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cm - 내 눈에만 보여 inst
* 움짤 폭발이라 스크롤 압박이 있을 수도 있어여 *
X 같은 선배와의 전쟁
by. 탄덕
Special Chapter
호석 선배와 어이없게 포옹한 날 D+ 1
지각이다, 시원스레 뱉은 욕질과 함께 겨우 지하철에 올라타고선 맨투맨에 가려진 시계를 1초 단위로 연신 들여다보며 내리자마자 죽어라 내달렸다. 날이 날인지라 유독 우리 건물만 왜 이렇게 멀리 있냐, 엄청난 거리를 달려온 탓인지 자꾸만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부여잡고 강의실의 문을 조심히 열어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는 의자에 짧디 짧은 다리를 걸었다. 온데간데 둘러봐도 교수님은 보이지 않고 수업도 이제 막 시작하려 했는지 아슬아슬하게 걸쳐 들어온 난 가쁜 숨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슴께에 한 손을 가져다 대곤 지구 상에 존재하고 있는 각종 비속어들을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입에 담았다. 자칫하다가는 조질뻔 했네, 이와 동시에 두 손을 턱 밑에 괸 사내의 낮은 목소리가 조그맣게 끼어들었다.
" 야, 오늘은 정국이랑 안 놀아? "
네, 왜요? 책을 펼치던 나에게 큰 눈망울로 물어오는 태형 선배에게 단호하게 대꾸해주고서는 언제나 같은 자리만 고수하는 단정한 뒤통수를 바삐 쫓았다. 저 인간의 머릿속엔 대체 무슨 생각들이 들어가 있을까, 날 왜 안은 거지. 술에 취했잖아, 별 거 아냐. 그리고 술이라는 명목을 끊임없이 가져다 붙이며 밀려오는 의구심을 진압시키기 바빴다. 이걸 앙심이라고 단정지으면 되려나, 사실 앙심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약간의 싫음이 +20 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이 자꾸만 걸림돌에 걸렸다. 싫다, 존나 싫어. 그럼에도 변함없이 내 눈은 그런 뒤통수만 따라갔고 내 앞으로 손을 휘휘 젓던 태형선배 덕에 잠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딜 그렇게 보냐는 그가 이럴 때가 아니라며 팔에 껌딱지처럼 착 달라붙어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오늘만 전정국, 그 유치한 새끼랑 계속 놀아주라는 그의 안쓰러운 부탁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수업이 끝나고 신호등 앞에 멈춰세웠다. 싫다는 감정 아래 다른 감정도 존재할 수가 있나, 호석 선배가 날 끌어안던 시간 이후로 지속되어오는 이 뒤숭숭한 기분에 괜히 투덜대며 애꿎은 바닥만 운동화로 쓸어내리다 학교 근처 대학로를 두리번거렸다. 남들은 연애니 뭐니하며 과팅도 한다던데 이 놈의 인생은 어찌된 게 수업 하나 들으러 여기까지 온 것도 억울한데 거기다 울먹거리며 나이값 하지 못하는 선배님 부탁까지 들어주러 가고 있으니 뭐하는 짓인가 싶다. 지금이 딱 편의점 밖에 앉아 소주를 까야 제 맛인데, 불필요한 생각들로 가득찬 머리를 한껏 헤집고서는 카페 안을 들어섰다. 따분한 표정으로 카운터로 걸어가 인물만 번듯하게 잘생겼지 실상은 허당끼 투성이인 알바생의 어깨를 툭 건들였다.
" 정국, 나 카페 라떼랑 허니 브레드."
" 언제 왔어. 교대하는 애가 조금 늦는다고 해서 잠깐만 기다려."
" 나 휘핑 크림 겁나 많이 올려줘."
" 첫 판부터 장난질이냐, 이런 공적인 장소에서 인맥을 이용하게."
" 그러는 넌 어디서 밑장빼기냐."
