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너는, 지금의 너와 같을까. 난 요즘 이런 생각이 많이 들어. 과연 6년 전의 너는, 지금과 같았을까.
난 감히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1000일이 넘는 시간 동안, 넌 변했고, 나도 변한 것 같아.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 그건 확실해.
우린 너무 많은 일들에 무뎌졌고, 처음과 같은 설렘도, 두근거림도 우리 둘 사이에 흐르는 것 같지 않아.
서로가 일상이 되는 거, 내 꿈이었고, 내가 바라던 일이었는데, 그게 이렇게 아픈 일인 줄 나는 꿈에도 몰랐어.
지쳐 간다는 말이 맞을까. 맞아, 나는 요즘 많이 힘들어.
오래된 연인들이 이별하는 방법
기억 나려는지 모르겠어. 6년 전에, 아마 겨울이었던가. 우리는 처음으로 손을 잡았고, 그 작은 떨림에 귀와 볼을 붉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너는 볼을 붉히면서도 내 손을 더 꽉 잡았었지. 그리고 웃었어. 부끄러워서였을까. 그냥 보고만 있어도 좋았던 때가 있었는데.
아무것도 안 해도 좋았어. 하루 종일 붙어 있었는데도 할 얘기가 끊임없이 많았고, 넌 나의 모든 게 궁금하다고 했었어.
내 취미, 내가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색깔은 뭔지. 사소한 것들이었지만 너는 계속 나한테 물어봤었어.
가끔 같이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면 넌 질투를 했었다?
'내가 잘생겼어, 아니면 쟤가 더 잘생겼어.'
'일단 넌 아니야.'
'와....'
왜 그런 걸 비교하려고 드는지 이해할 순 없었지만 나는 너가 귀여웠어. 끝내 너가 제일 멋있어, 라는 말을 듣고 싶어했던 넌 원하는 답을 듣고 웃었지.
아, 그리고. 너랑 나랑은 이상하게도 맞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어. 성격부터, 생각하는 방식까지. 좋아하는 영화, 음악까지도.
평행선처럼 우린 취향이 달라도 너무 달랐지. 입이 짧은 나와는 다르게 넌 아무거나 잘 먹었고, 손재주가 없고 정리정돈을 잘 못하는 나와는 달리 넌 집안일을 잘 했어.
내가 보러 가자고 한 영화가, 너가 제일 싫어하는 종류의 영화였다는 걸 알았다면 안 봤을 텐데. 그런데도 넌 꿋꿋이 나랑 같이 영화를 봐 줬었지.
너 때문에 나는 돈 주고는 절대 안 볼 것만 같던 공포 영화도 보고, SF 영화도 봤었어. 그러고 보니까 우리 영화 진짜 많이 봤네.
슬픈 거 보면 나보다 너가 더 많이 울었었는데.
옛날에 너가 나한테 맨날 이거 하자, 저거 하자. 했을 땐 귀찮다구, 싫다고 했던 적이 많았던 것 같은데. 많이 해 둘 걸 그랬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원래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지는 거라는 말 있잖아. 난 그 말의 의미를 이제 알 것 같아. 나한테 너가 너무 커져서, 나의 시간만 너무 느리게 가고 있어서,
네 맘이 변하는 걸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아. 더 많이 사랑했던 너의 시간은 너무 빨라서, 나는 이제 네 뒤에 서 있는 것만 같아.
넌 앞서갔고, 난 너한테 많은 걸 주지 못했던 것 같아.
'무슨 생각해?'
'......그냥.'
내 앞에 앉아 있는 너는, 예전과 많이 다른 것 같아. 내가 입 열 틈도 없이 말을 걸어 오던 너는 이제 없어졌지.
의무감 때문에, 억지로 앉아 있는 사람인 마냥 넌 아무 말도 없었어. 내 눈을 다정하게 맞추던 너는 온데간데 없더라.
널 잃어버린 것 같았어. 무슨 일 있냐고, 묻고 싶었는데. 자존심 때문에 난 너한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어.
너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화라도 내고 싶었어. 그런데, 그랬다가는 널 정말 영영 못 볼 것 같은 거 있지.
그래서 못하겠는 거야. 그리고, 너가 나 때문에 지친 것 같아서. 모든 게 서투른 나한테 정말 질려버린 것 같아서,
너한테 매달릴 수가 없었어. 그 때부터였을까, 난 남몰래 그냥 너를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어.
오랜만에 노트북을 켜서 너랑 찍었던 사진들을 한 장씩 넘겨 봤어. 졸업식 날 찍었던 사진을 보니까,
우리 참 어렸었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 활짝 웃고 있는 네 모습을 보니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
처음 데이트 했던 날, 그리고 같이 여행 갔었던 날. 여행 가서 한 번 대판 싸우고 난리 났었는데. 그러다가 화해하고.
아, 그리고 너가 나 아팠을 때 와서 죽도 쒀 주고 그랬었는데. 내가 이걸 왜 찍어놨는지 모르겠네.
몇 만장이 넘는 사진들을 보기가, 우리의 추억들과 마주하기가 나는 너무 힘들었어.
결국엔 그냥 삭제 버튼을 눌러 버렸어. 순식간에 휴지통으로 들어가는 사진들을 보면서,
이제 우리도 이만큼 밖엔 안 남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아, 미안해. 오늘 못 만날 것 같아.'
