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모리 박스 00 "안녕?" 따사로운 햇살이 차가운 바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올 때 나는 너를 기억한다. 풀린 첫번째 단추 아래로 내려온 넥타이를 살살 잡아당기며 나른한 표정으로 내 옆자리에 앉아 나를 반기던 너를. 찬열. 박찬열. 특별히 튀는 행동을 하지 않아도 어딜가나 항상 주목받고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 동성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사실로 만들고도 박찬열이라는 존재를 인정받는 사람. 금방이라도 잠을 쏟을 듯한 눈빛은 나를 보고 있었고 대답을 기다리는 듯 했다. 안녕. 찬열아. "연아 어제." 백현이 만났지? 덧붙여 말하는 찬열을 지나쳐 자리에 앉으면 너는 또 내 대답을 재촉하는 듯 몸을 틀어 나를 바라본다. 비치는 햇살을 고스란히 받으며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는 갈색 머리는 부드러워 보였고 바람에 실려온 포근한 냄새와 오늘도 어김없이 나에게 백현의 소식을 물어오는 그 모습에서 내가 그에게 뭘 바랬는지 어떤 마음이었는지. 아마 찬열은 오래도록 모를 것이다. "응. 만났어." "둘이서 뭐하고 놀았는데? 재밌었어?" "..응" "정말? 그럴 리가 없는데." 찬열의 말에 이연은 눈을 내리깔았다. 슬퍼보였다. 당연히 그래야지. 내가 존나 좋아하는 백현을 울린 년이 넌데. 넌 백현이가 엄청 아끼는 서이연인데. "백현이가 도통 말을 안해서 그러는데." "니가 말해봐. 어제. 걔한테 무슨 말 했어?응?" 찬열은 이연이 자기 때문에 힘들어 하는 모습을 즐겼다. 자기가 좋아하는 변백현의 여자친구. 찬열에게 이연은 자신이 받지 못한 과분한 그 사랑을 매번 거절하는, 내가 갖고 싶어 안달난 것을 보란듯이 짓밟아주는 가증스런 존재일 뿐이었다. "백현이..부탁할게 찬열아." 시원스럽게 올라간 찬열의 미소는 철저히 백현의 것이었다. 백현만이 찬열의 관심을 얻게 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다. 찬열이 백현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아버렸을 때 이연의 나이는 고작 열 네살이었다. 자신이 찬열을 사랑한다고 깨달았을 때 이연은 이미 백현의 마음을 내칠 용기가 없다는 것을 단념했다. 백현을 생각하는 찬열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커졌고 그럴수록 찬열을 사랑하는 이연의 마음은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되었다. 결국. 고백할 용기도, 사랑할 용기도, 그럴 만할 자격도 아무 것도 없는 이연에게 허락된 건 그저 갈수록 위험해지는 미로의 주인처럼 끝을 알 수 없이 엉킨 실타래의 마지막을 결정할 수 밖에 없는 외롭고 슬픈 운명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연은 그 운명의 끝에서 자신을 희생할 준비를 하고 있다. "미친." "우리 연이 그런 말 함부러 하는거 아니라는 거 알잖아. 응?" 진짜 내가 가지고 나서 매달리면 다 그게 무슨 소용이야? 여전히 나른한 미소로 눈을 비비며 느릿느릿 내뱉는 찬열의 말은 경고였다. "사랑해줄때 잘 받아처먹어." 모이라이는 운명을 결정할 수 있지만 이연은 그녀들이 짜놓은 운명의 마지막을 마무리지어야 했다. 백현의 마음이 자신에게 향한 그 순간부터 찬열은 이연의 사랑이 될 수 없었다. 그녀는 지독히도 아픈 사람이었고 찬열과 백현은 그런 그녀를 애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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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남연예인 중에 서인국 처럼 설레게 날티나게 생긴 사람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