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E & SEEK
16.
ㅡ쪼꼬미~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혀 짧은 목소리에 인상을 팍 썼다. 뭐야, 이 새끼 술 마셨어?
“너 술 마셨냐.”
ㅡ쪼금?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벌써 취한거야. 언제부터 마셨길래. 평소에 술을 자주 마시는 편은 아니었던 종대라서 기분 상한 일이 있었겠거니, 하고 짐작해 본다. 무슨 일 있냐?
ㅡ오늘 모의고사 봤거든…. 수능이 코앞인데 괜히 싱숭생숭 해서 한 잔 했어.
술술 풀리지 않았나보다. 세상에 쉬운 게 어디 있겠냐마는, 티는 안냈어도 남들보다 늦게 도전하는 거라 그간 부담이 컸던 모양이다. 잘 해내야만 한다는 그런 부담감. 괜히 녀석이 안쓰러워서 코끝이 시큰해진다. 어떤 위로의 말을 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이런 놈에게 그동안 내 하소연이나 했으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침묵을 지키고만 있자 결국엔 종대가 먼저 말을 꺼낸다.
ㅡ심각한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알았냐?
“..네 걱정이나 해.”
ㅡ난 알아서 잘 하고 있다니까? 형님 목표가 서울대야, 인마.
다시 분위기를 환기시키려고 가볍게 말을 던진다. 무겁고 진지한 얘기는 그만하자는 일종의 신호라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같이 맞춰주었다.
ㅡ아무튼 넌 어떻게 됐어?
“그게 궁금하냐.”
ㅡ궁금하지. 척박한 재수생활 한줄기 빛이나 다름없는 흥미진진한 얘긴데. 아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그냥, 뭐... 진범 아닌 거 밝혀졌어.”
ㅡ종교가 밝혔나보네?
어? 어.. 말을 얼버무리며 인정하자 종대가 흐음,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ㅡ수상해. 수상하단 말이야.
“또 뭐가.”
ㅡ자, 봐. 이유 없는 호의는 없어. 호의가 계속되면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는 거거든.
근데 김종교를 봐. 지금 끊임없이 너한테 호의만 보이고 있잖아? 이래도 흥, 저래도 흥. 난 관심 없소. 물론 속은 아니지만 겉으로 보기에 넌 아무런 반응이 없어. 그런데도 걘 끊임없이 선배, 선배 하면서 따라다니고. 웃어주고, 물에 빠진 거 꺼내주고….
ㅡ답 나왔네.
술에 취하면 기분 변화가 심해지기 마련이다. 별 거 아닌 일에도 울상을 짓게 되고, 마찬 가지로 별 거 아닌 일인데도 한 없이 웃음이 헤퍼진다. 그건 종대도 별 다를 바 없는 듯 했다.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때만 해도 축 가라앉아 있던 목소리가 한 없이 높아져간다. 재미있다 이거지. 제 일 아니니까 흥미진진하다 이거지?
옆에서 지켜본 것도 아닌데, 내게 전해들은 것만으로도 지금까지 거의 다 모든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종대여서 이번엔 또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리고 김종인의 호의 뒤에 숨겨진 그 어떤 것이 궁금하기도 했고.
“..뭐.”
종대 시선에서 바라본 해답은 무엇일까. 난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질 않는데.
ㅡ걔가 너 좋아하네.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멍해지던 것도 잠시, 버럭 목소리가 크게 나간다. 뭐라는 거야 미친놈이. 술 먹었으면 집에 가서 잠이나 자라? 태연한 척해보지만 김종대가 헛소리를 하는 바람에 당황해서 눈을 감았다 뜨는 속도가 굉장히 빨라진다. 짜증을 내고, 버럭 화를 내도 종대는 그저 웃기만 한다. 흐흐흐, 실없는 웃음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ㅡ괜찮아, 괜찮아. 내 친구가 게이가 되어도 난 관대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
“안 닥쳐?”
ㅡ그동안 쌓은 정을 봐서라도 돌을 던지진 않을게.
“..좋은 말로 할 때 그만해라.”
ㅡ네가 언제 좋은 말을 했다 그래.
그리고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김종교에 대한 네 마음.
친구가 아니라 웬수지. 시발놈.
김종대 때문에 혼란스러움이 정점을 찍었다. 켜놓은 워드 창 위에 깜빡이는 커서가 몇 시간째 그대로였다. 걔가 너 좋아하나보네? 아무렇지 않게 툭 내던져진 그 말이 계속 잊혀지지 않고 있다. 짜증이 나서 노트북을 덮어버렸다.
그대로 매트리스 위로 드러누우며 손으로 두 눈을 가렸다. 머리가 복잡하다. 나는 진짜 혼란스러운 걸까. 아니면, 종대 말대로 녀석에 대한 내 마음을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인정하지 않고 있는 걸까.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은 누구나 부정하기 마련이다. 아니야. 아니겠지. 아닐걸? 그렇게 점점 부정의 강도가 약해지고, 언젠가는 인정하게 되겠지. 맞나? 맞네. 맞는 거네, 그러네.