아- 안 속네, 안 속아. 주문을 넣으며 혼자 궁시렁 중얼거리는 정국이를 한심하기 짝이 없게 쳐다보다 이내 남는 자리로 발을 옮겨 자리를 잡고서 창 밖을 구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국이 손님이 적은 막간을 이용해 들고 온 음식과 함께 반대편에 털썩 앉았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그를 잠시 측은하게 지켜보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 네 학교 앞에 있는 알바거리는 다 제껴두고 1시간 거리인 우리 학교에서 알바 뛰는 이유가 대체 뭐냐."
" 김태형 보려고."
" 태형 선배가 네 친구냐, 힘든 일은 골라서 해요."
" 3년을 사- 아니, 1년이 다 되어가는데 그깟 한 살 터울은 아무것도 아니지."
" 하여간 이 자식은 연애의 근본부터 글러먹었어."
" 너님 연애나 잘하세요, 그 잘나신 선배는 어디 계십니까."
" 그 선배 얘기가 왜 나와, 맛 떨어지게."
" 전에 말했잖아, 별의 별 꼰대질 시킨다며."
" 야, 그래서 말인데- 아니다."
" 뭔데 말을 하다 말아."
귀찮은 듯 귀를 후비던 정국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달달한 커피를 목에 축이며 버릇처럼 밖을 쳐다보다 크로스백을 어깨에 올려맨 한 남자와 엉겁결에 눈이 마주쳤다. 그 남자의 심드렁한 표정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순간, 손님이 왔다는 걸 알리듯 경쾌한 소리가 울리더니 우르르 몰려 들어오는 남자들과 여자 무리에 정국이 몸을 일으켰다. 어서오세요, 언제나 그렇듯 허벅지를 두 손으로 짚으며 일어나 카운터에 가려던 정국이 문을 활짝 열고 들어온 첫 번째 손님과 마주치자 자본주의의 미소가 철철 넘치던 그의 얼굴이 서서히 구겨지기 시작했다. 형, 형이 왜- 정국의 굳어진 얼굴이 심각한 상황임을 점차 드러내줬고 그제서야 태형 선배가 이토록 부탁했던 이유를 알게 된 나는 그들의 모습에 자연스레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 큰소리 탕탕 치며 해맑게 아이처럼 들어왔다가 이내 정국이를 본 태형 선배가 당황스럽다는 듯 말을 더듬었고 살벌해지는 분위기에 옆에서 보고 있던 윤기 선배가 조용히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원년 친구들이라 그런지 죽이 척척 맞는게 참 보기 좋았다.
" 어..... 국아, 교대 시간 아니었어?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정말 주선만 해주려고- 내가 다 설명할게."
" 끝나고 우리 얘기해요. 변명하지 마요, 그게 더 화나니까."
정국이 사고 치고 들켜버린 강아지마냥 쩔쩔 매는 태형 선배에게 짐짓 사나운 경고장을 날리고서 재빨리 카운터로 가 주문을 받았다. 최근 들어 자주 보지 못했던 석진 선배가 친구인 태형 선배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평온하게 주문했고 이로써 태형 선배를 제외한 안타까운 과팅이 시작의 종을 울렸다. 물론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한 사람, 호석선배 또한 얼토당토않게 그들의 중간에 끼여 나와 대각선을 이루는 위치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 수저나 들고 다니기나 하고 우리 석진이는 이 귀공자 얼굴을 사용할 줄을 몰라요, 복에 겨운거죠."
" 어쩌라고, 네가 내 빵을 사줬어 뭘 사줬어."
" 재밌으시네요, 석진씨는 요즘 들어 제일 후회하신 일이 뭐에요? 전 학점 좀 따놓을 걸 그랬어요."
" 제가 컴퓨터 공학에 들어간 일이요, 취업 잘 된다는 말에 혹해서 만약 제가 국어국문학을 지원했으면 예진씨를 벌써 만났을텐데."
" 이래서 너는 연애를 못 하는거야, 임마."
" 숙녀분들 앞에서 욕질을 해대는 너도 그래서 연애를 못하는 거야, 임마. 공대인 나보다 에티켓에 미숙해."
