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와 여고생
w. 꽃
핸드폰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닫았다.
벌써 일주일이다. 아이가 떠난 지도. 그날은 아이에게 화가 났고, 둘째날은 원망했으며, 셋째날은 궁금했고, 그 다음은 두려웠고, 후회했으며, 걱정했고, 보고싶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이제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아이가 미치도록 그리웠다. 내 원고작업도 중단되었다. 당연했다. 내 글은 아이로 인해 지어졌고, 아이로서 이루어졌다. 이제, 아이가 사라졌으니, 내 글 또한 사라졌다.
핸드폰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닫았다.
나는 고민하고 있었다. 아이를 다시 만날지의 여부에 관한게 아니었다. 아니, 사실 그것은 여부를 따질 것도 없었다. 지금, 아이가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기다리는 것 밖엔, 아무것도 없었다. 진실로 내가 고민하는 것은 이 방법이 옳은지, 였다. 아이는 나에게 스스로의 근원과 그 주변을 알리기를 원치 않았다. 따라서 나는, 아이의 동의 없이 그곳에 발을 들이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지금 아이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라면 내 영혼도 팔 수 있을 지경이다. 이로 인해 아이가 어떤 상처를 받을 지라도, 참으로 이기적인 나는 이렇게 해서라도 아이를 보아야 했다.
핸드폰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닫았다.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할 시간이다. 핸드폰을 열었다. 통화 목록에 찍힌, 저장 되지 않은 번호로 전화를 건다. 몇 번의 신호음이 뒤로 예전의 무례한 젊은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전화를 걸기 전 수없이 연습하고, 상상했던 말들이 하나도 생각 나지 않았다. 머리가 백지처럼 하얗게 변해버리는 기분이다. 소설가란, 내 머릿 속 공상을 글로 적어내는 직업이다. 하기에 나는 늘 거짓말에 능했고, 익숙했다. 하지만 지금은, 나는 도둑질을 하고 들켜버린 아이가 된 듯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이가 있었더라면, 붉어진 내 얼굴을 두고두고 놀렸으리라. 아이. 나는 아이가 보고프다. 용기를 내야 한다.
진이, 아버지 되는 사람입니다. 진이, 담임선생님이시죠?
수화기 너머 풋 ㅡ. 웃는 소리가 들렸다. 뭐가 잘못 된거지? 열일곱의 딸을 둔 중년 남성처럼, 나이들어 보이려 목소리도 최대한 낮춰 보고, 말도 더듬지 않으려 나름 최선을 다했다. 수화기를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무슨 실수를 했는지 성급히 되짚고 있자니 여자가 의아한듯 물었다.
아, 죄송해요. 댁에서도 그렇게 부르시나 봐요? 진··· 한 진아 말씀하시는거죠?
이름이 말썽이었다. 그래, 진이는 이름이 아니었다. 한심하게도 망각하고있었다. '진'은 학교에서 부르는 애칭 쯤 되었는지, 다행히 여자는 알아 들은 모양이다. 진아. 진아. 한 진아. 그동안 얼마나 알고 싶던 이름이던가. 몇번이고 이름만이라도 알려달라고 애원을 했었다. 내 모습이 갸륵해 한번 언질이라도 해줄만 하련만, 아이는 늘 냉정했다. 이렇게 쉽게 알게 될 것을, 그동안 어찌 그리도 숨겼던가. 아이의 영역으로 발을 들인게 참 잘한 일이었다고, 적어도 이름을 알게 되었지않느냐고, 그렇게 나는 내 자신을 합리화했다. 지금은 어딨을지 모를 아이에게 힐긋, 원망의 눈초리를 흘기고는 그 예쁜 이름을 머리속으로 몇번이고 되뇌이다가 늦게서야 정신이 들었다.
네,네, 맞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
저번에 전화 주신 뒤로 생각이 났는데, 저희 집이 이사를 했거든요. 주소가 바뀌었는데, 새로 등록이 되었는지··· 혹시 그 전 주소좀 불러 주실수 있을까요? 그래, 도둑질도 처음이 어렵다던가. 한번 뚫린 입은, 거짓을 말하는데 막힘이 없었다. 이제 남은 건 여자의 대답을 기다리는 일 뿐이었다. 제발 들통나지 말아라. 믿지 않던 신을 찾아 빌며, 나는 여자에게 한치의 의심도 없기를 간절히 바랐다.
