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그래프꼭짓점 인물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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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그래프꼭짓점 20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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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니임~ 퇴근시간이에요오~"
말꼬리를 늘이는 성규는 참 귀여웠다. 그러나 우현은 괜히 맘에도 없는 말을 했다.
"마,말꼬리는 왜 늘어트려요. 혀에 살쪘어요?"
성규, 메고 있던 가방을 다시 내려놓는다.
"도와줄 건 없고. 심심하니깐 앉아서 말동무나 해줘요."
의자를 끌고 와 테이블 앞에 앉은 성규가 의자를 좌우로 흔들거리며 핸드폰으로 동우와 문자를 주고 받았다.
"장오권이 누구에요?"
우현이 피식 웃으며 서랍에서 USB를 꺼내 컴퓨터에 꽂았다.
"왜 웃어요? 미심쩍게."
그 후 우현은 정말 묵묵히 일만 했다. 말동무를 해달라면서 정작 너무나 진지한 표정으로 일하는 모습에 성규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의자에 앉아 발가락과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서서히 졸음도 몰려온다.
"졸려요?"
졸린 눈을 비비며 휴게실로 들어가는 성규를 보며 우현이 기분좋게 웃었다. 사무실 안에 자신과 성규, 딱 둘만 있다는 느낌이 썩 나쁘지 않다.
"…왜 안 오지."
커피 원두를 따러 자메이카로 갔나? 아님 원두를 빻으러갔나…. 결국 일하던 서류를 잠시 미뤄두고 휴게실로 가 불투명한 유리문을 벌컥 열었다.
"……."
성규는 손에 커피 믹스를 꼭 쥐고 테이블에 얼굴을 댄 채 잠들어있었다. 커피포트에 담긴 물은 식은 지 오래였다. 커피포트 전원을 끄고 성규에게 다가간 우현이 무릎을 낮추어 성규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살짝 벌린 입술, 높은 콧대, 작지만 매력있는 눈, 흐트러진 갈색톤의 머리. 나중에 머리색깔가지고 시비 한 번 걸어야겠다.
"…피부 되게 뽀얗네."
볼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살결 한 번 끝내준다. 약간 구릿빛 도는 자신의 피부톤과 달리 성규는 두부처럼 허여멀겋다. 새근새근 내뿜은 성규의 숨결이 우현의 이마에 와 닿았다.
"……."
우현, 살짝 손을 들어 성규의 뺨을 쓰다듬듯이 건드린다. 전에도 느꼈지만 참 푸딩같다. 스물여덟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탱탱하고 매끈거렸다. 그때 성규가 부스스 눈을 떴다.
"흐읍. 아, 침 흘렸다."
침 때문에 촉촉히 젖은 입술을 성규가 손등으로 훔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뇌는 깼지만 몸은 아직 수면 중인지 다리에 힘이 서질 않아 성규가 으헉,하는 소리를 내며 비틀거렸다. 우현이 재빨리 그 허리를 붙잡았다. 어색한 분위기에 성규가 빠져나오려고 몸을 살짝 뒤틀자 우현의 손에 힘이 바싹 들어간다. 마치 그대로 있으라는 것처럼. 레이저가 발사될 듯한 우현의 눈빛에 성규가 커피믹스를 꼭 쥔 채로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김성규씨."
