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과 청년 사이
1.
"야, 박찬열."
"왜."
찬열이 차가운 책상 위로 볼을 비비며 느리게 대답했다.
"너 진짜 학원 다닐 거냐?"
"그걸 말로 해야 아냐."
"하긴, 네가 학원 같은 데에……."
"야, 저거 누구냐?"
"어? 누구?"
찬열이 기울었던 몸을 일으키며 어딘가로 눈짓을 했다. 그 시선의 끝을 따라간 찬열의 친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
"저기. 저 하얗고 작은 거. 학생이야?"
"아, 조교 형?"
친구의 말에 찬열이 입술을 말아 호오, 하는 소리를 냈다.
"아니, 학생 아니고-. 아르바이트. 대학생."
"쌤이라고……?"
찬열의 눈이 멀리서 백현을 구석구석 훑었다.
"어. 성격도 좀 찌질하긴……."
"야."
"어?"
"나 여기 계속 나올 거다."
"뭐라고?"
"나 학원 계속 다닐 거라고."
찬열의 담담한 말에 친구가 또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어디 아프냐?"
그러나 찬열의 시선은 이미 백현에게 고정된 채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엔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고 학원은 끝난 뒤였으며 저는 학원에서의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에 가려던 어느 대학생의 앞길을 막고 선 채였다.
"저기……. 좀 비켜 줄래?"
"아."
저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큰 남학생이 좁은 복도를 막고 서자 백현이 난처하게 눈을 굴렸다. 찬열은 한쪽으로 스르르 물러나며 백현에게 길을 내어 주었다. 그러나 백현을 쉽게 보내 주진 않을 생각인 듯했다.
"형."
"……나?"
"네."
"왜?"
"이름이 뭐예요?"
"……왜?"
어지간해서 학원의 원생들과 이렇다 할 소통은 하지 않는 백현인지라, 제 이름을 묻는 찬열에 백현의 동그란 얼굴에는 다소 당황이 서렸다. 찬열은 굳이 변명거리를 찾지 않으며 씨익 웃고 백현에게 답했다.
"마음에 들어서요."
"……뭐가?"
"형이."
"내가 마음에 들었다고?"
"네."
백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찬열을 스윽 올려보았다. 그리고, 실실대며 저를 '내려다보는' 찬열의 시선에 자존심이 상하고 말았다.
"집에나 가라."
"아, 이름이 뭐냐니까요!"
"알려 주면 뭐. 스토킹이라도 하게?"
"그런 거 좋아해요? 못할 것도 없는데."
이거 진짜 또라이 아니야? 백현이 조금 전과 같은 생각을 되풀이하며 찬열에게서 등을 완전히 돌렸다. 누가 저런 멀대 같은 또라이한테 이름을 순순히 알려 줄 줄 알고?
"아, 백현 씨-. 조심히 퇴근해."
에이씨. 백현의 미간이 한 번 더 팍 찌푸려졌다. 동시에 찬열은 한 번 더 실실거리고 웃었다.
"백현? 백현이 형? 성은 뭔데요? 이백현? 한백현? 최백현?"
"변이다, 변! 변백현!"
"와, 이름도 무지 귀엽다."
이거 진짜 완전 또라이네? 백현은 찬열을 더 상대하기를 포기하고 입을 도르르 닫으며 학원을 빠져나갔다. 등뒤에서 찬열의 부름이 끝없이 저를 쫓아왔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한 주가 지나갔고, 지난 주 일요일 저의 이름을 묻던 어느 당돌한 고등학생쯤은 까마득하게 잊은 백현이 특유의 종종대는 발걸음으로 학원 문을 열었다.
"어휴, 이제야 오네. 빨리 빨리 좀 안 다녀요? 기다리다 더워 돌아가시는 줄 알았잖아요."
그리고, 찬열과 마주쳤다. 백현은 예상치 못한 이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네가 날 왜 기다려?"
"왜 기다렸겠어요?"
"……."
"응? 왜 기다렸을까나-."