'......아니야, 괜찮아.'
'미안. 애들하고 갑자기 약속이 잡혀서.'
나한테는 더이상 내가 우선이 아니라는 게 느껴질 때, 제일 비참했어.
내가 너의 모든 일상을 좌지우지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나랑 잠깐 얼굴 보는 것보다, 남들을 만나는 게 너한테 더 중요하다는 게, 난 속상했어.
내 이기심 때문에 내가 너의 숨통을 조르는 걸까, 라고도 생각해 봤는데. 난 그 정도 대인배는 못 되나봐.
친구랑 약속.... 그래, 있을 수 있지. 그럴 수 있지. 근데, 나 오늘 생일인데. 넌 까먹었나 봐.
하긴, 만나면서 여섯번도 더 챙겼을 텐데, 별 일도 아니지. 그러다가 그냥 울어 버렸어.
너에게 바람 맞고 와서, 친구한테 연락을 받았었어. 너한테 관심을 가지는 여자가 있다고.
별로 놀라지 않은 척 했어. 사실은 나도 대충 눈치는 채고 있었다? 너 거짓말 못 하는 거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데 모를 리가 없잖아.
평소엔 잘 보지도 않던 핸드폰을 계속 만지는 것도, 나가서 전화를 받고 오는 것도.
좀 바꾸라는 핀잔을 내가 할 정도로, 늘 그대로였던 프로필 사진이 없어진 것도.
난 너가 수상하다고 생각했어. 그러다 그냥 받아들이게 됐어.
너한테 화를 내거나, 누구냐고 묻거나 할 것도 없었지. 그게 우리 사이인 걸.
별 기대도 이젠 하지 않게 됐어. 단지, 너의 새로운 만남이 우리가 헤어지고 나서 시작되길 바랄 뿐이었어.
오랜만에 너가 써 준 편지를 꺼내서 읽었어. 읽자마자 눈물이 나와서, 잉크가 좀 번졌는데.
그거 하나는 그냥 간직하기로 했어. 내일, 우리가 헤어지게 되어도, 이 편지 한 장은 간직하려고 해.
'결혼하자고?'
'응. 너가 싫어도 너랑 무조건 결혼 할 거야.'
'........'
'내가 돈 많이 벌게.'
삐뚤빼뚤한 글씨, 그리고 네 말투가 그대로 묻어 나와 있는 문장들.
너가 나를 바라봤던 시선, 우리가 미래를 그리며 생각했었던 모든 것들이 담겨 있는 종이 한 장.
나는 내일, 너와 이별하려고 해. 울지 않을 거야. 수 백번 다짐하며, 잠도 오지 않는데 억지로 눈을 붙였어.
아직 내 핸드폰 배경화면은 너랑 찍은 사진인데, 그걸 바꿀 생각도 하지 않고 말이야.
오늘도 너는 귀찮은 듯한 표정이었어. 말투가 날카로웠고, 한숨을 쉬기 일쑤였지.
조금 떨렸어. 기대감, 이런 건 아니었지. 내 말 한 마디에, 이제 우리는 남남이 되는 거니까.
너가 붙잡지 않을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 나만 놓으면 되는 관계니까. 그게 좀 무서웠어.
평소와 다르게 말이 없는 내가 이상했는지, 너는 툭 던지는 듯한 말투로 나한테 물었어.
"왜 그렇게 우울하게 있어."
"우울해 보여?"
"어. 너 좀 이상한 거 같은데."
이상한 것 같은데. 그 한 마디에 눈물이 날 것 같았어. 너는 알까.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이제는 없으면 허전할, 반지를 손에서 뺐어. 차가웠어. 뭘 하는 거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너는 당황하고 있었어.
그걸 왜 빼. 물어오는 너의 손을 보니 네 약지에는 반지가 늘 그렇듯, 끼워져 있더라. 코 끝이 찡해졌어.
그래도 약해지면 안 돼, 이러면 안 돼. 오늘 말하기로 했잖아. 나는 울고 있는 걸까.
"민규야, 있잖아."
"......."
"이제 우리 그만 만나자."
"......뭐라고?"
"나는, 이제 너를 놔 줘야 될 것 같아."
"......."
"행복했으면 좋겠어, 너가."
"......."
"근데, 나랑 있으면 넌 행복할 수 없을 거 같아, 민규야. 미안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너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어.
너가 날 따라오는지, 아니면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을지. 알 수도 없을 만큼 빨리 걸었어.
내심 너가 날 잡아주길 바랐을지도 모르지. 너랑 헤어지면 안 된다고, 날 붙잡길 바랐을 지도 몰라.
집에 가는 방향인지, 아닌지도 모를 버스를 탔어. 나를 찾으러 나온 건지, 주변을 서성거리는 너가 보이더라.
역시나 핸드폰을 켜 보니, 너한테 계속 전화가 오고 있었어. 절대 바꾸면 안 된다고, 너가 직접 저장했던 네 이름.
밍구. 그 때는 유치하다고, 오글거린다고. 짜증냈었는데. 이게 왜 이렇게 슬퍼 보이는지 모르겠어.
너는, 나 없이 행복할 수 있겠지?
나는, 너 없이 행복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