'일단 이것 좀 놔요'하고 말하려는데 여전히 잡고 있는 손은 끄떡도 하질 않았다. 참 이상한 건, 가슴이 두근두근거린다는 점이다. 우현의 얼굴이 점점 성규 코앞으로 다가왔다. 저번과 똑같은 상황이다. 우현의 코와 성규의 코가 맞닿았다. 성규의 손에 들려있던 커피 믹스가 투둑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
우현의 눈동자가 흔들흔들거리는게 훤히 보이는 거리. 아마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키스를 할 지, 아니면 저번처럼 그냥 물러설지. 그리고 그때, 성규가 먼저 고개를 들이밀어 입을 맞추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앞에 두고 고민을 하는 우현의 모습에 묘하게 오기가 발동했던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는 그런 거지같은 오기. 동그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게 느껴져 얼른 눈을 감았다. 내가 드디어 미친건가? 속으로 생각하며 좀 더 편안하게 뒷통수를 잡아오는 우현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키스는 부드럽고 달콤했다. 성규에겐 정말 수년만의 키스였다. 그리고 그 상대가 우현이라는 점이 썩 나쁘진 않았다. 우현이 키스를 잘해서였을까? 아니면….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제서야 가출했던 정신이 스물스물 들어오기 시작하고 상황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우현의 근육질 잡힌 팔뚝이 느껴지고 지금 입안을 헤집고 있는 우현이 느껴지고 상대가 무려 남!자!라는 것도 느껴지자 머릿속에서 위이이잉하는 사이렌이 울렸다. 비상, 비상! 얼른 입술 철수하고 도망가라, 오바. 성규의 뇌에 위치한 지휘부 장관이 명령을 내렸고 그 명령에 성규는 즉각 반응했다.
"…하아."
꽤 긴 시간의 키스에 둘 다 숨까지 거칠어져있었다. 성규는 혼란스러웠고 우현은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너,너무 느,늦었어요. 먼저 가볼게요."
휴게실을 박차고 나온 성규가 가방을 냅다 집어들고 회사를 뛰쳐나왔다. 회사 입구에서 멈춰선 성규가 주먹 쥔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계단에 주저앉았다. 농후한 키스에 입술이 아렸다.
"…위험해."
우현에게 드는 감정이 너무 위험했다. 한편 휴게실에 혼자 남아있던 우현, 평소 안 하던 욕까지 나지막하게 내뱉으며 커피 포트 옆에 있던 커피 믹스통을 집어던졌다. 화가 난다. 그 순간의 감정을 제어못한 자신 때문에, 자꾸만 커지는 알 수 없는 감정 때문에.
*
인생그래프꼭짓점
20.
한숨을 쉬며 버스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입술은 아직도 저릿저릿했고 다리는 계속 후들거린다. 왜 키스를 했을까. 나나, 남우현이나. 50%는 먼저 한 내 잘못, 나머지 50%는 먼저 분위기잡은 남우현 잘못. 결국 둘 다 잘못. 따지자면 먼저 한 내 잘못이 조금 더 많긴 했지만 어찌됐든 나랑 남우현은 키스를 했다. 그것도 찐하게. 고등학교 체력장할때도 이렇게 가슴이 쿵쾅쿵쾅뛰진 않았었는데…… 머릿속이 복잡했다. 일단 제일 첫번째 문제는 당장 내일 마주할 남우현 얼굴이었고, 두번째 문제는 자신의 감정이었다.
"…너무 간만이라그래."
그래. 키스가 너무 간만이라서 '키스'라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이렇게 부끄럽고 설레는 걸꺼다.
"얼른 여자를 만나야겠어."
빨갛고 뜨뜻한 두 볼을 착착 두드렸다. 심장은 한참이나 요란했다. 버스가 멈추고 가방을 챙긴 성규, 터덜터덜 버스에서 걸어내린다. 입김이 날 것만 같은 밤이다. 살짝 오동통해진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집으로 향하는데, 뒤에서 부우웅- 하는 익숙한 소리가 들려온다. 성규는 얼른 의류 수거함 뒤로 몸을 감췄다. 역시나 우현의 벤츠다. 성규네 앞에서 잠시 멈칫하는 벤츠. 성규는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우현의 벤츠는 한참이 지나서야 성규네 대문을 지나쳐 매일 주차하는 곳에 멈춰섰다. 운전석 문을 열고 나오는 우현의 모습에 성규는 몸을 좀 더 움츠렸다. 차에서 내린 우현은 집으로 갈까하다가 잠시 고민하는 듯 발길을 멈추더니 성규네로 향했다. 헉. 설마 벨을 누르려는건 아니겠지? 성규의 조바심과는 달리 잠시 서있던 우현은 특별한 행동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아이씨, 어떡해!"
