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와 여고생
w. 꽃
아 ···
마셔.
꽤나 고단했던지 아이는 한참 후에나 눈을 떴다. 본래 내 몫이었던 차를 건네자 두려움도 없는지 주는대로 홀짝홀짝 잘도 받아 마신다. 내가 뭐라도 넣었으면 어쩌려고? 먹고 죽죠 뭐. 설핏 웃으며 농담조로 건네는 말에, 오히려 아이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오히려 놀란것은 나였다. 키며 외모는 영락없는 어린아이인데, 얼굴 표정과 말하는 투는 나이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오목 조목 제법 귀엽게 생긴 얼굴에 손도 발도 키도 눈에 띄게 작고 말랐다. 아이에게 노골적으로 향한 눈길을 거두고 식어버린 찻물을 다시 끓이며 무성의하게 물었다.
몇 살이야?
열일곱이요.
그래, 어느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중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지만, 교복이 이 근처 고등학교 어디서 많이 본 듯도 했다. 체격으로 보아서는 이학년이나 삼학년이라기엔 이상했고, 그저 일학년쯤 되었겠거니, 생각만 하고 있었더랬다. 하지만 그래도 막상 실제로 나이를 들으니 꽤나 놀라웠다. 내가 벌써 스물 일곱 먹었으니 계산 할 필요도 없이 강산이 한 번 변한다는 십 년 차이었다. 갑자기 그동안 원고에 빠져 인지하지 못했던 세월의 기간을 물씬 느끼는 듯 하여 문득 서럽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서른, 마흔 먹은 노장 소설가도 아니지만, 그래도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 아이 앞에 있다는건 어쨌거나 나를 슬프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름은?
당연한 수순이겠거니 하고 별 뜻없이 물었는데, 쉽게 나오던 전자의 대답과는 달리, 아이의 말이 없었다. 끓는 물에서 시선을 옮겨 아이를 보니, 아이는 원망하는 마음을 잔뜩 담은 눈길로 나를 책망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실수한게 있나 곰곰히 기억을 되짚어 보고 있자니, 아이가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거없잖아요. 곧 떠날거니까. 어른이 아이를 달래듯 조곤조곤 타이르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하지만 이내 화악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이름을 물어본것 뿐인데. 아이의 말에는 틀린 점이 없었다. 비를 피해 잠시 들어온것 뿐이었고, 곧 떠날 아이다. 오히려 이름을 묻는 내쪽이 이상하게 느껴질수도 있었다. 하지만 달랐다. 이건 뭔가 억울했다. 이름정도는 물어볼수 있는거 아닌가? 저는 남의 집에 무작정 들어온 주제에. 할 말은 많았지만, 조금이나마 남은 어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위해 입을 다물었다.
··· 이름은 아니지만, 진이라고 부르세요. 진.
그렇게 진과의 의도치 않은 동거가 시작되었다.
곧 머물다 갈거라는 첫 만남때의 말과는 달리 아이는 며칠이고 나의 집에 머물렀다. 언제쯤 떠날 것이냐, 야속하게 들릴수도 있는 타박을 할때면 아이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배째라는 식으로 배시시 웃고 말았다. 그리고 그 웃음을 보고 나면 나도 모르게 또 누그러져 이틀쯤을 그냥 보내는 것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에도 사람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작품을 시작할때면 그 기피증은 더욱 심해졌다. 으레 찾아오는 출판사 사람도 얼씬조차 못하게 할만큼 까칠했던 모습은, 스스로를 진이라 칭하는 이 정체모를 아이 앞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나이에 비해 제법 설거지며 음식도 수준급인 아이의 모습에, 어차피 도우미 아줌마를 부를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구차한 핑계를 대며, 오히려 내쪽에서 아이를 받아들이는 부분도 분명 있었다. 아이는 매우 영리했다. 며칠만에 소설가라는 내 직업을 알게된 후로는, 조용히 해야할 때와 말을 걸어야 할 때를 분명히 구분했다. 나는 약간의 결벽증도 있었지만, 아이는 첫 만남때의 소파의 최후 이후로 한번도 집안을 더럽힌 적은 없었다. 오히려 내가 몇 번의 잔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다.
아이는 잠깐의 반항심에 집을 나온 가출 청소년은 아니었는지, 비에 젖은 교복을 빨아 말리고는 다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전쟁을 치루듯 한바탕 시끄럽게 하고 아이가 학교로 떠나고 나면, 나는 심지어 독립하고서 한번도 없었던 외로움과 적막감을 소름끼치게 느끼며, 빨리 아이가 돌아오기만을 하루 종일 기다린적도 있었다. 내가 하얀 모니터 창을 바라보며, 글을 쓰지 못하는 내 손과 머리를 자책하고 있을 때면, 아이는 어느 사이엔가 내 방으로 들어와 내 옆에 앉아 재잘재잘 떠들어 댔다. 그러나 아이는 결코, 학교와 집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으며, 그 주된 내용은 주로 내 생활에 대한 의문이 대다수였다. 대답해주지 않는 나를 잘 알면서도, 아이는 굴하지 않겠다는 듯이 나에 대해 끊임 없이 질문했다.
아저씨는 참 이상한 사람이에요.
네가 더 이상해.
모르는 여자가 집에 눌러앉아 사는데도 아무렇지 않아요?
모르는 남자네 집에 눌러앉아 사는데도 무섭지도 않니?
이런식의 별의미없는 대화가 대부분이었지만, 나는 그마저도 감사하게 느낄 만큼 그 생활에 충분히 만족했다. 오히려 아이가 내 인생에 나타나기 전 모습이, 스스로의 가엾음을 숨기기 위한 나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었는가, 하고 의심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래, 나는 어쩌면 그동안 지독하게도 사람이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보잘것 없는 글을 사랑해 주셔서 감사해요ㅠㅠ 여러분의 과분한 댓글에 작가는 행복합니다...♥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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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나락간 연예인들 보면... 반응도 좀 무서울 때 있음.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