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택운이라. 택운이. 운이.
윤이나 운이나, 한 끗 차이 밖에 나지 않거늘.
홍빈의 입꼬리가 밀려 올라갔다. 제 앞에서 눈물을 흘려대는 택운의 모습에 심사가 비틀렸다.
재환이 살아 생전 택운과 연이 있었다는 사실에 살짝 놀란 것이 사실이었으나, 그 뿐 이었다.
재환은 병상에 세상을 뜬 지 오래였고, 택운은 현재 자신의 손 안에 쥐어져 있다.
너는 순수한 것이냐, 멍청한 것이냐.
그 다른 무엇도 아닌, 제 죽은 형. 이재환 따위에 울다니. 내 화를 돋구는 행동만 골라서 하는구나. 응?
홍빈의 상체가 주저 앉은 택운을 향해 서서히 내려갔다. 훅 끼치는 차가운 바람에 택운이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붉은 뺨은 그 마저도 말라 붙어 자국이 선명했다.
화려하게 수 놓아진 홍빈의 소맷자락이 찬찬히 택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택운의 입술이 달달 떨렸다. 재환과 많이 닮아 있는 커다란 눈. 그러나, 그 속은 하나도 재환과 닮아 있지 않았다.
따스했던 재환과는 달리 한 없이 차가웠다. 제 자신을 얼음 마냥 꽁꽁 얼려 버릴 듯한 냉기.
소매를 들어 제 얼굴을 까슬하게 더듬어 오는 홍빈이 입바람을 내며 웃었다.
" 사내가 그리 쉬이 울음을 터뜨려서야 되겠어? "
" ... "
" 이미 죽은 사람을 그리워해서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 "
" ... "
" 쓸데 없는 연유로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마라. "
" ...! "
" 아주, 신경질이 나니까. "
홍빈의 입에서 나오는 '사내' 라는 단어가 낯설었다.
나를 계집 취급 한 것이 본인이면서, 이제 와 자신을 사내라고 칭하는 그 뻔뻔함에 기가 질렸다.
택운이 입술을 세게 물었다. 홍빈이란 사내의 심중을 당최 이해 할 수 없었다.
제 형이라고 했다. 그런 재환의 죽음에 정말, 하나도, 전혀 슬픔을 내비치지 않는다.
마치, 남의 죽음을 이야기 하듯이.
저 분노는 그저 제가 우는 것이 꼴 보기 싫어 그런 것일 터.
이제는 두렵다 못해 소름이 끼친다.
택운의 얼굴을 뒤덮었던 눈물을 모조리 닦아 낸 홍빈이 또 다시 환히 웃었다.
얼핏 보면 따스하게 보일 미소였으나, 택운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가시가 잔뜩 박힌 미소. 홍빈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증거였다.
홍빈의 기다란 검지 손가락 하나가 택운의 뺨에 닿았다.
동그랗게 원을 그리던 손가락이 택운의 눈가를 스치고, 입가를 스친다.
택운의 어깨가 살짝 움츠려지자, 홍빈이 푸스스- 웃으며 입을 열었다.
" 오늘 네 건방진 행동은 용서 해 주겠다. "
" ... "
" 꼼짝 없이 수그러 든 모습이 골목길을 배회하는 괭이 새끼 같아 우습구나. "
" ... "
" 말을 할 줄 알면서 내 말에는 왜 대답을 않는 것이지? "
뭐, 아무래도 상관 없다. 네가 말을 하던 하지 않던 별 상관은 없으니.
홍빈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펄럭이는 옷 자락이 택운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은은히 꽃 향이 났다. 그 마저도 택운의 마음을 흔들었다.
꽃 밭에서 뒹굴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웃었다.
재환은, 꽃 그림도 아주 훌륭히 그렸었다.
" 한 발짝도 나오지 말거라. 길이라도 잃으면 내가 귀찮으니. "
말을 끝 맺은 홍빈이 뒤 한 번 돌아 보지 않고서 방을 나선다. 마지막까지 가시 돋힌 말투에 택운이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홍빈에게서 묘한 느낌을 가졌던 것도, 그가 재환과 닮아서일 것이다.
.. 다른 이유는 없으리라.
* * *
답답했다. 방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말라는 홍빈의 말 덕에 택운은 벌써 몇 일째 방에만 처박혀 있었다.