자신의 입술을 찰싹 때린 성규가 발을 동동 구르며 의류 수거함을 퍽 걷어찼다.
*
구두를 벗는 우현에게 오늘도 성열만 다가와 반겼다.
"순재 자?"
방으로 들어가려던 우현을 성열이 불러세웠다. 입술…. 성열이 자신의 입술을 가리키며 말했다. 입술? 우현이 천천히 손을 올려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축축한 물기가 묻어나온다.
"아…."
피나네. 얼마나 격하게 했으면 피가 날까. 티슈를 뽑아 입술을 닦으며 생각했다. 성규도 피가 날까. 시덥지않은 생각을 하며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
물줄기가 뜨거운 머리는 식혀줬지만 달뜬 입술은 식히지 못했다. 말랑하고 촉촉하던 성규의 입술 감촉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더불어 성규를 안을 때의 느낌까지. 성규는 굉장히 부드럽고 보들거리고 품안에 쏙 감겼었다. 보기보다 좀 마르긴 했지만 닿는 감촉이 뭐랄까, 따뜻하고 푸근하다고 해야하나?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아래 쪽으로 뻐근하게 피가 몰리는 걸 느낀 우현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오늘 일은 실수였어, 실수. 생각해보면 먼저 키스를 한 건 성규였다. 물론 자신이 먼저 포즈를 잡긴 했지만. 수도꼭지를 잠근 우현이 거울에 서린 습기를 슥 닦아내고 생각에 잠겼다. 성규가 먼저 입술을 들이댔다. 왜 일까. 날 좋아하나? 그렇지 않고서야 왜 먼저 입술을 갖다댔을까. 그것도 자존심 센 성규가…. 대충 물기를 닦고 샤워 부스에서 나와 속옷을 꺼내는데 문득 침대 구석에 앉아있는 갓파인형이 눈에 들어온다.
"…뭘 봐."
손에 들려있던 수건을 던져 도톰히 반짝거리는 인형 눈을 가렸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핸드폰 알람을 확인하며 침대에 누웠다. 내일 아침, 성규는 우현을 피해 평소보다 일찍 출근을 할 게 분명했다. 차라리 그게 편하겠지. 자신도, 성규도. 몸을 뒤척이며 인형 쪽으로 몸을 돌린 우현이 손을 들어 수건을 잡아 끌어내렸다. 인형에게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맛을 다시다가, 이내 한숨을 쉬며 인형 얼굴을 툭 밀쳐 침대 밑으로 떨궈낸다. 눈을 떠도 성규 얼굴, 눈을 감아도 성규 얼굴만 둥둥 떠다닌다.
결국 명수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잠 좀 자자, 잠 좀!"
성규의 한숨 소리에 솔솔 오던 잠이 모두 달아나버렸다. 엽기토끼인형을 품안에 꼭 끌어안고있는 성규는 명수가 던진 베게에 얼굴을 정통으로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별 반응이 없었다.
"혹시 회사 잘렸어?"
아흐. 머리를 박박 헤집은 성규가 엽기토끼 귀를 앙앙 깨물었다.
"그럼 나 잘꺼니깐 한숨 그만 뱉어. 청테이프로 입 막아버리기전에."
결국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명수가 방안의 불을 켜고 성규의 몸을 일으켜세웠다.
"말해."
성규의 얼굴로 봐선 장난이 아닌 것 같아 명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바꾸며 되물었다.
"갑자기 키스는 왜?"
내가 생각하는 예외? 입술을 톡톡 치며 생각에 잠겼다. 우현과 자신이 해당되는 예외는… 아무리 머리를 짜내어봐도 떠오르질 않는다.
"……몰라. 안 떠올라."
