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다고 말해上
written SOW.
01.
독학에는 도가 텄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대학교수님이신 부모님의 영향이 컸기도 했지만 나는 거의 독학으로 대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도 1학년이 끝나자마자 자퇴를 한 덕에 인간관계는 넓진 않았지만 홀로 보내는 시간이 익숙해져서인가, 나는 그래도 나름
즐겁게 인생을 사는 중이었다. 대학교에 진학한 내게 가장 힘든 점을 고르라면 혼자 다니는 내게 시선을 두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신경을 안 쓸 수는 있지만 선배라는 사람들은 날 못 잡아먹어 안달이니, 똥을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가 없었다.
"야, 김여주. 나 노트북 좀."
"선배, 저 조별과제 할 거 다 여기 있어서 못 빌려드릴 거 같은데."
"아, 걍 니 메일로 보내면 되잖아. 나한테 빌려 주기 싫으냐?"
그럼 좋겠습니까. 하며 반박하고는 싶었지만 그는 현재 4학년인 우리과 최고령 선배였다. 다른 선배들도 그에게는 대충 기는 느낌이어서
나도 길 수 밖에 없었다. 남들 눈 밖에 나는 것과 내가 남들 눈 밖에 나고 싶어하는 것은 달랐으니까. 근데 이 선배는 왜 항상 나한테만
지랄인지. 부들부들 떨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려 그럼 내일 빌려드릴게요. 오늘 안에 조별과제 다 끝내고. 하며 웃어보이자 그제야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선배였다. 짜증도 나고, 기분도 그지같음에 학식을 혼자 먹으며 분풀이를 하고 있었는데
내 앞과 옆에 앉는 남학생들에 몸이 굳었다. 오늘따라 식당에 학생들이 많더라니, 오늘따라 내 테이블에만 사람이 없더라니. 이런 재수없는 일이.
빨리 먹고 나가야한다는 생각에 체할정도로 밥을 급히 먹었다. 입에 거의 붓는 수준으로 먹고 있었는데, 내 앞에 앉은 남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전정국이었다. 우리 과 2학년 차석. 당황한 표정으로 내가 그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자 정색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뭐야, 뭔데 기분 나쁘지. 대충 기분을 추스린 후 잔반을 버리고 식당을 나왔다. 화학과 사람들이 무슨 모임이 있었는지 삼삼오오 모여
'미시적인 관점으로 보자면 말이야 ‥.' 하며 궁시렁대고 있었다. 화학은 질색인 탓에 몸을 부르르떨곤 도서관으로 발을 옮겼다.
다음 교양까지 2시간이나 공강이었다. 시간표도 그지같네. 대강 책꽂이를 스캔한 후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펼쳤다. 슬픈책은 아니었으나
괜시리 눈물이 나와 훌쩍거리고 있었는데, 어느 새 잠이 들었나보다.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치길래 떠지지 않는 눈을 떴다.
누구야. 몇 분을 잔지는 모르겠지만 교양 갈 시간이 다 되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깨워준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어 그 사람을 바라봤지만
그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헐, 귀신이 깨운건가.
02.
오늘 하루종일 이상한 일만 꼬이더니, 교양도 거지같았다. 할게 없어서 연애에 관한 교양을 택하는게 아니었다. 점수따기 좋을 것 같아
신청했는데, 데이트를 하라니. 생전 처음보는 남자와 영화보는 취미는 없었다. 교양을 취소하러 가야하나. 교수님에게 정말 죄송하지만
리포트로 대신할 수는 없을까요. 라며 말씀드리러 가려고 했는데, 나보다 먼저 와 있는 누군가의 형상에 그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전정국이었다. 그러고보니 쟤도 나랑 같은 교양이었지. 쟤랑 같이 데이트하러 갈 애는 좋다고 방방 뛰겠네.
"그러니까, 네 짝이랑 여주랑 바꿔달라고?"
"‥안될까요?"
"당연히 되지. 난 너의 사랑을 응원한단다."
"아, 그런거 아니에요."
"아니긴 뭘. 과 차석이라고 들었는데. 차석이 수석 좋아하는 건 보기 드문 일 이라서."
잠깐. 저 여주가 내 이름은 아니겠지? 하긴, 내 이름이 흔한 것도 아닌데. 아니 그럼 내 이름이 맞잖아? 우리 학교에 나랑 동명이인은 없는 것 같던데.