부러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표정을 지으며 웃는 찬열에 백현의 얼굴이 팍 찌푸려졌다. 계속 물었다간 또 형이 마음에 든다느니 어쩌니하는 헛소리가 튀어나올 분위기였다.
"일찍 왔으면 가서 자습이나 할 것이지. 학생이 말이야."
"거기 아무도 없던데."
"아무도 없으니까 더 좋은 거야, 이 자식아."
"아아-. 형은 아무도 없는 데 좋아해요? 지금이라도 갈까요?"
"그게 무슨……."
"하긴, 사람 많은 데에서 스릴을 즐기는 것보다는 아무도 없는 데에서 마음 놓고……."
"야!"
능글거리는 찬열의 말은 결국 백현의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서야 멈추었다. 소리는 빽 질렀으나 막상 할 말이 없어 숨만 몰아쉬는 백현을 보며 찬열이 킬킬대고 웃었다. 아, 얼굴 빨개진 것도 귀여워.
"근데 백현이 형."
"몰라."
"아, 형-."
"비켜, 좀 들어가게."
"대답하면 비킬게요."
수업 시작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학원에 도착하는 학생 수도 속속 늘어나고 있었다. 좁은 입구를 막고 선 찬열과 백현 탓에 그 뒤로 줄을 지은 학생들은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 고개를 빼꼼거리며 웅성대기 바빴다. 그런 주변을 인지한 백현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대답해 줄 테니까 비켜. 민폐잖아, 이거."
"진짜?"
"그래, 그래. 들어가서 얘기해."
"오케이."
드디어 찬열이 문에서 물러났고 몰렸던 인파가 학원 안으로 밀려들었다. 그 속에 슬그머니 몸을 묻으려던 백현의 손목을 채어 잡은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찬열이었다.
"어딜 가시려고."
"에이씨……."
백현이 찬열의 눈길을 피하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형."
"왜, 인마."
"제 이름 알아요?"
"몰라."
내가 네 이름을 알아서 어디 쓰라고. 백현이 작게 툴툴거리며 찬열에게 잡힌 손목을 버둥거렸다.
"박찬열이에요, 박찬열."
백현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나 찬열은 고집스럽게 백현과 눈을 맞추며 계속해서 저의 이름 석 자를 반복해댔다.
"응? 박찬열. 어때요? 이름도 완전 멋있죠."
"웃기시네, 이거 안 놔?"
"멋있다고 해 줘요."
"놔, 좀."
"멋있다고 해 주면."
백현의 입술 사이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세 살짜리 조카도 이렇게 말을 안 듣지는 않는데, 이건 무슨 고등학생이 세 살배기 어린 애보다 더 못나 보였다.
"멋있다고 해 줘요-. 멋있죠?"
"그래, 멋있다."
"나한테 반했죠?"
"그래, 반……. 뭐?"
백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고 찬열은 아쉽다는 듯이 눈을 한 번 찌푸리며 백현을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곧바로 찬열의 등에 백현의 매운 손바닥이 짝소리를 내며 날아들었다.
"아-!"
"너 말이야, 장난 좀 작작 쳐라. 어? 학원에 왔으면 공부를 해야지. 한 번만 더 이런 장난 쳐 봐, 어디. 원장님한테 말해서 너희 엄마한테 전화가게 할 거야, 알았어?"
백현이 떽떽거리며 잔소리를 늘어 놓았지만 찬열은 제대로 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백현에게 맞은 등자리를 힘겹게 손으로 쓸어대며 제자리에서 방방 뛰던 찬열이 백현을 쏘아보며 대꾸했다.
"장난 아닌데! 누가 장난이래요?"
"지금 이게 장난이 아니면 뭐야!"
"나 정말로 형한테 반했다니까요! 아, 근데 진짜 아파……."
백현이 후욱하고 앞머리를 불어 올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아악!"
가차없이 찬열의 등짝을 때렸다.
"수업 일 분 전이다, 지각하기 싫으면 쉬지 말고 뛰어 올라와라."
"아, 형! 백현이 형! 야, 변백현!"
찬열의 코앞에서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다다다 누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