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이 날 것 같자 아이들은 하나 둘 반 밖으로 나가고 없는 모양이었다. 보통 같으면 싸움이라고 옆 반에서까지 와서 구경했겠지만 사태도 사태였거니와 세훈은 거슬리는것을 정말 싫어하기 때문에 옆에 있다간 경수처럼 한 대 얻어 터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어느새 반 안은 텅 비었고, 세훈과 경수 종인만 남아있었다. 웃는 얼굴이던 종인의 표정이 금새 바뀌었다. 잘못봤나 싶을 정도로. 쩔쩔매는 표정으로 변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다는 얼굴로 경수와 세훈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을 세게 맞았나. 입 안이 터졌다. 비릿한 맛이 코를 찔렀다. 경수는 바닥에 피를 뱉어냈다. 그와 동시에 이번엔 배쪽으로 들어오는 타격에 급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한참동안 배를 붙잡고 켁켁대는 경수의 모습을 보던 세훈이 종인과 시선을 마주하더니 제자리로 돌아갔다. 수업을 시작하는 종이 울렸는데도 아이들과 선생님이 들어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대충 세훈이 쌈질을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경수가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입술과 입안쪽은 이때문에 찢어졌다. 그것을 본 종인이 걱정된다는듯이 물어왔다. '괜찮아?' 종인의 손이 경수의 입술에 닫기 직전, 온 몸에 돋은 소름에 경수가 종인의 손을 쳐냈다.
" 치워! "
다소 날카롭게 나간 목소리에 종인은 손을 멈춘채 눈을 꿈벅였다. 그 장면을 본 세훈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수는 종인을 쳐다봤다. 혹시라도 세훈에게 들릴까봐 조용히 읊조렸다. '다, 너 때문이야 개새끼야.' 입술을 꾹 깨문 경수가 문을 박차고 교실 밖으로 향했다.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교실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선생님과 아이들의 모습에 경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걔 중에는 변백현도 있었다. 경수와 백현의 눈이 마주치자 백현이 눈을 내리깔았다. 씨발. 연신 욕을 내뱉은 경수가 양호실로 움직였다. 배가 아파서 죽을 것 같았다.
경수는 양호실을 좋아했다. 자주 아프다고 도망 올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양호선생님이 친절한데다 예뻤으니까. 경수가 배를 잡고 절룩거리며 양호실로 들어오자 자리에 앉아있던 양호선생님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경수를 침대까지 부축했다. 경수를 침대 위로 조심스레 눕힌 양호선생님이 연고와 알약 데일밴드를 가져왔다.
" 이거 바르고 붙여. 왜 이렇게 된 거야? "
" 아, 오세훈한테 줘 터졌어요. 망나니새끼. "
오세훈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양호선생님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생긴건 그렇지 않은데 한 번 심사가 뒤틀리면 잡아다가 팼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쉬쉬하는 것은 물론이요 얻어터진 아이들은 항상 양호실로 왔기 때문에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한 건지 알 수 있었다. 보통은 오세훈에게 얻어터졌다 하면 병원 갈 정도로 심각했는데 경수는 그나마 괜찮은게 막 심사가 뒤틀리는 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연고를 대충 아무렇게나 바른 경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양호 선생님이 의아한 표정으로 경수를 쳐다봤다.
" 선생님 조퇴하게 조퇴증좀 끊어주세요. "
" 심각한 정도는 아닌데 뭐하게? "
" 그냥. 병원에서 치료받는다고 구라치고 좀 쉬게요. "
김종인 오세훈일도 있고. 뒷 말은 씹어삼킨 경수가 순순히 조퇴증을 끊어주는 양호선생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교무실로 향했다. 아직도 맞은 배가 욱신거렸다. 아마 집에가도 있는 사람은 없을게 분명했다. 고아라는 말이 딱 맞았다. 부모님은 일 때문에 항상 없었고 집에 사는거라곤 혼자 뿐이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자신을 돌봐주는 형들이 몇 있다는 점이었다. 세상물정을 잘 아는 것도 아니었고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활용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밝은 성격으로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이었다. 선생님들은 그런 경수가 불쌍했는지 자주 여러 혜택을 주곤 했다. 다른 사람들은 불쌍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그것이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수업이 없는지 자리에 앉아있는 선생님에게 조퇴증을 건넸다. 배를 부여잡은채로 슬금슬금 다가가자 자리에 앉아있던 선생님이 낌새를 느끼고 경수를 쳐다봤다. 방금, 싸움이 났다는 것을 아이들을 통해서 들었기 때문에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경수의 조퇴증을 받아들었다. 가방, 들고가야 되는데. 생각 해 보니까 그 상태 그대로 가방을 두고 나왔다. 가방을 가지러 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견딜 수 없는건, 자신을 보며 수근댈 아이들이었다. 잘못 한 것도 없는데. 반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다 그냥 계단을 내려갔다. 아이들은 수근댈게 분명했다. 죽여버리고 싶었다. 오세훈이 아니라 김종인을.
