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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혁 샤이니 온앤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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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면아.

 

 

 

 

   

세훈이 들어선 집 안은 적막함만이 가득했다. 세훈은 준면을 부르며 거실 불을 켰다. 텅 빈 소파를 보며 준면의 화방으로 향했다. 슥삭거리는 소리가 멀찍이에서 들려왔다. 세훈은 화방을 소리없이 살짝 열었다. 화방으로 향하는 복도는 온통 준면의 그림액자들로 가득했고 화방 안 또한 액자들이 넘쳐났다. 아주 큰 캔버스위에 쉴새없이 연한 연필을 덧댄 흔적이 보였다. 준면은 세훈이 들어오는 것 또한 알지 못한 채, 작업에만 열중이었다. 세훈은 가만히 들어와 준면의 화방을 쭉 둘러보았다. 깔끔한 성격과 다르게 준면의 화방은 A4용지로 그린 듯한 소묘들이 벽에 덕지덕지 붙어있었고 조형작품들도 널려있었다. 대체로 밝은 색체의 그림들이 난무했다. 세훈은 흥미로웠다. 작업에 열중인 준면의 모습이 꽤 새롭기도 하면서 관찰하기에 즐거웠다.

 

 

 

 

 

준면아. 저 그림뭐에요?

 

 

 

 

 

준면은 그제서야 저의 작업을 멈추고 세훈을 알아챘다. 뒤돌아서 본 세훈은 저가 따로 빼두었던 세훈의 초상화와 오르골 그림에 시선이 멈춰있었다. 준면은 빙긋이 웃었다. 세훈이 필시 기뻐해주리라. 하지만 세훈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아, 저거? 나도 언제 그렸는지 기억이 잘 안나는데 우리 첫 만나고 얼마 지…

 

그거 말고. 오르골. 아니, 잠깐만.

 

오르골? 응? 글쎄, 잘 모르겠어.

 

우리 첫 만났을때 기억나요?

 

 

 

 

 

준면은 당황스러웠다. 사실 세훈과의 첫만남은 물론 저와 세훈의 추억들도 빛바래있는 것들이 다 였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세훈의 곁에 있었고 깨닫고 보니 저의 모든 것. 전부는 세훈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어떻게 둘의 관계가 이렇게 진전될 수 있었는 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분명하지 않았다. 세훈은 준면에게 다가갔다. 요즘 보는 세훈의 모습은 불안하고 위태로웠다. 준면은 미묘한 세훈의 표정을 또다시 알 수가 없었다.

 

 

 

 

 

꼬마야, 왜 그래.

 

 

 

 

 

세훈은 준면의 예상과 다르게 준면을 지나쳐 오르골 그림을 치켜들었다. 지금까지 봐온 준면의 그림 중 가장 어둡고 텅 비어있었다. 세훈의 손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숨소리 조차 거칠어지자 준면은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세훈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세훈은 또다시 핏빛으로만 가득한 준면의 손과 자꾸만 겹쳐보였다. 아득하고 멀찍했던 일들, 절대로 꺼내어지길 원하지 않는다. 세훈은 어떻게 저를 제어해야할 지 몰랐다. 그저 이 오르골 그림. 그리고 팔다리가 잘린 발레리나 오르골. 세훈은 준면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준면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번도 저에게 화를 낸 적도 그 흔한 서운한 감정조차 내비치지 않던 세훈이 낯설었다. 준면 또한 사지가 오들오들 떨리기 시작했다. 불안해 보이는 세훈의 몸이 저에게도 옮겨온 듯했다. 저의 전부가 저토록 무너질려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 그림…. 왜 그린거에요? 네? 김준면! 왜 그린거야?

 

진정해, 꼬마야. 나도 잘 기억이….

 

진짜 기억이 안나요? 아님 그런 척 하는 거야? 응? 대답 해!

 

꼬마야.

 

어린애가 아니라고 몇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요?

 

그래. 세훈아.

 

넌… 나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야?

