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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톡 상황톡 공지사항 팬픽 만화 단편/조각 고르기
몬스타엑스 이준혁 온앤오프 김남길 샤이니
BM 전체글ll조회 1729l 4









1990.05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비릿한 피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생전 처음 맡아보는 생소한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고 운동화를 벗어 던지며 거실로 들어섰다. 이게 무슨 냄새냐며 투정을 부리려던 나는, 거실에 낭자한 핏구덩이에 눈을 희번득하게 뜬 채로 쓰러져있는 아빠를 발견하고서 그대로 돌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다. 손이 덜덜 떨리고 호흡이 가파졌다. 쓰러진 아빠에게 다가갈 엄두도 못 낸채로 현관 근처에 서서 거실을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에, 안방에서 엄마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반가적으로 고개를 돌리니, 안방의 문이 열리며 엄마가 쓰러졌다. 피가 몰려 충혈된 눈동자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가'




  엄마의 입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나가, 백현아. 소리없는 아우성. 엄마는 내게 나가라며 힘없이 손를 허공에 내젓고 있었다. 놀란 나는 발이 땅에 붙은 것 마냥, 그렇게 엄마를 보고만 있었다. 허공에 휘휘 내저어지던 엄마의 희고 고운 손은, 검정색 구둣발에 의해 짓밟히고 말았다. 그리고 나의 엄마는, 핏구덩이를 토해내며 숨을 거두었다. 눈 뜨고 보기조차 힘들 정도로 잔혹한 풍경과 더불에 진득하게 온 집안을 메운 피냄새로 인해 머리가 어지러웠다. 엄마를 짓밟은 구둣발이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작은 주먹을 꾹 쥔채로 나의 부모님을 죽인 살인마의 얼굴을 올려 보았다. 검정색의 캡모자를 푹 눌러써서 그런지 입만 보일 뿐, 살인마의 얼굴이 보이질 않았다. 그는 나를 내려다 보며 픽, 웃고는 천천히 쭈그려 앉아 나와 시선을 맞췄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울컥하고 치미는 기분에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지은채로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훤히 드러난 남자의 얼굴을 보니, 도저히 방금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선해 보였다. 하지만 그래서 그는 더 비열해 보이기도 했다.




  '안녕, 네가 변백현?'

  '……누, 누구 세요?'

  '나? 네 부모님 죽인 사람.'

  '왜…….'

  '왜 죽였냐고? 킥킥, 말해주면 너같은 꼬마가 이해하려나.'

  '…….'

  '내 이름 말해줄게, 똑똑히 기억해둬. 그리고 나중에 커서 나 찾아와. 그럼 그때 왜 죽였는지 말해줄게.'

  '…….'

  '이유를 듣고, 그래도 네 부모의 죽음이 억울하다 싶으면 그때 네가 나 죽여도 좋아.'

  '…….'

  '내 이름, 도경수. 기억해 둬, 꼬마야.'




  남자는 줄곧 끼고 있던 가죽 장갑의 한 쪽을 벗어서 피가 묻지 않은 하얀 검지 손가락으로 내 볼을 톡톡, 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모자를 푹 눌러썼다. 남자는, 유유히 내 옆을 지나치며 현관을 나섰다. 내 곁을 지나치는 남자에게서 비릿한 피냄새가 풍겨졌다. 눈앞이 아찔할 정도로 진하게 풍겨오는 냄새에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문 밖으로 나가며 남자는 다시 한 번 더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도경수, 꼭 기억해.'

  '…….'

  '그리고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 법이야, 백현아. 이것도 같이 기억해.'



  쾅. 남자가 나가자 찬 기운이 집 안을 가득 메웠다. 순간 내가 서있는 곳 까지 핏구덩이로 변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는, 내 곁을 지나치는 남자를 붙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집 안에는 오로지 피냄새만이 진동했다.