" 김석진 얜 맨날 공대 타령이야."
" 너희들은 나보다 감수성이 풍부하잖아!!!! 그런 의미로 감수성이 풍부하면 뭘까요? "
깐풍기하면 죽는다, 너. 윤기 선배가 와플을 포크로 콕 세게 찔러박으며 으름장을 놓았다. 웃으면 안 되는데 이미 터져버린 웃음을 참지 못한 채 끅끅거리며 입술을 앙 다물어 나름 연기한답시고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고서 곁눈질로 대각선을 훑었다. 여전히 호기심을 참지 못한 귀는 열어 둔 채로 그들의 대화에 더욱 집중했다. 어쭈- 예민 보스 베시시하네, 나랑 있을 땐 웃지도 않더만. 비록 제대로 보지 못하는 시야였지만 어느 정도 그려지는 그림을 조심스럽게 훔쳐봤다. 그러다 다시 한 번 마주친 호석 선배의 시선에 가방에 박아 둔 폰을 찾으려 뒤적이다 민망함에 아무 책이나 보고 있는 척이라도 해야겠다 생각이 들어 정말 무념무상으로 아무 책이나 집어 들었다. 그러자 대각선에서 피식 바람 빠지듯 웃는 소리가 살풋 들려왔다. 교양 책이라도 꺼낼 것이지, 하필이면 토익 입문서를 꺼낼 게 뭐냐고. 몰려오는 민망함에 괜히 주눅이 들어 어깨를 축 내려 토익 입문서를 테이블에 고이 올려두곤 페이지를 넘겼다.
선배님은 웃음이 많으시네요, 혜인이도 웃음이 예쁜 남자가 이상형이던데. 그와 맞은 편에 앉아있던 여자애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혜인이라면 학식에서 선배한테 된통 까인 여자 아이 아닌가, 확실히 뇌리에 박혀오는 그 아이의 인상에 괜히 애꿎은 허니 브레드에 올려진 생크림을 퍽퍽 바르기 시작했다. 절대 정혜인이라는 애가 신경이 쓰여서가 아니라 단지 그 날의 기억이 좆같아서 그럴 뿐이였다. 물론 그 애의 성까지 다 알고 있다는 증거가 수상해 취조한다면 싫어서라는 이유로 자신있게 응할 수 있다. 정신없이 포크에 발려진 생크림을 내려보다 소위 말하는 현실 타격처럼 훅 밀려온 자괴감에 쳐진 어깨를 한껏 더 내렸다. 그리고서 이어 들려오는 선배의 단조로운 목소리에 아랫입술을 잘근 물었다 놓았다.
" 혜인이는 아직도 그래요? 분명 식당에서 말했는데도 말귀를 잘 알아듣지를 못하네요."
" 아니에요, 전 그냥 선배님께서 계속 웃으시길래 궁금해서. 그리고 혜인이처럼 말 놓으셔도 되요, 선배님들."
혜인이야 학과 후배라 그런거고, 그가 알게 모르게 선을 그었다. 철벽을 치던 그의 모습을 훔쳐보며 티가 나지 않을 만큼만 조용히 고개를 위 아래로 흔들었다. 그리고 귀여워서 웃는 거에요, 제가.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역시나 그 여자애도 말을 알아듣지 못한 건지 재차 되물었다. 당당하게 검지 손가락을 들어올려 본인을 가리키던 선배가 시선의 끝을 전과 같이 나에게로 향했다.
" 귀여워서 웃는다고요, 제가."
