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E & SEEK
14-2.
“과제 내준지 얼마나 됐다고 또 과제야?”
머리를 감싸며 투덜거리는 변백현을 보고 픽 웃었다. 그랬더니, 좋냐? 웃음이 나와? 인상을 찌푸리며 시비를 건다. 대답 없이 한번 쳐다보고 말았다.
오후 수업까지 마치자 하루 일과가 끝이 났다. 집으로 돌아가서 편히 쉴 생각만 했는데 과제 때문에 그럴 수가 없게 됐다.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었지만 딱히 할 것도 없으니 빨리 하고 치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불만을 쏟아내는 백현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계단을 내려오는데 1층 로비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인다. 말쑥한 옷차림을 하고 멀뚱멀뚱 서 있는 걸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살짝 삐져나온 귀를 보고 확신했다. 아, 게이 애인이다. 변백현 마중 나왔나보네.
제 애인이 기다리고 있는 사실도 모르고, 내 얼굴만 보며 쫑알대던 백현이의 어깨를 툭 치며 고갯짓을 했다. 그러면 변백현은 뚱한 얼굴로 왜, 하며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마침 두리번거리던 박찬열과 눈이 마주쳤는지 내내 불퉁하던 얼굴에 갑자기 생기가 돈다.
“말도 없이 여긴 어쩐 일이야?”
빠른 걸음으로 박찬열에게 다가간 백현이 조금 올려다보며 묻고, 박찬열은 녀석을 내려다보며 슬쩍 웃는다. 그냥. 그러더니 뭐가 그렇게 좋은지 마주보고 생글생글. ...그렇게나 좋을까. 웃음꽃이 피는 두 얼굴을 몇 걸음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얼굴만 봐도 그렇게나 좋은지 몇 초간 눈을 맞추고 저들만의 세상에 갇혀있던 녀석들이 동시에 나를 돌아본다.
“도콩, 거기서 뭐해.”
“안 오고 뭐하냐?”
빨리 오라며 손짓하는데 왠지 불청객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키진 않았지만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겨 게이 커플의 앞에 섰다. 가까이서 보니 더 가관이다. 짜증을 부리던 변백현은 어디로 갔는지, 눈동자에서 하트가 쏟아져 나올 것 같다고나 할까. 내 앞에선 좀 자제하는 듯 했는데 지금 이 순간은 주체를 못하겠는 모양이다. 눈을 깜빡이며 녀석의 얼굴을 쳐다보다 생각했다. 사랑하면 다 똑같은 거구나.
그런데 갑자기 기분이 조금 이상해진다.
“오늘 수업 끝났어?”
“난 4시에 수업 또 있어. 너는 끝났지?”
“어. 끝났지. 드디어 끝났다!”
“어디 갈 거야, 집에?”
박찬열의 물음에, 백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가서 과제해야지.
“도콩은?”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눈만 깜빡이며 서 있는데, 문득 박찬열이 나를 돌아보며 묻는다.
“나도.”
“도콩은 정문에서 자취한다며?”
“어.”
“다음에 백현이랑 놀러가도 되지?”
날 몇 번이나 봤다고 집엘 찾아온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설마 진짜 찾아올까 싶어서 대충 대답했다. 그러든지. 내 대답에, 조만간 꼭 갈게! 박찬열이 박수까지 짝짝 치며 좋아한다. 애냐?
로비에 서서 쓸데없는 대화가 이어진다. 변백현은 과제해야 되니 집으로 간다고 하고, 박찬열은 잘 모르겠고. 서로 갈 길이 다른 게 아쉬운지 괜히 툭툭 쳐가면서 장난을 치는 걸 멍하니 서서 지켜보다가 내가 도대체 이걸 왜 보고 있어야 되는지 모르겠는 거다. 또 다시 둘만의 세상에 갇힌 녀석들에게 나 먼저 간다. 흘리듯 말하며 몸을 돌리는데, 변백현이 5분만 기다리라며 붙잡는다.
아….
그냥 가버릴 까봐 내 팔을 덥석 잡은 채 박찬열과 속삭이던 백현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지고, 아는 얼굴이라도 발견했는지 손을 들어 이름을 부른다.