등 뒤에서 식은땀 한 줄기가 흘렀다. 전정국이, 나를? 쟤가 왜? 뭐가 부족해서. 더군다나 2학년이 된 지금까지 쟤와 말 섞어본 적은 손에 꼽았다.
처음 맞닥뜨린 상황에 심장이 쿵하고 가라앉았다. 처음 타본 바이킹의 느낌과 같았다. 누가 사랑은 롤러코스터라고 했어, 바이킹이고만.
손바닥에 난 축축한 땀을 허우적거리며 맨투맨에 닦은 나는 급히 옆 여자화장실로 몸을 숨겼다. 숨기자마자 나오는 전정국에
여자화장실로 들어온 내가 자랑스럽게 여겨졌다. 엄청난 반사신경이네. 왜 건축을 선택했디야. 혼자 되도 않는 개그를 치다가 밖에 인기척이 없는 것 같아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아, 교수님한테 가, 말아?
03.
결국 나의 선택은 말아. 였다. 솔직히 좀 무서웠다. 만약에 내가 리포트로 대신한다고 했다가 전정국의 마음을 교수님께 듣게 된다고 생각해봐.
아, 상상만해도 당혹스러웠다. 고백을 받아봤어야 알지. 아니, 근데 왜 나 걔가 좋아한다고 생각해? 나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런 거일 수도 있지!
주먹까지 불끈 쥐며 베게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무리 이렇게 자기 합리화를 해봐도 "차석이 수석 좋아하는 건 보기 드문 일 이라서." 라던
교수님의 말이 귓가에 웅웅 울렸다. 그리고 불규칙하게 들리는 내 심장소리에 귀를 틀어막았다. 아니야, 아니라고. 아닐거야.
결국 나는 간접적으로 들은 고백때문에 밤을 새고 말았다. 그 밤샘이 원인이었나보다. 다음날이 공강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하루종일 잤다. 그리고 내 핸드폰엔 불이 났다. 최고령선배였다. 왜 노트북 안 빌려주냐며 카톡을 몇 개나 한건지.
조별과제도 하지 않은데다 그 카톡을 확인한 시간은 다음 날 새벽 3시였다. 덕분에 그 날은 학교에 마스크에 모자까지 쓰고 가야했다.
혹여나 그 선배를 마주칠까봐. 하지만 그 선배는 공강도 없는지 오늘도 학교에 나타나셨다. 날 보자마자 내 가방끈을 잡고 끌어당기는 바람에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사실 그렇게 세게 끌어당긴건 아닌데, 내가 중심을 잃은 탓이었다. 그 선배도 당황했는지 어버버 거렸고, 난 그냥
아파서 끙끙거렸다. 하필 그 장소가 식당일게 뭐람. 학식을 먹으러 온 학생들이 모두 나와 선배를 번갈아 봤다. 이제 셀프아싸하긴 글렀다.
나의 조용한 대학 라이프는 끝난거였다. 그래도 선배가 당연히 미안하다고 할 줄 알고 선배를 올려다봤는데, 하는 말이.
"그러게, 왜 남의 노트북을 가져가고 안줘. 네가 그렇게 꽁꽁 싸매면 못 찾을 줄 알았어?"
"네?"
"모르는 척 하지마. 와, 너 설마 지금 수석이라고 졸업시험 통과도 못한 나 깔보는거냐?"
"아니, 선배 지금 무슨 ‥."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거야. 얼척이 없으면 말도 안 나온다더니, 내가 딱 그 꼴이었다. 이 선배는 나중에 뒷감당 어쩌려고 이렇게 말하는걸까.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무슨 생각을 하고 살면 이렇게 스케일 크게 거짓말을 하지. 내가 아무리 혼자 마이웨이라고 해도 참아주는 게 정도가 있었다.
이 선배는 그 정도를 이미 넘어버리셨고.
"선배, 이거 선배님 노트북 맞아요?"
언제 나가떨어졌는지 가방에서 분리되어 저 멀리 나동그라져있는 내 노트북을 주운 전정국이 선배에게 물었다.
그 물음이 이미 알고 있는데 묻는 듯한 느낌이어서 보는 내가 쎄했다. 근데 선배는 오죽했을까. 하지만 제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선배는 또 거짓말을 실천하셨다. 당,당연하지!
"그럼, 이거 노트북 비밀번호. 쳐봐요."
"어?"
"쳐보시라고요. 제가 보기엔 선배 이거 비밀번호 못 푸실거 같은데. 아니에요?"