차라리 괴롭히지 말았으면 좋았을걸하고 자괴감도 밀려들었다. 그런데도 남을 괴롭힐 수 밖에 없는건 자신이 다른 이를 먼저 괴롭히고 있지 않으면 다른 이들은 자신을 두 배, 세 배로 괴롭힐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경수가 걱정됐는지 집으로 절뚝거리며 돌아가는 경수의 휴대폰으로 카카오톡이 와 있었다. 백현이가 보낸 것이었다. 괜찮아? 세 글자. 그렇게 걱정되면 그 때 말리지 그랬어, 개새끼야. 대답하지 않으려다 ㅇ하나를 백현에게 보냈다. 누군가가 말려 줄 거란 생각도 안 했지만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얻어맏을 줄 몰라서 자존심 상했다. 그 왕따 앞에서 맞았다는게. 사람심리라는게 참 복잡해서 정작 자신을 때린 오세훈에게는 그렇게 큰 반감이 들지 않는데 그 앞에서 구경만 했을 뿐인 김종인에게는 큰 반감이 드는 것이다. 이미 오세훈은 자신이 건들 수 없는 종자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김종인이 경수의 입술에 손을 가져다대려고 했던 것을 생각해냈다. 자신도 모르게 돋은 소름. 분명히, 김종인은 웃고 있었다. 순식간에 팔에 소름이 돋았다. 경수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맞은편에서 오는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분명히 일 나가 있느라 엄마아빠는 집에 없을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조용하게 있는게 나았다. 수틀리면 내일 학교에 안 나가도 상관 없었다. 어차피 집에 자주 들어오지 않는 부모님은 경수의 일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몇 분 채 되지 않아 집앞에 도착한 경수가 차에서 내려 엘레베이터를 탔다. 배가 욱신거렸다.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어지럽기도 했다. 전부 오세훈에게 맞아서 그런거라고 생각했다. 한참동안 엘레베이터 올라가는 소리와 층 수에 집중했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고 집 문앞에서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문을 열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 경수? "
경수가 자리에 굳었다. 엄마의 얼굴이 틀림 없었다. 조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 여간 고생한게 아닌 모양이었다. 경수를 보는 엄마의 얼굴에 짜증이 묻어났다. 몇 달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표정을 본 경수가 말 없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신경쓰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게 오히려 더 편했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짜증스러운 목소리의 엄마가 경수에게 물어왔다.
" 학교에 있을 시간 아니야? 왜 지금 집에 와. 가방은 또 어쩌구? "
나긋나긋하게 물어오지만 짜증이 담겨있음을 몇년동안 같이 살았는데 모를 리 없었다. 경수는 무시하고 문고리를 잡았다. " 너, 이제 엄마아빠 엿먹이는 걸로 모자라서 쌈박질까지 하니? " 경수가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와 동시에 짜증이 밀려들었다. 왜 저 사람에게 이런 소리를 듣고 있는지 자신이 한심했다. 뒤에서 한참동안 중얼거리던 경수의 엄마가 ' 커서 뭐가 되려고, 할 줄 아는게 없으면 학교에라도 붙어있던가. ' 라고 말함과 동시에 경수가 발로 문을 세게 찼다. 거센 욕지기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오세훈에게 얻어맞은 것도 분해 죽겠는데, 엄마가 저런식으로 나오는게 짜증스러웠다. 경수의 욕지기에 엄마는 놀란모양이었다. 경수와 닮은 눈을 크게 치켜뜨며 경수를 응시했다. 경수는 방 안으로 들어가 대충 옷을 갈아입고 카드를 챙겨 든 뒤 집 밖으로 나섰다. 뒤에서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집에 있으면 항상, 숨이 막혔다.
갈 곳이 없어 동네 구멍가게에서 사탕을 하나 사 놀이터 그네에 앉았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게 이제 곧 어두워질 모양이었다. 어디에 가서라도 자야지, 라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경수가 모래를 발로 참과 동시에 약간의 진동이 울리더니 까만 창 위로 카카오톡 메세지가 떠올랐다. 종대에게서 온 메세지였다. 경수는 카카오톡을 확인했다. '우리 클럽가자. 아는 형있거든? 니 보고싶단다.' 몇 주전 모습을 마지막으로 종대의 얼굴을 본 지가 언젠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반가웠다. 경수는 알겠다는 대답을 보냈다. 뒤이어 곧바로 장소가 카카오톡으로 날아왔다. 경수는 휴대폰을 쥐고 아파트 단지를 벗어났다.
약속장소에 도착한 경수가 헉헉대며 주위를 둘러봤다. 오랜만이다. 흥분도 됐다. 네온사인이 반짝반짝 거리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 껴 있는게 분명한데, 누군지 모르겠어서 주위만 둘러봤다. 한참을 둘러보는데 앞에서 반가움이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도경수! "
경수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종대였다. 사람좋은 미소를 가득 단 종대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경수는 가까이 다가오는 종대의 어깨를 반갑다는듯 쳤다.