“종인아!”
그 이름에 고개를 돌려보면, 낯익지만 이름은 모르는 얼굴들과 함께 계단을 오르던 김종인이 우릴 보곤 이쪽을 향해 걸어온다.
“어, 선배. 수업 끝났어요?”
여느 때와 같은 웃는 얼굴로 나를 향해 말을 거는 녀석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행사가 있다더니 바빠 보인다. 수업 끝나자마자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걸 보면.
“네 눈에는 도콩 밖에 안 보이냐.”
심지어 내가 불렀는데. 따라오는 백현의 말에, 그제 서야 변백현을 보며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하는 녀석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 경수 선배한테 잘 보여야 되잖아요. 웃으며 던지는 농담에 백현이가 그래도 너무 편애하는 거 아니야? 하는 농담으로 받아치고, 봐줘요, 선배. 녀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내내 조용하던 박찬열의 목소리가 끼어든다.
“..김종인?”
아는 사인가…. 부르는 목소리에 약간의 의아함이 섞여있는 것 같다. 그저 내 느낌일지도 모르겠지만.
녀석의 시선이 백현이 옆에 선 박찬열에게로 향한다.
“어, 형. 오랜만이에요.”
“그러게. 2년 만에 보는 것 같다?”
“형 제대 했단 말은 들었어요.”
“나도 너 한국 왔단 얘긴 들었어. 형은 잘 지내고?”
“네, 잘 지내요.”
꽤 익숙하게 말을 주고받는다. 아는 사이 맞나보네. 난 그렇다 쳐도, 변백현도 둘의 친분 관계를 몰랐던 듯 조금 놀란 얼굴로 녀석과 박찬열을 번갈아 보고 있다. 학교 밖에서부터 이어진 관계인 것 같았다. 녀석이 누군가를 선배, 이외의 호칭으로 부르는 건 처음이었으니.
“..김종인!”
그러는 와중에, 계단을 오르던 무리 속에서 누군가가 녀석을 불러 재촉한다. 그 소리에 녀석이 박찬열에게 다음에 봐요, 형.
“그래. 형한테 안부 전해줘.”
“선배, 저 가볼게요.”
“부학 엄청 바쁘네. 힘내라.”
변백현에게 꾸벅이며 인사를 마친 녀석이 마지막으로 나를 돌아본다. 눈이 마주쳤음에도 말없이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그런 나를 몇 초간 응시하던 녀석이 선배, 과제 열심히 해요. 습관처럼 웃으며 내 어깨를 한번 쥐었다 놓고 간다.
급하게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녀석의 손이 닿은 내 어깨를 바라보았다.
…뭐야.
“박찬열, 너 종인이랑 아는 사이야?”
“응. 니들은 어떻게 아는데.”
“과 후배.”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사이에, 박찬열이 내게 묻는다.
“도콩, 너 종인이랑 친해?”
도콩한테 되게 살갑게 구네.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곰곰이 생각해본다. 내가 녀석과 친했던가. 이걸 친하다고 할 수 있는 건가….
녀석에게 마음의 문을 열게 된 건 인정했지만 그것과는 다른 질문이다. 너 쟤랑 친해?
“..아니.”
짧은 생각을 마치고 박찬열에게 대답했다. 예전보다 나아진 거지, 친한 건 아니었으니까.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이 나를 반긴다. 손을 들어 이쪽이야, 하며 손짓하는 크리스 선배를 보곤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백현이를 집으로 보내고, 자취방에서 혼자 과제를 한답시고 노트북을 켰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다. 해야 겠다 마음먹었을 뿐이지 하기 싫은 건 백현이나 나나 마찬가지라, 워드 창을 켜놓고 줄기차게 웹서핑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허리가 조금 아프다 싶으면 몸을 비틀어 스트레칭도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아 과제나 해야지, 하며 타이핑을 하는 와중에 전화가 왔다. 변백현이나 김종대 일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외의 인물이었다.
“뭐냐.”
“저 새끼 누가 불렀어?”