***
여자가 알려준 주소대로 길을 나선지 벌써 두 시간이다. 아파트 생활에 익숙해진 나로서는 이 원룸촌이 어디가 어딘지 도저히 분간할 길이 없었다. 이 건물이 그 건물 같고, 이 길이 그 길 같았다. 아니, 어쩌면 내가 같은 곳을 몇번이고 돌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길을 가던 사람을 붙잡고 사정해 간신히 종이에 적힌 장소로 도착했다. 생각 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어제까지 이름도 모르던 낯선 여자아이에게 바보같이 속아 넘어가 이용만 당해놓고, 이제서야 사실을 깨닫고 원래 내 모습과 생활대로 되돌아가나, 했더니, 멍청한 나는 내가 밀어낸 아이를, 다시 찾아가고 있는 모양이다. 아이의 학교에 말도 안되는 거짓말까지 하고서. 어쩌면, 아이와 지낸 몇주동안, 나는 나도 모르게, 지독히도 아이를 닮아갔는지 모른다.
아이의 집 문앞이다. 당장 아이를 보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일을 저질렀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정신이 들었다. 안에 부모님이 계시면 어쩌지? 아이가 외출이라도 했으면? 아니, 이 집이 맞는건가? 온갖 현실적 질문에 대답해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병신같이.
웃음이 터졌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거지? 아버지 번호도 거짓으로 적은 아이다. 집주소야 지어내지 못할게 뭔가. 나는 원래가 태생부터 이런 용기를 낼 따위의 위인이 못 된다. 나는 내가 잘 알았다. 비겁하고 소심한. 그래, 그런게 나란 놈이다. 이정도까지 온 것도 나로서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아이가 바꿔놓은 내 모습에 새삼 놀라며, 물밀듯 몰려오는 허탈감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제 다시 현실과 타협할 시간이 왔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럴때 담배라도 피울 줄 알면 좋을걸.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돌렸다.
··· 씨, ···아저ㅆ···
문 안에서 아주 작은 신음소리가 났다. 다른 이었다면 듣지 못하고 그냥 넘길수도 있을만한 그런 아주 작은 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들을 수 있었다. 분명히 아이었다. 안에, 아이가 있다. 나를 부르고 있다. 그것으로 이유는 충분했다. 모험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아이다.
쾅쾅쾅ㅡ 진아! 진아, 문열어봐! 진아!
몇분동안 현관문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애타게 아이를 불렀는데도, 안에선 응답이 없었다. 손에서 피가 흐르고, 목에선 울음섞인 목소리가 흘렀다. 진아···, 진아···. 아무리 불러도 들리는 건 나를 향한 옆집 사람의 욕섞인 고성뿐이었다. 잘못 들은건가, 아니. 그럴리가 없다. 아이의 목소리를 착각할만한 내가 아니다. 불안감이 온 몸을 엄습했다. 차라리 내가 미워 피하는 거면 다행이다. 그러나 머릿속에선 내 의지와 무관하게 자꾸만 안좋은 생각만 떠올랐다. 그냥 한번 얼굴이나 보고 싶었다. 집에 돌아오지 않아도, 그저 건강히 잘 있는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끼익ㅡ
한참 후에서야 느리게 문이 열렸다. 눈물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황급히 눈가를 비볐다. 믿을 수 없게도 눈앞에 아이가 서있었다. 그런데 내가 알던 예전의 아이가 아니었다. 진은 한눈에 보기에도 위험했다. 안그래도 마른 몸이 눈에 띄게 체중이 줄었고, 입술은 부르트다 못해 피딱지가 앉았다. 피부는 창백했고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그동안 부모란 인간들은 집에서 애 관리를 어떻게 한건지. 분노가 치밀었다. 고작 이 꼴을 하려고 나를 두고 가버린 건가. 분노가 아이를 향했다. 하지만 이내 곧 사라졌다. 이 작은 아이 앞에선 화도 낼 수 없었다. 미칠 지경이다. 분노와 걱정과 안도와 또다시 걱정. 그리고 반가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아이는 항상 내 이성을 잃게 만들었다. 아이 앞에서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너, 너··· 할 말을 잃었다.
아저···씨.
아이는 웃고 있었다. 활짝 웃는 눈은 반달모양으로 보기좋게 휘어지며 어울리지 않는 눈물만 흘렸다. 잔뜩 쉰 목소리였다. 일주일만에 이 꼴이 될 수 있는 건가. 나를 향해 손을 뻗는 팔에는 간신히 사라졌던 멍자국이 다시 생겨났다. 옷에 가려진 부분에 있을 상처는 안봐도 뻔했다. 아이가 손을 뻗어 내 얼굴을 향하는 동안에도 나는 충격에 굳어버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왜, 왜. 이 작은 아이를 건들일 곳이 어디있다고. 누가, 대체 왜.
보고···싶었어요.
아이가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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