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담벼락에 죽은듯이 앉아있었는지 모르겠다. 더 이상 장난치면 상처만 서로에게 줄 것이고, 김태연의 얼굴을 보니 더 이상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즐거웠어 행복해라, 라고 헤어질 연인에게 빌어줄 여유조차 없었다. 미안하다면서 고개를 푹 숙인채 발끝으로 길거리에 모나게 툭 튀어나온 돌만 툭툭차는
그녀를 뒤로 한채 도망치듯 필사적으로 그녀에게서 멀어지기위해 뛰었다. 몇 번이나 주저앉았다가 담벼락을 짚고 겨우 일어섰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간신히 힘을 주어 길도 모르고 걸었다. 정말 우리는 행복할 줄만 알았는데.
저만치 김태연의 집이 보인다. 불이 꺼진 그녀의 자취방이 이토록 나를 눈물나게 할 줄을 몰랐다. 김태연도 불꺼진 저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 생각만으로 단숨에 달려가고 싶던 내 발을, 현실이라는 족쇄가 가두었다. 괴로운 얼굴로 약혼자와 통화할 김태연이.
"김태연.."
온 몸의 긴장이 풀리자 다시 송곳으로 몸을 찌르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나는 담벼락에 기대 차오르는 눈물을 삼켰다. 내가 어떻게 다시 김태연을 볼 수 있겠어.
몇 년동안 감정을 교제했던 인연도 아니었다. 그 저 일년. 일년이라는 시간이 나에게 미쳐버릴 듯한 절망감을 남겨주었다.
내가 지금 김태연에게 제발 부탁이니 결혼하지 마라고 매달리면 김태연은 다시는 나를 안 볼지도 모른다.
그런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김태연은 현실적인 인간이었다. 동화속에서만 나올것 같은 happily ever after라는 구절보다 현실을 직시 할 줄 아는 여자였다.
고장나서 빛이 깜빡거리는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서 다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 추악한 기억을.
'이제 우리도 철없이 행동 할 나이는 지났잖아.'
담담한 그녀의 눈빛에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철이 없었던게 아닌데. 나는...그냥, 정말 네가 좋아서.
나는 원래 이런 인간이니깐. 과장한테서 쓴 소리를 듣고 울적한 마음에 집에 와도, 그 날 밤에 나를 위해서만 웃어주는 김태연만 보면 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 너를 늘 갈망하고 사랑했는데. 내가 그렇게 바보같이 철 없던게 아니었는데.
일년동안 혹시 김태연이 나를 한심하게 보고 어린 아이처럼 유치하게 봤을 생각에 다시 나를 부끄럽게 했고, 슬프게 했다.
그리고 이렇게 울어도 나를 달래줄 김태연이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 슬프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