녀석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을 때도 그랬다. 이미 꽤 오래 전부터 열려있었으면서 일부러 부정하고 모른 척 외면했다. 한번 인정하게 되면 걷잡을 수 없어질 것 같아서.
또한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인 법이다. 아니야, 아니야. 난 네가 싫어. 난 너한테 관심 없어. 온몸으로 부정하고 그렇게 노력해왔지만 서서히 다가온 녀석에게 어느새 곁을 내주고 말았다.
…그럼 이젠 어떻게 되는 건데. 곁을 내주면, 그 다음은 뭔데, 대체.
머리를 굴려 봐도 백지처럼 하얗기만 하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고, 대체 이게 뭔지 정의를 내리기도 힘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속 시끄러워 죽겠는데 김종대가 거기다 짐을 하나 얹었다. 무슨 의도로 말한 거야. 내가 이렇게 고민할 거라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 아, 진짜 짜증난다.
온통 까맣기만 한 눈 앞으로 김종인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녀석의 얼굴이 떠오르는 건 또 뭐야. 싫다, 이런 거. 떨쳐내려고 머리를 마구 흔들면, 습관처럼 웃고 있는 얼굴이 점점 흐려진다. 그리고 요 며칠 사이 발견한 새로운 표정을 한 김종인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술집에서 얼빠진 얼굴로 서 있는 녀석이라든가, 그보다 더 이전의, 강의실에서 나를 보던 굳은 얼굴이라든가….
“…….”
내 마음도 내 마음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궁금했다. 김종인의 생각이.
종대에게서 듣는 거 말고, 진짜 김종인에게서 듣는 녀석의 생각이 궁금하다.
“가라.”
많은 분량이 남은 것도 아닌데 집중을 못하고 방황하느라 아까운 시간을 쓴 탓에 결국 밤을 새워야 했다. 새벽까지 노트북 앞에 앉아 멍하니 다른 생각에 빠져 있다가 부랴부랴 과제를 마무리했다. 제출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빈 강의실에 앉아 프린트를 확인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녀석이 은근슬쩍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뚫어져라 바라보는 게 신경 쓰였다. 그것도 아주 많이.
집중이 안 되잖아, 집중이. 인상을 찌푸리며 하는 내 말에 녀석이 못들은 척하며 아예 내 쪽으로 턱을 괴고 앉는다.
“가라고.”
“싫어요. 여기서 선배 공부하는 거 볼 거예요.”
어쭈, 이젠 대놓고 싫다고 하네.
어이가 없어서 눈동자만 돌려 녀석을 쳐다보면, 뭘 잘했다고 씨익 웃는다.
“왜?”
한 마디 쏴붙일 작정으로 정색을 하며 물었다. 네가 날 왜 보는데. 무슨 이유로. 그러자 김종인이 고민하는 듯 눈을 꿈뻑인다.
“음..”
그러던 것도 잠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한다.
“..그냥 보고 싶어서?”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서 또 다시 씩 웃는다. 뭘 잘했다고 웃어. 짜증을 내며 얼른 눈동자를 피해버렸다. 이 와중에 쓸데없이 김종대 말이 생각이 난다. 진짜 쓸데없지, 김종대도.
‘걔가 너 좋아하네.’
쓸데없어, 다. 쓸데없다고.
집중이 되기는커녕 목만 탄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보고 있던 걸 대충 구겨서 백팩 안으로 집어넣었다. 들여다봐야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서.
“선배, 저 오늘은 여기 앉을게요.”
“..뭐.”
“제 자리 맞잖아요. 오른쪽.”
능구렁이 같은 면이 있다. 나를 놀리는 건지 생글생글 잘도 웃는 얼굴로 말하는 게 보기가 싫다. 대답 없이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더니, 왜요? 여기 제 자리 아니에요? 다시 묻는다. 놀리는 거 맞네. 아….
“선배, 어디 가요?”
그 꼴을 더 보고 있어봐야 내 속만 답답할 것 같아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면 김종인이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리며 나를 따라 엉거주춤 일어난다. 걸어가려다 말고 녀석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따라올 것 같다. 너 피해서 가는 건데 네가 따라오면 어떡하냐.
“야.”
망설이는 사이에 똑바로 선 녀석이 나를 보며 눈을 빛낸다.
“너 따라 오지 마.”
“따라가는 거 아니에요.”
“..그럼.”
“저 화장실 갈 건데.”
산책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쳐다보는 주제에 따라오는 게 아니란다. 넌 왜 하필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화장실에 가고 싶어지냐.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으니, 김종인이 그런다. 선배 따라가는 거 아닌데, 진짜.
“그럼 나중에 가.”
“따라가는 거 아니라니까.”
“..말 놓냐?”
“…같이 가면 안돼요?”
녀석과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에 벨소리가 울린다. 마침 손에 쥐고 있던 걸 확인해보니 변백현. 이 새낀 왜 또 전화질이야. 빨리 오기나 하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다급한 목소리가 전해져온다.