 

 

 

 

 

준면은 멍했다. 또다시 편두통이 찾아왔다. 본능적으로 안쪽 방을 향해 달렸다. 세훈은 아주 세게 밀쳤다. 걸어나가는 준면을. 준면은 골이 울렸다. 아무것도 들리지않고 말문조차 막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세훈의 손아귀는 준면을 세게 옭아매며 더 이상 준면이 걸을 수 없게 만들었다. 세훈의 표정은 일그러져있었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분노한, 광기 가득한. 그런 표정이었다. 준면은 저의 몸이 통제 할 수 없을 정도로 마구 떨려오기 시작했다. 저기 저 무언의 방문을 열면 정말 거대한 뭔가가 저를 덥쳐올 것이 분명했다. 준면은 세훈을 밀쳤다. 그리고 순식간에 무언의 방에 도달해 망설임없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세훈은 그런 준면의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오르골

 

w. prisJ

 

 

 

 

 

 

 

 

 

 

 

세훈의 공연 날짜가 다가오더니 어느 덧 하루 앞두었다. 밤늦게까지 연습을 끝마치고 오면 잠들어있는 준면에게 버드키스를 나누고 아침일찍 발레단으로 향하는 일상을 해왔다. 세훈은 아무도 없는 컴컴한 연습실에서 마지막으로 혼자남아 안무를 찬찬히 하나씩 다듬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일. 어쩌면 세훈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무대의 주인공이었다. 험상궂고 포악한, 극악무도하며 잔인한 사냥꾼의 안무는 강렬했고 쭉쭉 뻗은 팔다리에는 힘이 들어갔다. 세훈은 저의 분노를 온 몸으로 표현했다. 사냥꾼의 파트가 끝난 후, 온화하며 우아한, 차분하면서도 아름다운 왕자의 안무는 부드러운 느낌이 강했다. 세훈은 사냥꾼 안무에 부족함을 느껴왔고 그것에 초점을 맞춰 맹 연습을 해왔다. 하지만 막상 리허설때도 지금도. 계속해서 지적을 받고 걸리는 부분은 왕자의 안무였다. 세훈은 입술을 악물었다. 순간 짝짝, 박수로 신호를 보내며 소희가 연습실 안으로 들어왔다. 또각거리는 소리만 울렸다.

 

 

 

 

 

 

 

열심히네. 근데 아직도 너의 사냥꾼은 지나치게 널 통제하는구나. 뭐, 내일은 잘해내리라 믿어. 그만하고 일찍 들어가 쉬어.

 

네.

 

어디 오세훈의 발레인생 통틀어 진정한 네 실력을 한번 보여줘봐, 세상 사람들에게.

 

…….

 

그리고 준희에게도. 아, 이건 선물.

 

 

 

 

 

 

소희는 세훈의 앞에 발레리나 오르골을 두고 나가버렸다. 일관된 웃음이 세훈을 더 압박하고 조여오는 것같았다. 세훈은 천천히 오르골을 들어 발레리나를 만져보았다. 김준희. 김준면. 그리고 저. 오르골은 준면의 그림 속에 있었던 팔다리 잘린 발레리나와 똑같은 것이었다. 세훈은 발레 타이즈와 슈즈를 벗으며 가방 속에 오르골을 넣었다. 준희와 준면의 사진액자가 만져졌다.

 

 

 

 

 

 

 

 

 

-

 

 

 

 

 

 

 

세훈은 연습량이 어마어마했던 일상을 접고 공연을 위해 일찍 문고리를 열었다. 역시나 적막함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훈이 거실불을 키자 공허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는 준면이 소파위에 앉아있었다. 세훈은 준면에게 다가갔다. 준면의 이마에 손을 대며 문지르듯이 뺨을 쓰다듬었다. 준면은 금세 울기젖은 얼굴로 세훈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품에 얼굴을 묻었다. 동그란 두상이 심상치않아보였다. 세훈은 그저 말없이 준면을 끌어안아 준면의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세훈의 어깨부근이 물기로 젖어들어갔다.

 

 

 

 

 

밥은 먹었어요?

 

아니.

 

나 안 보고싶었어요?

 

…….

 

대답.

 

보고…싶었어.

 

아직도 기억해요?

 

…아니.

 

그럼 된거에요.

 

 

 

 

 

세훈은 준면의 얼굴을 들어 눈가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고운 얼굴선이 울음으로 가득차있어 세훈은 씁쓸하게 웃었다. 준면아. 속삭이며 준면에게 입을 맞추었다. 한번 가볍게 맞추고 코를 맞대고 서로의 숨소리를 음미했다. 준면은 세훈에게 손을 뻗어 세훈의 뺨에 대었다. 나른하게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리고는 세훈을 꽉 끌어안으며 세훈의 귀에 속삭였다.

 

 

 

 

 

근데도 꼬마야, 나 무서워.