살인의 추억

부제 - '그 사람' 을 단죄하다


변백현x도경수



w.BM








2000.05


  그 날로부터 십 년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붉은 색만 보아도 그 날의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고, 금방이라도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잠이 드는 순간까지도 그날의 기억은 끊질기게 나를 따라 붙었다. 그리고 그날의 범인을 잡아서 감옥에 가게할 수 있는 시간도 5년이 남았다. 나는 어떻게든 그 5년 안에 그 남자를 찾아야 했었다. 나의 부모님을 죽인, 그 파렴치한을 말이다. 그래서 아무리 그날의 기억이 나를 절벽 끝까지 밀어 붙여도 꿋꿋이 버티고 또 버텨서 공부를 했다. 법의 심판 아래에서, 나의 부모님을 죽인 그 남자를 단죄하기 위해 무엇이든 열심히 했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며 '독종' 이라고 표현했다.




  "담임 선생님께서 출산 휴가를 내셔서, 이번에 임시 담임으로 왔다. 짧은 기간이지만 잘 부탁한다."




  멍하니 창밖을 보던 나는, 교탁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딱 봐도 작은 덩치를 가진 남자가 교탁 앞에 서있었다. 어딘지 낯이 익은 모습에 임시 담임이란 사람을 한없이 쳐다 보았다.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던 그 순간, 임시 담임이란 사람이 뒤를 돌아 분필을 쥐고 칠판에 자신의 이름 세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임시 담임의 손이 지나간 자리에 생기는 자음과 모음의 조합을 보는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끼며 칠판과 임시 담임을 번갈아 보았다.




  "내 이름은, 도경수."




  '내 이름, 도경수.'




  "다시 한 번 더 잘 부탁하고, 역사 과목 담당이니까, 이따 수업때 또 봅시다."




  도경수. 임시 담임의 이름을 보는 순간, 기억의 저편에서 나의 부모님을 죽인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둔기로 세차게 얻어 맞은 것 마냥 머리가 띵했다. 남자는, 반을 주욱 둘러 보고는 반을 나갔다. 반을 나서는 남자의 모습에, 어릴적 내 곁을 지나쳤던 남자기 풍기던 피냄새도 같이 느껴졌다. 도경수, 도경수, 도경수. 지난 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내 머릿속에서 떨어진 적 없던, 만나 게 된다면 이유가 무엇이던 간에 꼭 감옥에 집어 넣고야 말겠다고 다짐하며 수없이도 떠올리던 그 이름. 정작 그 이름의 주인공이 내 앞에 나타나자, 나는 줄곧 내 머릿속을 지배하던 그날의 기억 속, 여덟 살의 꼬마로 돌아가 있었다. 눈앞에는 핏구덩이에 쓰러져 있던 잔혹한 모습의 부모님이 아른거렸다.




  수업 시간이 되자 다시 교실에 들어온 도경수는 십 년 전에 보았던 살인마 도경수와 전혀 매치가 되질 않았다. 분명 이름과 입가에 걸리는 미소가 똑같았지만 살인마라는 사람같지도 않은 사람이 학생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그를 뜯어 보았고, 그는 인사를 한 뒤에 곧장 출석부를 꺼내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고, 번호 순으로 불리고 있었기에 순서는 금방 코앞까지 와있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남자는 과연, 나를 기억할까?


  가장 기초적인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남자의 이름은 지난 십 년 동안 줄곧 내 머릿속에서 잊혀질 줄을 몰랐는데, 과연 그 사람도 그럴까? 그리고 그 순간 그가 내 이름를 불렀다.




  "변… 백현?"

  "……네."




  남자의 부름에 조금 늦게 텀을 두고 대답을 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남자는 줄곧 나를 보면서 출석을 계속 부르고 있었다. 오래도록, 남자의 시선과 얽힌 채로 그렇게 서로를 보고 있었다. 남자의 입가에는 십 년 전 보았던 그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느 순간 내 시야에서 나와 남자는 교실의 풍경 대신, 십 년 전의 그 장소로 돌아가 있었다. 오로지 남자와 단 둘이서. 한동안 그 흐름이 유지되다가, 다시 원래의 시공간으로 돌아온 것은 남자가 수업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수업하기에 앞서 수업과 관련한 내용이 담긴 짧은 영상을 먼저 보여주었다. 나는 가까스로 남자에게서 고개를 돌려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남자가 틀어주는 영상은, 5.18 민주화 운동 당시의 상황을 애니메이션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흑백의 배경 속 도청 앞에 맨 몸에 깃발만을 든 채로 군인들과 대치한 시민들의 모습이 나왔다. 그 속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진정한 민주화를 외치는 시민들이 있었다. 그들 사이로 애국가가 흘러나오고, 숙연해진 분위기 속에서 시민들은 애국가를 따라 부르며 민주화을 외쳤다. 그리고 그 순간, 군인들은 각자 들고 있던 총을 장전했다. 애국가는 절정에 치달았고, 끝을 향해가는 순간, 먼저 들린 총소리와 함께 애국가는 끝이났다.


