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만의 시간
3부
5.
결국 어제 술은 한 모금 마시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아침에 늑장 부리는 게 습관이 되어버린 건지 머리맡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을 무시한 채 깊은 잠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김종인의 전화가 아니었다면 일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제 버릇 개 못준다고 아침수업을 또 자체 휴강을 할 나를 너무 잘 알고 있는 김종인이 기어이 전화로 나를 깨우지 않았다면 지금 강의실에 앉아 수업을 듣는 일 따윈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머리가 아프다. 깨알 같은 글씨가 박힌 강의안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어제의 행동과 오늘의 행동이 너무 다른 김종인 때문에.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내 앞에서 핸드폰만 내내 붙잡고 있었으면서. 그렇게 나를 불안하게 만들어놓고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침부터 핸드폰이 불통 나게 전화해서 나를 깨우는 친절까지 베풀고. 김종인이 나를 들었다, 놨다 아주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든다. 이렇게 휘둘리는 건 정말 싫은데. 싫다고 하면서도 거기에 휘둘리는 난 또 무엇이며. 그 애의 속셈은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나 혼자 생각해봐야 답은 나오지 않고, 머리만 복잡할 뿐이다. 그걸 알면서도 직접 물어볼 용기는 안 나고. 연애는 참, 힘들다.
[또 자고 있지.]
[정신 차려!]
[열심히 공부합시다. 도경수씨.]
끊임없이 반짝이는 액정을 내려다보았다. 아침에 깨운 걸로도 성에 차지 않는지 웬일로 나를 챙기려든다. 이런 김종인은 또 오랜만이라 낯설게만 느껴졌다.
[안 자.]
[수업 듣고 있으니까 걱정 마.]
손가락을 움직여 그 애에게 답장을 써내려가는 것도 낯설다.
[거짓말.]
[수업 듣고 있다면서 왜 이렇게 칼 답이야?]
그런데도, 이런 그 애의 행동에 잠시 피어올랐던 의심은 접어두고 결국엔 웃고 마는 나는 참 단순하다. 수업시간 내내 이어지는 종인이와의 연락에 손가락은 쉴 틈 없이 바삐 움직인다. 김종인도 수업 시간일 텐데 그 시간을 나에게 쓰고, 나 또한 마찬가지다. 물론 그 애와의 연락이 없었더라도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을 나라는 걸 잘 알지만. 이러고 있으니 고등학교때 생각도 나고, 기분이 좀 이상하다. 잊고 있던 과거를 문득문득 떠올리게 되는 그런 사소한 일이 생길 때마다 뭔가, 아득해진다고나 할까. 괜히 그 때가 그립기도 하고, 그랬던 적도 있었지 하고 웃음 짓게 되는. 아, 좀 애늙은이 같다. 나는 고작 스무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벗어나고 싶었던 고등학교 생활이 그립고, 애틋하다. 그 때로 돌아가게 된다면 더욱 더 열심히 살았을 텐데 하는 후회와,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아예 잊어버리게 될까 무섭기도 한, 조금은 복잡한 마음.
수업시간에 웬 사색인지 모르겠지만, 참 우스운 건 이런 상념들은 수업시간에만 떠오른다는 것. 비싼 등록금 내고 다니는데 수업에 집중은 안하고, 늘 딴 생각만 머리에 가득 차있다. 으, 반성해야지. 반성은 또 내 전문 아니겠어?
[경수야]
[어제 봤는데 또 보고 싶다ㅎㅎ]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느라 미처 답장을 하지 못했다. 액정만 띄운 채 입을 헤 벌리고 멍하니 먼 곳만 바라보다가 곧 정신을 차리며 다시 시선을 핸드폰으로 고정시켰더니, 종인이의 카톡이 와 있었다. 그걸 또 멍하니 바라보다가 스물스물 왠지 모르게 간지러워지는 가슴께를 느끼며 아랫입술을 깨물며 웃었다. 아, 진짜 좋다. 진짜…좋다.