 

 

 

 

 

세훈은 얼굴을 굳혔다. 품에 안긴 준면을 조심스럽게 안고 세훈은 준면의 방으로 향했다. 준면을 조심스럽게 눕히고는 나갈려는 세훈을 준면이 붙잡았다. 세훈은 저의 옷자락을 붙잡는 준면의 손길에 뒤돌았다.

 

 

 

 

 

내일 공연인거 알잖아요.

 

이리와.

 

 

 

 

 

세훈은 더이상 말하지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준면의 곁에 나란히 누웠다. 준면은 저의 허리에 세훈의 손을 언져놓고 세훈의 품 안으로 점점 더 파고들었다. 세훈은 그저 웃으며 저에게도 다가오는 준면을 말없이 받아들이고 품에 안았다. 따뜻한 무언가가 가득찼다. 세훈은 한숨을 쉬며 점점 더 준면을 끌어안았다. 둘은 눈을 감았다. 준면의 침대 옆 탁자위에는 팔다리가 잘린 오르골이 놓여있었다. 알아채지 못한 세훈은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준면 또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세훈은 꿈을 꿨다. 꿈 속에서는 저는 발레 공연을 위해 무대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순백의 의상을 입고 하늘하늘한 손끝을 뻗으며 안무를 수행했다. 무대 바로위에서 쏘는 흰 빛의 핀 조명이 세훈과 함께 움직였다. 면사포로 얼굴을 가린 발레리나가 어느순간 등장해 둘은 함께 스텝을 맞추어나갔다. 발레리나를 높이 들어올리고 옆으로 다리를 뻗어 다가가는 안무가 끝나자 핀 조명이 바뀌고 무대 조명이 전부 켜졌다. 세훈은 검은 의상을 입고 칼을 들고 서있었다. 세훈의 손은 바들거리는 손아귀를 천천히 펼치자 주르륵 떨어지는 피와 얼룩덜룩의 저의 소매가 보였다. 피묻은 칼을 놓자 발레리나가 면사포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발레리나는 고통스러워하며 다량의 피를 흘렸다. 그 순간 숨을 몰아쉬며 세훈은 눈을 떳다.

 

 

 

 

 

 

 

 

 

-

 

 

 

 

 

 

 

준면은 공연이 시작되기 30여분이 남았지만 가장 먼저 입장했다. 세훈의 발레를 본 것이 기억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터라 기대도 되고 오히려 저가 더 긴장되었다. 준면의 기억 속에서 세훈은 언제나 현재와 같았고 현재였으며 현재일것이다. 때문에 더더욱 생각해내려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저가 고장난 상태라 하더라도 뭔가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세훈을 잃고 싶지않았다. 어느 덧 시간이 흘러 막이 올랐다. 1막은 마녀와 아름다운 공주 역할을 1인 2역으로 소화하는 발레리나의 독무 안무들이 많았다. 준면은 세훈의 등장만을 기대하여 무대에 집중했다.

 

 

 

 

꼬마.

 

 

 

 

준면은 떨렸다. 저의 기억으로는 처음보는 세훈의 몸동작은 강렬했다. 검고 투박한 의상을 입고 분장도 짙었다. 마녀의 사주를 받는 안무가 시작되고 음악은 절정에 달했다. 세훈은 칼을 찌르는 듯한 안무를 세훈이 가진 기다란 팔로 화려하게 표현했다. 마치 광기어린 살인귀같았다. 안무도 의상도 세훈 그 자체가 너무도 강렬했다. 세훈은 공주 역을 수행하는 발레리나에게 다가가 훼방을 놓더니 발레리나를 붙잡았다. 과장된 몸짓이나 현란하고 아름다웠다. 세훈이 발레리나의 허리를 높이 들어올려 다리를 쭉 뻗어 옆으로 다가갔다. 나무 세트로 발레리나가 세훈을 향해 도망갔다. 세훈은 그런 발레리나를 붙잡고 다시 높이 들어올려 저의 가슴팍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발레리나를 위협하며 밑으로 추락시켰다. 떨어진 발레리나는 오들오들 떠는 안무를 훌륭히 수행했다. 1막의 마지막 안무로 세훈은 손을 들어 위로 상의를 전부 젖혔다가 앞으로 쏠리며 손을 모아 발레리나의 심장을 찌르는 시늉을 했다. 그 순간 준면은 저의 머리를 감싸안았다. 분명 어디서 본 장면같이 익숙했다. 준면은 자신을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 눈물을 쏟고있었다.

 

 

 

 

무서워.

 

 

세훈아. 오세훈.