성규, 명수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끄덕. 하긴 했지…. 근데 남자랑. 그것도 남우현이랑. 뒷말은 삼키고 고개만 끄덕거리자 명수가 놀란 눈치로 묻는다.
"모태 솔로 김성규가 키스를?"
명수가 성규의 엉덩이를 토닥토닥거리며 아무튼 어떤 여잔데? 예뻐? 가슴 커?하고 물어왔다. 여잔 아니고 예쁜 건 더더욱 아니고 보너스로 가슴도 없어. 왜냐면 남자거든!
"그게 문제가 아냐. 내 말 들어봐. 글쎄 나랑 그 사람은 진짜 키스할 관계가 아니였거든?"
성규,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난다. 사겨보면 알겠네. 명수가 심드렁하게 말하게 도로 침대에 누웠다.
"키스를 했다는 건 은연중에 서로에 대한 호감이 있기때문에 한 거 아냐?" 느릿느릿 침대에서 일어나 불을 끄고 다시 침대에 누운 성규는 한참이나 뒤척거리다 잠에 들었다.
노란색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파에 앉아 음소거로 해놓은 TV를 멍하니 보고있던 동우가 초인종 소리에 이불을 뒤집어쓴채로 꾸물꾸물 일어나 현관문으로 향했다.
"누구세요?" [나 호원이요]
호원의 목소리에 얼른 문을 열었다. 형 안녕. 호원이 어색하게 반말을 쓰며 손을 흔들었다. 추울텐데 어서 들어와. 동우가 이불로 감싼 몸을 꿈틀거리며 어두컴컴하던 집안의 불을 켰다.
"왜 둘둘 말고 있어요?"
이불을 둘둘 말고 고개만 쏙 내밀고 있는 앙증맞은 동우의 모습에 호원이 꿀꺽 침을 삼켰다.
"원래 혼자 있을땐 보일러 잘 안 켜거든. 근데 그 봉지는 뭐야?"
아, 이거요? 그냥 형 좋아할만한 거 사와봤어요,하며 호원이 묵직한 봉지를 식탁에 올려놓았다.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과 프랑스바게트 쿠키가 한가득 들어있었다.
"우와. 되게 많네… 너가 저번에 사온 과일도 다 못 먹었는데."
이불을 홱 벗어 소파에 내려놓더니 소매를 걷어부치며 주방으로 향한다. 집 분위기과 지금 이 상황이 꼭 신혼 분위기같아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식탁 의자에 앉은 호원, 분주히 무언갈 준비하는 동우의 뒷모습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는데 도마를 꺼내던 동우가 갑자기 휙 뒤돌더니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호원아."
동글동글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그대로 마주한 호원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혼자 잘 있나 걱정되기도 하고 그냥 자꾸 생각나서요.
"아아…."
조금 낯간지러운 말에 동우가 얼른 도마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가게는 어떻게 됐어요?"
애호박과 양파를 꺼내 능숙하게 칼 질을 하며 쪼그마한 입으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장오권이라는 분이 이상한 남자들이랑 여기저기 재보더니 내일 보자면서 말도 없이 사라졌댄다.
"근데 아까 포털사이트에 쳐봤는데 장오권이라는 사람 되게 유명하더라구. 남우현씨가 디자이너분을 소개시켜준 건 고마운데 돈 많이 나오면 어떡하지."
사실 내가 돈이 많지않거든. 보험비가 나오긴 하지만 유명디자이너 지어주는 가게면 돈이 무지 들테고 또 수고비도 드리려면…. 동우의 말을 잠잠히 듣고 있던 호원이 설마하는 마음에 '그 돈을 형이 내려던 생각이었어요?'하고 묻자 뚝배기에 물을 담던 동우가 '그럼 누가 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순수하면 눈치가 없다는 말이 사실이었나보다.
"형. 그 돈 형이 안 내도 되는 거에요."
정말 모르는 눈치다.
"형, 남우현 몰라요?"
그러는 형도 남우현을 모르는 거 보니깐 간첩이네요. 남우현이 누구냐면요.
