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上
"타오, 뭐 받고 싶은 거 없어?"
"으응? 아니, 딱히 없어요."
"그러지 말고 생각해 봐."
타오가 가만히 입술을 물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아니, 없는걸요."
"정말?"
"응, 정말 없어요."
타오가 고개를 흔들며 베시시 웃었다. 그런 타오의 머리를 한 번 쓸어내리는 우이판의 얼굴은, 타오만큼 밝지는 못했다.
"일 년에 한 번뿐인 생일이잖아."
"일 년에 생일 두 번인 사람도 있나, 뭐."
"그래도 특별한 날이니까."
타오의 고개가 다시 가볍게 흔들렸다.
"특별한 날이라는 생각은 안 해 봐서 괜찮아요."
"……."
우이판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피었다. 정말 일 년에 단 하루, 내일만이라도 타오가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우이판은 그럴 수 없었다. 저의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뭔들 해 주고 싶어도 정작 당사자인 타오가 원하는 게 없다고 하기 때문이었다.
"우이판, 맛있어요? 레시피만 보고 얼추 따라 만든 건데."
"……응, 좋아."
힘없이 대답하는 우이판의 포크 끝에 타오가 저녁 내 부엌에서 바삐 만들었을 고기 반찬이 걸렸다. 이런 것쯤은 그냥 가사 도우미에게 맡기라고 수도 없이 말했건만 도통 들어 먹질 않는 타오에 우이판은 내심 답답함을 느꼈다. 보나마나 타오의 손가락은 또 자잘한 상처로 망가졌을 것이었다.
조금은,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타오."
"응?"
우이판은 침대를 바로 보는 반듯한 자세로 누워 있었고, 타오는 옆으로 누운 몸을 약간 웅크려 우이판의 얼굴 옆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말이 없던 우이판이 그윽한 시선을 타오에게 돌림과 동시에 둘의 입술이 엉켜들었다.
"우이판……."
타오의 손이 우이판의 어깨를 약하게 부여잡았다. 그러나 그마저도 너무나 맥이 없어서 우이판은 다시 심기가 조금 불편해지고 말았다. 얇은 옷가지 밑으로 타오의 맨살을 어루만지던 우이판의 커다란 손이 휙 떨어져 나갔다. 우이판이 침대에서 상반신을 일으키자 벌써 초점이 반은 풀린 타오의 눈이 우이판의 움직임을 쫓았다.
"우이판?"
"……오늘은 피곤하니까 그만 자자."
"……."
우이판은 애써 타오에게 돌아가는 눈길을 다잡으며 그렇게 말했다. 보지 않아도 저에게 묶인 타오의 시선은 빤히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아쉬움이 가득하다고 할 만한 표정으로, 타오는 잠시 우이판을 응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자요."
우이판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결국 또 너는 그렇게 네 욕심을 포기하는구나. 그저 싫다는 한 마디면 될 것을, 타오는 그러지 못했다. 몇 번이고 더 한숨을 폭폭 내쉬던 우이판은 곧 침대에서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휙 침실을 빠져나갔다. 그를 따라 타오도 조심스럽게 침실을 나섰다.
"……우이판?"
거실 소파에 몸을 묻은 우이판의 얼굴이 어두웠다. 저녁 식사 후로 계속 저런 표정이었다. 타오가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느린 걸음으로 우이판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 있어요?"
"……."
"오늘 왜 그러는……."
"타오."
"……응?"
우이판은 타오를 돌아보지 않고 눈을 꾹 감았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타오가 스스로 속마음을 눌러 재우지 않고 드러내 주었으면 했다.
"오늘은 따로 자자."
"……."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랬으면 했다.
"……알았어요."
그렇지 않으면, 자꾸 나쁜 생각을 품게 되니까.
결국 타오의 생일로 넘어가는 그 밤을 우이판과 타오는 거실과 침실에서 각자 보내 버렸다.
"생일 축하해, 타오."
"으응, 고마워요."
"대답에 왜 그렇게 힘이 없어?"
"저기, 우이판……."
구두를 신고 앉은 자리에서 일어난 우이판의 옷깃을 탁탁 정리하며 타오가 망설이듯 입을 열었다.
"응?"
"……기분은 좀 풀린 거예요?"
"……."
"어제 너무……. 안 좋아 보여서……."
또다. 또 불쾌한 감정이 우이판을 짓눌렀다. 타오가 할 수 있는 말은 많았다. 맛있는 케이크 사 와요, 라든가. 오늘은 일찍 들어와요, 라든가. 조금 더 생일을 맞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말이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마저도 타오는 눈을 뜬 순간부터 제 눈치를 보기 바빴다. 아니, 타오가 정말 그랬든 아니든 중요치 않았다. 우이판의 눈에 그렇게 보였으니 그런 거였다. 우이판은 이제 어둡다 못해 싸늘해진 얼굴로 타오에게서 몸을 돌려 현관문을 잡았다.
"늦어. 기다리지 말고 자."
대답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 대답이래봐야 어차피-.
"응, 알았어요."
젠장. 우이판의 얼굴이 파삭 구겨졌다.
타오는 늘 그랬다.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정확히는 저의 집에서 가정부 일을 했던 어미 탓에 늘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왔다. 그건 누구보다 우이판이 잘 알았다. 그러나 도련님과 그 발 아래의 누군가가 아니라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둘이 묶인 지금, 타오가 다른 이의 시선에 주눅 들 필요가 없다는 사실 역시 우이판은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타오 본인조차 모르는 그 사실을, 우이판은 세상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다 못해 타오가 천성에 욕심이 끼지 않은 부처 같은 인간이라면 또 몰랐다. 그러나 우이판은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를 분명히 기억했다.
'……예쁘다.'
'뭐가? 저거?'