"‥."
누가 스프라이트를 여기에 부은거야.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청량한 느낌에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전정국의 밀어붙임에
선배는 바닥에 가래가 들끓는 침을 퉤 뱉으며 나가버렸고, 전정국을 날 다정히 일으켜주더니 가방에 노트북을 손수 넣어주었다.
전정국 친구인 김태형은 "자,자! 이 노트북 얘꺼 맞다니까 다들 밥 드세요! 저 선배가 구라친거에요!" 하며 나 대신 해명을 함과
동시에 분위기를 풀었다. 대단하네. 그런 김태형을 보다가 내게 "괜찮아?" 하며 묻는 전정국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고마워. 난 아무말도 못했는데."
"저 선배가 이상한거야. 괜찮다니까 다행이네."
"응‥."
괜히 민망해지는 느낌에 뒤돌아 자리를 뜨려고 했는데, 발목에서 물밀듯 밀려오는 통증에 얼마못가 주저앉아버렸다.
"다쳤어? 봐봐."
"아,아니야. 그냥 발목 삔거 같아. 괜찮아."
사실 안 괜찮았다. 아까 넘어질 때 발목에서 뭐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리더라니. 금이 간 것 같기도 했다.
노트북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개고생이야. 입술을 앙 물곤 일어나려했지만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아, 미친 쪽팔려.
아픈데 쪽팔렸다. 본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애한테 도와달라기도 그랬고, 그냥 이 고통을 참고 의무실이나 가려고 했다.
내게 등을 보인 전정국만 아니었으면.
"업혀. 의무실까지 데려다 줄게."
"어? 아니야. 진짜 나 혼자 갈 수 있어."
"거짓말 하지 말고."
"‥."
예리한 친구네. 전정국의 등에 업히긴 업혔으나, 무거운 내 몸뚱아리를 업고 있을 전정국에게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편하긴 드럽게 편한데, 나 살쪄서 장난아니게 무거울 텐데.
"무겁지. 미안."
"살 좀 쪄라. 무겁긴 뭐가 무거워."
"‥."
살 좀 찌라니. 악담인가. 좋아해야하나. 남자와 말을 섞어봤어야 알지. 그저 침묵만 치키며 의무실 의자에 털석 앉았다. 앉자마자
다시 밀려오는 고통에 신음을 내뱉자 전정국이 화들짝 놀라며 의무실에 계셔야할 선생님을 찾았지만 책상에는 '데이트하러가염'이라는
포스트잇만이 남겨져있었다.
"쌤 데이트하러 가셨대."
"‥호진쌤?"
"응."
내 물음에 대답한 전정국이 의무실 서랍을 뒤지더니 붕대와 부목을 가져왔다. 응급처치를 하려는 듯 보였다.
내 신발을 벗기려는 그에 나는 오늘 내가 신은 양말이 최고 유치한 곰돌이 양말이라는 걸 기억해냈다.
쪽팔림에 손가락이 가만히 있질 못했다. 내 양말을 보며 웃음을 참으려는 듯 입을 앙 다문 전정국이 묵묵히 응급처치를 했다.
"아,저 고마워. 신세 많이 졌네."
"‥그래. 병원 꼭 가."
"응."
응급처치가 끝나자마자 나는 빨리 병원에 갈 생각에 나가려고 손잡이를 잡았는데 전정국이 갑자기 내 손을 잡아오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버렸다. 어억! 하며 내가 기겁하자 나보다 더 놀란 전정국이 내 손을 가르키며 말했다.
"그거, 택시비 하라고."
"아‥."
엄마, 나 휴학해야할까봐.
04.
동아리, 실패적, 홍일점. 오늘 인스타그램을 올려야만 한다면 이렇게 태그할 것이다. 안 그래도 좁은 인간관계를 넓혀보라며
내 등을 떠민 손승완은 정작 휴학해버리고, 난 홀로 동아리에 남아버렸다. 그것도 남자 5명에 여자 1명인 만화동아리에.
그렇다고 퇴부하고 싶은건 아니었다. 만화 덕후거든. 1학년 땐 1학년이 나랑 손승완,박지민밖에 없었는데
이번 년도에 한 명이 들어오셨다.
"안녕."
