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트트랙 국가대표 연하남과 연애중
20 : 제 애인은요.
w.스노우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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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학하기 전 한 번 얼굴 좀 보자는 친구의 말에 잡힌 저녁 약속에 겨울잠 자는 곰마냥 집에만 붙어있느라 찌부둥해진 몸을 친히 일으켰다. 그냥 편하게 입고 나올 걸. 오랜만에 외출이라서 힘 좀 줄까해서 얇게 입고 나왔더니 아직도 겨울에서 벗어나지 못한 계절 덕분에 당장이라도 약속을 취소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도 막상 얼굴을 보니 그 생각들은 다 날아가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학교이야기 그리고 마지막 종착점인 연애 이야기.
"야, 내가 너 진짜 리스펙한다"
"거기 커피에 술 탄 거 아니지?"
대학선수와 엄청나게 긴 썸을 타다가 끝끝내 고백을 받고 최근에 100일을 돌파한 친구가 신나게 자랑하더니 스푼으로 날 콕 집었다.
"너는 연락하는 거 불만 없어?"
"딱히..."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친구가 답답한 듯 인상을 찡그렸다. 연락에 불만을 가져본 적이 있었나. 좀 답답한 적은 있으나 불만까지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얼마나 연락하는데?"
"비시즌일 때는 그나마 원할 때 하고 시즌일 때는 거의 못하지"
"시즌 기간이 언젠데?"
"대회는 거의 11월부터 3월? 그리고 3,4월은 선발전하고... 아! 여름에 훈련 가는 데 그때는 거의 못해-얄짤없어"
"... 너 성인군자야...?"
일년의 반이잖아. 시즌기간이 일 년 반씩이나 되나 싶어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세어보니 세상에 진짜 일년의 반이 넘어갔다. 엄청난 사실을 깨달은 표정을 하고서 친구를 올려다보니 날 기인 보듯이 입을 벌리고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와, 진짜 몰랐네. 아니, 그보다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딱히 비교 대상도 있는 게 아니니. 어릴 때 한 어줍짢은 연애를 제외하고서는 지금 현재 진행 중인 정국이와 연애 밖에 없으니 남자친구와의 연락 개념도 정국이에 맞춰 처음 생겨나서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 줄 알았다.
"연락 안 오면 안 불안해? 난 하루 종일 연락 안 오는 거 보면 솔직히 속상하던데"
"원래 너 남자친구처럼 전화하면 안 되는 데 그냥 밤에 몰래 전화하더라고"
"몰래?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데?"
"그거 그냥 선수 재량이래. 연락하고 싶으면 알아서 몰래 전화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
괜히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위험하게 전화하지 말라고 했을 때 정국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기가 전화하고 싶어서 몰래 하는 거니깐 괜찮다고. 나름 팁이라고 말해준 건데 오히려 친구는 열받아서는 당장이라도 남자친구에게 전화할 기세로 핸드폰을 거칠게 꺼냈다. 오히려 화만 불러일으킨 것 같아 친구의 손을 다급히 막자 답답한지 애꿎은 머리만 자꾸 쓸어넘겼다.
"오늘 만나서 한바탕해야겠네"
"만나고 싶을 때 만나러 갈 수 있는 거에 감사해라"
"감사는 무슨. 자기 훈련 다 끝나고 밤에도 볼까 말까야"
"난 훈련 다 끝나도 만나지도 못해"
갑자기 누가 누가 더 불쌍한가 배틀이 붙기 시작했다. 친구는 그동안 꽤 불만이 쌓인건지 내가 뭘 말할까 생각할 때면 먼저 치고 들어와 푸념을 늘어놓았다. 처음에는 동지구나 생각했는데 불만이 하나하나 나열될수록 고개만 갸웃거렸다.
"어찌나 우정을 소중히 여기시는지 뭐만 하면 회식이라 하고"
회식, 참 낮선 단어였다. 쇼트트랙이 팀경기가 아니라서 그런가. 이때부터 공감이 가지 않기 시작해서...
"회식 끝나고 잠깐만 얼굴이라도 보는 것도 못 할 거 같다하고"
조금이라도 공감해보려고 상상을 해보는데... 근데 그건 만약 정국이었으면 안 그랬을 거 같은데. 정국이는 훈련이 끝나고 나서 전화를 할 때면 항상 잠깐만이라도 내 자취방에 가면 안 되냐고 물어보는 데 선수촌에서 생활하는 이상 오고 싶다는 곳이 내 자취방이어도 그 집의 주인장인 나의 허락 여부는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그런데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인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정국이는 자신을 희망고문하듯 항상 내게 물어왔었다.