새벽에 가까워지는 시간. 지금 잠들어도 피곤할 시간인데 성규는 잠이 오질 않았다. 가끔씩 동네 개 짖는 소리와 오토바이 지나가는 소리를 고스란히 들으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지 못 한채 좌우로 뒹굴거리고 있는데 띠링 하고 핸드폰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
[남우현이라는 사람. 꽉 잡아놔야겠더라 - 동우 - ]
"…뭐래, 미친놈. 이 자식 단단히 돌았네."
안 그래도 심란해죽겠는데! 미간을 찌푸리며 동우의 문자를 과감히 삭제한 뒤, 핸드폰을 홱 집어던지듯이 내팽겨쳤다. 침대밑으로 핸드폰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고물폰.
당장 내일 마주할 우현의 얼굴이 막막하면서도 명수의 코고는 소리를 계속 듣고 있자니 성규도 점점 잠에 빠져들었다.
호원은 배웅을 하겠다며 가디건을 뒤집어쓰고 따라나오는 동우에게 애정섞인 타박을 했다. 실은 좋아죽겠으면서. 갈께요. 운전석에 올라탄 호원이 자신에게 손을 휙휙 흔드는 동우에게 똑같이 손을 들어주고 차를 출발시켰다. 동우표 된장찌개가 뱃속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음식이 소화된다는게, 이렇게 아쉬울 정도로 동우가 좋다.
"내일 또 가야지."
기분좋게 웃은 호원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로등이 주욱 늘어선 도로를 빠르게 내달렸다.
*
또 악몽인가? 안개가 자욱한 곳에 서있던 우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깨어나려 노력해봐도 깨어날 수 없다는 건 이미 예전에 깨달았다. 근데 오늘은 상황이 좀 다르다.
"……."
처음 보는 낯선 장소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안개가 참 축축했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안개에 손으로 안개를 내저으며 천천히 한걸음씩 발을 내딛는데 순간 '참방'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강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강?"
강이라기보단 낚시를 하는 저수지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 천천히 뒤로 물러난 우현이 주위를 둘러보기도 전에 옆에서 불쑥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안개가 자욱한 날엔 낚시하기에 참 좋은 날이지. 안 그런가?"
"…꿈이죠?"
그래도 생각보다 편안한 기분에 우현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남자의 낚시질을 멍하니 구경했다.
"낚싯대가 많이 낡았네요. 그 낚싯대로도 낚시가 가능합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뭔지 아나? 남자의 질문에 우현이 잠시 고민을 하다가 나름 그럴싸한 대답을 내어놓았다. "…사랑아닌가요."
우현,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린다.
"정확히 말하자면 딱 한 사람 때문에요."
남자가 낚싯대를 접으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그너라는 음악가를 아나? 그 사람이 한 말 중에 '방황과 변화를 느낀다는건 살아있다는 증거다!'라는 말이 있네. 지금 자네한테 딱 어울리는 말이구만."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군. 남자가 낚싯대와 의자를 짊어지고 안개 속으로 사라지려는 걸 우현이 불러세웠다.
"근데…누구세요?"
말없이 미소 지은 남자가 안개속으로 사라졌다. 마지막 미소가, 분명 익숙했다.
*
널 좋아한다고 이 바보야. 그 말을 하는 명수의 얼굴이 복숭아처럼 붉었다.
"너도 나 좋아해?"
성열이 말없이 긍정의 표시로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피식- 순정만화 남주인공처럼 눈부신 미소를 지은 명수가 맞잡은 성열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넌 손도 예쁘구나."
꿀꺽. 두 눈을 감은 명수가 성열의 뒷통수에 손을 얹고 지그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허헙! 하는 소리와 함께 성열도 얼른 눈을 꾹 감았다. 촉촉하고 말랑한 입술이 닿는게 느껴지고 소름이 돋는 성열의 허리를 명수가 거칠게 휘어감는다.