" 존나 오랜만이다. 뭐 하고 지냈어? "
" 나야 그냥저냥 잘 살았지. 몇 달 만인데 키 좀 큰 것 같다? "
" 니가 작은거지. "
" 닥쳐. "
우스갯소리를 하는동안 종대가 경수를 어디론가 이끌었다. 편했다. 숨이 트는것도 같았다. 욱신거리던 배가 조금 잦아든 기분이었다. 클럽 안으로 경수를 이끈 종대가 따라오라며 바쁘게 손짓했다. 경수가 웃으며 종대의 뒤를 따랐다. 한참을 시끄러운 클럽을 돌다 좀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자 소리가 잦아들었다. 왠 룸? 경수의 물음에 종대는 그냥 웃으며 룸 한 곳에 멈춰 문을 열었다.
" 형~ 저 왔어요! "
" 새끼, 오랜만이네. 잠수타더니. 데리고 온다던 친구는? "
" 여기! "
종대가 경수의 팔목을 잡아 앞으로 끌었다. 안에 있는 남자들이 경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괜히 느껴지는 수치스러움에 경수가 눈을 내리깔았다. 경수의 행동을 봤는지 안에 있던 남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경수가 문 앞에 서 있는동안 종대가 테이블 앞으로 다가가 맥주 한 병을 집어들었다.
" 귀여운 새끼네. 이름이 도경수? "
" 아까 말 했잖아요. "
" 얼굴은 왜 저래? "
" 얼굴이 왜…. "
" 좆터졌나 보네. 남자애들은 다 싸우면서 크는거다~ 그래도 너무 싸우진 말고. 대가리에 똥만차면 우리처럼 할 거 없어서 이런거 하고 앉아있는다, 너? "
네온사인때문에 얼굴이 잘 안보였던건지 경수의 부은 얼굴을 본 종대가 경수의 얼굴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근 몇 달 만에 보이는 얼굴인데 이런 얼굴로 마주하는게 부끄러웠다. ' 괜찮아, 야 앉아! ' 자리에 뻘쭘하게 서 있는 경수에게 남자가 말을 던졌다. 경수는 쭈뼛쭈뼛 종대의 옆으로 가 앉았다. 종대가 더 질 안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건 차원이 달랐다. 풍겨져 나오는 느낌이 꼭, 조폭같았다. 다들 옆에 여자 하나씩을 끼고 우스갯소리로 ' 그 새끼 팔을 꺾었어야 하는건데! ' 하는 농담을 던지는 것도 장난같지 않았다.
" 쟤 말 좀 시켜봐. "
자리에 어색하게 앉아있는 경수가 웃겼는지 한참을 여자와 말을 주고받던 남자가 종대의 팔을 툭 건드렸다. ' 민석형이 너무 껄렁하게 나와서 그래요. ' 한 번 야유를 준 종대가 경수를 건드렸다. 자리에 멍하게 사람들을 쳐다보던 경수가 응? 하고 소리지르자 룸 안에 한바탕 웃음소리가 터졌다.
" 골 때리는 새끼네. 형은 민석이라고 하고 얘는 루한. 너무 긴장하지 마, 형들이 잡아먹냐? "
" 형이 생긴게 그래서 그렇다니까. "
종대의 한숨섞인 말에 민석이 종대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으악, 작게 소리를 내뱉은 종대가 칭얼거렸다. 아, 씨발 친구 앞에서 가오죽게. 경수가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그렇게 놀다 어느새 분위기에 적응한 경수가 먼저 말을 꺼내기도 하고, 특유의 입담으로 이야기를 주도하기도 했다. 주위 남자들은 경수가 마음에 들었는지 감탄사를 뱉어냈다. 시간이 늦어졌다고 이제 집에 돌아가봐야겠다고 할 때 즈음엔 연락하라며 연락처를 주기도 했다. 옆에서 종대가 빈정댔지만 우스갯소리로 넘기고 그 연락처를 휴대폰에 저장했다.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숨 트이는게. 다른 것 보다, 지금 이게 훨씬 편했다. 지루한 학교나 엄마의 잔소리를 듣는 것 보다 더.
펜네임입니다! |
3화가 나왔습니다. 원래 내용이 이게 아니었는데 EPP님과 말하다 보니 내용이 바뀌고 바뀌어서 앞으로 전개가 좀 다이나믹하게 이뤄질 것 같네요.
항상 콘티 짠다고 고생하시는 EPP님.. 네 사실 저는 하는게 아무 것도 없어요
EPP님이 항상 독촉해서 그나마 느릿느릿 완성하는 처지에 뭘 바라겠습니까 네....
재밌게 감상해주시구요 추천꼭 눌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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