  탕! 탕!


  연달아 들린 총소리를 시발점으로 거리에는 붉은 핏물이 고이기 시작했고, 무고한 시민들은 무자비하게 군인들의 군화에 짓밟히기 시작했다. 남녀노소할 것 없이 그 거리에 있던 시민들을 닥치는 대로 쏘고, 찌르는 포악한 군인들의 모습에 교실의 분위기는 한껏 숙연해졌다. 영상이 끝이 난 뒤에 교실에는 침묵이 흘렀다. 나 역시 너무나도 잘 아는 군부의 독재와 횡포였기에 잠시 동안 그 날의 기억을 잊을 수 있었다.


  한참의 침묵 뒤에 남자가 그 정적을 깨고서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보았고, 남자 역시 오로지 나를 쳐다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젠 국민 모두가 너무나도 잘 아는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영상입니다. 군인들의 잔혹한 총칼 앞에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나갔죠. 아마 한국전쟁 이후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통계 상으로 약 4,000천명의 사람들이 죽었고, 발견되지 않은 시신까지 합하면 그 수가 엄청나죠.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대다수는 이 민주화 운동을 폭동, 종북론자들의 난 쯤으로 아는 사람들이 꽤 있었어요. 하지만 엄청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인해 인식이 개선되었고 지금은 오히려 이 사건의 주범인 '그 사람' 에게 진실된 사과를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글쎄요, 그 사람은 일말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을까요."




  남자는 잠시 말을 끊고 반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시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유족들과 부상자들, 그리고 부상자의 가족들을 비롯한 그 날 광주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그 날의 공포를 잊지 못한 채,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 내가 기억을 잠시 잊을 수 있는 것은, 나와 비슷한 사람들의 사정을 알기 때문이었다. 광주 5.18 민주화 운동 유족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묘한 동질감을 느꼈었다. 고통 속에서 그 날의 기억을 잊지 못하는 그들의 상처는 나와 비슷했다.




  "한 가지 말씀 드리자면, 제 부모님과 형도 이 날, 군인들의 총칼과 군화에 처참히 짓밟혀 죽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해서 이 날의 진실을 사회에 알리고자 했어요. 그래서 선생님이 되었고, 여러분에게 그리고 여러분의 동생들에게 알려주고 있죠."




  남자의 시선이 날카롭게 나에게 꽂혔다. 나는, 그와 시선을 마주하면서 원인 모를 따끔한 가시가 심장을 콕콕 찌르는 것만 같았다. 남자는 왜, 줄곧 나를 보며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나는 지지않고 끊질기게 남자를 보았다. 똑같이 서로를 보고 있었지만 그 시선에 담긴 의미는, 조금 달랐다. 가만히 남자가 보여주었던 영상과 동시에 남자가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에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언젠가, 아버지의 원래 직업을 얘기해주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아버지는 군인이었단다.'


  '제 부모님도 이 날, 군인들의 총칼과 군화에 처참히 짓밟혀 죽었습니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불안함이 가득담긴 시선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의 입가에 득의양양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 순간에, 남자는 내 이름을 불러 세웠다. 덜덜 떨리는 손을 애써 감추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현이? 응,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

  "군인들 말야, 그들을 어떻게 생각해?"

  "……."




  남자의 물음에 나는 쉽사리 대답하질 못했다. 이전같았으면 너무나도 쉽게 그들은 나쁘다, 상부의 명령이었지만 동족상잔의 비극은 한국전쟁 못지 않다고 말하며 유족들에게 동정을 표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수많은 문장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떠다니고 있었지만 하나로 정리되지 않아 무어라 말할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군인들도 어쩔 수 없었을 거야, 그들도 죽이고 싶지 않았을 거야, 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응? 어떻게 생각하니, 백현아."