"좀 그렇기는 하네."
"너는 불만 없어?"
정국이는... 다른 사람이 보는 우리의 연애는 어떤지 몰라도 나는 불만이 없는 편이었다. 만나는 건 훈련과 대회를 제외하고서는 항상 날 만나러 오려 한다는 것도 알고 있는 연락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하려고 노력하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드는 서운함은 어쩔 수 없지만 이건 이해해줘야 하는 부분이라 생각하고 처음보다는 내 마음을 잘 구슬리고 있었다.
"그나마 승부욕? "
"어후, 승부욕도 장난 아니지. 내가 아니라고 지적할 때마다 무시하냐고 하고"
음, 나는 그런 거 말고 인형뽑기라던가... 게임이라던가... 진짜 그나마 불만이라고는 가끔 튀어나오는 승부욕뿐이었다. 정말 한 번씩 등짝을 찰싹 때리고 싶지만 그것도 나름 운동하는 애니깐 그렇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또 이제는 시간이 지나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잘 알아서 불만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했다. 근데 분명 내게 공감을 하며 꺼내온 친구의 말에 나는 공감을 다시 한 번 하지 못한 채 또 멍하니 듣기만 했다. 이쯤 되니깐 내가 공감능력이 부족한건가 의심이 들었다.
"야, 그렇게 불만 가득하면 그냥 헤어지면 되지"
옆에서 듣다 못한 한 친구가 한 마디 거들었다. 헤어져라는 말을 입에 쉽게 담을 수 없는 말이기는 하나 지금까지 나열해본 친구의 불만들을 되돌아보면 어떻게 참고 연애를 하고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러자 친구가 호탕하게 웃으면 머그컵을 들었다.
"백 번도 헤어질까 생각했지"
"근데 얼굴만 보면 다시 좋더라"
수백 가지 아니 수천 가지의 불만들이 머릿속을 헤집어놔도 헤어지지 않은 이유는 딱 하나. 아직 좋아하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에. 아까까지만 해도 공감할 수 없는 말을 뱉어내는 친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만큼 불만이 많지 않아도 사소한 불만들이 알게 모르게 마음 한켠에 자리 잡았음에도 마음이 변하지 않을 수 있던건 아직도 처음처럼 정국이를 좋아하기 때문이었고 불만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채 속으로 삼킬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내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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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아-"
-응, 오늘 뭐했어?
"나 오늘 친구 만났어"
-재밌었겠다
"너는 힘들었겠네"
-안 힘들어. 뭐, 맨날 하는 건데
"그래도... 내가 응원 좀 해줄까?"
-응원? 누나 오늘 진짜 재밌었나봐.
"흔하지 않은 기회야. 잘 생각해봐"
-그래? 빨리 해줘봐
"사!...으헛...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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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를 들었길래 허공 보고 웃고있냐"
"지민이형!! 야간훈련 하러 갈래요?!"
와... 제대로 맛 갔네. 지민이 형이 혀를 차고서는 빈 의자에 앉았다. 맛 갈 만한 소리를 들었으니 지민이형의 아니꼬운 눈빛을 받음에도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금 갑자기 코치님 들어오셔서 빙상장 돌고오라도 해도 웃으면서 돌고 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뒤이어 다른 선수들도 하나 둘씩 힘든 몸을 이끌며 앉는 공간이 아닌 곳에 편안하게 앉아버려 원래 앉는 공간인 마냥 착각이 들게했다.
"형, 이번에 대회 갔다오면 소개팅 할거죠?"
"웬 소개팅이요?"
"맏형이 너도 있는 여자친구가 없다는 게 크나큰 슬픔이라서 내가 주선하기로 했지"
나도 모르는 소개팅은 무슨 일인가 싶어 꼽사리처럼 둘 사이에 껴서 묻자 지민이 형이 고개를 홱 돌려서는 날 흘겨봤다. 형도 한 번 썸 탔으면서. 들어보니 별로 관련있는 일도, 관심이 가는 일도 아니라서 의자에 편안히 기댔다. 아직 손에 쥐어져 있는 핸드폰을 보자 아까 급하게 전화를 끊던 누나가 생각나 카톡창을 열었다. 다시 전화한다는 게 갑자기 형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못했는데 지금이라도 카톡을 보내볼까 싶어 키패드를 하나씩 눌렀다.