바깥의 공기가 어떠한지 잊어 버릴 정도였다. 문득 산뜻한 햇살이 그리워졌다.
택운이 요리조리 눈알을 굴렸다. 밖을 지키고 서 있던 어린 계집도 때 마침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밖으로 내빼기 최고로 적합한 상황이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지금, 택운이 망설일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택운이 나풀거리는 치마를 움켜쥐고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방 밖을 두리번 거리다 재빨리 뜀박질했다. 혹시나 들키면 제가 어찌 될 지 모르니 얼른 나갔다 다시 돌아와야했다.
조금만, 조금만 있다 들어 오면 될 거야.
숨이 턱 끝 까지 차올랐지만, 방 밖을 나설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이 절로 들떴다.
길게 늘어진 택운의 그림자가 복도 끝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 ... 하아-. "
상쾌하고 청명한 하늘이 드 높게 이어지는 배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제가 있는 이 곳은 꽤 구석진 곳에 위치 했었나 보다. 저 멀리 커다란 기와 지붕이 보였다.
조금 더 나가 볼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택운의 발이 저도 모르게 움직였다. 조금만 나갔다 들어 가려고 했던 마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길은 그닥 길지 않았다. 조금만 걸음을 옮기니 커다랗고 단단한 담벼락이 있었고, 그 곳을 따라 주욱 이동하니 통로가 나타났다.
호기심에 들어 간 그 곳에는, 다름 아닌 꽃 밭이 있었다.
" .. 와아-. "
절로 탄성이 나왔다. 유채색의 물감을 덧칠 한 듯 노랗게 물들여진 꽃 밭에서 나는 싱그러운 향이 코 끝을 간질였다.
택운의 새 하얀 손 바닥이 꽃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손 바닥에 꽃 가루가 묻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마치 재환과 함께 했던 그 꽃 밭을 보는 듯 하여 기분이 이상하기도 하고, 설레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곳은 대체 어디일까. 크기로 가늠하여 보면 평범한 곳은 절대로 아닌 듯 하여 보이는데..
택운의 생각이 끝을 맺기도 전, 흙 길을 밟는 인기척이 났다.
" 너는 누구냐! "
" ...! "
" 어느 안중이라고 이 곳에 발을 들인단 말이냐! "
택운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뒤를 돌아 보았다.
화려한 옷을 입은 갈색 머리의 남자가 자신을 바라 보고 있었다.
자신에게 소리 친 것은 그 남자의 뒤에 있던 시종 인 듯 하였다. 이를 어쩐다.
" 여봐라! 당장 저 년을 잡아 가거..! "
" 잠시, 기다려 보라. "
남자가 시종의 말을 끊었다. 택운이 눈을 도륵도륵 굴리며 안절부절 못 하자, 남자가 흐음-. 하며 팔짱을 끼었다.
" 너는 여인이 아니로구나. "
" ... "
" 겉 모습은 영락 없는 여인인데, 골격을 보아하니 사내이다. "
'계집' 이 아닌 '여인'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갈색 머리의 남자를 쳐다 보았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걸고 있었다.
그 미소에, 왠지 두려움이 조금은 가시는 것 같았다. 사정 없이 흔들리던 택운의 눈동자가 멎었다.
정사 회의 중 머리가 지끈거려 잠시 산책을 나온 학연에게 꽃 밭을 헤집는 낯선 이가 보였다.
태양의 사가 앞 마당에 발을 디딘 어리석은 자가 과연 누구일까.
내관이 호통을 치자, 가녀린 등이 퍼드득 놀란다.
.. 아.
뒤 돌은 얼굴이 저와는 다르게 새하얬다. 유채색의 꽃 보다 더 밝은 그 얼굴이 눈을 부시게 했다.
여인인 줄 알았는데, 사내인가.
대충 봐도 8척은 넘어 보이는 큰 키 였다.
학연이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밖을 나설 때 부터, 오늘따라 꽃 향기가 더욱 진하다고 생각 했는데. 착각이 아니었구나.
참으로 향기로운 꽃 한 송이가 제 발로 밭을 찾아 왔어.
학연은 본디 눈치가 빠른 자였다.
자신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새하얀 사내.
' 어젯 밤, 저의 궁 정원에 꽃 한 송이를 들였습니다. '
' 아주 아름답고, 향기가 짙은 꽃이옵니다. '
필시, 청하의 꽃이로구나.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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