  "저, 저는……."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입만 달싹일 뿐, 막상 정리된 것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아니야, 아닐거야. 그리고 어쩌면, 군인들도 죄책감에 시달릴 수도 있잖아? 절대 아니야, 증거도 없잖아. 나 스스로 합리화를 하며 위안 삼아 보려 했지만 불안하게 떨리는 시선은, 혹시 하는 생각으로 흔들리는 마음은, 다잡을 수가 없었다. 점점 지쳐서 이대로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즈음, 그런 나를 구원해주듯 수업이 끝났다는 종소리가 울렸다. 나는 여전히 자리에 서있었고, 남자는 수업을 마쳤다.


  교실 밖으로 나서며, 남자는 나에게 시선를 고정시킨 채로 말했다.




  "역사는, 진실만을 말한단다."




  남자의 말을 듣는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다정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히 떠올랐다.







***








  결국 학교를 뛰쳐나왔다. 그리고 내가 향한 곳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골함이 있는 납골당이었다. 도시의 외곽지역에 있는 납골당은 버스를 타고 한시간 조금 더 걸려서 가며 도착하는 곳이었다. 남자가 한 말 따위는 절대 기억하지 않으려 무던히도 노력하며 납골당 안으로 천천히 발을 들여 놓았다. 평일 오후의 시간었기에 납골당에는 나 혼자만 존재했다. 납골당의 유리 너머로 보이는 인자한 미소의 부모님의 사진을 보자마자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감정이 한꺼번에 터지며 눈물이 흘렀다. 그 앞에 무릎 꿇고 주저앉아 사진 속 아버지의 모습을 하염없이 보며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정말, 정말… 아버지가 그랬어요? 아니죠, 아버지가 아니고 그 사람이 착각한 거죠? 제발… 제발, 아니라고 해요……."


  "그 사람 이제야 만났는데, 아직 공소시효 남았는데… 그 사람 벌 받아야 해요, 그러니까…… 어흑, 아버지… 아니에요, 절대 아니죠, 아버지가 죽인 사람들 아니죠?"


  "아빠, 아, 아으흑… 아빠…… 아니라고, 아니라고! 으으……."




  역사는, 진실만을 말한단다.


  그 순간 귓가에 울린 남자의 목소리에, 귀를 틀어막으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끊질기게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역사의 진실 속에서 진정한 가해자는 누구인가, 떠오르는 생각에 잠시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아버지의 죽음은 억울한 것일까, 정당한 것일까. 쉽게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 법이야, 백현아.


  문득 십년 전, 남자가 자신의 이름과 함께 기억하라고 알려주던 말이 떠올랐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 남자가 나의 부모님에게 복수를 한 것이라면, 나도 남자에게 복수를 하면 된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주먹을 꽉 쥔 채로 사진 속 부모님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내가 꼭, 복수 해줄게요.







***







  다음날 학교에 조금 일찍 도착하니, 남자 홀로 교무실에 앉아 있었다. 나는 이틈을 타서 교무실로 들어가 남자를 만났다. 남자는 여덟살의 내가 보았을 때보다 훨씬 왜소했으며, 키도 그리 크진 않았다. 십년 전에만 해도 올려다 보며, 크게만 느껴졌던 남자였는데, 새삼 세월의 흐름을 느꼈다. 잠시 남자를 보면서 들었던 잡생각을 모두 지우며, 천천히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보고 있었다.




  "언제 오나 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왔네."

  "어디서 만날지부터 정해요. 빨리 끝내고 싶으니까."

  "그래? 그럼 뭐, 하교하고 우리 집으로 와. 알려달라는데로 다 알려줄게."

  "하, 살인자 주제에, 자신감 넘치네요? 아직 공소시효 남은 건 아시려나?"

  "당연히, 5년 남지 않았던가. 하지만 과연 네가 복수를 할 수 있을까?"

  "뭐라구요?"