"…하아…."
명수, 잠시 입술을 떼어내고 은가루를 뿌려놓은듯 반짝이는 성열의 눈을 한번 진득하게 쳐다본 후 다시 입술을 맞췄다. 부드러우면서도 급한 듯이 다가오는 키스에 성열이 몸을 움찔거리며 명수를 꼭 끌어안았다. 한참 잡아먹을듯이 입술을 물고 늘어지던 명수가 고개를 성열의 목덜미에 푹 묻었다. 윽 - ! 생소한 느낌에 성열이 눈을 번쩍 뜨며 신음을 뱉었다.
"……."
방금까지 갈증난 것처럼 자신의 입술을 물고 빨아대던 명수는 온데간데없이 어두컴컴하고 넓직한 방 천장만 눈에 한가득 들어왔다. 어안이 벙벙한 채 눈만 꿈벅이던 성열, 미끌거리고 축축한 아래의 느낌에 이불을 홱 걷어낸다. 잔뜩 젖은 잠옷바지와 봉긋하게 솟아있는 그 곳을 확인한 성열의 두 눈이 한라봉만해졌다. 수치심과 당혹감에 코 끝이 빨개지더니 이내 닭똥같은 눈물이 투둑투둑 이불 위로 떨어졌다.
몽정이란 무엇인가. 몽정 [ night pollution ]. 성숙한 남성이 수면 중에 성적 흥분을 하는 꿈을 꾸고 사정하는 것을 뜻하며 야간유정이라고도 한다. 아,참. 그리고 여기서 사정이란 '다신 안 그럴께요 제발 이번 한번만 봐주세요'하고 사정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생식기에서 정액을 반사적으로 내쏘는 일로 생식기에 가해지는 자극에 의하여 사정 중추가 흥분하면 일어나는 그 사정을 말한다.
참고로 자위는 유아기때부터 자신의 성기를 만지며 노는 행위로부터 비롯된다고 한다. 성열은 성인치고 자위 횟수가 많이 낮았다.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아예 없는 편이었다. 자연스런 자위는 아동의 정상적인 발달을 위해 필요한 것이며, 전 생애를 통해 다양한 기능과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고 하지만, 이건 자위도 아닌 몽정이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열에겐 더할 나위없이 큰 충격으로 느껴질 수 있는 몽정. 서둘러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간 성열이 깨끗히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자신의 잠옷 바지와 미끄덩하게 젖어버린 팬티를 욕조에 넣고 물을 가득 채웠다. 자위를 안 하는 탓인지 바지와 팬티에 묻은 양이 꽤 상당했다.
"…히끅."
변기 커버를 닫고 그 위에 앉은 성열이 훌쩍거리며 눈가에 대롱대롱매달린 눈물을 닦아냈다. 수치심이 빠져나가기도 전에 죄책감이 밀려왔다. 명수에게 드는 죄책감. 명수를 대상으로 불순한 상상을 한 것 같아 명수에게 너무 미안했다. 물론 성열의 의지는 아니였지만 말이다. 잠옷 바지와 팬티를 빡빡 문지르고 물을 쭉쭉 짠 뒤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할까. 따로 말리다간 순재나 우현에게 들킬 게 분명했고 방안에 숨기자니 그것도 며칠 안 갈 것 같아 결국 버리는 쪽을 택했다. 방 안을 뒤져 못 쓰는 종이가방을 꺼내 젖은 바지와 팬티를 넣고 조심히 방문을 열었다.
"……."
조용한 집안을 둘러본 성열이 살금살금 현관문을 열고 나와 오르막길에 있는 헌옷수거함에 종이가방을 쑥 집어넣었다. 오르막길을 도로 내려오며 성열은 자신이 정말 성숙한 남성이 된건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
다음날, 8시 10분. 끝내 성규는 나타나지 않았다. 집 앞 대문에서 기다리던 우현은 성규가 자신을 피해 일찍 출근한 거라는 결론을 짓고 차를 출발시켰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아씨! 늦었어! 어떡해!"