ㅡ도콩 어디야? 나 지금 과제 프린트하는데 돈이 모자라.. 여기 와주면 안 돼?
“넌 도대체 들고 다니는 게 뭐야.”
ㅡ현금이 없으니까 그렇지!
“주위에 돈 빌릴 사람 없어?”
ㅡ아, 없어없어. 나 혼자 뿐이야. 그러니까 너한테 전화하는 거 아냐. 좀 와줘라, 좀!
백현이도 백현이지만, 자꾸만 따라붙는 김종인을 자연스럽게 따돌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통화를 하다말고 녀석을 힐끔 바라 보니 눈을 깜빡이며 나를 쳐다보고 있다. 느낌이 왠지, 저도 같이 따라가겠다고 할 것 같기도 한데….
ㅡ빨리빨리!
재촉하는 백현이의 목소리에 하는 수 없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어딘데.”
“너 아니었음 나 진짜…. 어우, 생각하기도 싫다. 끔찍해.”
“나 아니었음 뭐. 박찬열 있잖아.”
“찬열이 오늘 오후 수업이라 아직 학교 안 왔단 말이야.”
변백현을 구제해주고 강의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나저나 장밉상 이 기지배 오늘은 학교 나오겠지?”
“..글쎄.”
“오늘 과제 제출해야 되니까 분명히 나왔을 거야. 아 그거 어떻게 엿 먹이지?”
이름만 들어도 짜증나. 인상을 찌푸리자, 백현이가 나도 만만치 않거든요? 하며 같이 표정을 일그러뜨린다.
화장실 간다던 김종인은 빈말이 아니었던 모양인지, 강의실 문 앞까지만 따라오더니 화장실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김종인. 고개를 갸웃거리며 화장실로 향하는 길쭉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변백현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 몇 시야, 열두시 오십분? 너 제출 했어?”
“아직..”
“어, 그럼 같이 내면 되겠네. 네 건 어디 있는데?”
“가방에.”
“그러니까 네 가방이 어디있냐고요.”
쥐고 있는 프린트로 내 팔을 툭툭 치며 묻는다. 아무튼 성질 급하지. 팔에 자꾸만 닿아오는 프린트 물을 손으로 툭 치워버리며 강의실 문을 열며 들어섰다. 뒤이어 백현이가 여기 있냐? 하며 따라들어 온다.
수업 10분 전이라 그런지 조금 전보다는 많은 인원이 강의실을 채웠다. 미리 잡아놓은 자리로 걸음을 옮기며 김종인을 찾는데 보이지 않는다. 화장실 간다더니 아직도 안 왔나….
“야, 빨리 찾아. 5분 남았어, 5분. 민석이 형 되게 칼 같은 거 알지? 1분만 늦어도 안 받아주잖아.”
“5분이나 남았거든?”
“빨리 하자고, 빨리.”
재촉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다.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쥐었다. 꽉 다물려있는 입구를 열며 손을 넣어 프린트를 찾는데,
“…어?”
손에 잡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뭐야, 뭐지? 당황해서 조금 굳은 얼굴로 가방을 열어젖히며 이리저리 뒤져봐도 프린트가 없다. 이상하다…. 분명히 내가 여기 넣어놨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
“너 뭐해.. 못 찾았어?”
옆에 서서 묻는 백현이를 돌아보았다.
“..없어.”
내 과제가 사라졌다.
뚱한 얼굴로 가만히 기다리던 녀석의 눈이 조금 커진다.
“뭐라고?”
“…….”
“어디 봐봐, 가방 이리 줘.”
손에서 가방을 낚아챈 백현이가 조급한 손길로 이곳저곳 뒤적이기 시작하고, 내가 찾았을 때 없던 프린트물이 백현이 손에서 발견될 리 없다. 시계를 힐끔 보니 12시 55분. 5분밖에 남지 않았다. 새로 프린트를 하기 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어서 빨리 찾아내야 한다. 조급해진 마음에 손에 땀이 다 났다.
“집에 두고 온 거 아니야?”
“..아니야.”
“확실해?”
“어.”
내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가자 백현이도 덩달아 어두운 표정으로 내 가방을 다시 한 번 살핀다.
분명히 내가 여기서 과제를 보고 있었고. 내 옆엔 김종인이 있었고…. 분명히 있었는데. 있었다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
“와, 대박.. 장 선배 진짜 물건이야. 이번엔 김 선배랑 복도에서… 어? 분위기가 왜 이래. 선배, 무슨 일 있어요?”
중얼거리며 나와 백현이가 서있는 곳으로 걸어오던 세훈이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묻는다.
“얘 과제 없어졌어.”
“..네?”
“여기 놔두고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없어졌대.”
말 할 정신도 없어서 입술만 깨물고 있는 나를 대신해서 백현이가 설명한다. 그에, 놀란 얼굴로 변한 세훈이가 ‘헐’을 남발하고,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 말고 대뜸 말한다.
“..어, 나 누가 그랬는지 알 것 같아요.”
녀석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누가, 그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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