  인상을 찌푸리며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남자는 조소을 흘리며 손을 뻗어 내 볼을 쓰다듬었다. 가엽긴, 너는 절대로 날 못 죽여. 내기 할래? 남자의 속삭임에 주먹을 쳐드니,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킥킥, 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달래며 남자의 멱살을 놓고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더러워. 남자의 손길이 닿았던 볼을 벅벅 문지르면서 교실로 돌아왔다.




  수업 중에 남자는 종이 쪽지를 내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나는 그 종이에 적힌 주소를 몇번이고 읽으며 곱씹었다. 필요한 것은 모두 가방에 들어있었다. 혹시라도 남자를 죽이게 된다면 어떻게 할 지도 다 계산 해두었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시계를 보며 어서 모든 수업이 끝날 기다렸다. 하교할 시간이 되자, 오늘은 자습실에 안 남고 집으로 향했다. 조금 더 정확히는, 남자의 집으로 말이다.


  남자의 집안은 꽤 깔끔한 편이었다. 남자는 먼저 방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경계 태세를 갖춘 채로 남자가 들어간 방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나는 방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곧장, 지난 십 년 동안 궁금했었던 아버지를 죽인 이유부터 물었다.




  "진실을 알려줘?"




  남자가 서랍에서 낡은 천조각을 꺼내 내게 던졌다. 내 앞에 떨어진 천조각을 주워 들어 보니, 그것은 검정색의 궁서체로 자수가 박힌 명찰이었다. 명찰에 박힌 이름은, 내 평생동안 절대 잊어서는 안되고, 또 잊지 못할 이름이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것을 보다가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조소를 흘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명찰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더 듣지 않아도, 진실을 알 것만 같아서 호흡이 가파졌다.


  변정석. 그것은 내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그것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해주는 명확한 증거였지만, 이 조차 부정할 수 있다면 부정하고 싶었다.




  "그 이름, 설마 모르진 않을테고."

  "……."

  "죽은 우리 아버지 손에 그게 들려있더라고. 그래서 나는 그것을 간직했어. 꼭, 찾아 가서 사과를 받아내겠다는 생각으로."

  "……."

  "스무살이 되던 해, 그래 네가 여덟살 때, 찾아갔어. 그런데 그 사람, 참 뻔뻔하더군. 이미 지난 일이고, 끝난 일이라고, 폭도들의 난 이었을 뿐이었고, 위에서 시킨대로 했을 뿐이라는 개소리를 지껄이더라고. 죄책감 느낄 만큼 느꼈으니 이만 가라며 나를 내쫓으려고 했어. 살인자 주제에, 뻔뻔하게!"

  "…그 입 다물어!"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올라, 나는 남자를 밀어 침대에 눕히고 그 위로 올라타 남자의 목을 손으로 조르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고서 있는 힘껏 목을 조르는데도 남자는 반항없이 그저 나를 보며 비웃고 있었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참을 수 없는 감정의 폭발을 느끼고서 괴성을 지르며 주먹을 들어 남자의 얼굴을 내리치려다가 맥없이 옆으로 비껴나가 침대를 쾅, 내리쳤다. 남자의 목에서 손을 떼고 흐느끼면서 그대로 남자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남자는 한꺼번에 폐부를 채우는 산소에 적응하지 못한 듯, 켁켁 거렸고, 나는 이를 악물고서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 도대체 왜 그러셨나요?


  귓가에 애국가와 함께 총소리, 비명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어지럽게 울렸다. 나는 여전히 울고 있었고, 남자는 그런 나를 굳이 밀어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다독이지도 않았다. 유족들과 동질감으로 연결되어있다고 믿었던 내게, 이 사실은 엄청난 배신과도 같았다. 나의 슬픔은, 본질적으로 그들과 같을 수 없었다. 나는 가해자의 가족이었고, 그들은 피해자의 가족이었다. 그들을 옹호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모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절대로 날 못 죽여, 백현아."

  "……."

  "역사는 진실만을 말 해, 그리고 그게 진실이야. 네 아버지는 군인이었고, 내 부모님과 형은 무고한 시민이었어. 네 아버지의 총칼에 죽은 사람이 비단 나의 가족 뿐일까? 글쎄, 그건 장담 못 해."