[나도.]
一
“아, 황교수님 만날 풀 수업해. 나 토하는 줄….”
“그러게. 하루 이틀 일이냐.”
“넌 수업도 안 듣는 게 말이 많다?”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을 빠져나오면서 오세훈이 툴툴거리기에 기분도 좋겠다, 맞장구나 쳐줘야겠다 마음먹고 받아줬더니 또 시비를 건다. 아침 수업을 나온 건 용한데, 대체 언제 쯤 수업 들을래? 띠거운 눈빛을 발사하며 나를 아래위로 훑는다. 그 눈빛. 맘에 들지 않아. 널 처단하겠다. 죽어라!
“그나저나 용케 학교는 왔다?”
“어.”
“김종인이 깨우든?”
“응.”
“와, 존나…. 사람 차별해. 개새끼.”
오세훈이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서 멀어지려하기에 얼른 그 팔을 붙잡고 물었다. 내가 뭘.
“내가 그렇게 전화해서 깨울 땐 받지도 않더니. 김종인 전화는 꼬박꼬박 받고 말이야…. 와, 진짜 배신감 느껴져.”
“너랑 종인이랑 같냐?”
“헐….”
“이런 게 바로 사랑의 힘이지. 남이 했을 때 불가능한 일을 해내는 것!”
나름대로 뿌듯한 웃음을 지으며 세훈이를 바라보았다. 그랬더니, 놈은 할 말을 잃고 나를 약 3초간 쳐다보다가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지랄 났네, 지랄 났어.”
시발, 또 애 보듯이 봤어. 만날 만만한건 나지. 그 반응이 맘에 들지 않아 입을 꾹 다물고 녀석을 노려보았더니 뻔뻔한 그 얼굴을 들이밀며 내가 왜, 틀린 말이라도 했냐? 한다. 개자식. 진짜 얄밉단 말이지. 그렇지만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까 내가 봐 준다. 이 형아가 용서를 해줘야지. 우리 성질 더러운 오세훈 누가 받아줄까. 쯧쯧. 이게 바로 커플의 여유랄까?
“그나저나, 너 오늘 그 약속 지켜.”
“무슨?”
“니가 전에 점심, 저녁 풀코스로 쏜다며.”
“…아.”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니, 오세훈이 만족스런 표정으로 비싼 거 얻어먹겠다고 머리를 굴린다. 아, 오늘 지갑 털리는 날이구나.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난 약속은 지키는 남자라 이거지. 가슴은 아프지만 어쩔 수 없이 내 품에서 돈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어. 아, 근데 좀 슬프다. 헝.
오세훈이 점심 메뉴를 정하는 동안, 내내 핸드폰을 붙잡고 종인이와 끊임없이 연락을 주고받았다.
[밥은 먹었어?]
[아니 아직 안 먹었어ㅠㅠ]
[아직 안 먹고 뭐했어! 누구랑 먹을 거야?]
[누구긴ㅋㅋㅋ오세훈이지. 넌 밥 먹었어?]
[응, 난 지금 먹고 있어.]
[누구랑?]
[과 동기랑ㅋㅋ근데 얘 너무 많이 먹어. 내꺼 다 빼앗아먹는다. 혼내줘.]
[내가 지금 거기로 갈까?]
아, 좋다. 나 이런 거 진짜 좋아. 이게 얼마만의 카톡인지 모르겠고. 이렇게 오랫동안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도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난다. 그러니까 더, 소중하고. 더, 애틋하고. 더, 좋고. 여자애라도 된 것 마냥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하다. 내가 너 때문에 이렇게 살아. 김종인. 종인아. 그러니까 나한테 좀 잘 해라. 응?
“입 꼬리가 아주 찢어지겠다?”
“뭘….”
“적당히 하시죠? 바퀴벌레들? 어? 쫌?”
“내 맘대로 카톡도 못하냐!”