가까이 다가서자 여러 테이블을 가득 채우고 있던 과 선배들이 대놓고 불청객 취급을 하고, 기분이 나빠져 인상을 찌푸리는데 크리스 선배가 태연한 얼굴로 나를 자리에 앉히며 말한다.
“내가 불렀다. 니들 경수한테 사과해.”
“싸가지 없는 새끼한테 우리가 왜 사과를 해.”
도콩, 뭐해. 안 바쁘면 형 있는 곳으로 올래?
이런 자리인 줄 알았다면 나오지 않았을 거다. 불편한 건 저들이나 나나 마찬가진데 대놓고 면박을 주니 짜증이 안날수가 없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사과 받을 바엔 안 받는 게 나을 거고. 어느새 선배한테 대드는 싸가지 없는 새끼가 되어있는 거지같은 이미지에 한숨이 새어나왔지만 딱히 내가 잘못한 건 없다고 생각했다. 제 잘못은 모르고 내 탓만 하는 그네들에게 한마디 더 해버릴까 했지만, 크리스 선배 때문에 입을 꾹 다물었다.
“욕먹을 짓 했잖냐.”
“욕먹을 짓? 우리가, 이 새끼한테?”
“사실 관계도 확인 안 해보고 마녀사냥 한 게 욕먹을 짓 한 거지.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그렇다고 선배한테 막말하는 후배는 뭔데. 선배의 말에도 눈 하나 꿈쩍 않고 저 잘났다고 하는 꼴을 보고 있으니 차라리 밖으로 나가버리고 싶은 거다. 말해서 뭐해. 내 입만 아프지. 꼭 저런 유형의 인간이 있다. 선배 노릇은 제대로 못하면서 대접 받고 싶어 안달이 나 권위만 내세우는.
“선배면 선배답게 행동을 해야 될 거 아니야.”
“선후배는 괜히 있는 줄 알아? 아니면 아니라고 말을 하면 되지, 뭐? 모르면 입을 닫고 있어?”
크리스 선배의 맞은편에 앉아 나를 노려보는 선배의 이름이 뭐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저 새끼 이름이 뭐더라….
“그래서 김종인 차 누가 긁었는지는 찾았냐?”
“찾고 있어.”
“뭐야, 그럼 아직 모르는 거네. 그런 주제에 어디서 사과하라 마라야.”
“도경수는 아니야.”
“장미가 봤다잖아. 목격자가 있는데 넌 왜 그렇게 이 새낄 싸고 도냐? 얘 뭘 믿고?”
“장미가 본 건 확실한 거고?”
가벼운 신경전만 오가던 분위기가 점점 과격해진다. 진지한 얼굴로 대립각을 이루는 두 선배를 보다가 그냥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에 더 있다간 숨이 막힐 것 같아서.
날 이 자리에 부른 선배의 의도는 대충 알겠는데, 범인을 확실하게 찾아내지 못한 상황에선 독이 될 뿐이었다. 진범을 찾았어도 순순히 제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게 분명한데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득보단 실이 많다. 나한테나, 선배한테나. 괜히 나 때문에 동기와 날을 세우는 선배를 보고 있자니 답답하기도 하고, 이름 모를 선배의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말이 다 욕뿐이라 더 듣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경수, 앉아.”
낮은 목소리가 나를 향하고, 그를 따라 테이블의 모든 눈동자도 나를 향한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 흐린다더니, 무슨 염치로 여길 와? 뻔뻔하네, 하긴. 그러니까 그런 짓하고 학교 나오는 거겠지만. 크리스 선배랑은 대체 무슨 사이길래 저렇게 감싸고돌아? 선배도 선밴데, 종인이도 장난 없더라. 쟤는 아니라고 감싸는데 난 걔 천산가 했다. 쟤가 뭔데 여기까지 불러서 동기끼리 싸우냐? 어마어마하네, 도경수도.
침묵이, 침묵이 아닌 시간이 흐른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싫은 소리에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는 선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 갈게요.
제 의도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고 더 악화되자 선배의 얼굴에서 여유로움이 사라진다. 누구나 다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선배의 머릿속에 이 상황은 없었나보다. 대책도 없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감이 오질 않는다. 이 상황의 계기도, 이 상황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이후의 일을 생각하니 더 막막해진다.