초고속으로 세수와 면도, 머리까지 감고 나온 성규가 파다다닥 뛰어다니며 출근 준비를 했다. 핸드폰 배터리가 분리되어 알람이 울리지않은건 제 잘못이었지만 안 깨운 봉신씨는 뭐고, 또 명수는 뭐란 말인가. 왜 안 깨웠냐고 버럭 물으니까 너무 곤히 자고 있었댄다. 참나. 어이가 없어서.
"양말,양말! 넥타이!"
한 손으로 스킨을 착착 때려바르며 다른 한 손으로는 넥타이를 가방에 챙겨넣었다.
"나 갔다올게!" 정류장까지 걸어선 10분인데 버스시간은 5분밖에 남질않았다. 성규, 구겨신은 구두를 고쳐신으면서도 힐끗 고개를 돌려 우현의 차를 확인한다.
"…기다리다 먼저 갔나."
기다리긴 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서둘러 정류장으로 미칠듯이 뛰어갔다. 때마침 버스가 정류장에서 막 출발하려던 참이었는지 부릉 소리를 내며 검은 매연을 뿜어냈다.
"어어! 아저씨! 아저씨 나! 나!"
버스 옆구리를 팡팡 두드리자 허겁지겁 달려오는 성규를 알아본 운전기사가 버스문을 열고 성규를 태웠다.
"허억…허억 감사합니다아…."
버스카드를 찍고 갈라진 앞머리를 정리하며 뒷자리로 가 앉았다. 아침부터 달려서 그런지 진심 토할 것 같다. 속을 가라앉히며 넥타이를 꺼내 매고 차림새를 곱게 매만졌다.
"휴우…. 그나저나 남우현 얼굴을 어떻게 보냐…."
회사가는 길이 이렇게 지옥같는 길처럼 느껴질 줄이야. 게다가 차까지 밀린다. 신입 사원 티를 벗은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지각을 하다니! 왕창 꾸지람을 들을 게 분명했다. 볼네드 본사 근처 정류장에서 내려 또 한번 죽을듯이 달렸다. 일년에 두세번 달릴까말까한 일을 오늘 하루 다 달린 기분이다. 엘리베이터를 잡아타고 서둘러 사무실로 들어가려던 성규가 불투명한 사무실 문으로 사무실 안 동태를 살폈다. 우현의 자리가 텅텅 비어있었다.
"저럴 사람이 아닌데…."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늦어서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하고 허리숙여 사죄를 한 뒤, 후다닥 자리로 달려가 앉았다.
"제가 많이 늦었죠. 죄송해요."
호원이 넓은 화면에 뜬 우현의 이름을 성규에게 보여주며 전화를 받았다.
"어. 성규씨 왔냐고? 내 옆에,"
성규가 기겁을 하며 손사래쳤다. 말하지마요, 똥싸러갔다고해요! 아님 없다고 하던지! 대충 눈치를 챈 호원이 '내 옆에 없어. 오늘 좀 늦나봐'하고 말을 이어갔다.
"응. 알았어. 오면 전화줄께."
가방 안에서 굴러다니는 핸드폰을 켜자 부재중 전화 3통과 문자 한 통이 와있었다. 부재중 전화 3통도 우현에게서 온 전화고 문자 한 통도 우현이 보낸 문자다. [벌써부터지각이에요?전화왜꺼놨어요.할말있으니까이거보면전화해요] 천천히 문자를 읽어내린 성규가 한숨을 쉬기도 전에 바로 우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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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남위엔입니다.
오랜만이에요, 그대들 ㅠ
일단 저 좀 축하해주세요.
인생그래프꼭짓점이 500kb를 넘었습니다.
히힣. 장장편이 되겠네요 . 아, 이 뿌듯함. 말로 형용할 수 음스요.ㅠㅠㅠㅠ
내일은 제 시간에 찾아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