신입부원으로 전정국이 들어왔다. 5명이던 남자가 6명으로 늘어서 나는 부담스러울 뿐이고, 분위기 파악 못하는 남준선배는
둘이 아는 사이냐며 능글맞게 웃었다. 아는 사이, 인가. 알긴 아는데 친하진 않은 사이? 같은 과인데 아는 사이라곤 해도 되겠지 뭐.
보던 만화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공의 매치포인트였다. 이것만 넘기면! 아토베를 이길 수 있다고!
8번이나 본 장면이었지만 이 장면은 여전히 두근두근댔다. 비록 주인공이 다 이기는 사기스러운 만화지만 잘생겼으니 되었다.
"전정국? 넌 무슨 만화 좋아하는데 여기 들어온거야?"
"저,저요?"
"응."
남준선배의 물음에 부원들 모두가 그를 쳐다봤다. 도라에몽을 정주행 중인 석진 선배도, 하이큐를 9번째 보고있는 박지민도,
만화는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동방에서 주무시고 계셨던 윤기 선배도, 소녀스러운 만화를 좋아하는 호석 선배도, 테니스의 왕자를 보고 있던 나도.
우리의 시선에 부담을 느낀 건지 머뭇거리던 전정국은 하,하이큐요. 하며 조그만 목소리로 하이큐 커밍아웃을 했다. 오, 하이큐를 좋아했구나.
박지민이 보던 영상을 끄곤 전정국 앞으로 다가가 미사일 쏘듯이 말을 내뱉었다. 최애가 누구야? 언제부터 봤어? 난 이와이즈미가 좋더라! 라며.
그런 박지민을 귀찮아 하는 내색하나없이 하나씩 천천히 대답을 해주던 전정국은 나와 눈을 한 번 마주치더니 고개를 아예 반대 쪽으로 돌려버렸다.
뭐야, 뭔데! 나도 하이큐 좋아하는데. 왠지는 모르겠지만 섭섭한 기분에 전정국이 내게 택시비를 쥐여줬던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핫팩이 들어있던 주머니는 따듯했지만 손이 워낙 차가운 탓에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으, 꽃샘추위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정국이라고 했나?"
"네."
"좋은 시기에 들어왔네. 우리 동아리 마침 MT가는데."
"선배, 전 동의한 적 없는데요."
"여주야, 홍일점이 안가면 남자 6명이서 뭐하라고?"
"선배 여자친구랑 가세요."
"‥."
"왜, 왜 그래요."
"헤어졌어."
"죄송해요."
"미안해?"
"네."
"그럼 가자, MT."
강제였다. 아 괜히 여자친구 얘길 꺼내가지고. 오만상을 찌푸리며 석진 선배를 노려보자 가만히 누워있던 윤기선배가 말을 이었다.
근데, MT가려면 음식 사올 사람 필요하잖아. 그런 윤기 선배를 바라보던 나는 나를 빤히 바라보는 6명의 남자들에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요, 고기랑 술 많이. 맞죠? 내 한숨섞인 말에 역시 우리 여주라며 내 어깨에 손을 두른 호석선배가 박지민과 전정국을
끌어오더니 내 양손에 악수하게 했다.
"셋이 갔다와. 우리 홍일점 힘들게 하지 말고."
분명 짜증이 나야 맞는건데. 나는 왜 내 왼손에 쥐여진 전정국의 손의 온기에 미소를 짓게 됬는지 모르겠다. 두근,두근.
아까 만화책을 보던 것과는 미세하게 다른 심장박동이 나는 두려워졌다. 황급히 내게서 손을 빼넨 박지민이 내게
"너 핫팩들고 있었냐? 겁나 뜨겁네 진짜." 하며 손을 탈탈 털었다. 뜨겁긴, 추워죽겠구만. 나는 그런 지민이를 흘끗 노려본 후
내 왼손에 핫팩을 쥐려했으나 내 손을 감싸오는 온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전정국을 멀뚱멀뚱 바라봤다.
"손, 차갑네."
"어? 어. 근데 이것 좀,"
"헐, 아 미안."
자신도 의식적으로 한 행동은 아닌지 귀까지 새빨개지며 황급히 내 손을 놓는 전정국에 내가 더 쪽팔린 기분이었다.
전정국의 귀와, 내 볼의 색은 아마 같을 것이다. 불규칙하게 뛰는 내 심장년 때문에.
05. 단톡방
김여주 = 독자님들 임미당...
06.