선배가 날 믿으니까 이런 자리에 불렀다는 것도 알겠는데, 짜증이 치미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어, 선배 왔어요?”
세 개의 테이블이 붙어 있고, 그 자리를 가득 채운 선배들과 간간히 보이는 몇 명의 후배. 난 자리에 서 있고, 그들의 시선은 오로지 나를 향해있었다.
침묵을 깨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잔뜩 얼어붙어있던 분위기가 녀석의 등장으로 다시 소란스러워진다.
…김종인이다.
종인이 왔네? 왜 이렇게 늦게 와. 너 기다렸잖아, 인마. 종인아, 여기 와서 앉아.
내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분위기. 원숭이 마냥 나를 구경하던 시선들도 모조리 김종인에게로 옮겨간다. 주먹을 꽉 눌러 쥐었다.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선배를 원망해서도 안 된다. 김종인을 원망해서도 안 되고.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머저리같은 상황 속에서 지내야하는 건지….
녀석에게 쏟아지는 환영인사를 가만히 듣고만 있으니 투명인간이라도 된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고마워해야하는 건가. 잘난 김종인의 등장으로 내가 잊혀졌으니까? 못해도 이곳에 십대는 없을 텐데 스무 살 넘어서 다들 뭐하는 짓거린지…. 어이가 없다가도 이참에 잘됐다 싶었다. 소란스러움을 틈타 조용히 나가버리면 되는 거니까.
내가 이들에게 불청객이듯, 이들도 나에겐 불청객이니까.
“분위기가 왜 이래요, 무슨 일 있어요?”
입구를 향해 몸을 돌리는데, 저를 향한 모든 인사에도 한마디 대꾸도 없이 녀석이 내 앞을 막으며 말한다.
“비켜.”
지금 말을 걸어봤자 좋은 소리가 안 나올 건 뻔했다. 기분이 최악인데 어떻게 좋은 소리가 나와.
내가 미친놈이다. 선배에게 전화가 왔을 때, 무슨 상황인지 알아봤어야했다. 부른다고 쪼르르 나올 게 아니라 미리 알아봤어야 했다고.
“뭐야, 아직도 안 갔어?”
“진짜 눈치 없다. 양심만 없는 줄 알았는데, 눈치도 없네.”
“종인아, 안 비켜주고 뭐해, 간다잖아.”
“김종인 넌 속이 없냐? 네 차 긁은 놈 뭐 하러 신경 써. 신경 쓰지 말고 이리와 앉아.”
내 앞을 막고 선 김종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들었냐? 들었으니까 비켜. 지금 당장 네 차 긁은 진짜 범인 찾으러 가게.”
대답 없는 김종인이 눈을 깜빡이며 나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왜 안 비켜. 비킬 생각이 없어 보이는 녀석을 밀어버리려는데,
“가지 말고 여기 있어요. 여기서 사과 받아요, 선배.”
녀석의 시선이 나를 비껴 테이블 쪽으로 옮겨간다. 시끄럽게 비난하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잦아든다. 내내 어쩔 줄 모르고 난감한 얼굴로 앉아있던 크리스 선배의 시선이 내 얼굴에 닿았다 떨어진다.
“저, 할 말 있는데.”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김종인을 쳐다보았다. 이 자리에 모여 앉은 사람들을 눈으로 훑던 녀석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다.
“경수 선배 아니에요.”
“…….”
“제 차, 선배가 한 거 아니에요. 장미선배가 잘못 본 거였어요.”
..진짜 범인을 찾았나보다.
“죄송해요, 선배.”
“마셔, 마셔.”
한 마디의 파급 효과는 꽤 컸다.
김종인이 꾸벅 고개 숙여 사과를 하자, 눈치를 보던 인간들이 말을 얼버무리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미안하니 어쩌니, 사과를 하는 사람도 있고 조용히 입을 다무는 사람도 있었다. 처음과는 달리 스스럼없이 내게 다가오는 그 틈 속에 정신없이 앉아 있었다. 앉아만 있었을 뿐 섞이려 들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김종인이 이 사태를 해결한 거나 다름없지만, 어찌 됐든 상황이 원하던 분위기로 흘러가자 가장 신이 난 건 크리스 선배였다. 빈 잔에 끊임없이 맥주를 따르며 마시라고 권하는 걸 몇 번이고 거절했다. 의혹은 풀렸지만 아직도 찝찝한 부분은 남아 있었기 때문에 썩 기분이 좋은 건 아니었다.