 

 

나 무서워…

 

 

 

 

발레리나의 심장을 찌르는 시늉을 한 것은 세훈의 손이었으나 찔린 것은 마치 준면, 자신같았다. 준면은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작품전시회를 앞두고, 세훈은 공연을 앞두고 불안했던 저들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준면은 마침내 저의 머릿 속, 아주 깊은 곳에 감춰놓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그 판도라의 상자는 오르골 상자였다. 열자마자 보이는 것은 팔 다리가 잘린 발레리나 형상이었고 바로. 그 방이었다. 준면이 기어코 열어버린 세훈과의 무언의 방. 준면은 정신없는 저를 통제할수가 없었다. 그저 흐르는 눈물을 주체 못했고 떨려오는 몸뚱이를 숨길 수도 없었다. 저가 그 방의 문을 열었을때 방 안은 깜깜하여 아무것도 보이지않았다. 뻥 뚤린듯이 시원 할 줄 알았으나 오히려 점점 더 불안감에 빠지는 것은 저였다. 어느 새 세훈이 저의 뒤에서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세훈은 천천히 준면을 위해 불을 켜주었다.

 

 

방 한가운데는 테이블이 있었다. 갈색으로 얼룩덜룩하고 해져있었다. 꽤 조그마한 방에 방문 맞은편으로 창문이 벽 한면으로 나있었다. 그 앞에는 여자의 침대로 보이는 침실이 보였는데 역시나 이불보도 갈색으로 얼룩덜룩했다. 테이블 위에는 세훈이 소희에게 받았던 준희와 준면의 액자와 발레리나 형상을 한 오르골이 놓여져있었다. 방문 바로 옆에는 책상이 하나있었는데 그 위는 액자들로 가득했다. 거의 다 준면과 세훈의 사진들이었다. 준면은 느릿하게 걸어들어가 침대에 앉았다. 침대에 앉자 테이블이 한순에 더 잘 보였다. 준면은 그때 깨달았다. 세훈의 초상화를 그린 것이 이 곳이노라고. 테이블은 세훈의 초상화과 이어지는 오르골 그림 속 테이블과 일치했다. 그림 속 팔다리가 잘린 오르골이 지금 이 방 안의 발레리나 오르골과 동일한 것 또한 깨달았다. 준면은 순간 피묻은 저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세훈은 준면에게 다가갔다.

 

 

 

 

 

왜 말 안했어, 꼬마야? 아니, 왜 난 기억을 못했어?

 

스스로 기억할려고 하지 않으니까요. 의사도 더 이상은…

 

그 여자 이름이 뭐였어?

 

김준희.

 

 

 

 

 

준면이 세훈을 바라봤다. 세훈은 참을수가 없는 표정이었다. 갑자기 휙 돌아 나가버리려는 세훈이었다.

 

 

 

 

 

넌 나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야? 

 

…….

 

그 여자, 왜 사랑했어?

 

…….

 

꼬마, 너가 그 여자 안 사랑했어도. 아니, 내…내가…

 

준면아.

 

무서워. 나 무서워.

 

준면아.

 

네가 날 버릴까봐 무서워.

 

 

 

 

 

준면과 세훈이 암묵적으로 지워버린 기억속에서 그 날의 대사를 세훈을 향해 준면은 똑같이 읊었다. 세훈의 눈가가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입술을 깨물며 처음으로 세훈은 준면의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마구 흘러내리는 눈물은 세훈을 무너지게 했다. 세훈은 준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준면은 세훈의 머리를 따뜻하게 감싸안았다.

 

 

 

준면이 정신을 차리고 무대를 보자 벌써 2막이 지나고 어느 새 순백의 의상을 입은 세훈이 죽어가는 발레리나의 머리를 뒤에서 감싸안는 안무의 부분을 춤추고 있었다. 준면은 고개를 도리질치며 눈물을 손등으로 거칠게 닦았냈다. 공연은 점점 끝을 알리는 듯 오케스트라의 선율은 장엄해지고 있었다. 여러명의 무용수들이 군무를 맞추며 공주 발레리나를 무대뒤로 끌어올렸다. 음악이 격정으로 치닫더니 업스테이지에서 의상을 검은 도포로 뒤집어쓴 마녀 발레리나가 등장하여 세훈에게 위협을 가했다. 준면은 마치 저가 마녀가 되어 세훈에게 칼을 휘두르는 모습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속이 메스꺼워졌다. 준면은 저의 입을 손으로 억지로 틀어막아 공연장을 벗어났다. 화장실로 향하는 준면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준면은 변기에다 토악질을 했다. 역겨운 저의 모든 것을 속으로 긁어내어 전부 버리고 싶었다. 준면은 억지로 헛구역질을 반복했다. 순간 핏물이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비릿한 맛에 준면은 마구 기침을 했다. 저의 피는 맑았다. 준면은 진정을 찾으며 입을 헹구고 화장실을 벗어났다. 긴 복도를 걷는 준면의 뒤로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준면? 맞지?