“내가 왜! 대학까지 와서 이 꼴을 보고 있어야해? 아오, 진짜….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울분을 토하는 오세훈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도 나는 둘이니까 혼자인 너를 보듬어줄게. 그 정도의 아량은 베풀어야 된다고 생각해. 그랬더니 오세훈이 어깨에 있는 내 손을 내치면서 동정 따윈 필요 없다며 있는 성질, 없는 성질 다 부린다. 아, 얘가 이렇게 예민한 캐릭터가 아니었는데. 고등학교 때만해도 되게, 싸가지 없고 재수 없고, 아무튼 얼음장 같은 이미지였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아줌마스럽게 변한 걸까. 이것 또한 미스터리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는데, 갑자기 동기인 민혁이가 나와 오세훈 사이를 파고든다. 아, 얜 또 뭐야 징그럽게.
“야. 오센. 너 소개팅 할래?”
“…소개팅?”
“응. 간호학과 내 친군데 완전 예쁨.”
개강 초부터 백퍼센트 밝히진 못했지만 오래된 애인이 있다는 얘기는 했었다. 그래서 난 이미 여자 친구 있는 애로 이미지가 굳혀졌고. 그와 반대로 오세훈은 대학생이 된 이후로 여자 친구를 만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생긴 것도 멀쩡하고 어디 모자란 부분이 없어 보이는 애가 지금까지도 혼자인 게 신기했던지 끊임없이 소개팅을 주선해주겠다는 사람이 이어졌지만 그럴 때마다 이상하게 자꾸만 거절을 한다.
“아니. 안할래.”
“왜! 왜 안 하는데!”
예쁘다는 말에 잠시 생각하는 듯 보였던 오세훈이 결국엔 고개를 젓는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단번에 굴복하지 않던 민혁이가 녀석의 팔을 잡고 졸라봤지만 끝내 먹혀들지 않았다. 그에, 민혁이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그래. 그럼 말아라. 하고 손을 흔들며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고개를 돌려 민혁이 녀석이 멀어져가는 걸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오세훈을 바라보았다.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래서 팔꿈치를 툭 치며 말했다.
“너 왜 그러냐.”
“내가 뭘.”
“왜 사람 호의를 거절하고 그래. 그것도 한 두 번이지.”
“아니, 그냥. 좀 안 내켜.”
“…뭐가.”
왜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거지? 고등학교 때 만난 그 여자애도 소개팅으로 만났나.
“난 그런 인위적인 만남보다 자연스럽게 만나는 게 좋다.”
“…….”
“소개팅. 뭔가….”
“…뭔가?”
“절박해보이잖아.”
듣고 보니 또 그런 것도 같아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지가 싫다는데 내가 뭐, 억지로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아직은 어리니까 조급해 할 필요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짜식, 알고 보면 나랑 종인이를 부러워하고 있었던 건가. 바퀴벌레니, 지긋지긋하니 하면서도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고. 나 혼자 생각하며 킬킬 웃었다. 그랬더니 오세훈이 뭘 쳐 웃냐고 뒤통수를 때려. 아파. 시발.
***
정말정말 오랜만이에요T^T
수험생 여러분들 수고하셨어요! 아직 난관이 남으셨겠지만 그래도 수고하셨습니다! ㅎㅎ
이젠 정말 겨울인가봐요.
찬바람이 장난이 아니더라구요ㅠㅠ
감기조심하시구, 또 조심하세요!
3부 들어서 연재텀이 길어진 점에 대해 죄송하다는 말씀 꼭 드리고 싶습니다.
죄송해요..흑...
아무래도 2부처럼 가벼운 분위기가 아니다보니 매끄럽게 써내려가지가 않아요.
으..ㅠㅠ홧팅!
제가 저지른 일은 꼭 처리하고 갈거에요!
그러니 걱정마셔요! 읭?
아무튼, 다음주에는 빨리 찾아뵙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하트!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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