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와 여고생
w. 꽃
엉겁결에 쓰러지는 아이의 몸을 받쳐 들었는데, 가벼워도 너무 가벼웠다. 고등학생은 무슨 중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만했다. 정신없이 쓰러진 아이를 고쳐 안는데, 이 와중에도 멍자국이 생각난다. 씨발. 혹시라도 들릴까 작게 욕설을 뱉었다. 진짜 어떤 새낀지 얼굴 한번 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었다. 쓰러진 아이를 옮기는게 먼저다. 우리집은 너무 멀었고, 병원을 가자니 보호자를 불러야 할 것 같았다. 헐레벌떡 달려온 부모가 나를 대면하면 뭐라고 생각할까. 오해 받기 십상이다. 아니, 오해도 아니지. 아이와 나와의 관계는 나조차도 정의할 수 없는 애매한 상황이 아닌가. 할 수 없이 내키지 않는 아이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안에 부모가 있을 리가 없다. 일단 되는대로 이불을 깔고 아이를 눕혔다.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집은 방바닥이 얼음장이었다. 한껏 낡아버린 전기장판의 온도를 최고로 높히고, 게중에서 그나마 가장 두터워보이는 이불을 잘 덮어주었다. 집안꼴은 아비규환이다. 이렇게 차갑게 식어버린 아이가 조금 전까지 외롭게 있었을 곳은, 부모님이 아닌 초록색 술병들이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그릇은 하나같이 이가 나갔고, 변변한 가구는 커녕, 바닥엔 쓰레기가 굴렀다. 근원이 어디인지 모를 음식물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분노가 치밀었다. 이런 곳에 아이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대접을 받을만한 아이가 아니다. 세상 누구보다 사랑스럽고 강한 아인데, 여기 누워 웅크려 떨고있는 메마른 아이는 저 답지 않게 나약했다.
아저씨, 아저씨···.
부르튼 입술은 자면서도 나를 찾았다. 그래, 나 여기있어. 이제 제발 푹 자, 진아. 응?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고 등을 토닥였다. 아이의 차가운 두 손이 한 손에 잡힌다. 몸이 조금 녹았는지, 아이의 두 뺨에 혈기가 돌았다. 대체 얼마나 떨었던 거야. 아이를 이 극한 상황으로 내몬 것은 그래, 바로 나다. 내 치졸한 자신이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다. 변변한 옷거지도 없이 홀로 여름 비를 맞으며 타박타박 이 먼 곳까지 걸어갔을 아이는 그동안 나를 얼마나 원망했을까. 누굴 탓할 것도 못되었다. 가장 큰 죄인은 나다.
***
되는대로 집안을 대강 정리하고 나뒹구는 술병을 내놓았다. 혹시나 그사이에 아이가 깰까, 부리나케 달려가 약국에서 약을 사오고, 죽집에서 사온 죽을 다시 끓여 데웠다. 아이가 일어나진 않았을까 몇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몇 안되는 쌓인 그릇을 설거지했다. 원룸촌에서도 아이의 집은 가난한 편에 속했다. 방은 커녕 부엌과 거실을 구분하기도 애매할 정도로 좁은 집은, 네 사람이 눕고 조금 남을만한 크기다. 보일러를 켠지 꽤 지나자 드디어 방에 온기가 돌았다. 그제서야 마음 놓고 음식을 했다. 독립하기 전까지만 해도 집안에선 손하나 까딱 안하던 나였다. 새로 집을 구해 나온지 몇달간은 인스턴트만 먹다가, 이렇게 살다간 죽겠구나, 싶을 때 쯤이 되어서야 음식을 해먹었다. 지독히도 집안일을 귀찮아 하던 내가, 누구의 집일지도 모르는 곳을 그 어느때보다 정성스럽게 쓸고 닦는 모습에 자조섞인 웃음이 터졌다. 어머니가 보시면 얼마나 배신감을 느끼실까.
아저씨···.
아이가 깨어났다. 황급히 설거지를 서둘렀다.
일어났어? 몸은 좀 어때. 갑자기 쓰러져서 놀랐어. 괜찮은거야?
···.
집안 꼴이 이게 뭐야. 네 몸은 또 왜그래. 어떤 새끼야? 어떤 자식이 이래놨어?
···.
걱정됐어. 후회했고, 미안했어. 그래도 이제 좀 마음이 놓인다. 병원가보자 응?
아무리 말해도 대답이 없었다. 설거지를 다 마치지 못하고 고무장갑을 낀 채 걱정스레 뒤를 돌아보는데 아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왜 울어. 응? 말 좀 해봐. 아직도 어디가 아파? 약 사왔는데. 아무래도 병원에 가봐야겠다. 빨리 옷입···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아이가 달리듯이 나에게 안겨왔다. 진아, 나 비누 거품···! 너무 당황스러운데도 내 품을 파고드는 아이의 몸이 따뜻해서, 그 와중에 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아이는 서럽게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한 쪽 고무장갑을 벗고 아이의 등을 어루만졌다. 야윈 몸은 등뼈가 다 만져졌다.
왜그래, 울지마···.
아저씨, 내가 다 잘못했어요. 다신 안그럴게요. 거짓말도 안하고 학교도 아저씨가 가라면 꼬박꼬박 나갈게요. 아저씨가 하라는 데로 다 할게요. 그러니까 나 좀 아저씨 집에 데려가줘요. 내가 다 잘못했어. 나 버리지말아요. 아저씨··· 제발··· 제발, 나 좀···.
말을 이어가면서도 아이의 울음은 멈출줄을 몰랐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아이는 그말만을 반복했다.
***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벌써 하늘은 어둑어둑 했다. 짐이라고 싼 물건은 몇 안되는 옷가지가 다였다. 아이는 이 집에 어느 것도 미련이 남지 않은 듯, 문을 나온 이후로 단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버스 정류장까지 함께 걷는 동안에도, 아이와 나는 서로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버스 좌석에 나란히 앉아 창 밖 야경을 하릴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아이의 머리가 내 어깨에 기대어 왔다. 아이는 눈을 감고있었다. 시선을 다시 창 밖으로 옮겼다.
엄마는···, 어디갔는지 몰라요. 선생님한테 아빠 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요.
아이의 눈을 바라보고 싶었다. 아이는 많이 고단했는지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눈물을 참으려 그랬을지도 모른다.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괜찮다고.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꼭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아이의 목소리가 너무 슬퍼서. 감히 나조차는 침범할 수도 없을만큼 외로워서. 말을 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빠가 때렸어요. 몇주간 사라져서 평소보다 더 많이 맞았어요. 그래도, 아저씨랑 있었던 동안이 그렇게 행복해서, 그 대가가 이거라면, 그래, 이 정도는 견딜만 하다. 생각했어요.
아이의 손을 잡았다. 힘겹게 한마디를 뱉었다. 그만 말해도 괜찮아. 아이는 그제서야 안심하고 잠에 빠졌다.
우리 두 사람 뿐인 버스안의 정적을, 덜컹거리는 소리와, 스쳐가는 가로등 불빛이 가득 채웠다.
BGM - reminiscence (테일즈 위버 ost) 암호닉 : 아즈씨 만만세님, 나비님, 승민님, 사과님, 감귤님, 레더라님, 연필님, 구자농민님, 격한님, 댕열님, 아찌님 모두모두 사랑해요♥ 처음으로 BGM 넣어봤는데 어떤가요?ㅠㅠ 어울리는거 찾느라 힘들었어요ㅎㅎ 스포하자면 다음 편엔 불마크가?!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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