 

 

 

 

준면은 성공적으로 끝난 공연을 올린 소희의 사무실에 들어섰다. 소희는 홀가분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준면에게 손짓했다.

 

 

 

 

 

기억 못할려나. 나 소희누난데. 우리 어렸을때 자주 봤었어.

 

기억, 해요. 전부.

 

뭐? 기억 잃었다고 들었는데.

 

 

 

 

 

준면은 긴장했던 표정을 풀고 웃으며 대답했다. 유하고 순한 인상이 더 풍부해졌다. 소희는 커피잔에 물을 받으며 깜짝 놀라 뒤를 돌았다. 소희가 알던 어릴 적 준면은 그 누구보다도 순했다. 소희의 기억 속 준희 동생은 약한 몸을 갖고 있었으나 그림을 잘 그렸었다. 준희는 일찍이 무용수에서 연출파트로 진로를 틀어 이곳 발레단 최연소로 감독데뷔를 준비했었던 동기였다. 준면은 웃던 입꼬리를 싹 내렸다.

 

 

 

 

그래서 누나, 우리 꼬마를 주연으로 세운거구나.

 

잠깐만, 너… 지금…. 너 아직도 완치가…?

 

난 또 누군가 했잖아. 그럼 누나도 우리 꼬마랑 자고 싶었어요? 김준희처럼?

 

김준면…너 뭐야, 준희가 누군지나 알고서 그런 말해?

 

한때 호적상 혈연관계였죠. 그게 왜요?

 

준희가 널 얼마나…….

 

 

 

 

 

준면은 싸늘하다 못해 냉기가 가득한 얼굴로 소희를 쏘아봤다. 김준희, 김준희. 전부다 김준희고 모두가 김준희를 말했다. 준면은 몸서리를 쳤다. 분명 소희는 세훈과 잤을 것이라. 생각했다.

 

 

 

 

 

김준희가 왜 하필이면 우리 꼬마를 주연으로 세우고 싶어했는지 알아요?

 

그거야 가장 잘했고 재능있으니까.

 

아니, 틀렸어.

 

 

 

 

 

준면은 소희의 소파 앞에 놓여있는 탁자에 손을 뻗었다. 과일 접시와 날카로운 과도가 보였다. 준면은 저의 사고를 정지하지 못했다. 단도의 칼날을 잡아 손이 베였다. 준면의 손이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과도의 손잡이로 고쳐잡은 준면이 점점 더 세게 말아쥐었다. 저의 주먹을.

 

 

 

 

 

가장 갖고싶으니까.

 

너 지금 제정신 아니야. 정신차려.

 

왜 자꾸 내 걸 탐내? 누나도 김준희도, 왜? 날 위해 삼류로 살겠다는 얘를 왜 자꾸 흔드는데! 내가 그랬어…

 

…….

 

발레 잘하는 꼬마는, 필요없다고.

 

 

 

 

 

준면은 하염없이 울었다. 높이 과도를 소희를 향해 치켜들었다. 그날 밤의 저와 오버랩되었다. 어렸던 세훈을 끌어들여 뒹굴려고 했던 수치스러운 준희에게 응징을 가했던 저를. 아니, 사실은 사랑하는 오세훈을 빼앗으려는 미운 누나에게 유독 심한 응석을 부렸던 저를. 그리고 피로 물들어진 저의 손을 봤다. 그날 밤 처럼. 쿵. 하고 순식간에 문이 열렸다. 그날 밤 처럼 세훈이 알 수없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준면아,

 

…훈아, 세훈아. 사랑하는 우리 꼬마.

 

지금, 이게 무슨….

 

넌 나만 있으면 된 거 아니야? 응?

 

칼 이리줘요. 위험해. 지금 손도 베인거 알아요? 빨리 치료해야지.

 

싫어, 이거 주면 갈거잖아. 나 두고 가버릴거잖아!

 

내가 왜 가요, 여기 준면이가 있는데, 왜 가요. 어서 줘요, 위험해.