가식이 점철된 인간관계에 진물이 나서이기도 했고, 김종인이 진짜 범인이 누군지에 대해선 밝히지 않는 것도 무언가 수상했다. 진범이 누군지 못 찾았거나, 아니면 밝힐 수 없는 사람이거나….
“경수야, 그땐 미안했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생각을 곱씹으며 앉아있는데 현철 선배가 다가와 은근하게 말을 건다. 그 꼴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술 한 잔 할래? 묻는다. 크리스 선배가 가득 따라놓은 잔을 옆쪽으로 치우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뇨.”
이제 와서 이러는 거, 역겹다.
“야,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기분 풀어.”
현철 선배가 난감한 듯 가만히 서서 날 바라보고만 있자, 크리스 선배와 날을 세웠던 그 이름 모를 선배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친한 척 말을 걸어온다.
네가 제일 역겨워.
도대체 어떻게 봐야 좋은 게 좋은 건데?
인상을 쓰자, 내 얼굴을 확인한 현철 선배가 그나마 양심은 있는지 술 마시기 싫으면 어쩔 수 없지. 여튼 미안했다. 하며 그 선배를 데리고 다른 테이블로 건너간다.
“거봐, 형은 널 믿었어.”
“…….”
“역시 넌 아니었잖아?”
가득 찬 술잔을 옆으로 밀어버린 게, 크리스 선배의 앞에 놓여있었다. 꽤 기분이 좋은지 연신 웃음기가 가득한 얼굴로 잔을 집어 들며 선배가 내게 말한다.
결과는 나쁘지 않게 됐을지 몰라도, 과정이 썩 좋았던 건 아니잖아요.
“선배, 고마워요.”
“야, 됐어. 우리 사이에 고맙기는….”
“근데 다음부턴 이러지 않으셔도 돼요.”
생각이 그대로 나타난다. 꽤 단호하게 내뱉어진 말에, 선배가 머쓱한 듯 웃으며 내 등허리를 두어 번 두드린다. 알았어, 너한테 안 물어보고 그런 건 미안하다. 그래도 부학이 해결했으니 봐줘.
짧은 한숨을 내쉬며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선배는, 끝까지 나를 믿어줬으니까.
“화장실 좀 다녀올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선배를 올려다보다가, 다른 테이블에 앉아있는 김종인을 눈으로 찾았다. 녀석이 앉은 테이블은 개강파티 때와 같았다. 녀석은 그 테이블의 중심축이 되어있고, 주변의 모든 사람은 녀석을 둘러싸고 웃음이 끊이질 않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선배, 매운 거 못 드시죠? 그럼 이거 드세요.”
“그걸 기억해? 와, 김종인 역시 세심한 남자.”
“종인 선배! 저는 해산물 못 먹어요!”
“그래? 그럼 해물 탕 시켜야겠다.”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적당히 선배들의 비위도 맞출 줄 알고, 분위기를 띄울 줄도 알고, 소외된 후배에게 농담처럼 먼저 말을 걸어 분위기에 녹아들게 만드는….
아직까지 수트를 입고 있는 채로 여러 사람을 겉돌지 않게 은근히 신경 쓰고 있는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보면 참 대단하다 싶었다. 불편할 텐데. 옷도 그렇고, 사람들도.
녀석이라고 왜 쉬고 싶지 않을까.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하루를 바쁘게 보냈을 테고, 이 자리에 와서까지 여러 사람 틈에서 내내 웃는 얼굴을 보여주어야 하는 게 보통 쉬운 일은 아닐 거다.
