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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l 외국어 l 해외거주 l 해외드라마
한도윤 전체글ll조회 950377


누구나 무기력해지는 때가 있다. 마음에 감기처럼 찾아오는 무기력일 수도 있고 안 좋은 일들이 겹겹이 쌓여 오는 무기력일 수도 있다. 애초에 인간은 태어나기를 나약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스쳐가는 감기 몸살에도, 겹겹이 쌓인 사건들에도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우리 모두의 경험이 그것을 증명한다(이 글을 읽는 당신도 아니라고 말하지는 못하겠지?). 삶이 고되어 버틸 힘이 없을 때. 한 없이 무기력해지고 기분이 끝도 없이 가라앉을 때. 우리는 어김없이 일상에 실패한다.




나는 얼마 전 일상에 실패했다. 시작은 글로벌 대기업 아웃렛에 입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을 때였다. 운이 좋게(헤드헌터는 스펙과 실력이 좋다고 했지만) 최종면접까지 올라갔지만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탈락한 후 나는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 이내 곧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려던 찰나.


“한 대리. 잠깐 내 자리로 와봐.”


나는 권 소장의 짤막한 부름에도 쏜살같이 그의 자리로 뛰어갔다.


“한 대리. 이제 한 대리도 과장 곧 달건대 PM 한 번 해봐야 하지 않겠어?”


“네. 근데 저 아직 실시 설계 경험이 많이 없는데 괜찮을 까요?”


“언제까지 괜찮을 일만 할 거야? 이거 한 대리 자세 고쳐먹어야겠네. 이거 프로젝트 하나 줄 테니까 네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한번 해봐.”


“네. 저 근데 혹시 그러다가 공사 일정에 문제라도 생기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는데요. 지금 이사 님도 파견 나가시고 차장 님도 육아휴직 중인데….”


“그러니까 네 말은 그러면 누가 책임지냐는 거지?”


“네. 물어보거나 할 사람이 없어서….”


“허허. 선수 답지 않게 왜 그래? 당연히 PM 달면 PM이 책임져야지. 그러니까 빵꾸 안 나게 네가 알아서 잘하라고.”


“아…. 네.”


“나는 실무 뗀 지 10년도 넘어서 잘 몰라. 인터넷에서 좀 찾아보고 동기나 대학교 친구들한테 물어보면서 잘해봐.”


쏜살같이 달려갔던 나는 졸지에 어깨에 엄청난 무게의 부담감을 안고 돌아왔다. 일도 못하고 뺀질거리는 권 소장이 나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을 시켰다. 다른 팀 소장님이었으면 알려주면서 트레이닝 겸 PM을 시키셨겠지만 실력도 없이 물경력 낙하산으로 들어온 권 소장은 그럴 리 없다. 하필 윗 직급 분들은 모두 휴직을 하거나 파견을 나가서 물어볼 사람도 없고 PM으로 맡게 될 실시 설계 프로젝트는 제대로 된 경험도 없어서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실시 설계 프로젝트 PM이 되고 나서는 회사가 가기 싫어졌다. 모르는 걸 찾아보느라 손이 느려 매일 야근을 해야 했고 집에 돌아와서도 일 생각이 끊기지 않았다. 몇 번은 꿈에서 일을 하는 악몽을 꾸다 아침에 헐레벌떡 일어나 진짜 일을 하러 출근하는 날도 있었다(24시간 일하는 기분이란…). 버거운 업무량과 업무 난이도에 회사를 다니는 게 힘이 들었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다른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이 힘들어 그만두는 것도 직장 생활에 실패하는 것 같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때는 정신없이 도면을 치고 있었다. 오른손은 마우스에 올리고 왼손은 쉴세 없이 단축키를 누르면서 도면을 그렸다. 그러다가 오른손 손목이 찌릿하면서 통증이 왔다. 나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다는 듯 손목을 위아래로 흔들어보았다. 움직일 때 통증이 있는 것으로 보아하니 분명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도면을 쳐야 된다는 생각에 책상 서랍 제일 안쪽에 올해 초 회사에서 나누어준 라텍스 손목 받침대를 꺼내어 오른 손목 아래로 끼어넣고 다시 도면을 쳤다. 이 정도면 긴급조치는 되었겠지 했다.


화장실을 갔다 오면서 핸드폰으로 혹시 저녁 늦게까지 여는 정형외과가 있는지 검색했다. 다행히 집으로 가는 지하철 한 정거장 전에 있는 동네에 저녁 8시까지 진료를 보는 병원이 있었다. 나는 야근을 해야 하는 일정이었지만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고 6시에 퇴근했다(퇴근하는 나를 보며 권 소장은 PM이 벌써 가냐며 한마디 쏘았다). 