전정국이 나한테 같이 가자고 했을 땐 진짜 기절하고 싶었다. 둘이 마트까지 간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셋이서 장보는 것도 벌써 기빨려 죽겠는데 둘이 걸어간다면 아마 장보기도 전에 쓰러질거다. 걸어오느라 조금 늦긴했지만
왠일로 먼저 와있는 박지민과 전정국에 머쓱하게 웃으며 그들의 등을 떠밀었다. 그 와중에 마트 미닫이 문을 내가 들어올 때까지 잡고 있는
전정국에 또 심장년이 나대서 죽을뻔 했다. 아, 제발. 오늘은 건강하게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여주야 양배추를 살까 말까."
"너 태어나면서 양배추 얼마나 먹었어."
"음 ‥."
"손가락으로 셀 정도면 그냥 내려놔. 어차피 선배들도 안 먹을거 같으니까."
왜 먹지도 않는 양배추를 사고 싶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꾸 박지민은 양배추에 집착했다. 안 그래도 요즘 고기값 올라서
돈 모자를까봐 걱정인데,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건지 자꾸 양배추에게 말을 거는 박지민에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양배추를 구경하는 박지민을 버리고 전정국과 고기를 사러 왔는데, 푸드코트에 있던 아주머니가 나와 전정국을 스윽 쳐다보더니
밝게 웃으시며 말했다.
"아이고, 남동생이 잘생겨서 좋겄네."
"아, 네 ^^; 너무 좋네요."
"남동생 아닌데요."
귀찮으니까 대꾸하지 말고 그냥 가자는 내 눈빛을 보긴 한건지 전정국은 남동생이 아니라며 딱잘라 말했다.
그런 아주머니는 그럼 무슨 관계여? 하며 전정국을 향해 물었다. 내가 누나처럼 보일정도로 삭아보였나. 나는 절망에 빠진 채로
전정국을 올려다 보았는데, 나와 눈을 마주한 전정국이 그대로 나를 응시하며 아주머니께 말했다.
"무슨 사이처럼 보여요?"
"‥? 야, 왜 그래."
"음, 연인관계여?"
"아,아니ㅇ..!"
"네, 맞아요. 아! 아주머니, 고기 15인분만 주세요. 다 삼겹살로요."
"으이구, 알겠어. 총각이랑 처녀 예뻐서 내가 더 준다. 점장님께는 비밀이여."
"네. 감사합니다."
어느 새 포장된 고기를 든 전정국이 내게 "안 가?" 하며 능글맞게 웃었다. 아, 오늘 건강하게 집 가긴 글렀네. 심장 근육 찢어져도
보험되나. 뭔가 좋긴 좋은데 기분이 되게 찝찝했다. 내가 이렇게 두근거리더라도, 전정국과 내 사이는 아무런 사이도 아닌데.
이런 감정이 무슨 쓸모가 있나 싶었다. 착잡한 마음으로 전정국의 뒷통수를 바라보던 나는 이제는 브로콜리를 관찰하고 있는
생물학과인 박지민의 뒷덜미를 잡고 마트를 나왔다. 피곤한 하루였다. 한게 뭐가 있다고 벌써 6시였다. 분명 2시에 만난거 같은데.
"안 무거워? 내가 들까?"
"아니야. 재료는 우리집에 둘래? 우리집이 여기서 제일 가까울걸."
"아싸, 그럼 오랜만에 김여주 집에서 술파티 각!"
"‥? 지랄말고 니 집으로 꺼지세요."
박지민에게 맥주 상자를 넘겨주며 앞장 서 걸었다. 자취하면 이게 안 좋았다. 우리집은 아주 자기 집으로 착각한다니까.
자꾸 옆에서 술먹자는 박지민의 주둥이를 찰싹 내려치곤 엘레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안 그래도 무거운 짐들인데, 엘레베이터가
1층에 오려면 아직 한참남아서 소주가 가득 든 봉지를 내려놓으려 했으나 깨지면 선배들한테 깨지는 건 나라서 그냥 들고 있었다.
하염없이 엘레베이터 숫자판을 보고있으면 갑자기 가벼워지는 손에 당황한 내가 텅 빈 내 손을 보고 있자 전정국이 핏줄이 톡톡 올라온
팔뚝으로 내 짐까지 들고 있었다. 자기가 원래 들고 있던 것도 무거울텐데 내가 들고 있던 거까지 드느라 목에도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야, 줘! 내가 들게."
"너네집 얼마 안 남았잖아. 그냥 가자."
