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과 청년 사이
3.
주말이 네 번 더 지났고 찬열은 여덟 번 더 학원에 왔으며 저는 최소한 여든 번은 찬열에게 성질을 부렸을 것이다, 라고 백현이 생각했다.
"왜요? 학생이 공부하러 학원 다니는 게 이상해요?"
"그게 아니라, 너……. 너 공부하러 다니는 거 아니잖아!"
백현의 손가락 끝이 찬열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확히는, 엄마와 계약한 방학 한 달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조금 전 학원의 데스크에서 그 다음 달 수강 신청을 다시 한 찬열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었다.
"공부하러 다니는 건데?"
"거짓말……."
"어어? 학원에 당연히 공부하러 오지, 아니면 뭐 하러 와요?"
"……."
"혹시 형 때문에 왔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죠? 에이, 설마."
"……."
"진짜-? 진짜 그렇게 생각했어요, 형?"
백현이 작게 툴툴거리며 몸을 돌렸다. 왠지 민망했다. 백현의 작은 머리통 옆으로 보이는 새빨간 두 귀에 찬열은 박장대소를 하고 그 어깨를 끌어당겨 제 팔을 턱 걸쳤다.
"그런 생각 해도 돼요, 백현이 형."
"누, 누가 그렇다고……."
"그게 맞으니까."
"……."
"나 형 때문에 학원 다니는 거잖아요. 형 생각이 정답."
백현은 말이 없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잠시 찬열과 백현은 그대로 서 있었다. 그리고,
"아악-!"
백현이 찬열의 운동화 위로 그 발등을 꾹 눌러 밟았다.
"아, 왜요!"
"요즘 애들은 이러고 노냐? 장난 좀 적당히 쳐-."
"장난 아니라니까요! 나 진짜 형 좋아……."
"시끄러워! 수업 끝났으면 집에 가!"
찬열이 밟힌 발을 들고 콩콩 뛰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백현은 매정하게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백현이 혀엉-. 이제 뭐 해요? 오늘 약속 있어요?"
"없어도 있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형, 이제 할 거 없죠? 네?"
"집에 갈 거다, 인마!"
"에이-."
다시 제 어깨에 손을 올리려는 찬열을 잽싸게 피한 백현이 가방을 고쳐 맸다. 그리고는 서둘러 학원 복도를 걸었다. 당연히도 그런 백현을 뒤따르려던 찬열은 마침 저의 쪽지 시험을 채점 중이던 담당 강사에게 딱 걸려 붙잡히고 말았다. 찬열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제 어깨에 손을 올린 이를 깨닫는 잠깐 사이 벌써 계단에 발을 디딘 백현은, 예상 외로 조용한 제 등뒤에 힐끔 고개를 돌렸다.
"……."
낮디낮은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게도 수다스럽던 찬열이 들리지 않자 어쩐지 허전했다.
"……별 생각을."
그냥 좀 친해진 모양이지. 백현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나 집에나 가라며 찬열에게 빽하니 소리를 내지른 심장은 평소보다 유난히 벌렁거리는 것도 같았다.
한편 찬열은, 끌려 온 교무실에서 오답 정리는 커녕 자신의 연애 사업에 힘을 실어 줄 거름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동그란 눈을 들이밀며 이것저것 캐묻는 얼굴에, 찬열의 감독을 떠맡은 백현의 친구이자 또다른 학원의 아르바이트생 종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백현이 형은 학교에서도 인기 많아요?"
"그래, 그래. 걔가 어디 가서 미움 받을 성격은 아니라서."
"고백도 받고 그래요? 아, 그러면 안 되는데."
"인마, 너 집에 언제 갈래? 얼른 끝내고 좀 가자-."
"아, 대답해 주세요. 네? 백현이 형한테 고백하는 사람도 많아요? 네-?
괴로워하는 종대의 모습에 그 뒤로 지나가던 학원 강사가 찬열의 뒤통수를 소리나게 툭 때렸다. 찬열은 잽싸게 뒷머리를 부여잡으며 고개를 돌렸다.