그 일을 당연하게 해내는 녀석의 휘어진 눈꼬리를 빤히 바라보다가, 내가 앉은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
끝까지 곁에 남아있던 크리스 선배까지 자리를 뜨자, 테이블에 앉은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의자 개수에 관계없이 꽤 많은 인원이 녀석의 테이블로 몰려들었고, 몇몇의 선배들은 밖으로 나가 담배를 태우고 있었으며, 나이가 어린 후배 몇 명은 저들끼리 구석에서 속닥이기 바쁘다.
녀석이 내게 사과를 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저들이 내게 한 짓에 대한 민망함에 구름처럼 몰려오던 사람들은 당연하게 흩어졌다. 주목을 받는 것도, 위선자들 속에 섞여있는 것도 싫었지만 괜스레 목이 탄다.
크리스 선배가 반쯤 남겨놓고 간 잔을 들고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꿀꺽, 목구멍으로 잘도 넘어간다. 이게 술인지, 물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빈 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입술을 닦았다.
다시금 녀석이 앉은 테이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언제부터 날 보고 있었던 건지 녀석과 눈이 마주친다.
녀석이 나를 향해 웃는다.
“…뭐야.”
그 시선을 맞춰 빤히 바라보다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선배, 왜 혼자 앉아 있어요.”
테이블을 돌고 돌아, 녀석이 내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처음의 웃음과는 조금 다른 얼굴이다. 힐끔 옆에 앉은 녀석을 보고는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동안의 억울함이 풀린 날인데도 전혀 즐겁지가 않다. 조금 전 갈증을 느낀 이후로 계속해서 홀짝홀짝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던 크리스 선배도 어디론가 가버리고, 김종인이 옆에 앉을 때까지 아무도 다가오지 않은 건 아니지만 무관심으로 일관하니 저들이 알아서 떨어져 나가더라.
“저녁은 먹었어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녀석에게 말했다.
“넌 나보면 밥 생각 밖에 안 나냐?”
김종인이 멀뚱멀뚱 나를 쳐다본다. 꿈뻑꿈뻑, 눈꺼풀이 닫혔다가 다시 열리기를 반복한다. 뭐야, 취했어? 반응이 왜 이렇게 느려. 살짝 인상을 찌푸리면, 예의 웃음을 되찾고는 한 손에 잔을 들고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린다.
“아뇨, 선배 보면 밥 말고 다른 것도 생각나죠.”
“…….”
“선배 집도 생각나고.”
“…….”
“회화수업도 생각나고….”
그러더니 저 혼자 픽 웃으며 손에 쥔 잔을 내려놓는다. 잔 입구를 톡톡 손가락으로 두드리기도 하고, 슬쩍 나를 보기도 하지만 술을 마시고 싶은 건 아닌지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다.
“과제는 다 하셨어요?”
“..아니.”
“하다가 불려 나온 거예요?”
“어.”
“그렇구나…. 그래도 목요일까지면 아직 여유 있잖아요.”
“..어.”
내가 먼저 입을 열지 않는 게 익숙한 듯, 저 혼자서 이런 저런 말을 건네던 김종인이 가끔 입을 꾹 다물어버린다. 그러면 아주 자연스럽게 침묵이 찾아온다. 턱을 괴고 앉은 녀석을 힐끔 보다가 빈 잔에 맥주를 따랐다. 쪼르륵, 소리와 함께 거품이 입구로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백현 선배는요?”
녀석이 다시 내게 말을 걸어온다.
“..글쎄.”
녀석의 말은 주로 물음표로 끝나고, 내 대답은 마침표로 끝이 난다.
“세훈이는 오늘 제사라고 못 왔어요.”
말라오는 입술을 축이려고 잔을 입에 가져다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현이도, 세훈이도 없으니 조금 허전하다. 녀석들이 없으니 주위에 아무도 오지 않는 거겠지만.
“없으니까 허전하죠, 선배?”
마치 내 속을 읽은 것처럼 말한다. 입안으로 넘어가는 맥주를 삼키며 말했다.
“장미 없으니까 됐어.”
그랬더니 또 바람 빠지는 소리를 하며 웃어. 조금 전부터 느낀 거지만 평소의 김종인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웃어도 웃는 게 아닌, 어딘가 지쳐 보이는 그런 얼굴….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는 걸 빤히 바라보았다. 녀석과 내가 앉은 테이블을 제외하곤 여기저기 시끌벅적 난리였지만 그래서인지, 그 가운데서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만 같았다.