제일 먼저 엘레베이터에 올라탄 전정국이 꿋꿋이 봉지들을 들고있었다. 나는 그 봉지들을 들고있는 전정국의 핏줄 돋은 팔뚝을
훔쳐보며 현관문을 열었다. 집들이 할 때만 나온다던 브금을 손수 입으로 내던 박지민은 제 집인 양 소파에 드러누웠다.
전정국의 짐을 받아 식탁에 조심스레 올려놓은 뒤 박지민의 궁둥이를 발로 툭툭 차자 낑낑대며 더 소파에 파고드는 박지민에
푹- 한숨을 쉬었다. 내 좁은 인간관계에서 그나마 가까운 친군데 냉대하기도 좀 그렇고 ‥ 그냥 오늘 여기서 재울까.
"나 집 가기 귀찮아 여주야. 오늘만 여기서 자고 갈래, 응?"
"‥."
"진짜 재울건 아니지?"
"얘 우리집에서 많이 자고 갔었어. 걍 냅둬, 아무리 내보내도 안 나가."
"아싸! 치킨시켜먹자, 치킨! 치맥 콜?"
"콜. 정국이 넌? 먹고 갈래?"
"‥아, 어."
어딘가 불편해보이는 전정국을 뒤로하고 치킨 2마리를 시켰다. 3마리를 시키자는 박지민에게 나는 안 먹는다는 말을 하자 그제야 수긍했다.
김여주가 안 먹으면 한 마리는 비지. 음! 하며. 대학에서 처음 만난 친구만 아니었어도 아마 죽빵을 갈겼을거다.
근데 아까부터 어정쩡하게 소파에 앉아있는 전정국이 마음에 걸렸다. 어딘가 언짢아 보이는 듯한 전정국의 얼굴에
무슨 일 있냐며 물어봐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치킨 먹으면 좀 나아지겠지. 배달 온 치킨을 받은 박지민이 누구보다도 밝은 얼굴로
닭다리를 뜯었다. 난 그 옆에서 맥주캔을 뜯으며 옆자리를 툭툭 쳤다.
"전정국, 여기 앉아. 닭다리 먹을래?"
"응."
"자, 많이 먹어."
"넌 왜 안 먹어."
"살쪄서. 빼야해."
"안 빼도 된다니까."
"‥."
닭다리를 뜯는 그 모습이 조금 귀여워보였다. 몸집은 큰 남자애가 조그만한 닭다리를 뜯고 있는게 답지 않게 귀여워보였는데,
박지민은 온갖 양념을 입술에 묻히고 먹었다. 으, 드르버라.
박지민에게 휴지 몇 장을 건네주자 제 입술을 내밀면서 닦아달라고 하는데 진짜 뺨 칠뻔 했다.
"와, 드릅나."
"응. 넌 손이 없냐 발이 없냐. 니가 닦아."
"매정한 여자.."
"많이 친한가보다."
"어? 얘랑 나랑?"
"응, 너랑 박지민이랑."
"친하긴 친한데. 원수야."
"내가 원수면 넌 원숭이다."
"뒤질?"
벌써 취했는지 발그레 달아오른 뺨을 자랑하시며 뒤로 드러누운 박지민에 익숙하게 담요를 덮어주었다.
내일 일어나면 짬뽕 쏘게 해야지.
"너도 자고 갈래? 시간 늦었는데."
"‥."
"왜, 왜 그래."
"남자, 막 함부로 재우는거 아니야."
"어?"
"내가 박지민 데려갈게. 간다."
"어? 야! 정국아!"
박지민을 들쳐업곤 현관문으로 다가가는 전정국에 그 앞을 가로막았다. 야, 너 집까지 얘 어떻게 업고 가려고 그래.
박지민은 두고가. 어차피 얘 정신줄 놔서 내일 점심까지 못 깨.
"얘 두고 나만 가라고?"
"응, 나 괜찮아."
"내가 안 괜찮은데."
"‥."
"누가 좋아하는 여자애 집에 남자를 두고가냐."
"아니, 전정국."
"간다. 잘자고."
아, 터지고 말았다.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전정국 같이 완벽한 애가 날 좋아하는 것 따윈 그냥 내가 잘못들은거라고.
난 지금 꿈을 꾸고 있는거라고 믿고 싶었다. 전정국을 좋아해봤자 상처받는 건 나일게 뻔한데. 난 왜 ‥.
"싫지가 않은거야 ‥."
.
.
.
.
下편은 내일 올라옵니다람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