"박찬열, 너 조교 형들 좀 그만 괴롭혀라. 백현 씨가 아주 너 때문에 미치고 팔짝 뛰더라."
"왜요? 제가 너무 좋아서?"
"얼씨구-."
강사의 손이 다시 한 번 찬열의 머리를 때렸다. 요즘 부쩍 여기저기 많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에 찬열은 괜히 입술을 조금 비죽였다. 그래도, 백현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것은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혼자 입을 내밀었다 또 혼자 실실 웃길 반복하는 찬열을 보며 학원 강사나 종대는 조금 오싹해지는 등을 느꼈다.
"형, 형. 그럼 혹시 백현이 형 이상형 같은 것도 알아요?"
"글쎄 네가 그런 건 뭣 때문에 알려고 하는데?"
"아, 그거야 당연히-!"
당연히-. 당연히……. 더 말하려던 찬열의 입이 조심스럽게 닫혔다.
"그냥요. 백현이 형이랑 친해지고 싶어서."
"백현이랑 친해지고 싶으면 공부나 열- 심히 하셔. 이렇게 딩가딩가 시간 보내지 말고. 어?"
"저는 공부 안 해도 성적 좀 나와요."
"그런 게 어딨냐?"
"저는 잘- 나가는 일진이라."
일진 같은 소리 하네. 대한민국 일진 다 죽었다, 인마. 종대는 그런 생각을 하며 찬열을 스윽 흘겨보았다. 학원에 다니는 학생들로부터 간간이 들어 온 문제아 박찬열의 이야기는 언제고 뉴스에 한 번 나오기라도 할 듯 심란하기 그지없었건만, 실제로 보니 또 그렇게 답이 없는 녀석 같지는 않고……. 아니, 오히려 종대의 눈에는 찬열이 유명한 문제아라는 것보다 제 친구 백현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게 조금 더 거슬렸다.
"그 나이 먹고 그런 말 하면 스스로도 좀 부끄럽고 하지 않냐?"
"전혀."
"아무튼 백현이랑 친해지려면 공부나 해, 이 놈아. 백현이는 잘- 나가는 법대생인 거 몰라?"
종대의 말에 찬열이 못 이기는 척 빨간 빗금이 군데군데 죽죽 그어진 시험지로 고개를 숙였다. 물론 그런다고 시험지 내용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다. 몇 번을 되돌려 생각해도 아까 백현의 퇴근길을 따라 나가지 못한 게 아까웠다. 분명 오늘 저녁은 약속이 없어 보였는데. 아, 백현이 형 목소리 듣고 싶다. 그러고 보니 번호도 모르네……. 백현에 대한 갖가지 생각이 쉴 새 없이 찬열의 머릿속을 꽉꽉 채웠다.
"형."
"또 왜!"
"백현이 형 핸드폰 번호 알아요?"
"알지, 그럼."
"저 알려 주면 안 돼요?"
너무나 뻔뻔한 찬열의 태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헛웃음만 나오게 했다. 종대가 한숨을 포옥 내쉬며 벽에 걸린 동그란 시계를 힐끔 확인했다.
"너 삼십 분 안에 그거 다 끝내면 알려 줄게."
"어어, 진짜? 진짜죠?"
"딱 삼십 분이다."
"네! 하고 만다, 내가!"
공부를 안 해도 성적은 좀 나온다더니 아예 없는 소리는 아니었는지, 의구심 가득한 종대의 눈을 픽하고 비웃으며 찬열은 정확히 이십칠 분 만에 끝마친 오답 정리를 책상에 쓱 내밀었다. 종대가 입을 턱 벌렸다.
"됐죠?"
"어어……."
"이제 빨리 백현이 형 번호."
종대가 찬열의 오답 정리를 눈으로 훑어가며 다소 얼떨떨하게 찬열의 휴대전화를 건네 받았다. 그리고, 제 휴대전화에서 백현의 번호를 찾아 곱게 눌러 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