나른한 녀석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았다.
“널 싫어하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으면 안 돼?”
그냥 궁금했다. 이렇게까지 애쓰는 모습이 신기해서. 제가 피곤한데도 그걸 숨기고, 어쩌면 그게 당연한 것처럼 웃는 얼굴을 하는 게 안타깝기도 하고. 내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김종인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꼭 그게 선배일 필요는 없잖아요.”
그러더니 버릇처럼 웃는다.
싫어한다고 한 적 없는데, 나는. 대답대신 그저 눈만 깜빡였다. 김종인의 시선이 아래로 내리깔린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 한참동안이나 말이 없다. 사실은 생각을 하는 건지, 아니면 조금 쉬고 있는 건지 정확히 모르겠다. 그냥, 옆 테이블에 앉아 사람들 틈에 섞여있던 얼굴과 내 옆에 있을 때의 얼굴이 확연히도 달라서.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든다.
“너 그렇게 살면 안 피곤하냐.”
눈꺼풀이 위로 들리고, 그 안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마주본 눈동자는 여전히 새카맣다. 여전히 말이 없던 녀석이 조금 웃으며 대답한다.
“..글쎄요.”
김종인의 얼굴이 내 쪽으로 비스듬히 기대어진다. 그리곤 어깨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종인아, 잘 먹었어!”
“선배! 고맙습니다.”
“부학, 먼저 가볼게.”
자리를 파하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가게를 나서는 얼굴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면 내 옆에서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잠시간 쉬던 김종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서를 집어 든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어서 상황을 읽으려고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가요, 선배.”
왜 먼저 나가는 거지? 당연하게 김종인만 남는 건 또 뭐고….
계산서를 들고 내게 말하는 녀석을 보니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다. 내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가 안 돼서 물었다.
“계산은.”
“네?”
“계산은 네가 해?”
그랬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왜?”
“…….”
“왜 네가 하는데?”
한 두 명도 아니고, 테이블이 세 개였다. 못해도 열 명은 넘는데다가 술은 김종인 혼자 마신 것도 아니고, 녀석이 가장 위 학번도 아닌데 어째서 이게 당연한 걸까. 더구나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녀석은 나보다 더 늦게 왔는데. 왜 저들은 당연하게 자리를 뜨는 건데….
내 물음에 녀석이 조용하기에, 얼굴을 확인했더니 계산서를 든 상태로 조금 멍하게 나를 보고 있다. 오늘 그 얼굴만 몇 번짼지….
“제가 내는 게 당연하죠.”
멍하게 있던 것도 잠시, 제정신으로 돌아온 녀석이 웃는 얼굴을 하고 말한다. 그러더니 선배도 나가 계세요. 따라 나갈게요. 자연스럽게 계산대로 향하는 걸 보고 있는데 갑자기 울컥,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몇 번이나 이랬던 건데. 네가 왜 이걸 계산하는거야, 대체.
급하게 녀석의 팔을 잡았다.
“이게 왜 당연한 거야.”
“그야….”
“왜 네가 계산하는 게 당연한 건데? 세상에 당연한 건 없어.”
“…….”
“너 돈 많아? 많아도 이런데다 쓰지 마.”
할 말을 잃고 눈을 깜빡이는 녀석을 쳐다보곤 지갑을 열었다. 지갑 속에 잠들어 있던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꺼내 들고 녀석의 손에 쥐어주었다.
얼마 되지 않는 거지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다.
“..간다.”
여태껏 처음 보는 얼빠진 얼굴로 나와, 제 손에 쥐어진 푸른 지폐를 번갈아 보는 녀석을 뒤로하고 먼저 가게를 빠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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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목요일마다 씐이나 죽겠네옄ㅋㅋㅋㅋㅋㅋ아이씐나♥
다음주 목요일에는 대박이 풍년이라면서여?????????????흐흐흐흐ㅡ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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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방탄 찐팬이 올린 위버스 글인데 읽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