 

 

 

 

 

준면은 힘없이 칼을 떨어트렸다. 세훈은 무대의상위에 입은 겉옷을 벗어 준면에게 덮어주었다. 사무실 안, 서랍장 윗칸을 열어 수건을 꺼내 준면의 손을 칭칭 감아 지열을 했다. 뜨거운 눈물이 마구 떨어지는 준면의 얼굴을 쓰다듬어주며 세훈은 다독거렸다. 준면은 점점 안정을 찾아갔다. 세훈은 준면을 소파위로 눕히며 억지로 준면의 눈가에 손을 내렸다. 눈을 감은 준면은 편하게 누웠다. 세훈은 잊자, 다 잊자. 하며 속삭였다. 준면은 의식을 잃어갔다. 세훈은 그런 준면의 이마와 뺨, 입술에 차례로 버드키스를 하며 준면이 떨어트린 칼을 쥐어잡았다. 바들바들 떨고있는 소희에게로 다가가 주저앉았다. 준면은 결국 소희를 찌르지 못했다. 세훈은 한숨을 쉬며 웅크린 소희의 긴 생머리를 움켜잡았다. 소파의 시트를 칼로 쭉 잡아 찢었다. 준면의 피로 물들어진 천들을 뭉개어 소희의 입 속에 구겨넣었다. 소희는 온 몸이 굳어 반항조차 하지 못한채, 식은 땀만 흘렸다.

 

 

 

 

 

그래, 당신 예상이 맞아. 김준희는 자살한게 아니였어. 그리고 당신 소원대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김준면을 불안하게 만들었어.

 

으…읍.

 

모두 다 당신 뜻대로 이루어졌다고. 근데 한 가지 놓친 부분이 있었네, 아쉽게도.

 

흐…윽. 읍.

 

김준희를 죽인건. 준면이가 아니라.

 

 

 

 

 

세훈은 소희의 심장에 칼날을 넣었다. 소희는 고통이 오기전에 세훈의 입모양을 읽었다. 커진 눈동자가 부들부들 떨려왔다. 증오로 인해. 하지만 소희의 증오는 부질없었다. 세훈은  부드럽게 잘려나가는 칼날을 느끼며 과도를 옆으로 틀었다. 소희는 역류하는 피를 입에 문 천에다가 쏟으며 쓰러졌다. 그대로 일어선 세훈은 느릿하게 수건 한장을 더 꺼내어 저의 손을 닦아냈다. 세훈은 찻장에 들어있는 양주들을 모조리 꺼내 뚜꼉을 열고 사무실에다가 뿌리기 시작했다. 독한 술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소희의 자켓 주머니에 손을 넣자 잡히는 라이터와 담배를 꺼내 담배를 입어 물고 불을 붙였다. 세훈은 겉옷으로 싸맨 준면을 등에 입고 사무실 문을 열었다. 닫히는 문 뒤로 불 켜진 라이터를 던지는 세훈의 손이 보였다. 불은 순식간에 소희를 먹어버렸고 사무실 전체를 태워버렸다.

 

 

 

 

 

 

 

-

 

 

 

 

 

 

 

잘 잤어요?

 

으,응. 공연은? 잘 했어? 못가서 미안해….

 

괜찮아. 준면아, 우리 이사가요.

 

갑자기 왜?

 

나 이제 춤 안 출거거든요. 준면이가 가고 싶다던 섬 가서 살래.

 

꼬마랑 나만 있는 섬으로?

 

네. 가요, 우리.

 

언제?

 

내일, 아니면 지금 당장.

 

에이, 집이 팔려야가지.

 

나 못 믿어요?

 

아니이…. 그럼 난 지금 당장 갈래.

 

그래요.

 

 

 

 

 

 

 

언제인지 모를 어느 순간에 그 집 밖 쓰레기봉투에는 세훈의 초상화와 팔 다리 잘린 오르골 그림, 그리고 그림 속  오르골과 준희와 준면의 사진액자가 버려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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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어휴..세훈아 너정말 무서운사람이구낟ㄷ대낮부터 소름이 돋네요...
10년 전
독자2
대박...세훈이 무섭다 ...흐규흐규ㅜㅜㅜㅜ
10년 전
독자3
세훈이가 끝을 쥐고있었네요 ㅠㅠㅠㅠㅠㅠㅠㅠ 글 정말 잘 봤습니다. 광기어린 오르골 잊지 못할거 같아요 ㅠㅠ
10년 전
prisJ
잊을 못할거같다니... 감사해요...하트♡
10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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