우이판에게 붙들려 나온 타오가 시내 한복판에 세워진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되묻는 우이판에게 퍼뜩 놀라며 아니라고 고개를 젓긴 했지만 타오의 눈은 그 트리에서 한참을 떨어지지 못했다. 그 길로 타오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우이판은 곧장 트리를 만들 준비를 했다. 아닌 척 해도 타오의 눈은 기대에 차 반짝거렸다. 그러나 트리는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하아, 미안. 하루 아침에 그렇게 큰 트리를 만드는 건 무리였나봐.'
시무룩한 얼굴로 망가진 트리 모형을 내던지며 우이판이 힐끔 타오의 얼굴을 살폈다. 기대가 컸으니 조금은 울상이라도 짓는다든가, 아니면 어떻게든 만들어 달라고 떼라도 쓸 줄 알았다. 그러나 타오는 말간 웃음을 띠며 우이판에게 답했다.
'괜찮아요, 그런 거 없어도.'
괜찮지 않으면서. 실은 트리가 보고 싶었으면서. 우이판은 타오를 따라 웃지 못하고 얼굴을 굳혔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우이판은 타오의 연인이었고, 타오가 저에게 숙이고 들어올 이유는 전혀 없었다. 하물며 타오의 그런 행동은 이제 우이판으로 하여금 불안마저 느끼게 했다. 둘의 관계에서 애가 타고 매달리는 건 저뿐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그렇다면, 조금 지치는 거였다. 우이판은 타오의 곁에서 그 마음을 열어 주기 위해 몇 년을 노력했고 타오는 그런 우이판을 무시해 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타오와 달리 감정에 지나치게 솔직한 우이판은 한참의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저는 지쳤다. 타오에게.
"……진짜 늦으려나……."
타오가 식탁 의자에 앉아 멍하게 중얼거렸다. 다른 건 하나도 원하지 않지만 퇴근은 빨리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
……아니, 사실 하나도 원하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그럴싸한 새 책상이나, 새로 낸 자리에 걸 귀걸이가 있었으면도 했다. 그러나 타오는 딱 그런 정도였다. 있었으면- 하는 정도. 그런 것이 없으면 죽을 것 같다거나 그런 것에 대한 생각으로 밤잠을 설치는 건 아니었다. 있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없어도 큰 상관은 없었다. 타오는, 욕심이 적은 만큼이나 그 적은 욕심을 숨기는 방법도 잘 알았다.
'넌 아무것도 원해서는 안 돼.'
'왜요?'
'너는 그냥,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살면 돼.'
누군지 모를 목소리가 머리에 맴돌았다. 그와 비슷한 말을 했던 게 한두 명의 어른은 아니었기에 굳이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엄마였을 수도 있고, 주인집 사모님이었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저와 다른 아이들을 눈에 띄게 차별하던 유치원 선생님일지도 몰랐다. 아니,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문득 우이판의 고백을 받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의 우이판은 아주 멋있었다. 물론 두말할 것 없이 지금도 멋있기는 하지만, 그날은 정말로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끌어다 잡은 제 손에 반짝이는 반지를 끼우며 우이판은 말했었다.
'난 널 갖고 싶어.'
갖고 싶다라-. 타오가 하기에는 다소 벅찬 그런 말을 우이판은 너무나 쉽게 내뱉었다. 타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이판이 그렇게 말한 이상 저에게 고민을 길게 할 시간은 없다, 라고 타오는 생각했었다. 뭐, 지금이야 그런 것의 앞뒤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만큼 우이판이 좋아졌지만서도.
어느 새 해가 지고 있었다. 황혼이 피어난 붉은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단 타오가 손을 뻗어 휴대전화를 들었다. 정말 늦으려나.
"……생일인데……."
괜히 마음 한 구석이 찌르르했다. 타오의 휴대전화 액정에 우이판의 번호가 우두커니 떠올랐다. 그러나 타오는 그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전화를 걸자니 일하는 우이판을 방해하는 것 같아 미안했고, 그냥 있자니 늦는 우이판에 신경이 쓰여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타오는 그저 우이판의 번호를 바라만 보는 것에서 스스로 합의를 마쳤다. 누가 보면 진짜 멍청하다고 할 거야, 그런 생각에 타오의 입가에는 피식 웃음이 흘렀다. 그러나 그런 타오의 마음이 통하기라도 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전화가 윙윙대며 울렸다. 타오가 놀란 눈으로 휴대전화를 받쳐 들었다.
우이판이었다.
"여보세요?"
「나야.」
타오의 목소리가 엷은 설렘으로 젖어들었다.
"퇴근했어요?"
「아니.」
"아아."
비록 금방 다시 죽어 버리긴 했지만.
"저기, 우이판……. 언제 퇴근……."
「타오.」
"……응?"
「할 말이 있는데.」
타오가 갸웃거리며 우이판에게 보이지 않을 고갯짓을 했다. 할 말? 무슨 할 말? 생일 축하를 또 하려나? 타오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무슨 할 말?"
「……타오.」
"응?"
우이판의 한숨이 귓가에 들려왔다. 어디선가 긴장감을 고조시키듯 톡톡거리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타오는 그게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빗방울이 빠르게 굵어지고 있었다.
"응?"
타오가 우이판을 살짝 재촉했다. 어쩌면, 그러지 않는 게 좋았을지도 몰랐다.
「그만 하자.」
"……우이판?"
「헤어지자, 우리.」
"……."
고백을 하던 때처럼 이별 통보 역시 우이판은 막무가내였다. 타오는 이번에도 저에게 고민을 길게 할 시간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천천히 입을 열고, 대답을 내뱉었다. 우이판 역시 짐작하고 있을 그런 대답을.
"……알았어요."
비가 요란하게도 내렸다. 창밖에도, 타오의 눈가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