퇴근길 지하철을 타고 병원에 가니 일곱 시 오 분 전이었다. 그 시간에도 웬만한 아파트 거실보다 큰 대기실을 꽉 채우는 환자들이 있었다. 나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는 걸 보니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진료를 받겠다 싶었다. 한 시간 남짓 기다려 겨우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서울대를 나왔다는 의사 선생님은 에스레이 사진과 손목을 이리저리 눌러보고 아프냐고 물어보더니(당연히 아프지!) 손목 인대가 파열되었다고 말했다. 어쩌다 그랬냐고 묻는데 나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마우스를 클릭하다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의사는 생기 없는 표정으로 “컴퓨터 업무를 조금 줄이세요”라고 말했다. 조금은 황당했지만 의사 선생님 말로는 손목을 최대한 사용하지 않아야 회복이 빠르다는 이야기란다. 그러고는 자기 병원을 한 두 달 꾸준히 다니면서 통원 치료해야 나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진료실을 나와 옆에 주사실에서 다른 의사가 들어와 손목에 젤을 바르고 초음파로 여기저기 둘러보더니 엄청 아프게 주사 바늘을 손목 정 중앙에 찔러 넣었다. 따끔해서 눈물이 났다. 그리고 진료실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리치료도 20분 넘게 받았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손목 통증이 줄어든 것 같았다.


“오늘 한 도윤 환자분 엑스레이, 원장님 진료, 초음파랑 주사 맞은 거, 물리치료까지 다 해서 이십 오만 원 나오셨습니다. 저희 실비 보험 있으면 돌려받으실 수 있으실 텐데 서류 뽑아드릴까요?”


“실비 보험 없으면 다른 할인받을 수 있는 건 혹시 없나요?”


“네. 실비보험만 가능하세요. 없으세요?”


“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신용 카드를 건넸다. 3개월 무이자 할부로 병원비를 내고 집으로 돌아갔다. 




혼자 살고 있는 원룸 월세방은 지하철 역에서 15분을 걸어야 했다. 마지막 10분은 언덕을 올라가야 해서 매번 집에 갈 때 숨이 찬다. 평소에 특별한 운동도 하지 않으니 이걸 유산소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월세방을 옮기지 않고 있다.


원룸 빌라 2층에는 집주인 할아버지가 살고 계신다. 종종 마주치면 인사를 하는데 그날은 할아버지를 만나 인사를 하고 올라가려던 찰나.


“306호 청년 맞지? 이번에 계약기간이 다 된 거 알아?”


“아. 네. 알고 있어요. 저 근데 따로 이사는 안 가려고요.”


나는 월세방을 매년 그랬던 것처럼 묵시적 갱신을 하려고 했기에 따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사 안 가는 건 좋은데 여기서 4년 정도 살았지? 이제 한번 보증금 올릴 때가 돼서 말이야.”


꿀꺽. 나는 보증금을 올린다는 말에 긴장되어 침을 삼켰다. 집주인 할아버지는 이 지역이 개발이 많이 되어서 시세가 많이 올랐다고 했다. 안 그래도 얼마 전부터 근처에 카페도 생기고 새로운 원룸들도 들어섰던데, 부동산 시장 소식을 접하고 오셨나 보다. 할아버지는 이어서 보증금을 천만 원 더 받고 싶다고 하셨다. 두 달 뒤 계약이 끝나는 날에 더 입금하면 내쫓지 않을 테니 잘 생각해 보라고 하신 뒤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가셨다.


나는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핸드폰에 부동산 앱을 깔고 주변 시세를 살펴보았다. 혹시나 비슷한 규모와 퀄리티의 집 중 괜찮은 곳이 있으면 이사도 가볼까 생각했지만 한 시간 넘게 둘러본 동네 원룸 시세는 많이 올라있었다(찬란하고 경이로운 서울의 집 값이여!). 오히려 보증금을 천만 원만 올리시는 할아버지께 감사하다고 해야 할 지경이었다.


부동산 가격에 피로감을 느껴 벌러덩 침대에 누워버렸다. 침대에 누워 올려본 핸드폰에는 3년 반을 사귄 애인 슬이의 장문의 카톡이 있었다. 슬이는 고되고 힘든 서울 생활에 내가 믿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매일 아침 카톡을 하고 매일 밤 페이스 타임을 하다 잠이 든다. 안 그래도 어제 통화를 하다 작은 말다툼이 있었는데 장문의 카톡이 온 게 괜스레 마음에 걸린다.


마음에 걸리는 건 꼭 현실이 된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설정된 작가 이미지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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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윤
3주만에 돌아왔습니다 :-) 이번 글을 다 쓰고 보니 조금 길어서 2편으로 나누어서 올릴게요ㅇ.ㅇ)/
읽어주셔서 항상 감사합니다.

9개월 전
대표 사진
비회원254
주인공이 공감이 돼서 잘 읽었어요! 슬이를 그리워하고 뭘 해도 안 되는 주인공이 옛날의 나를 그리워하는 저 같았어요
옛날보다는 감정을 잘 못 느끼거든요.. 그래서 옛날의 내가 전혀 다른 사람 같아요😂 작가님이 의도한 거랑은 다르게 저 멋대로 읽어버렸지만 감동은 하나니까ㅎㅎㅎ 좋은 글 감사합니다

9개월 전
대표 사진
한도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저도 옛날의 저와는 다른 사람 같다고 종종 느끼는데, 제 글로 그런 느낌을 받으셨군요 ㅎㅎ 다음에 또 2편도 읽으러 와주세요! 저는 이만 2편을 쓰러갑니다 춍춍춍
9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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