  "……."

  "이게 내가 네 부모를 죽인 이유야. 변백현, 이제야 좀 내 자신감의 근원을 알겠어?"




  나는 그의 어깨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내려다 보다가, 올라탄 남자의 몸에서 내려와 그 옆에 앉았다. 헛웃음이 나와 미친 사람마냥 웃다 또 울고 말았다. 지난 십 년 동안 부모의 죽음이 억울하다고 여기고, 범인을 만나면 꼭 사과를 받고 감옥에 집어 넣겠노라고 나 스스로와 그리고 부모님의 유골함 앞에서 몇 번이고 다짐했었는데 그것이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생각에, 그저 이 모든 상황들이 엿같기만 했다.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하늘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아, 다정했던 나의 아버지. 당신은, 어쩌다가 그런 추악한 과거에 휘말려야 했었던 가요?




  "지난 십 년 동안, 넌 어떻게 살았니?"

  "…당신을 참 많이 미워했어요. 부모님의 죽음이 억울하다고 생각했고, 법을 공부해서 꼭, 당신을 감옥에 가게 하려고 했어요."

  "나도 그랬어. 내가 열 살 때, 그 '사건'이 일어났고, 나는 십 년 동안 아버지가 쥐고 있던 명찰에 박힌 이름을 보며 증오의 마음을 키웠어. 그리고, 믿기지 않겠지만 죽일 생각은 없었어. 네 아버지의 태도를 보는 순간 지난 십 년의 울분이 터지면서 죽이고 만 거야."

  "내가… 대신 사과하면, 내 아버지의 추악한 과거의 죄악은 용서가 되나요? 할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어요……."




  남자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남자는, 내 앞에 나와 똑같이 무릎을 꿇고 앉아 나를 끌어 안았다.





BGM. Death train (영화 도가니 OST)









BM

영화 '26년' 을 얼마나 보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위 내용은 광주 5.18 민주화 운동과 관련이 있으며, 더불어 강풀 작가님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 '26년' 과도 어느정도 연관이 있습니다.

배경은 2000년을 기준으로 하고 있으며, 5.18 민주화 운동의 피해자 가족과 가해자 가족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조금은 어둡고 무거운 내용일지라도 좋게 봐주셨으면 싶네요.


그리고 영화 '26년' 도 아직 안 보신 분이 있다면 꼭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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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헐헐헐헐헐!!!!!! 영화 생각하면서 들어왔는데.. 영화보다 더 좋은건 뭐죠?! 진짜 이글은 대박이네요
11년 전
BM
영화보다 더 좋다는 것은 과한 칭찬입니다ㅠㅠ 무거운 글이이지만 좋아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11년 전
독자2
글 좋아요ㅠㅠ 내일 모레 26년 보러가는데 보고 나서 이글 다시 봐야겠어요!
11년 전
BM
꼭 보시길 바랄게요 어느정도 연관성이 있으니까요~ 댓글 감사합니다!
11년 전
삭제한 댓글
(본인이 직접 삭제한 댓글입니다)
11년 전
BM
영화도 꼭 보시는 것을 추천할게요! 무거운 분위기이지만 좋아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11년 전
독자4
영화는 안봤지만 웹툰으로 본 기억이 나네요.. 지금 이 두 사람이 어떻게 풀어나갈지 다음 내용이 궁금해요. 역사는 진실만을 말한다라는 구절이 너무 좋네요 신알신 하고 갑니다
11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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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타엑스 [몬스타엑스/댕햄] 우리의 겨울인지 08 세라 05.19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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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랑 포스타입에서 천사님을 모신다가 많은데 그게 뭐야?1 05.07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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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타엑스 [몬스타엑스/기현] 내 남자친구는 아이돌 #72 꽁딱 03.21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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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훈] 아저씨 나 좋아해요? 154 콩딱 03.06 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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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소 꿈의 직장 입사 적응기 1 03.01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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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타엑스 [몬스타엑스/기현] 내 남자친구는 아이돌 #53 꽁딱 02.26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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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타엑스/기현] 내 남자친구는 아이돌 #45 꽁딱 02.01 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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