"근데 피겨 하는 애들이면 안 할거야-"
"아, 왜요?"
"저번에 너랑 썸 타던 여자애 있잖아"
"형, 다 끝난 이야기를 왜 꺼냅니까. 그리고 해도 걔는 안 해요"
"아니... 내가 얘기 안 하려 했는데. 걔가 피겨 하는 애들 다 모아서 우리 욕하더라"
바쁜 척 쩐다고. 큰형의 말 이후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고개를 올렸다가 본 굳은 지민이형의 표정에 핸드폰을 잠시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다른 선수들은 제일인 마냥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아니, 자기 훈련시간은 챙기고 내 훈련시간은 개무시해놓고... 어이없네. 걔가 뭐라했어요?"
"원래 피겨랑 우리랑 같은 빙상장 써서 시간 맞추기 어렵잖아"
"그거 말고 연락 가지고 그러던데요"
아, 저번에 지민이 형이 잠시 만난다고 했던 피겨선수 이야기구나. 두루뭉술하게 별 거 없이 끝났다는 지민이형의 말을 듣고 딱히 좋게 끝난 건 아니구나 싶어 깊게 하나씩 물어봤다가 괜히 기분만 상하게 할까 평소처럼 지나갔었는데 평소에 보기 힘든 착 가라앉은 지민이형의 표정을 보니 내 생각보다 더 안 좋게 끝난 듯 싶었다. 한마디 꺼냈다가 괜히 좋지 않은 얘기가 길어질까 내려놨던 핸드폰을 다시 집어 타자를 치기시작했다. 자?
"제 선에서는 완전 많이 한 건데. 매일 거의 두 시간 정도 통화했어요."
"워... 두 시간이면 많이 했네"
"근데 그게 여자 마음은 또 다르다니깐"
"훈련 끝나고 두시간이면 말 다했지"
"아니지"
티격태격 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토론의 장이 펼쳐지고 있구나. 주제는 연락은 얼마큼 해야 하나 인듯싶었다. 하지만 이 주제 또한 나와 딱히 관련있는 것 같지 않아 카톡창에 시선을 돌렸다. 바로 1이 사라진 카톡창을 보자 사랑해 한마디 하고 전화를 끊고서 안절부절했을 누나가 눈에 그려졌다. 하필 왜 딱 그 타이밍에. 다시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한순간 등장한 지민이 형을 원망하면 또 보내기 버튼을 누르는 데
"정국아"
"넌 연락 얼마나 하냐?"
지민이 형을 포함해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예상치도 못한 형들의 소환에 뒷통수만 긁적이자 답답했는지 답을 재촉했다.
"가능한 대로?"
"가능이란다- 역시 연애하는 사람은 다르네, 우리 모두 본받아야 해."
"전화는 얼마나 오래 해? 맨날 맨날 전화해?"
"아니요, 맨날 못하죠. 그냥 그 날 하고 싶은 말 많으면 오래 하고 피곤하면 짧게해요"
"제수씨는 화 안내?"
화를 낸 적이 있었나. 내게 대답을 원하는 시선들이 부담스럽게 느껴질만도 한데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눈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 되짚어 봐도 누나는 화를 낸 적은 없었다. 오히려 자꾸만 위험하게 몰래 전화하지 말라고 먼저 끊으려고 했으면 했지. 되려 전화를 끊지 않으려는 건 내 쪽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오늘은 뭘 했을까 궁금했고 그래서 기분은 어땠는지 알고싶고 혹시 다치거나 안 좋은 일이 생겼는데 숨기고 있을까 걱정이 됐다.
"오히려 화 좀 냈으면 좋겠는데요"
"진정한 위너다"
난 누나한테 궁금한 게 많은 데 누나와 다르게 같은 패턴을 반복하는 내 하루는 별로 흥미롭지 않아서 문제였다. 그런 단조로운 하루를 조금이나마 다채롭게 마무리 시켜주는 게 누나이기에 만약 누나가 그런 불만은 내비친다면 난 대환영이었다. 그러니깐 투정 좀 부려봐, 누나.
"잘 들었지? 정국이 여자친구같은 분으로 소개팅 주선해야 한다"
"음... 그러면 주선하기 전에 제가 채가야죠"
"찾기 힘들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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