본인을 가리키던 긴 손가락과 날 향한 시선이 어이없을 정도로 모순적인 느낌에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그러자 선배도 똑같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인간이 맛이 갔나, 나와 때 아닌 눈싸움을 펼치던 선배가 이내 시선을 앞에 있던 여자애로 옮겨가며 먼저 끊어냈다. 심리학적으론 본인은 귀여운 걸 잘 모른다던데 워낙 티가 나야죠, 아주 신이 나서 주저리 말을 내뱉는 선배를 아니꼽게 엿보다 책을 덮고는 아직도 태형 선배와 실랑이를 펼치는 정국이를 향해 먼저 간다며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쿵쾅거리는 걸음을 이끌어 문 앞에 섰다. 그냥 손들 잡고 강강수월래를 부르지 그래요, 풋풋한 설렘으로 가득 찬 테이블을 쳐다보고서 밖으로 나오지 못할 말들을 비죽이며 문고리를 잡아 세게 밀었다. 그리고 카페에서 발을 내딛은지 다섯 발자국 되었을 무렵, 문고리의 경쾌한 소리가 한 번 거리에 울려퍼졌다. 반사적으로 돌려진 고개로 보이는 사람에 인해 난 저절로 불만스러움이 가득한 표정을 내지을 수 밖에 없었다.
뭐가 또 마음에 들지 않는 건데, 그가 내 앞에 마주섰다. '선배가 여자 앞에서 실실 쪼개는거요'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속으로 내질렀다. 질투하는 건가, 여전히 거슬린다는 듯 언짢음을 유지하는 나의 낯빛을 그가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아닌데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단번에 내뱉었다. 그럼 우리 모습이 지금 저 둘하고 비교해도 다른 점이 없겠는데, 내가 볼 땐. 그러자 선배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 형, 우리 연애는 왜 하는 건데요."
" 그야 사랑하니까."
" 와- 이 형 안 되겠네. 그러는 사람이 과팅을 주선해요? "
짜증이 돋혀 풀어진 미동 하나 없는 기색으로 팔을 걷어부치는 정국이와 그런 그의 행동에 오해라며 어쩔 줄 몰라하는 태형 선배를 번갈아보다 고개를 더 세차게 굳건히 옆으로 내저었다. 이는 부정을 더 강조하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서 부러 상황에 맞지 않는 문장을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감정적인 의식의 흐름이 흐르는대로 마구 아무 말이나 덧붙였다.
" 생각해보니 선배 웃는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네요."
" 네가 웃겨봐, 보고 싶으면."
" 제가 선배 전용 개그맨입니까, 웃음을 찾아주는 사람이게. 예능 프로도 보고 좀 스스로 발전해봐요"
뭐라는 거야, 선배가 어이 없다는 듯 이상한 헛소리를 펼쳐대는 나를 보다 크게 실소를 터트리며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히는데 그는 오죽할까, 처음으로 본 그의 환한 웃음이 보기 좋았다. 마치 민들레꽃을 불면 바람에 흩날리듯 가슴 한 켠이 간질거렸다. 그가 숙이던 고개를 들어 날 보고는 카페로 돌아가려는지 몸을 틀었고 얼마 안 가 걸음을 잠시 멈추더니 다시 나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 기다려, 나 곧 나올거야."
" 2차 안 가요? 왜 안간대. 아까는 좋아서 헤벌쭉하시더만."
" 신났다, 또 까불지."
" 지금 하나도 신나지 않고 하나도 즐겁지 않아요."
"사실 김태형이 두 번 다시 귀찮게 안 하다고 하길래 2시간만 버텨볼까 했는데- 방금 전만 해도 재밌던 게 지금은 재미없어."
그러니까 후배 좀 이용하자, 마주한 서로의 시선에 웃음이 동시에 터졌다. 난 그의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었고 조금은 떨어진 곳에서 아렴풋하게 미소 짓던 그도 이런 이유였을라나, 잘은 모르겠다.
시원한 바람에 휘날리던 한 장의 낙엽처럼 우린 서로의 무심한 가을이었다.
♥ 저의 원동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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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아시겠지만 혹시 호석이에게 ' 제가요'는 ' 쟤가요'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쿨럭....크흠.....
고마운 우리 암호닉 분들 추가했어여! 제 인생에 초록글을 올라갈 수 있게 만들어주신 저의 탄님들과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담아 이렇게 특별편을 올리게 되었습니당!!! 언제나 말씀드려두 모자랄만큼 저와 함께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다들 좋은 꿈 꾸시길 바라며 저는 이만.... 캡짱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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