내 손으로 정리할 관계 하나가 남았다. 이제, 이제 아플 일 없이…… 행복할 일.
여자를 보내고 서둘러 응급실로 뛰어 들어갔다. 꼬맹이가 누워 있던 자리로 들어갔는데…… 꼬맹이가 보이지 않았다. 깨끗이 정리되어 있는 침대를 바라보다, 돌아다니는 간호사를 붙잡고 물었다. 여기 있던 환자 어디 갔어요? 간호사는 차트를 확인하고, '이 분 퇴원 수속 밟으시고 가셨네요.'하고 짧게 대답해주었다. 퇴원 수속. 멍하니 서 있던 나는, 밑으로 뛰어 내려갔다. 미친 듯이 에스컬레이터를 뛰어 내려가, 모든 문들은 다 확인했지만 꼬맹이는 온데간데 없었다. 나는 빠르게 핸드폰을 꺼내어 꼬맹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 게 초조해서 끊고, 이번에는 정국에게 전화했다.
'여보세요?'
'……김여주, 어딨어요.'
'아, 방금 짐 다 싸서… 여기로 온다고 했는데.'
정국의 말에 핸드폰을 끊고, 택시 승강장으로 달렸다.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뒷태가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여주, 하고 말하자 뒤돌아보는 꼬맹이가… 있었다. 꼬맹이가 뒤돌자마자, 나는 직진해 꼬맹이에게 입을 맞췄다. 꼬맹이는 핸드폰을 바닥으로 떨궜다. 숨이 진정되질 않아서, 다소 거칠게 숨을 쉬면서도 입술은 떼지 않았다. 이러다 놓쳐버릴 것 같아서, 손가락 하나라도 놓칠까 싶어서.
"……아저씨?"
"…놓칠 뻔 했잖아. 어딜 가."
멍한 얼굴로 나를 보는 꼬맹이를 꼭 안았다. 어디 가지 말고 붙어 있어, 이제.
덧붙임
흐어... 분명히 일요일에 온다고 말했는데 8ㅁ8
찌통이라 독자 분들 넘나 슬프게 하는 것 같아서
두 편 같이 가지고 왔어요, 그래서 조금 늦었습니다
윤기가 꼬맹이를 잡는 과정을 어떻게 할까 정말 고민 많이 했는데
총 세가지로 줄였다가,
결국엔 처음 생각했던 걸로 쓰게 됐어요
저 대사 기억나세요? 짐니 글에 나왔던 대사인데!
결국은 반존대 대사가 철벽 관계를 정리해주는 키로 등장했습니다
이 시리즈는 계속 이럴 것 같아요
멤버들끼리도 서로서로 이어져 있는!
정국이랑 지민이 친분은 반존대 1편에 나와있어요,
맨 처음에 술떡이 토할 때 정국이도 나오거든요 ^ㅁ^
하... 뭔가 관계를 다 정리하고 나니까 속 시원한 기분
저는 숙제 같았던 이 글을 끝내고 이제 자러갑니다
오늘도 고마웠어요, 사랑합니다♡
다음엔 태태 나빠요 시리즈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