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 05 W.남군 명수가 했던 짓들도 다 자신의 탓으로, 제가 잘못해서 생긴 일이라고 끝없이 자책하는 일이 그가 할 일이었다. 이 사실을 말한 것이 잘못이 아니라, 자신을 강간한 명수의 잘못이 아니라, 모두 내가 살아있어서, 내가 죽지 않아서 생긴 일이라고. 인생은 내가 원하는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 05 그의 싫다는 말에 한참동안을 그 자리에서 머물러있었다. 그가 정말 진심이었는지,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버림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상처를 받았다. 잠시동안이라도 나를 오메가가 아닌 같은 인간, 소중하게 다뤄준 그가 정말 좋았었는데. 거기에 계속 있다가는 나만 상처받을 것 같아서, 나만 아플 것 같아서 무작정 나와버렸다. 하지만 나는 갈데가 없었다. 자신이 도와주겠다며, 우현이에게서 멀어지게 해 주겠다며 손을 내미는 명수를 내치고 혼자 길거리로 나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몸을 파는 일 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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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샤워를 마친 우현이 개운한 표정으로 화장실에서 나왔다. 거실로 나왔지만 보이지 않는 성규에 명수에게 다가가 성규 어딨어?라고 묻자 어딜 좀 나갔다고 했다. "어디 갔는데?" 그건 몰라.라고 대답한 명수가 갑자기 화제를 돌린다.
"아,맞다. 나, 방 구할때까지만 여기 있으면 안될까? 내 친구 성열이도." 갑작스레 화제를 돌리는 명수가 조금 이상했지만 금세 명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당연하지. 친구가 그런 부탁도 못들어주냐? 그냥 같이 살자, 성규랑 둘이 살기에는 너무 넓어서."
잠시동안만 머물러있으려던 계획이었는데 같이 살자니, 이거 참 좋은데?라고 생각하며 함박웃음을 짓는 명수다.
"고마워." #
우현을 만나기 전의 일상처럼 되돌아가 다른 남자와 수도 없이 잠자리를 가졌지만 그와 비교할 순 없었다. 잘 곳도 없어 길거리 이리저리를 돌아다니며 지냈다. 혹시나 그를 마주칠 수 있을까.라는 생각따위를 가끔씩 하곤 했다. 다른 남자와의 잠자리가 끝나자마자 잠든 남자를 내려다보며 서둘러 옷을 챙기고 밖으로 나왔다. 항상 앉아있던, 잠을 자던 자리인 서울역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구석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멍하니 지나다니는 사람들만을 쳐다보던 그가 무리속의 한 사람을 보고 흠칫-몸을 떨었다.
"김성규."
김명수였다. "거기서 뭐하냐."
들켰다. 어서 그에게서 벗어나야 했다. 아니, 그의 눈을 쳐다보지 말았어야 했다. 놀라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을때, 그가 내 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서 도망치려 발을 내딛는 순간, 그가 나를 턱-잡고는 성규야,라고 나지막히 속삭였다.예상치 못했던 그의 행동에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성규야, 어딜 또 가려고."
마치 스토커 같은, 도망치려 해도 계속 쫓아오는 그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랑 같이 있어야지."
그가 그 말을 한 이후로 정신을 놓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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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 보니 온통 하얬다. 좁은 방 안에 하얀 침대,하얀 벽, 하얀 가구. 나같이 더러운 오메가 따위, 이미 망가질대로 망가져버린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그것들은 매우 깨끗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침대의 끝에 걸터앉았다. 방 안에는 나밖에 없었다. 혼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생각만 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괜히 이런 내 처지가 불쌍해서 한참을 울었던 것 같다. 그러고 난뒤,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나보다 키가 조금 크지만 체격은 오히려 여리여리한 사람이었다. 그는 문을 닫고 내 옆으로 다가와 내가 앉아있던 침대 앞으로 의자를 끌고 와 털썩 앉았다. 누구지? 궁금하긴 했지만 처음보는 사람에게 선뜻 말을 걸기가 쉽지 않았다. "김성규씨,맞죠?"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알고 있다. 도대체 누구길래 나한테 이렇게 아는 척을 하는 거지? 김명수를 본 것이 마지막이었는데.
"맞는데요."
"우리 명수가 길가에서 성규씨를 데리고 왔다고 하더군요. 우리 명수가 왜 당신을 데려왔는지 몰랐는데, 지금은 이해할 수 있겠네요. 당신, 오메가죠? 오메가들은 거지들이 많다니까." 은근히 나를 무시하는, 아니 나를 대놓고 무시하는 그의 행동에 참을 수 없어 그의 멱살을 잡고 소리를 질렀다. "니가 뭔데!!!니가 뭘 안다고 나한테 이래?"
그가 잠시 피식 웃더니, 이럴 줄 알았어.라고 비웃는다.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온 너는 생각 안하니?" "우리 명수가 데려왔길래, 뭔가 다른줄 알았는데, 오메가는 오메가였네. 쓸데없이 맞고싶지 않으면 조용히 있어."
그가 갑자기 그의 보디가드를 불러 내 앞으로 데리고왔다. 그러더니 쟤 좀 의자에다가 묶어주실래요?라고 말한다.
그의 말 한마디에 그 사람들이 나를 그가 앉아있던 의자 위로 앉힌 뒤 몸을 꽁꽁 묶는다. "이러고 조용히 있어. 아, 맞다. 금방 풀리겠지. 누군지 몰라도 너, 그러고있다가 먹힌다? 나는 이성열. 이 집에서 같이 잘 살아보자, 성규야."
수치심에 고개를 숙이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의 턱을 살짝 들어올려 웃음지어보인 그가 그의 보디가드를 끌고 방을 나간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내 머릿속에서도 쾅-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누군가 내 머리를 망치로 친 느낌이 들었다. 전혀 편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었다. 쓸데없이 복잡해지는 이 상황에,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이 상황에, 그들의 말에 항상 상처를 받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쓸데없이 생각하다보면 오히려 더 복잡해질 뿐이야. #
우현의 집 안에는 사실 또다른 집이 숨겨져 있었다. 명수의 방에는 또다른 방이 숨겨져 있었다. 성규는 그 안에 갇혀 있었다.
잠시 후, 밖에서 명수야! 이제왔어?라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신경쓰지마.하고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아이, 명수야, 내가 반가워서 그러지."
"뭘 자꾸 참견이냐. 됐어." 딱 봐도 안 좋아하는 것 같은데. 짝사랑이었구나. 내가 알 바 아니다. 계속 들리던 남자의 발소리가 문 앞에서 멈추고, 성규가 있던 방의 문이 끼익-하고 열렸다. 아무 생각 없이, 침대에 누워있겠지.라고 생각했던 명수가 꽁꽁 묶여있는 성규를 보고 깜짝 놀랐다. 묶여있던 그의 몸을 풀어주고 그를 안고 침대로 데려가 눕혔다.눈물자국이 또렷한 그의 얼굴, 체념한 듯 그를 바라보는 얼굴을 보며 알수 없는 이끌림에 그에게 다가가 입을 맞췄다. 저항하나 없이, 눈을 감고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그모습을 보던 성열이 질투심에 주먹을 꽉-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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